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트 해전/포이닉스 해전 아랍어: معركة ذات الصواري 영어: Battle of the Masts/Battle of Phoenix | ||
시기 | 655년 | |
장소 | 아나톨리아 리키아 연안 포이닉스 앞바다[1] | |
원인 | 이슬람 제국의 아나톨리아 및 지중해 원정을 막으려는 동로마 제국의 반격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 이슬람 제국 |
지휘관 | 콘스탄스 2세 | 아부 알 아와르 |
병력 | 500척 | 200척 |
피해 | 궤멸 | 막대한 손실 |
결과 | 이슬람 제국의 승리. | |
영향 | 이슬람 제국의 동부 지중해 해상권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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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55년,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스 2세가 이끄는 동로마 함대와 이슬람 제국의 해군 사령관 아부 알 아와르가 이끄는 이슬람 해군이 맞붙은 대규모 해전. 이슬람 제국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동부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했다.2. 배경
630년 무함마드가 메카에 입성하면서 수년간 이어지던 아랍 내전을 종식하고 아라비아를 평정한 이슬람 제국은 632년부터 본격적으로 팽창 정책을 단행했다. 무슬림들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아므르 이븐 알 아스 등 굴지의 명장들의 지도하에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가 양분하던 중동 세계를 삽시간에 휩쓸고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를 잇따라 정복했다.하지만 순식간에 광활한 영토를 정복한 그들의 지배력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현지 기독교인들은 하루아침에 피지배인이 되어 지즈야를 납부해는 데다 이질적인 아랍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며, 정복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약탈을 자행한 무슬림 전사들에게 공포와 적개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들은 지중해를 여전히 장악하고 있던 동로마 해군이 해안가를 습격할 때 열렬히 호응하고 아랍 주둔군을 타도하려 했다. 이슬람 당국은 해안가에 사는 주민들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645년에는 300척에 달하는 동로마 함대가 현지인들의 호응에 힘입어 알렉산드리아를 일시적으로 탈환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공세를 이어가는 대신 알렉산드리아에 그대로 머물면서 주변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행태를 일삼았고, 이로 인해 주민들은 그들을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러 온 자들이 아닌 침략자로 여겼다. 결국 무슬림군이 반격해오자, 동로마군은 현지인들의 비협조로 인해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쫓겨났다.
이렇듯 동로마 함대가 해상에서 습격하고 현지인들이 호응하는 사례가 종종 벌어지자,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과 이집트 총독 압둘라 이븐 사드는 동로마 함대가 지중해를 항해할 수 있는 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의 해안선은 절대로 안전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그들은 제3대 칼리파 우스만을 설득해 이집트와 시리아에 대규모 함대를 건설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 후 우수한 해상술을 갖춘 시리아와 이집트의 콥트교 신자들을 선원으로 채용하고 아크레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사용할 수 있는 선박을 가능한 한 끌어모아 해상 훈련을 수행했다.
649년, 아랍 함대가 최초로 해상 원정을 개시해 키프로스를 삽시간에 공략했다. 뒤이어 654년 로도스를 공략하고 에게 해의 여러 섬과 해안가를 약탈했다. 이 일련의 성공에 고무된 무아위야는 655년 아나톨리아에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키는 한편 200척의 함대를 부관 아부 알 아와르[2]에게 맡겨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게 했다. 이 소식을 접한 황제 콘스탄스 2세는 적 함대가 에게 해를 거슬러 올라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 앞바다인 마르마라 해로 들어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친히 500척의 함대를 통솔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중세 지중해 최대의 해전인 마스트 해전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655년 여름, 양측 함대는 리키아 해안선의 포이닉스 항구 앞바다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양측은 해안가에 정박한 채 서로 대치하면서 다음날에 벌어질 해전을 준비했다. 연대기 작가인 8~9세기의 연대기 작가인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콘스탄스 2세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자신이 테살로니키에 있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해몽가를 불러 꿈의 의미에 대해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폐하, 테살로니키에 있는 꿈을 꾸기 위해 취침하지 마셨어야 했습니다. 테살로니키(Θεσσαλονίκη, "Thessaloniki")는 타인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테살로 니케(δές άλλω νίκη, "thes allo nike")와 발음이 비슷하니, 폐하의 적들이 승리할 것입니다."
다음날, 두 함대가 바다로 출격했다. 9~10세기 아랍 역사가 알 타바리는 로마측 함선 마스트엔 십자가가 새겨졌고 아랍측 함대엔 초승달 문양이 새겨졌다며, 이 전투의 명칭을 '마스트 해전'이라고 칭했다. 황제는 자신이 이끌고 온 함대가 적보다 훨씬 많아서 승산이 충분히 있다고 여기고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적 함대를 궤멸시키기 위해 전 함대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무작정 돌진하다보니 전열이 흐트러졌고, 때마침 바람이 불지 않아서 선원들이 배를 움직이기 위해 노를 힘껏 젓느라 탈진할 지경이었다. 아랍군은 그런 적을 향해 갈고리를 던져서 배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 뒤 적선에 올라타서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알 타바리에 따르면, 항해에 경험이 없던 아랍인들은 이를 통해 해전을 육상전으로 바꿀 수 있게 되면서 전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해전에 초보이던 900여년전 로마 공화국 시절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소위 코르부스라고 하는 갈고리로 카르타고를 꺾었는데, 이제는 (동)로마군이 해전의 도전자 입장에서 도전을 받는 입장으로 올라선 지 오래된 상황에서 카르타고군과 똑같이 당한 셈이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해가 저물 무렵 승패가 완전히 기울자 콘스탄스 2세는 평범한 선원의 복장을 한 채 쪽배를 타고 탈출했다고 한다. 그 후 아랍군의 공격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한 함선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돌아가려 했다가 폭풍우를 만나 대부분 파괴되었다. 한편 아랍 함대 역시 대규모 해전을 벌이는 동안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에 항해를 중단하고 아크레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마스트 해전은 이슬람 제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영향
마스트 해전은 육상에선 아랍군에게 속절없이 밀리더라도 오래도록 "로마의 호수"로 여겨진 지중해 만큼은 자신들의 수중에 남아있을 거라 믿던 로마인들에게 심대한 충격을 안겼으며, 이제 아나톨리아를 넘어 발칸 반도, 심지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아랍군의 해상 공격에 노출될 위험에 처했다. 7세기의 아르메니아 역사가 세베오스에 따르면, 아랍 함대는 뒤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해 이동했지만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인해 공성 무기가 탑승한 배들이 모조리 침몰해버리자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무와이야가 이끄는 지상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바다 건너편 도시인 칼케돈까지 이르렀다가 함대가 오지 않자 시리아로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아랍측 기록에는 이와 관련된 언급이 없어서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동로마 제국에겐 다행히도, 이슬람 제국은 마스트 해전 1년 후인 656년 1차 피트나 발발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최종 공세를 벌이지 못했다. 하지만 내전에서 승리한 무아위야 1세를 위시한 우마이야 왕조는 육상과 더불어 해상에서의 공세를 꾸준히 이어갔고, 동로마 제국은 적이 제국의 본토인 발칸 반도까지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사활을 거느라 다른 속주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무슬림들은 이를 틈타 마그레브, 이베리아 반도까지 거침없이 진격했고, 나중에는 시칠리아까지 공략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확고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