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23:48:52

이스마일리아

파일:이스마일리아 이집트.png
팀사흐 호숫가의 시가지
파일:이집트 기념물.jpg
1973년 이스마일리아 전투 기념탑. AK-47의 총구 모양으로, 북한에서 제작하여 보내주었다고 한다.

1. 개요

아랍어 الإسماعيلية
영어 Ismailia

이집트 동북부 수에즈 운하에 접한 도시. 인구는 75만으로, 북쪽 60km 지점에 있는 포트사이드와 유사하나 인지도상 이집트 제6의 도시로 분류된다. 남쪽으로 비슷한 거리를 가면 운하의 남단인 수에즈가 있다. 1859년 포트사이드가 세워지고 4년 후인 1863년에 건설되었는데, 당시 이집트의 군주 이스마일 파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포트사이드가 숙부 사이드 파샤의 이름을 딴 것과 비교된다. 이스마일리아는 포트사이드와 함께 운하 경영의 중심 도시가 되어 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였다. 운하의 중간에 입지한 덕에 수에즈 운하의 관제 지령부가 위치하여 있고, 현대의 국유화 후에는 운하 관리 본부가 위치한다. 그 일대에 근대 프랑스/영국식 건물들이 많다. 1882년 이집트-영국 전쟁 당시 영국군이 주둔하였고, 이후로도 계속 머물렀다. 세계 1차 대전 때는 시나이 반도 진출을 위한 영국 공군 기지가 위치하였다. 1928년 3월에는 하산 알 반나가 이곳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창설하였는데, 외세의 영향력이 짙은 도시에서 반외세 개혁 성향의 당을 창단한 것이다. 2차대전 종전 후에도 운하 관리를 명분 삼아 영국군이 계속 주둔하였다.

파일:이집트 운하 1.jpg
1869년 이스마일리아에서 열린 수에즈 운하 개통식

그러던 1952년 1월 이집트인 게릴라들이 이스마일리아의 영국군 기지를 공격하였다. 이집트 경찰이 이들을 돕는 것을 목격한 영국군은 전차까지 동원하여 현지 경찰서를 포위, 1시간의 말미를 주며 항복을 요구하였다. 경찰 서장은 내무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대응책을 물었고, 장관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라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이스마일리아의 경찰 43인은 전멸하였고, 영국군 역시 3명이 전사하였다. 그럼에도 친영국 기조를 유지하던 국왕 파루크 1세에 대해 여론의 분노는 폭발하였고, 같은해 7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때에는 운하를 건너 반격에 나선 이스라엘군의 이스마일리아 점령 시도를 분쇄한 이스마일리아 전투가 벌어졌다. 이 승전을 바탕으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 회복을 요구할 자신감을 마련하였고, 현재까지 크게 기념하고 있다. 이스마일리아 시가지는 운하 중간에 있는 팀사흐(악어) 호숫가에 형성되어 있다. 시가지 북쪽에는 수에즈 운하 대학교, 서쪽에는 이스마일리아 공항이 있다. 그외에 이스마일리아 박물관이 있는데, 규모에 비해 유물의 수준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