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0c0ff,#2f2f52> 다키아 전쟁 Dacian W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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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85년~89년 101년~102년(1차 원정) 105년~106년(2차 원정) | |
장소 | 발칸반도 다키아 | |
원인 | 로마와 다키아의 관계 악화 | |
교전국 | 로마 제국 | 다키아 왕국 |
지휘관 |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 데케발루스† |
결과 | 로마 제국의 승리 | |
영향 | 다키아의 로마 속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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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로마 제국이 다키아 왕국을 공격하여 합병한 전쟁이다.2. 상세
처음 다키아의 침공으로 패배했던 방어전과 그 반발로 일어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의 전쟁, 그리고 트라야누스 황제가 주도한 제1, 2차 다키아 전쟁으로 나뉜다.본디 AD 85년에 다키아는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로마는 그에 맞서 선전했지만, AD 89년에 일어난 반란 사건에 집중하기 위해서 플라비우스 왕조의 제3대 황제인 도미티아누스는 데케발루스와 휴전하게 되었고, 다키아는 수명이 더 연장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다키아의 왕 데케발루스는 자신의 권력을 굳게 다졌다.
그러나 AD 101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제2대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몸소 대군을 이끌고 다키아를 공격했다. 이것이 제1차 다키아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로마군은 다키아의 수도인 사르미제게투사를 멸망시켰다. 또한 다키아에는 트라야누스 다리가 건설되었다.
트라야누스 전승기념탑에 묘사된 전투 장면 하늘에는 유피테르 신이 직접 다키아군을 번개로 징벌하고 있으며, 왼쪽의 로마 병사는 다키아 장수의 목을 벤 후 수급을 자루에 넣을 겨를도 없어 입에 문 상태로 계속 싸우는 등 급박한 전투 상황이 묘사되었다. |
105년에 데케발루스는 점령군을 무찌르고 모이시아를 침략했다. 이것이 제2차 다키아 전쟁이었으며 데케발루스는 죽고 서기 107년에 다키아는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트라야누스 전승기념탑에 묘사된 데케발루스의 죽음 |
3. 다키아 전쟁에 대한 비판과 반론
트라야누스가 다키아를 무너뜨린 것이 결국 다키아가 견제해주던 게르만족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게르만족이 팽창하여 발생하게 되는 3세기의 위기를 자초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는 전술적인 승리가 전략적인 실책을 만회해주지 못한다는 좋은 예이자, 강대국의 팽창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비판하는 수정주의적인 소수 의견이다. 그러나 이는 따져보면 현대 미국의 이란-이라크 전쟁을 무리하게 로마 제국에 대입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우선 다키아 전쟁, 파르티아 전쟁, 3세기의 위기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발흥 사이에는 100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다. 로마 제국 말기 게르만족이 로마보다 한참 발전도가 낮은 부족사회였다고는 하나 차츰차츰 체계를 갖추고 부족사회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며, 본래 파르티아의 영토가 고대 페르시아인의 영토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페르시아의 발흥은 언젠가 충분히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산조가 파르티아보다 더 버거운 적수였던 것은 로마가 동•서로 분할, 즉 본인들의 국력이 절반으로 나뉜 까닭도 컸다. 즉 다키아 왕국의 존재와 무관하게 게르만족의 발전은 계속됐을 것이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발흥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다키아가 게르만족의 성장을 억제해주는, 로마한테 좋은 일을 해주는 착한 이웃으로 남아 있을리도 없다. 이웃국가=원수라는 역사의 법칙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다키아가 쭉 발전했으면 그대로 다키아가 게르만을 대신하여 로마의 위협이 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며, 이럴 경우 로마는 게르만, 페르시아에 이어 다키아라는 전선이 하나 더 추가되어 3중 전선이 되어 버린다. 당장 데케발루스만 해도 로마의 우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항복했지만 계속 선공을 걸어오지 않았는가? 실제로도 훗날 다키아가 있었던 지방에 정착하여 국가의 기틀을 잡은 불가리아 제국은 중세 내내 로마의 숙적이 된다. 그러므로 만약 트라야누스가 다키아를 공격한 것은 지극히 적절한 판단이며, 오히려 하지 않았다면 현제로 평가받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침공과 다키아 왕국의 멸망은 로마인들이 늘 벌여왔던 예방전쟁 중 규모가 가장 컸을 뿐이고, '평화란 적이 없는 상태'라는 로마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적 또는 적이 될 집단을 미리 섬멸한 것이 된다.
그리고 모든 걸 떠나서 다키아 측이 황제 암살 시도를 했는데 가만히 놔 둔다는 것도 로마 입장에선 말이 안 된다. 따라서 다키아 전쟁이 전략적인 실책이라는 수정주의는 사실상 해도 지랄 안해도 지랄이나 마찬가지인 트집잡기에 가깝다. 3세기의 위기는 트라야누스 한 명이나 다키아 전쟁 때문이 아니라 이민족의 성장 및 지중해권 농업 기술의 낙후와 전염병,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원수정의 본질적인 문제 등 복합적이며, 이 모든게 한꺼번에 터져나온 결과인 것이다.
4. 여담
- 다키아는 도나우(다뉴브, 다누비우스) 강 북부의 영역이었는데, 지금의 루마니아와 체코 근처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트라야누스는 두 차례나 친정을 떠나 다키아 왕국을 박살내고 다키아를 점령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의 국경 정책에 반(反)하는 것으로, 라인(레누스) 강-도나우(다누비우스) 강-옛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 밖을 벗어나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 당시 로마 군단병을 동원하기 위해선 각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던 각 군단의 기지에서 병력을 빼내야 했다. 로마 제국의 병력은 이 국경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므로[2] 대군을 동원하려면 국경의 방어력이 상당히 약화되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하에선 국경을 위협하는 세력이 없었으므로 200,000여 명을 한 개의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사치는 게르만족의 침략이 점점 거세지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한 이후엔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았다.
- 훗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을 상대로 대군을 동원하고서도 우왕좌왕하면서 14년간 전쟁을 질질 끌다가, 결국 진지에서 병사한것을 보면[3], 트라야누스처럼 대군을 효율적으로 지휘하여 단기간에 적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 수 있다. 트라야누스가 훗날 파르티아를 공격했을 때도 로마군이 1년 만에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멸망 직전으로 몰아세웠는데 이를 본다면 트라야누스가 대군을 동원하여 단기간에 전쟁을 마무리짓는 능력이 매우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 다키아와 전쟁 중, 로마 군단병은 다키아인의 무기인 팔크스(Falx, 언월도형 무기)나 롬파이아(Rhomphaia)에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제2차 다키아 전쟁에서는 노출되는 오른손에 방어구를 추가하고, 다리에 그리브를 장비하기도 했다. 이것이 로마 군단병이 기동력보다 방어력을 우선시한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 트라야누스 황제는 카이사르를 본받아 손수 '다키아 전쟁기'를 썼으나 중세 혼란기에 소실되고 다른 책에 인용된 문장 하나만 남아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 포룸에 세운 트라야누스 전승기념탑에 이 전쟁의 과정을 묘사한 조각상들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1] 실제 같은 시기에 세워진 다키아 지역의 전쟁 기념비에 묘사된 로마군은 기존의 로리카 하마타(사슬 갑옷)를 장비하고 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 원주에 나타나는 로마군의 무장 상태는 로마군=로리카 세그멘타타에(하프 플레이트)/동맹군=로리카 하마타로 일괄적으로 도배되어 있어서, 로마 시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2] 로마 제국은 30개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각 군단병이 6,000명이었으므로 180,000명, 보조병까지 포함하면 360,000명 정도였다. 지금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동유럽,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포함한 국경을 꼴랑 360,000명으로 방어하고 있었던 것이다.[3] 물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대에는 제국 전역에 안토니누스 역병이 창궐하는 등, 트라야누스 시절보다 상황이 안좋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4] 파르티아 전쟁 땐 제2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철수한 뒤 건강이 악화되어 그대로 사망해 결판을 짓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