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03 20:31:48

수에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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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수에즈 이집트 3.jpg

1. 개요2. 역사3. 갤러리

1. 개요


이집트 동북부의 항구도시. 수에즈 운하의 유래며, 운하홍해와 만나는 남단에 위치해 있다. 카이로에서 동쪽으로 120km, 운하의 북단인 포트사이드에서 남쪽으로 14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78만명으로, 카이로-이스칸다리야-기자에 이어 이집트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다.포트사이드보다 조금 더 큰 도시인데도 유럽이 아닌 아시아 방면이기에 포트사이드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이집트에서 가장 큰 석유화학 산업 단지가 위치해 있으며, 수입된 석유를 정재하여 카이로 등지로 보낸다. 도시 깃발에서도 산업 도시라는 점이 피력되어 있다. 교육 시설로는 수에즈 대학이 있고, 항구는 포트사이드보다 거대하다. 포트사이드와 달리 공항이 없는데, 2019년 서쪽 70km 지점에 이집트의 새 행정수도 (NAC)의 국제공항이 완공되었기에 그곳을 주로 이용한다. 북쪽으로 비슷한 거리에 이스마일리아에도 공항이 있지만 국내선만 있다.

2. 역사

그리스어 Κλῦσμα (파도)
콥트어 ⲡⲉⲕⲗⲟⲩⲥⲙⲁ
아랍어 القلزم

현대 시가지 북쪽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 건설되고 로마 제국트라야누스가 재건한 고대 도시 클리스마 (알 쿨줌)이 원형이다. 근현대 이전의 해안선은 현재보다 북쪽에 형성되어 있었기에 클리스마 역시 항구 도시였다. 대략적으로 현 시가지 중북부의 무슬림 묘지 즈음으로 추정된다. 525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곳을 통해 기독교 악숨 왕국의 유대 힘야르 왕국 원정을 돕기 위해 20여척의 함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541년 지중해를 뒤흔든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역시 클리스마를 통해 확산되었다. 그외에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으로 도시에는 성 아나타나시오스 성당이 세워졌다. 이슬람 정복 후 클리스마는 아랍어 지명인 알 쿨줌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시에 홍해는 바흐르 알 쿨줌 (쿨줌의 바다)으로 명명되었는데, 당시 도시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클리스마와 쿨줌은 다리우스 1세가 건설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중건한 '파라오 운하'의 시종착점으로 번영하였다. 그러던 770년 압바스 칼리파 알 만수르가 반란 진압 과정에서 운하를 폐쇄해버렸다.

780년 후계자인 알 마하디가 운하를 일부 복구했지만, 9세기 들어 압바스 왕조가 쇠퇴하며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도시는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잇는 대상 교역을 통해 번영을 이어갔다. 그러던 971년 극단주의 세력 카르마트의 장군 하산 알 아삼이 도시를 점령하였는데, 그해 말엽 카이로 전투에서 파티마 왕조의 자우하르에게 패하고 후퇴하였다. 이때부터 쿨줌 인근의 샘에 위성도시 수에즈가 건설되었다. 아이유브 왕조살라흐 앗 딘12세기 말엽 홍해 연안을 습격한 십자군 영주 르노 드 샤티용에 맞서기 위해 쿨줌과 수에즈를 요새화하였다. 한편 13세기 십자군 침공과 아이유브-맘루크 왕조의 내분을 틈타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베두인들이 약탈하며 쿨줌은 폐허가 되었고, 수에즈 만이 작은 도시로 유지되었다. 맘루크 시기에 일대는 현 요르단 일대에 기반한 알 카라크 주에 편성되었기에, 맘루크 정부가 이곳부터 아시아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들어 포르투갈인도양과 홍해에 진출하자 최후의 맘루크 술탄 깐수 알 구리는 셀만 레이스에게 6천 병력을 주어 수에즈를 방어하게 하였다. (1507년)

2.1. 포르투갈의 침공 (1541년)

파일:하이르 앗 딘 오스만.jpg파일:수에즈 이집트.jpg
인도양의 오스만 해군 수에즈 만에 진입한 포르투갈 아르마다

이렇게 맘루크 병력이 분산되며 10여년 후 오스만 제국군은 더욱 수월히 이집트를 정복할 수 있었다. 인도양의 패권 확립에 나선 오스만 조는 수에즈를 해군무역 거점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수에즈는 포르투갈과 싸우기 위해 함대가 건조되고 출정하는 주요 해군 기지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 포르투갈은 1538년 디우 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1541년 바스쿠 다 가마의 아들 에스타벙 다 가마 휘하 40척의 함대를 홍해로 파견하였다. 다만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포르투갈 함대는 마사와에 반이 머물고 남은 20척만이 당초 목표이던 수에즈로 향하였다. 그마저도 수아킨 습격 후 4척이 이탈하였고, 250명의 병력을 실은 잔여 16척의 함대만이 시나이 반도엘토르를 습격한 후 4월 말엽 수에즈 만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이미 소식을 접한 오스만령 이집트 총독 다부드 파샤가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고 2천 시파히 기병을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잠깐의 교전 후 포르투갈 함대는 후퇴하였다. 한편 마사와에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아로 돌아가는 길에는 폭풍으로 여러 전함을 상실하는 등 포르투갈의 수에즈 원정은 대실패로 귀결되었다.

2.2. 근대 ~ 현대

파일:수에즈 이집트 1.jpg
1832년, 운하 건설 이전의 수에즈

18세기 무렵 수에즈에서는 히자즈제다로 향하는 20척의 함대가 매년 출항하였다. 이는 무역과 성지 순례객 운송의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후 1800년 영국프랑스군이 격돌하며 도시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며 쇠퇴한 수에즈는 반세기 후 도시의 이름을 딴 수에즈 운하가 개통하며 다시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다만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지중해와 접한 포트사이드에 정착했기에 수에즈는 비교적 각광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구한 역사성에도 수에즈가 포트사이드에 비해 인지도가 낮다. 20세기 들어 항구 도시로 개발된 수에즈는 포트사이드와 마찬가지로 1967년 6일 전쟁주민들이 소개되었다가 1975년 재건되었다. 21세기 들어 아랍의 봄 당시에 수에즈는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첫 시위가 벌어진 대도시였다. 따라서 이집트의 시디 부지드라는 별명이 있다. 2021년에는 수에즈 운하 에버 기븐호 좌초 사고가 수에즈 북쪽 5km 지점의 운하에서 발생하여 많은 선박들이 대신 수에즈 항구에 머물며 허송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3. 갤러리

파일:수에즈 이집트 2.jpg
도시와 운하 위성 사진
파일:이집트 항구.jpg
모스크와 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