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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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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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서기 674년 ~ 678년 | |||||||
장소 | 콘스탄티노폴리스, 로도스, 리디아, 킬리키아 | |||||||
원인 | 이슬람 팽창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불명 | 40,000 ~ 180,000명 |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30,000명 전사 함대 전멸 |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승리 | |||||||
영향 | 동로마 제국과 우마이야 왕조의 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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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파 무아위야 1세의 아들 야지드 1세가 지휘하는 이슬람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4년에 걸쳐 포위한 유명한 전쟁이다.신생 우마이야 왕조의 위신이 걸린 대규모 전쟁이었지만 첨단 무기인 그리스의 불 앞에 큰 손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후 제2차 피트나(제2차 무슬림 내전)로 이슬람의 군사적 위협은 크게 축소되었으나, 이 사건은 당나라 시대의 역사서에도 기록될 정도로 국제적인 파장을 미쳤다. 그리고 40년 뒤에 실패를 반복하고 대제국 우마이야 왕조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2. 배경
동로마 제국의 숙적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 세력은 야르무크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권을 아나톨리아로 후퇴하도록 만들었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손에 넣었다.이슬람은 이제 로도스, 크레타, 키프로스 등의 점령지를 바탕으로 해군 강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새로운 이슬람 해군은 655년의 피닉스 해전[1]에서 동로마 해군을 격퇴하고 동지중해를 휩쓴 것도 모자라 아나톨리아의 각 테마를 공략한 끝에 669년, 보스포러스 해협 맞은 편에 위치한 칼케돈을 점령한다.
그동안 이슬람군은 아나톨리아 각지를 휩쓸고 다니기만 했지 영구적인 지배를 꾀하던 적이 없었지만 이 시기부터 동로마 제국의 수도 바로 앞마당인 아나톨리아 각지에 요새를 건축하고 본격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3. 전개
3.1. 초기 공세
669년의 공세는 이슬람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노릴 능력을 과시한 시위였으며, 동시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 근처에 보급기지를 만들어 공성의 발판을 만들겠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672년부터 이슬람 해군은 처음으로 아나톨리아 각지에 기지를 확보하고 동로마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전쟁의 장기화를 각오한 이슬람 세력은 함대를 셋으로 나누어 매년 겨울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를 반복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같은 대도시는 충분히 식량을 구비할 수 없었으므로 동로마 함대가 이슬람 함대에게 패배한다면 도시의 안전은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최초로 그리스의 불을 실전에 투입할 준비를 시키고 함대를 강화했다.
3.2. 우마이야 육•해군의 공세
674년, 우마이야 함대는 동에게해의 기지를 떠나 마르마라 해로 진입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 상륙해 겨울을 보내기 위한 기지들을 건설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위를 반복하여 동로마 제국군의 소모를 노렸다.이 시기 너무 많은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기록이 불명확해서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포위된 채로 우마이야군은 동로마 제국 각지를 휩쓸고 다녔던 걸로 추정된다. 동로마 제국은 동시다발적인 공세에 맞서 계속 국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상황에 몰렸다.
677년 가을, 아르메니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인 사보리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우마이야 왕조와 손을 잡자 콘스탄티노스 4세가 지휘하는 동로마군이 마침내 우마이야군과의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동로마 해군은 신병기인 그리스의 불을 내세워 대규모의 우마이야 함대를 불태웠고, 아나톨리아에서는 사보리오스의 반란군과 우마이야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4. 중요성과 이후 상황
이 전투는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세계사적 중요성 역시 갖고 있다.먼저 이슬람 세력의 첫 번째 패배였으며, 그로 인해 수세에 몰려 있었던 기독교측에게 큰 사기 증진이 되었다. 나아가 동로마가 이슬람으로부터 전체 기독교 세계를 보호했다는 공로를 지니고 있다.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이 퍼진 탓에 투르-푸아티에 전투가 대중적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지만, 만약 여기서 유럽과 아나톨리아 반도를 잇는 길목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다면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체 유럽이 이슬람에 잠식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그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조로아스터교처럼 컬트적인 종교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2]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위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했기에 우마이야 왕조는 막대한 노력을 소모해야 했다. 바다에서는 그리스의 불에, 육지에서는 단성론 또는 단의론을 믿는 마르다이테스의 게릴라전에 시달린 무아위야 1세는 679년에 강화조약을 받아들였고 30년 동안 3,000 노미스마, 50마리의 말과 50명의 노예를 동로마 제국에 바쳐야만 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다시금 강대한 적을 격파하고 위신을 드높일 수 있었다. 앞선 전쟁에서 적이었던 아바르 와 슬라브는 동로마 제국의 우위를 인정했고, 아나톨리아 반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지배는 안정되었다.
5. 논란
그러나 이 시기는 동로마 역사를 통틀어 가장 사료가 부족한 혼란기이기도 했던 만큼,[3] 정확한 전투의 양상이나 시기에 대해서 알기 힘들다. 따라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때처럼 명백하게 대규모 공방전이 벌어졌던 것인지, 아니면 소규모 국지전이 몇년에 걸쳐 중첩되었던 것인지 알기 힘들다.2010년대 들어 현대 학자들은 이슬람 측의 사료와 교차검증하면서 이 공방전의 실체에 대해 규명하려고 하고 있다. 대부분의 정보가 참회자 테오파네스[4]의 기록에 의존하는 만큼, 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오가고 있는데, 한 예로 옥스퍼드 대학교의 비잔티움 연구가인 제임스 하워드-존스턴(James Howard-Johnston)은 '그런 대규모 포위전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포위전에 수반되는 병참이 이슬람 측의 능력 밖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 '공방전'은 훗날 레온 3세 때의 절체절명의 공방전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과장되었으며, 테오파네스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외에도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 공방전이 완전한 의미의 전투라기보다는, 이슬람 세력이 제해권을 앞세워 무력시위를 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