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4 19:27:12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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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파일:성벽이콘.jpg
이콘을 들고 사기를 진작하는 로마군
시기 서기 626년 6월 ~ 7월
장소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인 로마-페르시아 전쟁의 일부.
교전국 파일:east_roman_mon_256.png 로마 제국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사산조 페르시아
파일:Avar_mon_256.png 아바르 칸국
파일:sclavene_mon_256.png 스클라베니
지휘관 파일:east_roman_mon_256.png 이라클리오스
파일:east_roman_mon_256.png 테오도로스[1]
파일:east_roman_mon_256.png 세르기우스[2]
파일:east_roman_mon_256.png 보누스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호스로 2세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샤흐르바라즈
파일:faction_emblem_sassanid_256.png 카르다리간
병력 기병: 12,000명
보병: 1,000 ~ 2,000명
80,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피해 규모 불명
결과 로마 제국의 대승
영향 로마-페르시아 전쟁에서 로마 제국의 확고한 우위.
1. 개요2. 전개
2.1. 사산 왕조의 공세2.2. 반격과 재반격
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4. 결과5. 영향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서기 626년 사산 왕조로마 제국간에 일어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호스로 2세로마-페르시아 전쟁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아바르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도박수를 두었다. 하지만 로마의 해군,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가로막혀 사산 왕조의 공성은 실패했고 이후 로마-페르시아 전쟁의 전황은 급격히 로마측으로 기울게 된다.

2. 전개

2.1. 사산 왕조의 공세

전쟁 초기 로마 제국포카스의 삽질 때문에 아나톨리아에서 쫓겨나 위기에 몰렸으나 포카스가 카르타고 총독 이라클리오스의 반란으로 제거되면서 한숨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이스라엘터키 일부까지 빼앗긴데다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로 건너편 칼케돈까지 상실한 상태였다. 종교의 힘으로 다양한 민족들을 통합하고 있는 제국의 입장에서는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을 빼앗겨 최고의 성유물 중 하나인 성 십자가[3]를 빼앗긴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타격이었고 예루살렘의 경우 페르시아군의 점령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기독교도들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인과 유대인을 학살하자 그 보복으로 대학살과 약탈이 발생했다.

여기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이제 로마 제국은 멸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포카스를 제거하고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 이라클리오스는 남아있는 해군을 활용해 아나톨리아 남부나 흑해 동쪽의 아르메니아 방면에서 메소포타미아를 공격하는 대담한 반격을 시도했다.[4]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포위되는 위기상황에 식량 배급을 둘러싸고 분쟁까지 겹치며 상황은 다시 악화일로를 달렸으나 이라클리오스에게는 상황을 반전시킬 계획이 있었다.

2.2. 반격과 재반격

비록 제국이 막대한 영토를 잃었지만 주력 동방군은 멀쩡했다. 그리고 성유물을 빼앗긴 위기상황에서 세르기우스 총대주교는 황제와의 해묵은 긴장관계[5]를 풀고 막대한 기부금을 제공했다. 이라클리오스는 하기아 소피아의 금까지 벗겨가며 마련한 자금을 바탕으로 반격의 준비를 마쳤다. 그 과정에서 아바르족의 함정에 걸려들 뻔한 위기도 겪었지만 사산조의 공세를 직접 상대하느니 차라리 아나톨리아 북동부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하는 역습에 나섰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0px-Byzantine-persian_campaigns_611-624-mohammad_adil_rais.png

623년, 이라클리오스는 종교적 열정으로 고양된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군의 노련한 장수 샤흐르바라즈와 대결했다. 이때까지 실전경험이 없었던 이라클리오스는 전투가 벌어지자 놀라운 역량을 발휘했다. 로마군은 반격에 나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했고 호스로 2세의 4만 군대를 니네베로 격퇴했다. 여기서 계속 공격했다면 호스로를 제거하는 게 더 빨랐을 수도 있지만 로마군은 트레비존드로 회군하여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0px-Mohammad_adil_rais-map1.png

624년 카스피해 서안에서 로마군은 샤흐르바라즈를 상대로 원정 초기보다 더 큰 승리를 거두며 페르시아 내부로 진격했다. 이어서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해온 이라클리오스를 맞아 샤흐르바라즈는 유프라테스 도하를 막아 로마군의 진로를 남쪽으로 유인한 후 매복시켜둔 부대로 기습공격했다. 작전이 성공해 그 동안 맹위를 떨치던 로마군을 꺾을 희망이 보이던 것도 잠시, 이라클리오스가 직접 이끄는 옵티마토이가 돌격하여 페르시아 궁수들을 도륙했다. 샤흐르바라즈도 이 모습을 보고 '마치 쇠로 된 모루처럼 화살과 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찬사를 보낼 정도의 용맹을 보인 이라클리오스는 기어코 역전승을 거두었다.

626년 이라클리오스가 재침공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 맞서 호스로는 메소포타미아 공격을 반격하려면 병력이 더 필요하다 판단하고 로마 제국을 타격하기 위해 외국인까지 포함한 가용 병력을 모조리 동원해 2개의 군을 별도로 조직했다. 5만의 페르시아군이 로마군을 막는 동안 샤흐르바라즈가 지휘하는 소규모 군대는 로마군의 측면을 우회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 그에 보조를 맞추어 호스로는 아바르와 슬라브인들을 끌어들였다.

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

페르시아군이 칼케돈에 머무르는 동안 아바르 칸국의 군대는 유럽쪽으로 건너가 발렌스 황제가 만들었던 수도교를 파괴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압박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들을 요격하는 로마 해군에 막혀 페르시아는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의 동맹국을 지원하지 못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휘하 동방군을 셋으로 나누고 그 중 하나를 증원군으로 파견했다. 그러는 한편 수도에 공개적인 격려 서신을 보내어 시민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고 하자르족에게 우호관계를 맺자고 선물을 보내어 이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덕분에 병력이 증원된 이라클리오스는 1/3로 줄어든 로마군을 이끌고도 아제르바이잔을 초토화시켰다.

626년 6월 29일, 사산조, 아바르, 슬라브, 불가르인 연합군이 1만 2천의 로마 기병이 방어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공격을 시작했다. 연합군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계속 밀어붙였지만 로마군은 종교적인 열정으로 사기가 왕성해서 매번 공격을 격퇴했다.

7월 내내 공성전이 진행되는 동안 총대주교는 매일같이 성상을 높이 들고 다니며 사기를 드높였다. 수비군의 병력은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시민들의 열렬한 지원을 받았고 연합군에는 제대로 된 공성병기가 없었기 때문에 공성은 지지부진했다.

8월 7일, 페르시아 해군이 금각만 위에서 로마 해군의 매복에 걸려 다시 참패했다. 그리고 슬라브인들이 바다쪽 성벽을 공격해보았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 왜냐하면 슬라브인들이 탄 배들은 죄다 통나무를 그대로 파낸 원시적인 카누에 불과했기 때문에 로마 해군의 함대에서 퍼붓는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로마군이 아바르군을 격파하자 전투는 로마측의 승리로 끝났다. 아바르족의 강압에 의해 끌려왔던 슬라브인과 불가르인들은 아무리 공격해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도저히 뚫지 못하자 전투에 환멸을 느껴서 진지를 해체하고 철수해 버렸다. 아바르족들이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고 그들도 사기가 떨어져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아바르족은 후퇴하면서 블라케르나이의 성당에 불을 질렀으나 로마인들이 그곳에 갔을 때는 이미 불이 꺼져있었다. 시민들은 기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샤흐르바라즈의 페르시아군은 여전히 칼케돈에 주둔했지만 로마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다른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7].

4. 결과

사산조 페르시아에게는 공성 능력이 충분했지만 아바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할 만한 공성 능력이 없었고, 결국 로마 해군이 칼케돈에 주둔한 페르시아군을 막는 동안 아바르는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에 무의미한 병력만 소비한 셈이 되고 말았다.

연이은 패배로 페르시아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사령관인 샤흐르바라즈가 반란을 꾀한다는 의심을 받게 되면서 시리아로 퇴각하자 전쟁이 끝났다.

이제 후방은 안정되고 사산 왕조가 약화되었다고 판단한 이라클리오스는 신중하게 군을 움직여 페르시아를 압박했다. 니네베에서 양군이 격돌할 때 이라클리오스는 일기토로 적장 둘을 참살하고 해질녘까지 싸워 페르시아군을 몰살시켰다. 거기에 더해서 호스로가 샤흐르바라즈에게 신속히 귀환해서 합류할 것을 명령하는 전령을 붙잡아 내용을 위조하여 그대로 거기 머무르라는 명령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이라클리오스는 그 시점에서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학살의 복수로 페르시아의 도시들과 신전을 파괴하고 귀환길에 올랐다. 이 혼란의 여파로 호스로 2세는 전사하였고 이전부터 반란 의혹을 받은 샤흐르바라즈는 결국 아르다시르 3세에게 진짜로 반란을 일으켜 샤한샤로 등극한다.

5. 영향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집트와 동지중해 전역에서 물러나야 했다. 로마 제국은 숙적을 무찌르고 부흥의 기회를 맞는 듯 했지만 페르시아가 약화되면서 아라비아 반도에서 새롭게 일어서는 이슬람 세력을 전혀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라클리오스는 빼앗겼던 유물을 되찾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지만 그가 페르시아를 원정하기 시작하던 622년 9월에 헤지라가 있었다. 이제 이슬람 세력은 지금까지보다 더 무서운 위협이 되어 로마 제국을 위협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포카스의 찬탈이 제국의 약화를 불러왔고, 사산조가 무리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시도하게 만들었으며, 이게 실패하자 엉뚱한 이슬람이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어 수백년 동안 대립하게 될 새로운 적을 키운 셈이다.

6. 관련 문서


[1] 황제의 형제이다. 이복형제라는 설도 있다.[2]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3]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발견해 기적을 일으켰다는 전설이 있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던 바로 그 십자가 또는 그걸로 알려진 나무조각들.[4] 사실 황제는 비밀리에 황궁 재산 일부를 과거 자신의 본거지였던 카르타고로 빼돌리려다가 배가 난파해서 실패한 일이 있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5] 황제가 조카딸 마르티나와 결혼했다.[6] 두달내로 군에 종군하던 황후가 아이를 낳았다는 점을 참고해보자.[7] 사산 왕조는 철저한 대륙 국가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로마처럼 강력한 해군을 거느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