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 영어: Battle of Hyelion and Leimocheir | ||
시기 | 1177년 1월 | |
장소 | 현 터키 콘야의 메안데르 계곡 인근 | |
원인 | 쌍방의 조약 위반, 1176년의 침공에 대한 룸 술탄국의 반격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 [[룸 술탄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요안니스 콤니노스 바타치스 | 무명의 아타베그 |
병력 | 불명[1] | 20,000 ~ 24,000 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사상자 다수[2]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승리 | |
영향 | 동로마령 서부 아나톨리아 보전, 룸 술탄국의 공세 둔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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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투 이후 3년이 경과한 1180년경의 제국 전도, 자세히 보면 미리오케팔론과 메안데르 강이 보인다. |
2. 진행
2.1. 애매하게 끝난 전투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전략적인 승리를 거둔 룸 술탄국이었지만, 섣부르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전투는 룸 술탄국-동로마의 경계선에서 이코니온에 치우쳐져있던 룸 술탄국 영토에서 일어났기에 제국이 큰 영토를 잃은 것도 아니었으며, 여전히 제국의 주력군은 건재했다. 양자는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그 조건들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원정군의 안전한 퇴각을 보장받는 대신 도릴레온(Dorylaion)과 수블레온(Soublaion)의 요새들을 철거하기로 약속했는데, 통제되지 않은 룸군 - 혹은 현지 튀르크 부족민들 - 일부가 퇴각하는 동로마군을 공격하자 이를 명분으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수블레온 요새만 허물고 도릴레온의 요새는 허물지 않은 것이다.룸 술탄국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승리에 쐐기를 박아넣어야 했다.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후 4개월 정도 경과한 1177년 1월, 술탄은 요새 철거를 거부한것을 명분삼아 제국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가 2만 4천이 넘는다고 기술한 룸군은 라오디키아를 출발하여 메안데르 강 유역의 도시와 촌락들을 공격·약탈하기 시작했다.
2.2. 룸 술탄국군의 반전, 로마인들의 추격
프리기아 동부에서 시작된 룸 술탄국 군대은 트랄레스, 안티오키아[3] 등을 유린하고 에페소스 인근까지 육박했다. 1177년 초에 벌어진 이 공격은 이들이 에게 해에 도착해 동로마 해군의 노, 바닷물, 백사장의 모래를 승리의 상징적 의미로 가지고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타베그 칭호를 가진 룸군의 지휘관은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왔던 길을 따라 룸 술탄국의 영내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이들은 거의 한달 만에 메안데르 강 유역의 동로마 촌락 대부분을 약탈했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지만, 돌아가는 도중에는 약탈품을 챙겨가느라 속도가 느려진 상태였다.한편 마누일 1세는 자신의 조카인 요안니스 콤니노스 바타치스에게 병력을 내어주며 적을 요격할 것을 명령했다. 양익의 부관으로는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아르메니아계 장군인 미하일 아스피테스가 출진했으며, 이들은 수도에서 출발해 적을 요격할만큼의 병력과 군량을 아나톨리아의 제국 권역에서 모으며 남하하고 있었다.
적이 메안데르 강을 끼고 복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요안니스 장군은 적의 도하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정찰병들을 보냈다. 마침 안티오키아 근교의 히엘리온 요새 주변에는 옛날 다리가 놓여있는 상태였고[4] 동로마군은 이곳에 매복해 룸군을 격파하기로 마음먹는다. 요안니스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강의 양편에 숨겨놓고는 적군을 기다렸다.
2.3. 튀르크군을 섬멸하다
제국군의 예상대로 룸 술탄국의 군대는 히엘리온의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병력들이 길게 늘어서 강을 반쯤 건넜을 무렵, 동로마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강둑 양편에서 기어나온 동로마군의 궁수들은 화살비를 쏟아부었고, 도하 중에 기습당한 룸 술탄국의 병사들은 패퇴하기 시작했다.아타베그는 반격을 시도했다. 동로마군이 양 편에서 돌격해오자, 그는 자신의 중장기병들을 집결시켜 한 측면을 돌파한 후 병력을 탈출시키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러나 아타베그 휘하의 군은 상류로 올라왔음에도 탈출할 만한 도하로를 구할 수 없었다. 동로마군이 천천히 따라오는 가운데, 아타베그는 어쩔 수 없이 제일 유속이 느린 강가로 뛰어가 말을 타고 강을 건넜다. 그렇게 속도가 느려진 사이, 로마인 궁수들은 더 손쉽게 적을 섬멸할 수 있었다. 아타베그를 비롯한 소수만이 강 좌안으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강 반대편에 매복해있던 제국군 보병대였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제국 소속의 알란인 하나가 강을 헤엄쳐 건너느라 기진맥진해 있던 아타베그의 목을 쳤다고 한다. 룸 술탄국의 병력은 지휘관의 전사를 보고 패주했으며, 겨우 수천여명만이 룸 영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제국군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포위당한 룸 술탄국의 전사들이 맹렬히 반격했다는 것이었다. 그 혼란 속에서 미하일 아스피테스 장군의 말이 부상을 당해 그를 낙마시켰고, 하필이면 강에 빠져버린 미하일은 갑옷의 무게 때문에 익사하고 말았다.
승기를 잡은 요안니스 장군은 이를 굳히기 위해 추격을 시작했다. 메안데르 강을 거슬러 룸 술탄국령 프리기아까지 진격한 동로마군은 그곳에 정착한 튀르크 촌락 여럿을 공격하고 인근을 초토화시켰다.
3. 여파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후 생긴 국제적 위신 추락과 이로 인한 정세 불안정 속에서, 그나마 제국은 설욕전을 성공했다. 룸군에 큰 타격을 입힌 덕에 1179년까지 이어진 공방에서도 제국은 승기를 잡았고, 룸 술탄국은 더 이상 공세를 펼칠 수 없었다. 1179년 겨울, 결국 술탄은 국력차를 인정하고 평화조약에 동의했다. 이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의 승리에 이어진 외교전 끝에 미리오케팔론의 패배로 혼돈에 빠져드는 듯 했던 동지중해는 안정되었다.훗날 알렉시오스 2세와 안드로니코스 1세 시절의 혼란기에 이 지역 인근의 소조폴리와 코테이온 (퀴타히아)이 함락되는 피해가 생기기는 했지만, 제국은 이 때의 승리 결과 이후 150여년 간 아나톨리아 서부를 지켜낼 수 있었다.
[1] 확실한 것은 튀르크군보다는 소규모였다는 것이다.[2] 니키타스 호니아티스는 수천명만이 살아서 도망쳤다고 기술했다.[3] 익히 알려진 안티오크가 아닌 아나톨리아의 도시이다.[4] 혹은 단지 강폭이 좁은 도하지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