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3 15:07:38

1차 피트나

파일:1차 피트나.png
658년 무아위야 1세 지지자인 아므르 이븐 알 아스의 이집트 '재정복' 이후의 정세. 빨강색이 무아위야 1세, 녹색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1. 개요2. 배경 : 우스만 피살
2.1. 알리의 칼리파 즉위와 반발
3. 전개
3.1. 낙타 전투(656년)3.2. 시핀 전투(658년)
3.2.1. 협상과 이탈(658~659년)
3.3. 국지전(658~660년)
3.3.1. 예멘에서의 학살(660년)
3.4. 알리의 암살(661년)
4. 종결 : 하산 이븐 알리의 퇴위
4.1. 이후
5. 여담6. 참고 자료

1. 개요

아랍어 فتنة مقتل عثمان [1]
영어 First Fitna

제1차 무슬림 내전(656~661년)이라고도 한다. 라쉬둔 칼리파조의 멸망과 우마이야 칼리파조 성립의 과도기이다. 제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의 석연치 않은 피살과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계승에 대한 반발로 벌어졌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부인 아이샤가 이끈 낙타 전투와 우스만의 6촌 동생이자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 1세가 이끈 시핀 전투가 양대 전장이었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정규군은 낙타 전투에서 승리했고, 시핀 전투에서도 승기를 잡았지만 이어진 무아위야 1세와의 협상에서 말빨에 밀려 저자세를 보이며 전선은 소강 상태로 이어졌다. 다 이긴 전투를 결정짓지 못하는 칼리파 알리에 실망한 급진파 카와리지가 결국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써 알리는 양면 전선의 부담을 안게 되었고, 나흐라완 전투에서 카와리지를 괴멸시켰으나 그 잔당에게 암살되었다. 뒤를 이은 장남 하산 이븐 알리는 이라크를 거점으로 버텼지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결국 무아위야 1세의 관대한 제안에 응하여 칼리파위를 넘기고 은퇴했다. 이로써 무아위야 1세가 단독 칼리파가 되면서 5년간의 내전은 종식되었다. 또한 정통 칼리파시대가 막을 내리고 우마이야 왕조가 성립되어 이슬람 세계는 다시금 통합되었다. 하지만 무아위야 1세의 칼리파위 세습화는 재차 반발을 유발했고,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차남 후세인 이븐 알리의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제2차 피트나라는 장기간의 대내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 배경 : 우스만 피살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에 이어 그가 선임한 6인 위원회 중에서 칼리파로 선출된 우스만 이븐 아판은 기득권이었던 쿠라이쉬 부족 우마이야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재산을 공동 분배한 전임 칼리파들과 달리 무슬림들에게도 토지세를 거두며 정부를 꾸렸고, 우마이야 친족들을 각지의 총독으로 봉하며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나타났고, 이집트와 이라크[2]의 무슬림 정착민들이 족벌 정치와 지나친 과세에 항의하며 메디나로 향했다. 군중은 우스만의 집을 둘러싸고 칼리파에게 하야할 것을 요구했으나 우스만은 이를 거부했다. 따라서 포위는 40일간 지속되었고, 우스만은 그들에게도 명망이 있었던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에게 중재를 부탁했으나 알리는 그에게 식수를 전달하는 것 외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3] 결국 한 이집트 병사가 우스만의 저택에 난입해 기도하고 있었던 그를 베어 죽이며 우마르에 이어 우스만까지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연이어 유력한 칼리파 후보였던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제4대 정통 칼리파로 즉위했다.

2.1. 알리의 칼리파 즉위와 반발

파일:알리 이슬람 1.jpg
알리의 제4대 정통 칼리파 등극. 오스만 제국 시기 삽화

656년 6월 18일 우스만이 비참하게 시해당한 후, 알리는 5개월간 칼리파 등극을 사양하다가 11월 13일에야 칼리파로서 충성 서약(바이아)을 받았다.[4] 메디나의 민중과 무하지룬, 안사르들은 앞다투어 그를 칼리파로 인정했다. 하지만 사하바 원로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탈하 이븐 우바이둘라 알 타이미와 앗 주바이르 빈 알 아왐의 경우, 곧바로 서약했다.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와 압둘라 빈 우마르 등은 주저한 후에 뒤따랐고 하산 빈 사비트나 무슬리마 빈 무칼리드와 같은 우마이야 가문원들은 아예 거부했다. 내부 통합에 나선 알리는 기존 우마이야 가문에 속한 총독들의 해임에 나섰고, 따라서 그들의 반란을 부채질했다. 무슬림 공동체(움마)가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탈하와 앗 주바이르는 '군중의 압박에 의한 것이었다며' 충성 서약을 파기하고, (순례를 핑계로) 성지 메카로 향하여 '신도들의 어머니'로 존경받던 아이샤 빈트 아비 바크르와 함께 반알리 전선을 결성했다.[5]

3. 전개

아이샤에게 가마보다 자신의 집이 낫고, 너희에게는 바스라보다 메디나가 낫다... (중략) ... 알리보다 나은 자가 없다면 그와 싸우지 말라

ㅡ 압둘라 빈 우마르, 반알리파 측에 가담하라는 제안을 거부하며

아이러니한 점은 아이샤, 탈하, 앗 주바이르는 제3대 칼리파 우스만 반대 운동에 앞장선 인사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제 와서 알리가 우스만 암살의 흑막이었고, 그 암살자들을 처벌하기는 커녕 보호하나며 메카 주민들에게 봉기를 호소했다. 또한 알리에게 칼리파직을 사임하고 슈라 위원회에서 후계자를 정하자고 제안했다. 특히 이전부터 예언자 무함마드의 환심을 두고 알리와 경쟁하며 사이가 나빴던 아이샤는 압둘라 빈 우마르와 무함마드의 다른 아내인 움무 살라마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히 출정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우스만의 사촌 마르완이 동참했고, 메카 주민들 역시 '신도들의 어머니'의 주장에 동조했다. 이라크의 주요 암사르 중 하나인 바스라에서도 호응 의사를 밝히자 900여 명의 메카인들로 구성된 반알리파 군대는 그곳으로 향했다.[6] 진군하는 도중에도 반란군은 탈하와 앗 주바이르가 예배 진행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등 내분의 모습을 보였다.

3.1. 낙타 전투(656년)

파일:낙타 전투 이슬람.jpg
16세기 이란을 통치한 12이맘파 국가인 사파비 왕조 시기의 삽화. 왼쪽 가마의 아이샤와 오른쪽 말을 탄 칼리파 알리가 보인다.

막상 바스라에 당도해보니 반란군은 그 곳의 주민들이 우스만이 임명했던 총독을 축출하고, 대부분 알리 측으로 돌아선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전투가 이어진 끝에 쌍방은 칼리파 알리가 당도할 때까지 휴전에 합의했다. 이후 반란군은 바스라 외곽에 주둔했는데, 얼마후 야습을 통해 도시를 기습, 점령하고 총독을 감금했다. 한편 전말을 접한 알리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바스라로 향하며 장남 하산 이븐 알리를 먼저 파견해 쿠파의 병력을 이끌게 했다. 그후 하산과 합류한 알리 진영은 약 10,000명에 이르렀고, 비슷한 수의 반란군과 마주하며 주둔했다. 중간에 천막이 세워져 알리와 탈하, 앗 주바이르가 3일간 협상에 나섰지만 결렬되었다.[7] 이후 알리는 한 병사에게 《쿠란》 구절이 적힌 깃발을 들게 하여 전열에 두었는데, 반란군이 화살을 쏘아 그를 사살한 후에야 진군을 명했다고 한다. 전투는 12월 8일에 벌어졌고, 격렬하면서도 짧은 충돌 끝에 마무리되었다.

사기 진작을 위해 아이샤가 철갑 가마를 얹은 붉은 낙타에 올라 진두지휘한 것에서 명명된 낙타 전투에서 탈하와 앗 주바이르는 모두 전사했다. 탈하의 경우, 같은 편이던 마르완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팀킬 훗날 마르완은 우스만의 아들에게 자신이 우스만을 시해한 자들 중 한 명을 처리했다고 말했다.[8]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차후 무아위야 1세의 집권에 있어 걸림돌을 제거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낙타 전투 후 마르완은 바스라를 떠나 시리아로 향하여 무아위야의 참모가 되었다.

앗 주바이르의 경우, 전투 개시 직후 알리의 말이 떠올랐는지 전선을 이탈해버렸다. 사태를 관망하던 바누 사드의 족장 알 아흐나프 이븐 카이스는 그의 이탈을 전해듣고 무슬림 내전을 일으킨 당사자가 동료들을 버린 것은 명예롭지 않다며 휘하의 예멘인 아므라 빈 알 자르무즈를 보내 죽이도록 했다. 앗 주바이르의 수급을 본 알리는 한때 용맹한 동료였던 그의 허탈한 죽음에 심히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탈하와 앗 주바이르의 죽음은 전세를 결정지었다. 다만 아이샤의 독전에 반란군은 전투를 이어갔고, 하나 하나씩 그녀의 낙타를 몰며 나아가다 전사했다. 보다못한 알리의 병사들이 항복을 권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국 아이샤의 낙타가 쓰러지고, 그녀가 사로잡힌 후에야 전투는 종결되었다. 알리와 이븐 아바스는 아이샤에게 수천명의 죽음과 파괴를 초래한 것과 부인들에게 정치에 개입하지 말 것을 요청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유지를 어긴 것에 대해 비난하며 그 이복동생으로 하여금 성지 메카로 호송하게 했다. 전투 이후 알리는 공개 사면령을 내리고 포로와 탈영병, 부상자들에 대한 폭력 행위를 금지했다. 포로들은 곧 석방되었음은 물론 재산 역시 반환되었다. 다만 알리 자신을 따른 병사들에게는 바스라의 재물 저장고를 열어 보상했다. 한편 고위급 포로들 중 우스만, 탈하, 앗 주바이르의 아들들은 용서를 빌며 칼리파 알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돌아간 방면 마르완은 여전히 충성 서약을 거부한 채로 시리아로 향했다고 한다.

3.2. 시핀 전투(658년)

파일:시핀 전투 이슬람.jpg
10세기에 저술된 《타리크나마》의 14세기본 삽화

639년 다마스쿠스 총독에 오른 후 647년부터는 시리아 전역을 관할하게 되면서 비잔티움식 중앙집권에 나서던 무아위야는 656년 알리의 메디나 소환령[9]에 여러 핑계를 대며 응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벌며 반알리 세력을 모은 그는 알리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어 자신에게 기존 영지(시리아 전역)와 이집트의 지배권을 인정해준다면 충성 서약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알리는 물론 단칼에 거절했다. 이에 무아위야는 낙타 전투 당시의 반란군과 마찬가지로 알리가 우스만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시해의 진상 규명과 살해범의 처벌에 소극적이라 주장하며, 피로 얼룩진 우스만의 옷을 다마스쿠스 거리에 전시하고, 주민들에게 피의 보복을 호소했다. 그는 시리아인들로 따로 슈라 위원회를 구성해 알리의 칼리파 폐위를 선언하며 자신을 후임 칼리파 후보로 내세웠다.

흥미로운 것은 무아위야 역시 우스만 생전에는 포위되어 있던 그의 구원 요청에 늑장 대응하는[10] 등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가 정치적으로 이용 가치가 생긴 후에야 6촌의 죽음에 대한 피의 보복을 호소한 것이다. 사실상 우스만을 유일하게 도운 것은 알리 뿐이었는데 오히려 그가 살해의 공범으로 몰리게 된 현실이었다. 적반하장 어이가 없던 알리는 무아위야에게 그가 우스만의 복수를 꾀하기는 커녕 먼저 자신에게 영지를 늘려달라 한 것을 각인시키고, 알리 자신의 죄를 인정할 증거가 있다면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시리아' 슈라 위원회의 구성원 중 법적으로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았다. 상당히 논리적인 반박이었지만 이미 반란에 올인한 이상 인정사정 볼 것 없었던 무아위야에게 통할 리가 없었고, 오히려 알리에게 우스만의 살해범들을 넘겨주거나 공범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낙타 전투 이후 이라크의 쿠파에 머물던 알리는 이를 묵살한 채로 657년 여름,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서진했다.

이어진 시핀 전투는 현재 시리아 라카 부근 유프라테스 강 서안에서 벌어졌다. 동년 9월 21일, 알리는 무하지룬과 안사르로 구성된 정규군을 이끌고 시핀에 당도했다. 무아위야는 80,000명에 달하는 시리아 대군을 이끌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아위야의 선봉장 아불 아와르 아므르는 알리군의 식수원을 차단하기 위해 강변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에 알리는 그들을 몰아내며 강변을 차지했고, 무아위야와 달리 시리아군이 강변에 접근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후부터 알리는 무아위야 측에 무슬림 사이의 화합을 요구했다.[11] 이후 가을과 겨울이 지나는 동안 협상이 이어졌다. 무아위야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충성 서약을 대가로 시리아와 이집트의 지배권을 요구했으나 재차 거절되었다. 알리는 출혈을 막기 위해 둘 사이의 1대1 결투로 승부를 결정하자고 제안했으나 그의 쌍검술을 두려워 한 무아위야는 회피했다. 결국 658년 2월, 대화가 결렬되자 전투가 개시되었다.

메디나, 쿠파, 바스라의 병력으로 구성된 칼리파 알리 진영에 비해 무아위야의 진영은 변방의 전리품을 노리고 막 개종한 시리아 무슬림들로 구성되었다. 수요일에 시작한 전투는 주말까지 계속되었다. 알리가 진두지휘한 것에 반하여 무아위야는 전방의 막사에서 지시했다. 초반에는 수적으로 우세한 시리아군이 승기를 잡는 듯 했다. 첫날 시리아군의 좌익이 알리 진영의 우익을 격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노련한 사하바 등의 베테랑으로 구성된 알리 진영의 반격이 성공했다. 다음날 무아위야는 알리 진영의 좌익을 집중 공격했으나 크게 격퇴당했다. 우마르의 아들 우바이둘라가 전사하고, 무아위야가 지휘소를 버린채 후방의 주둔지로 후퇴할 정도였다. 한편 알리 측에서도 원로인 암마르 이븐 야시르[12]가 전사했다. 원칙적으로 전투가 금지된[13] 금요일인 3일째에 알리는 재차 더이상의 출혈을 줄이자며 결투를 청했고, 병사들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무아위야는 이번에도 거절했다.

금요일의 전투는 비명의 밤이라 명명될 정도로 처절했고 밤새 이어졌다. 그 결과, 토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전황은 칼리파 알리 진영으로 기울어 있었다. 정오 직전 무렵 패색이 짙어지자 무아위야는 부관 아므르 이븐 알 아스[14]의 조언대로 《쿠란》을 창 끝에 달고
쿠란의 심판에 따르자
고 외치며 협상에 나서는 계책을 실행했다. 무력이 아닌 신의 뜻에 결정을 맡기자는 이 호소는 알리의 경건한 성품을 겨냥한 계락이었고, 고지식했던 사하바들은 속임수이자 지연술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세한 전투를 중단했다. 알리 역시 적진 깊숙히 진격했던 선봉장 알 아슈타르에게 회군을 명령했다. 사상자 수로 따지면 4일 간의 격전 끝에 무아위야 진영은 반이 넘는 45,000명이 전사했고, 칼리파 알리 진영도 25,000명을 잃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3.2.1. 협상과 이탈(658~659년)

전사자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는 주전파와 이제라도 희생을 줄여야 한다는 주화파의 대립 속에 칼리파 알리는 권력의 핵심층인 후자의 뜻대로 협상에 나섰다. 아제르바이잔 총독이자 쿠파 주민들의 대표였던 아쉬아스 빈 카이스 알 킨디가 주화파에 있었기에 쿠파를 수도로 삼았던 알리는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알리는 무아위야 측의 요구대로 칼리파의 공식 직함인 아미르 알 무미닌을 협약서에서 생략하기로 했다. 이로써 알리는 무아위야와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무아위야는 알리에게 해임당한 상태였기에 공식적으로는 어떠한 직함도 지니고 있지 않아서 그와 동급이 된 알리에게는 수모와 같았다. 승리를 목전에 두고도 취하지 않은 알리의 태도에, 주전파로서 선두에서 분투하던 열성파들은 진영을 이탈했다. 이들은 '떠난 자들'이라는 의미의 카와리지로 불렸다. 알리 역시 그들의 입장을 이해했지만, 화의를 원하는 다수와 무아위야군이 연대할 경우, 당해낼 수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

협상에 있어 무아위야는 '꾀주머니' 아므르 이븐 알 아스를, 알리는 중도파로 여겨지던 아부 무사 알 아쉬아리를 파견했다. 양 대표들은 《쿠란》과 순나에 따르고 공동체를 전쟁과 분열에서 구할 것과 상호 진영의 이익보다는 평화 자체를 우선시여길 것을 서약했다. 그리고 이틀 후 양측의 군대는 전장을 떠났고, 알리 역시 쿠파로 돌아왔다. 사태를 관망하던 주전파 카와리지 세력은 알리가 전쟁 지속 의지를 완전히 꺾었다고 판단, 그의 지도자 자격 박탈을 선언한 후 3월에 압둘라 이븐 와하브 앗 라시비를 아미르로 선출해 자립했다.[15] 이에 알리는 15,000명의 병력을 소집하여 미래의 바그다드 동쪽 나흐라완 일대에 있었던 카와리지 소탕에 나섰다. 7월에 벌어진 나흐라완 전투에서 (알리의 사면에 따라 귀순한 1,200여 명을 제외한) 2,800명의 카와리지군은 전멸했고, 압둘라 이븐 와하브 역시 전사했다. 그후 알리는 재차 시리아로 나아가려 했으나 연이은 전투에 지친 병사들이 종군을 거부했다.

쿠파 인근에서 숙영하는 동안 병사들 대부분이 귀가해버리자 알리는 협상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무아위야의 계획에 부합한 것이었고, 협상을 맡은 아므르 이븐 알 아스에게 더 큰 자신감을 부여했다. 몇달 간의 준비 후 659년 1월, 메디나와 다마스쿠스의 중간 지점인 두마트 알 잔달[16]에서 협상이 열렸다. 무아위야는 아므르 이븐 알 아스를 전권대사로 보내었고, 알리 측은 아부 무사 알 아쉬아리를 파견했다. 다만 알리 본인은 협상 대표에 별로 만족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양측은 우스만의 죽음이 부당한 것이고, 무아위야는 복수를 꾀할 권리가 있다는 합의에 당도했다. 이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았던 아부 무사가 온전히 무아위야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아므르의 의사에 경도된 결과로 여겨진다. 두마트 알 잔달 협상 이후 알리는 대화를 통한 해결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무아위야의 요청으로 양 대표들은 현재 요르단 남부에 해당하는 우드루[17]에서 회담을 이어갔다.

우드루 회담은 큰 충돌과 함께 결렬되었다. 양측은 무아위야와 알리 모두를 폐위하고 새로운 칼리파를 선출하기로 합의했는데, 아므르가 연단에 올라 알리는 폐위하되 무아위야의 지위를 유지한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에 쿠파측 사절단은 격노했고, 아부 무사는 메카로 도주했다. 한편 다마스쿠스로 돌아간 아므르는 무아위야의 환대를 받았다. 이슬람 정치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 우드루 협상에 대해 많은 기록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럼에도 한가지 확실한 점은 우드루 회담 결과, 아므르와 아부 무사는 무아위야와 알리를 둘다 퇴위(칼라)시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 대표들은 합의 사항을 공표했다. 아부 무사는 아므르가 먼저 발언하기를 희망했으나 아므르는 그의 특기인 달변으로 아부 무사가 먼저 발언하게 만들었다. 그 대화의 일부를 소개한다.
알라께선 신앙과 히즈라에 있어 나보다 당신을 앞서게 했습니다. 그대는 예멘인들이 라술 알라(무함마드)에게 보낸 대표였고, 또한 라술 알라가 예멘인들에게 보낸 대표였습니다. (중략) 일어서십시요, 그리고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ㅡ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아부 무사 알 아쉬아리에게
신께 영광이 있기를. 아므르와 나는 알리와 무아위야를 해임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부 무사)
오 여러분, 이 사람 아부 무사는 무슬림들의 셰이크요, 이라크 사람들 중의 현자입니다. 그는 알리를 해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아위야를 확실히 지지하였습니다. (아므르)

아므르는 아부 무사의 발언 중 유리한 부분만 취하여 그들이 알리를 칼리파에서 해임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무아위야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것이다. 이에 아부 무사는 분노했다.
뭐라?! 네게 알라의 저주가 있길! 너의 행실이 개와 같구나! (아부 무사)
너는 흡사 경전을 지고 가는 당나귀 같다! (아므르) .

3.3. 국지전(658~660년)

파일:1차 피트나.png
660년 무렵의 전선. 예멘과 이라크 전역이 표시되었다. 빨강색이 무아위야 1세. 녹색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협상으로 알리의 칼리파 폐위가 공표되자 시리아인들은 무아위야 1세를 새로운 칼리파로 인정하고, 충성 서약을 했다. 알리는 협상 자체가 《쿠란》에 위배되었다며 재차 시리아 원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대세는 무아위야 1세 쪽에 기운 상태였다. 이미 엘아리쉬를 장악하고 있었던 아므르는 658년 7월 무렵, 이집트 내에 포위되어 있었던 친우스만 세력이 호응하자 6,000명의 병력과 함께 진군하여, 알리가 임명한 총독 무함마드 이븐 아비 바크르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재정복'했다.[18]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제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에 반대했던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이븐 아비 후다이파는 무아위야의 계략에 속아 시리아로 향했다가 처형되었고,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가 임명한 카이스 이븐 사드 알 안사리는 657년 시핀 전투를 위해 소환되었다. 대체자로 임명된 말리크 알 아슈타르는 임지인 이집트로 향하던 중 쿨줌 (수에즈)에서 사망했다.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무함마드 이븐 아비 바크르는 협상에 나선 카이스와 달리 친우스만 봉기자들의 집을 불태우고, 가족을 체포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에 친우스만 파의 무아위야 이븐 후다이즈 알 킨디와 마슬라마 이븐 무칼라드 알 안사리가 시리아의 무아위야 1세에게 이집트 개입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었다. 대기하던 아므르 이븐 알 아스는 6,000명의 병력과 함께 이집트로 진군해, 옛 동료들을 모아 푸스타트와 헬리오폴리스 사이에서 벌어진 알 무산나 전투에서 칼리파 알리 지지 군대를 격파하고, 푸스타트를 장악했다. 무아위야 이븐 후다이즈는 무함마드 총독을 사로잡았고, 그가 초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아들이자 아이샤의 이복동생이라며 조언한 아므르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그를 처형했다.[19] 이집트 점령 이후 아므르는 무아위야 1세와의 약속대로 종신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풍요로운 서부를 공고히 장악한 무아위야 1세는 알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대신 이라크 일대에 지속적으로 습격대를 보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주민들을 공격하고, 여러 부족들에게 뇌물을 주어 회유에 나섰다. 앗 다하크 이븐 카이스 알 피흐리의 습격대는 쿠파 방면의 사막을 지나던 무슬림 순례단을 공격하는 추태도 보였다. 누만 이븐 바쉬르 알 안사리에 이어 660년 여름에는 수피안 이븐 아우프가 이라크의 히트와 안바르를 습격했다.

3.3.1. 예멘에서의 학살(660년)

한편 659년 말엽 무아위야 1세는 이슬람의 발원지인 히자즈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그는 우선 압둘라 이븐 마사다 알 파자리를 타이마로 파견해 세금을 걷고, 충성 서약을 받게 했으나 알리의 정규군에게 격퇴되었다. 660년 4월 성지 메카의 쿠라이쉬 연맹으로부터 충성을 얻어내려는 시도 역시 실패했다. 한편 그 이듬달에 무아위야 1세가 예루살렘의 성전산에서 칼리파로 즉위했다는 소식에 알리 역시 분노하여 기존의 존중과 달리 그에 대한 공개적인 저주를 시작했다. 무아위야 1세는 한술 더 떠 알리 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과 핵심 인사들 역시 저주했다.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그해 여름 무아위야 1세는 부스르 이븐 아비 아르타트에게 3,000명의 정예병을 주어 히자즈와 예멘 정복을 맡겼다. 부스르는 지시대로 메디나, 메카의 주민들을 위협하되 해를 가하지 않는 방식으로 복종을 받아내었고, 예멘에서는 저항하는 자는 누구든 일망타진했다. 그는 도중에 마주치는 낙타들을 징발해 이용하며 말들의 체력을 비축했다.

부스르가 접근하자 알리가 임명한 메디나 총독 아부 아이유브 알 안사리는 쿠파로 도주했다. 메디나에 무혈 입성한 부스르는 기존 안사르들을 비난했고 알리 측근들의 집을 파괴했다. 다만 유력자들로부터 무아위야 1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얻고는 메디나 주민들을 사면했다. 며칠 후 부스르는 남하하여 성지 메카로 향했고, 그곳의 총독 쿠탐 빈 아바스 역시 주민 다수와 함께 도주했다. 부스르는 알리와 친한 아부 라하브 가문원 몇명을 처형했고, 숨어있던 아부 무사를 사면했다. 카바에서 예배를 드린 부스르는 메디나와 마찬가지로 메카 주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낸 후 타이프에 입성했다. 타이프와 남쪽 타발라의 복속을 받은 그는 주민들을 또다시 사면한 후 예멘으로 향했다. 도중 알리의 사촌이자 예멘 총독인 우바이둘라 이븐 아바스의 두 아들인 압둘 라흐만과 쿠탐이 외가인 키나나 부족과 함께 있다가 사로잡혔는데, 부스르는 이들을 처형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나즈란에 당도한 부스르는 발하리스 부족장이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령이었던 압둘라 이븐 압둘 마단과 그의 동생 야지드 및 아들 말리크 등 과거에 칼리파 우스만을 비판했던 인사들을[20] 처형했다. 또한 알리를 지지하는 함단 부족을 공격해 부족장 아부 카립을 죽였고, 살아 남은 부족원들은 시밤 등의 험지로 피신했다. 그러자 부스르는 후퇴를 위장했고, 이에 속은 함단 부족이 마을로 돌아오자 재차 공격하여 남성은 학살하고 여성은 포로로 잡았다. 이는 이슬람 역사상 무슬림 여성이 처음으로 이슬람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는 사건이었다. 한편 예멘 총독 우바이둘라 이븐 아바스는 그대로 쿠파로 도주했고, 사이드 이븐 니므란만이 조금의 저항 이후 뒤따랐다. 우바이둘라의 부관 아미르 이븐 아라카 앗 타카피만이 사나를 수비했지만 전사했다. 사나를 함락한 부스르는 주민 전부를 학살하고 단 1명만을 살려두어 무아위야 1세에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이웃한 마리브에 경고했다.

부스르는 알리에 우호적인 자이샨 역시 공격해 점령했고, 주민들이 요새에서 저항하자 사나로 회군했다. 9세기의 시아파 분파인 자이드파 학자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 앗 타카피는 부스르가 아라비아 원정 중 30,000명을 대학살했다고 기록했다. 부스르는 알리가 파견한 자리야 이븐 쿠다마 휘하의 지원군이 다가오자 맞서지 않기 위해 히자즈가 아닌 네지드의 사막을 관통해 시리아로 돌아갔다. 도중 타밈 부족이 전리품의 일부를 약탈했음에도 무시하고, 황급히 진군한 것으로 보아 당초의 목적 자체가 정복이 아닌 친알리파에 대한 위협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야마마에서 하니파 부족을 복속시킨 부스르의 친무아위야 군대는 알리가 암살당한 661년 봄에서야 시리아에 당도했다. 그후 부스르는 하산 이븐 알리에 대한 무아위야 1세의 이라크 원정에 있어 선봉장으로 활약한 이후 바스라 총독에 올랐다.

3.4. 알리의 암살(661년)

파일:알리 이슬람.jpg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가 암살된 이라크 쿠파(나자프)의 대사원

같은 아랍 무슬림에 대한 조직적인 처형과 대량 학살은 알리 진영에 공분을 자아냈다. 우바이둘라의 두 자녀 역시 살해되었을 정도였다. 알리는 분노로 가득한 이라크 군대를 모아 재차 시리아 원정을 계획했다. 하지만 661년 1월 26일, 쿠파의 대사원에서 파즈르(새벽) 예배를 위해 절을 하던 알리는 카와리지파 자객 압둘라흐만 이븐 물잠에게 습격당했다. 알리는 부상을 당했고, 이븐 물잠은 경호원들에게 제압되었다. 이후 수석의사였던 아티르 빈 아므르 앗 사쿠니가 치료에 나섰으나 독이 묻은 검에 의한 자상이었기에, 알리는 이틀 후인 1월 28일, 상처가 도져 숨을 거두었다. 3일 후 알리의 장남 하산은 자객 압둘라흐만을 친히 처형하여 부친의 혼을 달래었다. 사실 카와리지 세력은 금요 예배에 임할 무렵 동시에 무아위야 1세,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알리 세 지도자 모두를 제거할 계획이었다. 따라서 각각 알 훗자즈 앗 타미미, 아므르 이븐 바크르 앗 타미미, 압둘라흐만 이븐 물잠을 파견했는데 이중 물잠만이 성공한 것이었다.[21]

4. 종결 : 하산 이븐 알리의 퇴위

알리가 사망하고 이틀 후인 661년 1월 30일, 장남 하산 이븐 알리가 충성 서약을 받으며 제5대 정통 칼리파에 올랐다. 무아위야 1세는 하산의 선출을 인정하지 않았고, 설전이 이어졌다. 협상이 결렬되자 무아위야 1세는 시리아를 앗 다하크 이븐 카이스에게 맡기고는 60,000명의 대군을 모아 현 바그다드 북쪽 50km 지점인 마스킨으로 나아갔다. 하산은 쿠파에서 군대를 모아 마스킨 방면의 알 마다인으로 나아갔는데, 아무도 적대하지 않는다는 연설을 한 것이 발단이 되어 그의 전투 의지를 의심한 일부 병사들이 난동을 일으켰다. 하산의 막사가 약탈되었고, 하산은 마다인으로 피신하던 중 알 자라흐 이븐 시난이라는 카와리지 자객의 매복 공격에 당해 허벅지 부상을 입었다. 부상 소식에 알리파 병사들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이탈이 시작되었다. 한편 마스킨에 다다른 무아위야 1세는 쿠파인들에게 사절을 보내 하산이 협상을 청했으니 끝날 때까지 공격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모욕과 함께 거절되었다.

그러자 무아위야 1세는 하산 이븐 알리의 선봉장 우바이둘라 이븐 아바스를 사석에서 만나 하산이 휴전을 제안했다며 100만 디르함을 조건으로 그를 전향시켰다.[22] 밤을 틈타 우바이둘라는 무아위야 1세 진영으로 넘어갔고, 환대를 받았다. 선발대를 이어받은 카이스 이븐 사드는 우바이둘라를 비난하며 친알리파 군대를 재정비하곤, 무아위야군의 부스르가 다가오자 공격해 이틀에 걸쳐 2차례나 격퇴시켰다. 무아위야 1세는 카이스 역시 매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마다인의 병란과 하산 이븐 알리의 부상 소식이 당도하자 양측의 전투는 멈추었고, 하산 진영은 서서히 이탈하여 12,000명 중 8,000명이 전향했다. 그리고 무아위야 1세의 공언대로 하산은 그와의 협상에 나섰다. 카이스 역시 휘하 병사들이 협상을 주장하자 그에 승복했다. 결국 하산은 무아위야 1세가 부친 알리의 명예를 존중하고, 쿠파에서 얻은 재산을 인정하며, 후임 칼리파를 선임하지 말고 슈라 위원회에서 결정하며[23], 모든 이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칼리파직을 사임했다.[24]

661년 7월, 무아위야 1세는 쿠파에 입성했고, 하산 이븐 알리와 그의 동생 후세인 이븐 알리를 필두로 알리 지지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그후 시리아로 돌아온 무아위야 1세는 단독 칼리파로서 다시 예루살렘의 성전산에서 즉위식을 치렀다.[25] 이로써 5년에 걸친 내전이 종결되고, 무슬림 공동체, 즉 움마는 재통합되었다. 무슬림들은 661년(헤지라력 40년)을 일치의 해('암물 자마아')라 부른다. 한편 알리에 의해 바스라 총독으로 임명된 이후 파르스의 반란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던 지야드 이븐 아비히는 이스타크르 주변의 요새에 웅거하며 무아위야 1세에 대한 복속을 거부했다. 다만 무아위야군의 장수 부스르가 바스라에 남겨진 지야드의 아들들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자 결국 지야드 역시 협상을 통해 662년 혹은 663년에 무아위야 1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이후 그는 673년까지 이라크 지역의 총독을 맡으며 우마이야 왕조에 협력했다. 지야드의 불복을 마지막으로 옛 알리의 세력 전부가 평정되었다.

4.1. 이후

이슬람 공동체는 무아위야 1세의 탁월한 지도력하에 20여년간 안정을 누리며 다시 대외 팽창에 나섰다. 하지만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잔인함[26]과 쉬아와 카와리지 운동의 세력화는 제2차 피트나의 씨앗이 되어 무아위야 1세의 사후에 이슬람 세계를 더 크게 뒤흔들게 된다.

5. 여담

간혹 서구권에서 발간된 역사교육 서적들의 경우는 이 1차 피트나가 벌어진 서력 656년을 수니파와 시아파가 분열된 해로 서술하기도 하는데, 정작 알 아즈하르 대학 등을 포함한 이슬람 교육계에서는 이와 같은 인식을 사실과 다르다고 부정하며 서구권에서 지나치게 단순화 하여 서술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에 대한 논증은 이미 무함마드가 사망한 직후인 632년에도 분열의 씨앗이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1차 피트나를 "수니파와 시아파가 분열된 사건"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무함마드의 일대기가 세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 서구권이나 동아시아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얘기이지만 시아파에서 성인으로 공경하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이미 무함마드가 사망한 직후부터 본인이 칼리파 직위를 이어받아야 함을 주장하다 며칠 뒤 실제 2대 칼리파가 된 아부 바크르와 크게 다투었으며 심지어는 아부 바크르가 이 때 알리를 향해 칼을 꺼내들었다는 설까지 있다.

6. 참고 자료

  • 《이슬람 교리, 사상, 역사》 (손주영)
  • 《이슬람 칼리파제사》 (손주영)
  •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Fitna

[1] 피타나트 무크탈 우쓰만(우스만 피살 내전)[2] 특히 이라크의 쿠파 주민들은 사태의 심각화를 보고하기 위해 메디나를 다녀온 총독 사이드 빈 아비 알 아스의 입성을 막았다. 그러자 칼리파 우스만은 중도적인 아부 무사 알 아슈아리를 파견했으나 그는 유약하여 쿠파인들의 반발을 방지할 수 없었다.[3] 다만 알리의 아들 하산 이븐 알리가 우스만의 저택 경호를 맡았다가 부상당하기도 했다. 알리가 아예 손을 놓은 건 아닌 것.[4] 불안한 정국을 염려하며 계속 거절하다가 딱히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 빈 아비 수피얀 정도를 제외하면) 반대 세력이 없고, 그대로 놔두면 공동체, 즉 '움마'의 분열이 더욱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승낙했다고 한다.[5] 흥미로운 것은 전임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에게 반대하는 데 있어서는 아이샤와 탈하, 앗 주바이르가 앞장서서 지지했다는 것이다[6] 앗 타바리에 따르면 여정 도중 하와브에 이르러 개들이 짖어대자 아이샤는 거사를 포기할 것을 고려했다고 한다. 생전 예언자 무함마드가 부인들에게 하와브의 개들이 그대들을 향해 짖는 날이 올지어니, 그 날은 그녀가 명백한 오류의 일원에 있는 날일지어다라는 발언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어쨋든 아이샤는 주변의 설득으로 가마에 올라 진군을 계속했다[7] 일설에 의하면 알리는 어린 시절 예언자 무함마드가 언젠가 앗 주바이르가 불의하게 알리와 싸울 것이라 예측한 것과 자신이 우스만을 구하려 노력한 것에 반해 아이샤와 탈하는 우스만에 대한 폭력을 선동한 것을 말했다고 한다. 또한 우스만을 시해한 이들이 싸움을 선동했다고도 한다.[8] 부상한 동료를 위해 기도하던 틈에 살해되었다고 함[9] 모든 총독들은 신임 칼리파가 즉위하면 메디나로 찾아와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관례였다.[10] 그가 파견한 원군은 우스만의 부고를 듣고 회군했다[11] 《쿠란》 49장 <알 후자라트> 장에 나오는 무슬림 간의 내분이 일어날 시에 양측의 화해를 도모하라는 구절에 따른 것이다.[12] 최초로 모스크를 지은 사하바[13] 애초에 이슬람에서 무슬림끼리 싸우는 것 자체가 금기이긴 하지만[14] 본래 칼리파 우스만 시해의 조력자로 분류되었으나 무아위야가 우마이야 친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호해 준 후 포섭하여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15] 초기 카와리지 세력은 12,000명이었으나 그중 8,000명이 알리 진영으로 되돌아와서 4,000명만 남았다[16] 현 사우디 북부의 도시 샤카카 부근이다.[17] 무려 예언자 무함마드 생전인 631년에 복속함[18] 641년에 이집트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복한 것도 아므르 본인이었기에.[19] 이때 개인적으로 무함마드 이븐 아비 바크르에 원한이 깊었던 무아위야 이븐 후다이즈는 그의 시신을 (구별하기 힘들도록) 죽은 당나귀 가죽 안에 넣어 불태웠다고 한다..[20] 은자 카압 이븐 아브다 딜 하바카 앗 나흐디[21] 무아위야 1세는 눈치를 채고 예배에 나오지 않았으며, 아므르 이븐 알 아스는 카리자 빈 후다파에게 대신 예배를 주도하게 하여 그를 아므르로 착각한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 자객을 사로잡은 아므르는 '너는 날 원했지, 허나 신께선 카리자를 원하셨다!'고 하며 그를 손수 처형했다.[22] 금액의 절반은 즉시 지불, 나머지는 쿠파에서 지급하기로[23] 혹은 하산을 후임 칼리파로 두며[24] 무아위야 1세는 하산에게 자신의 인장이 찍힌 빈 종이를 주며,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적으라고 했다[25]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에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가 세웠던 모스크를 확장 건설한 것이 훗날 알 아크사 모스크의 전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충성 서약을 받았다고 한다. 당대의 마론파 사료에 의하면 무아위야 1세는 서약을 받은 이후, 성전산 근처에 있는 골고다 언덕과 겟세마네의 마리아 무덤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제왕들과 달리 왕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26] 670년 무아위야 1세는 하산 이븐 알리를 독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