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8 04:53:04

안토니누스 역병

파일:안토니누스 역병.jpg

1. 개요2. 역병의 시작3. 역병의 증상과 원인4. 로마 제국의 피해5. 광기6. 마르쿠스의 대처7. 기독교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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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5년에서 180년 사이에 로마 제국을 덮친 전염병.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 들이닥쳤기 때문에 '안토니누스 역병'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역병의 전염 과정과 증상, 대처법 등을 상세히 기록한 로마 의사 갈레노스의 이름을 따 '갈렌의 역병'이라고도 불린다. 페스트 또는 홍역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이 전염병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혔고, 오현제 시대에 최전성기를 누리던 로마 제국이 쇠락의 길을 걸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2. 역병의 시작

161년, 23년간 로마 제국을 무탈하게 다스렸던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루키우스 베루스가 공동 황제에 등극했다. 사람들은 온화하고 진지한 성격의 마르쿠스와 쾌활하면서도 충직한 루키우스가 통치를 잘 이끌어갈 것이며,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로마 제국의 번영은 지속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 황제가 즉위한 직후, 파르티아 제국의 볼로가세스 4세가 로마의 속국인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해 아들 파코로스를 새 왕으로 앉힌 뒤 로마의 동방 속주인 시리아로 쳐들어갔다. 카파도키아 총독 마르쿠스 세다티우스 세베리아누스와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아티디우스 코르넬리아누스가 이에 맞서 싸웠으나 완패했고, 동방 로마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파르티아의 침략 소식을 접한 두 황제는 논의 끝에 마르쿠스는 국내에 남아 내정을 돌보고 루키우스가 서방에서 차출한 병사들과 함께 동방으로 가서 보복 원정을 감행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에서, 로마군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비롯한 유능한 장군들의 탁월한 지휘와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로마군의 분전으로 파르티아군을 압도하고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크테시폰이 함락되자, 인근의 그리스계 도시 셀레우키아 시민들은 즉시 항복하고 로마군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셀레우키아에 입성한 직후 철저히 약탈한 뒤 불살랐다.

디오 카시우스가 전하는 소문에 따르면, 당시 셀레우키아를 막 약탈하고 있던 장병들은 아폴로 신전에 침입한 뒤 로마로 운반하기 위해 아폴로 신의 조각상을 분해했다. 그러다가 신전 벽들 중 하나에서 신비한 균열을 우연히 발견하고 틈을 들여다봐서 어두운 방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들은 그 안에 뭔가 귀중한 것이 숨겨져 있으리라 믿고, 방으로 통하는 입구를 뚫기 시작했다. 그 방에는 황금 상자가 발견되었는데, 그 상자 안에는 역병으로 저주받은 병이 있었고, 병을 열어본 병사들은 순식간에 오염된 공기를 흡입하여 죽어버렸고, 역병은 이내 사방으로 퍼졌다고 한다. 또다른 소문에 따르면, 루키우스 황제가 셀레우키아의 폐쇄된 무덤을 파혜쳤다가 신의 저주를 받아 역병이 생겼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지만, 역병이 셀레우키아를 약탈한 로마군에게 처음 감염된 것은 분명하다. 카시우스는 병사들이 역병에 걸려 쓰러지는 걸 보고 서둘러 안티오키아로 철수했다. 그 후 볼로가세스 4세가 로마에 평화 협상을 맺자고 호소하고 베루스도 받아들이면서 전쟁이 종결되자, 서방에서 이동해 온 장병들은 로마로 돌아와서 루키우스 황제의 개선식에 참여한 뒤 자기들 기지로 돌아갔다. 그들은 파르티아에서 가져온 막대한 전리품을 과시했지만, 역병까지 가져온 것은 꿈에도 몰랐다. 역병은 시리아, 이집트를 거쳐 발칸 반도, 갈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바다 건너 브리타니아와 아프리카 속주까지 확산되었다.

3. 역병의 증상과 원인

당대 최고의 그리스 의사이며 로마 궁정에서 활동했던 갈레노스가 <치유의 방법(Methodus Medendi)>에서 서술한 바에 따르면, 역병에 걸린 이는 먼저 심한 발열과 목이 붓는 증상에 시달렸고, 뒤이어 설사, 구토 갈증, 기침을 심하게 하는 증상에 시달리다가 9일에서 12일 사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환자의 설사는 검게 보였는데, 이는 위장의 출혈을 암시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환자의 입에서 참기 어려운 악취가 났고, 온몸에 붉은 색과 검은색의 발진이 생겼다고 한다. 이중 일부는 궤양으로 자랐고, 피부가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간 뒤 그 자리에 흉터가 생겼다. 그리고 피부에 물집이 생겼는데, 많은 경우 눈의 표면에 물집이 퍼지면서 실명하거나 시야가 가려지는 증상이 발생했다. 또한 관절염이 발생하면서 영구 기형을 초래하는 경우도 종종 벌어졌다.

학자들은 갈레노스가 기록한 증상을 볼 때 천연두홍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역사가 윌리엄 H. 멕닐은 안토니누스 역병은 천연두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며, 250년대에 발발한 키프로스 역병은 홍역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일각에서는 두 역병 모두 천연두에 의해 발생했으며 홍역은 1000년 이후에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다만 갈레노스의 설명이 천연두에 걸렸을 때의 증상과 일치하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이 역병이 천연두에 의한 것이라고 확증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4. 로마 제국의 피해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역병이 한창일 때 로마에서만 하루에 2,000명이 사망했으며, 189년에 역병이 또다시 발발했을 때는 하루에 5,000명 이상이 발생했다고 한다. 정확한 수치는 기록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역병으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대체로 전체 인구의 1/4에서 1/3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169년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가 병사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쾌락을 추구하던 황제가 뇌졸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일각에서는 도나우 전선에서 널리 퍼진 역병에 걸려 죽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역병의 참화가 가장 심한 지역은 제국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였다. 많은 도시와 시골의 인구는 크게 줄어들었고, 일부 마을은 인적이 끊길 지경이 되었다. 많은 원로원 의원이 목숨을 잃자 로마 엘리트들은 불안에 떨었고, 일부 공직자는 관직을 내던지고 역병의 참화가 덜한 지역으로 달아났다. 생존자들은 자기들 역시 걸릴까 두려워하여 희생자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지도 못했다. 제국 전역의 교통과 무역 역시 큰 타격을 입었으며, 소 등 수많은 가축도 인간을 따라 죽었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해서 기근이 발생했다. 또한 납세자가 크게 줄어들면서 세금 수입이 감소해 국가를 운영하기도 힘들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로마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역병이 발생하기 전, 로마군은 28개 군단에 15만 병력에 달하는 대규모 부대를 구축했고, 잘 훈련되고 무장도 잘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병이 확산되면서 수많은 이가 죽거나 병약해졌고, 가용한 병사가 부족해지면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제국을 지킬 힘이 떨어졌다. 게르만족이 이 때를 틈타 167년부터 대대적으로 침공하면서, 장장 13년간 이어진 마르코만니 전쟁이 벌어졌다.

5. 광기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로마 제국이 역병으로 인해 혼란과 절망에 뒤덮이자, 광인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한 젊은이는 로마의 도심지인 캠퍼스 마티우스(Campus Martius)의 야생 무화과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군중에게 설교했다. 그는 언젠가 신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도시를 집어삼킬 것이며, 세상의 종말이 다가와 로마의 거리는 약탈에 휩싸일 거라고 에언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종말이 닥쳤을 때 황새로 변할 것이라면서, 나무에서 떨어져서 망토 아래에 숨겨두고 있던 새를 풀어줌으로써 군중을 속이려 했다. 그러나 군중은 그의 어설픈 책략을 간파하고 체포한 뒤 황제 앞으로 끌고 갔다. 마르쿠스 황제는 그가 광기에 휩싸였다는 걸 눈치채고 석방시켰다.

그런가 하면, 아보노테이코스의 알렉산드로스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의사로부터 일정 기간 의학 교육을 받은 후 자신의 고향인 아보노테이쿠스에서 뱀의 머리를 한 신 글리콘(Glycon)을 섬기는 신전을 세우고 오직 글리콘 신의 신탁을 받은 자신만이 환자들을 마법으로 고칠 수 있다고 선전했다.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였기에 호감을 쉽게 산 데다 실제로 여러 환자가 그에 의해 회복되자, 사람들은 앞다퉈 그의 말을 따랐다. 그는 자기가 작성한 부적을 문앞에 붙이면 역병이 비껴나갈 거라고 주장했고, 추종자들의 재산을 갈취해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자신을 의심하거나 사기꾼이라고 공격하는 자들을 추종자들을 시켜 무력으로 응징했다. 심지어 글리콘 신과 자신의 흉상을 담은 동전을 주조하기도 했다.그는 그리스와 소아시아 일대에서 활개치다가 170년경 다리가 썩는 괴저에 걸려 사망했다.

6. 마르쿠스의 대처

마르쿠스는 아폴론 신의 저주로 역병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는 파르티아인과 게르만족도 역병에 시달리고 있는 점을 상기시키며, 신이 오로지 로마에게만 천벌을 내렸다면 어째서 그들도 역병에 시달리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역병을 천벌로 보거나 로마인들이 버림받은 것으로 여기지 말고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명상록에서 역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육체적인 질병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한 가지는 더 심각하다. 바로 부패와 악덕에 휩싸인 정신적 역병이다.

그는 갈레노스 등 당대의 명의들을 모아서 역병을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게 했으며, 민심을 수습하고 땅에 떨어진 군대의 사기를 끌어오르기 위해 신들에게 기원하는 제사를 연이어 드렸다. 또한 유족들이 감히 수습하지 못하는 시신들을 국가가 나서서 수습해주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공금으로 장례식을 치렀으며, 가족을 잃은 이들을 위해 위문금을 내렸다. 또한 살아남아 역병에 면역이 된 자들은 다른 환자를 돌보고 장례 의식을 돕도록 했다. 다만 전염병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매장을 엄격히 금지하고 화장을 장려했다.

한편, 게르만족이 가차없이 쳐들어와서 제국에 큰 타격을 입히는 상황을 수습하고자 해방노예와 검투사들을 대거 동원해 군대를 보충하고, 재산을 털어서 군자금을 마련했으며, 병약한 몸으로 전선에 나아가 싸웠다. 의사들은 역병이 진정될 때까지 로마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휴양지에 있으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제국은 무너진다며 단호히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막내아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가 7세에 역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로마에서 전해졌지만, 그는 이 일에 상심해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과업을 포기하지 않았고, 180년 3월 17일 빈도보나 로마군 숙영지에서 병사했다.

7. 기독교의 확산

마르쿠스 황제는 역병으로 인해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제사를 대대적으로 드리게 했다. 이때 기독교인들이 "오직 하느님만이 유일한 신이며 다른 신은 거짓 신이다"라며 경의를 표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자, 마르쿠스는 이들을 제국을 혼란에 빠뜨릴 자들로 여기고 박해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안토니누스 역병은 오히려 기독교가 대중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 다신교 신봉자들과는 달리 어려운 시기에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환자들을 위해 음식과 물을 기꺼이 제공하고 간호해줬다. 그러면서 현실에서 힘겹게 살고 있더라도 천국에서 보상받을 것이니 기독교를 믿으라고 종용했다. 사후 세계에서의 구원에 대한 이들의 약속은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오현제 시대 동안 별다른 영향력이 없던 기독교는 안토니누스 역병과 이후의 혼란이 벌어지는 난세에서 급속도로 성장해 향후에 로마 제국의 국교로 자리잡는 기반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