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05:10:24

람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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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
람세스 2세
Ramesses II
파일:rameses-ii-facial-reconstruction.jpg
미라를 바탕으로 복원한 모습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칭호 [ 펼치기 · 접기 ]
호루스 이름: 의 사랑을 받는 강한 황소(Ka nakht mery Ra)
네브티 이름: 외국을 억제하는 이집트의 수호자(Mek Kemet Waf Khasut)
황금 호루스 이름: 긴 시간 동안 부유한 자, 승리에서 위대한 자(User renput aa nehktu)
즉위명: 라의 정의는 강하다 - 라가 선택한 자(User Maat Ra - Setep en Ra)
출생명: 아문의 사랑을 받는 람세스(Ramesesu mery Amun)[1]
출생 기원전 1303년
사망 기원전 1213년 (향년 90-91세)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1279년 ~ 기원전 1213년
(약 66년)
전임자 세티 1세
후임자 메르넵타
부모 아버지 : 세티 1세
어머니 : 투야
배우자 네페르타리, 이제트, 메리타멘 등
자녀 메르넵타 외 88-103명
신장 173cm[2]
무덤 람세스 2세의 무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amesses_II_cartouches_at_Tanis.jpg
User Maat Ra - Setep en Ra / Ramesesu mery Amun
(라의 정의는 강하다 - 라가 선택한 자 / 아문의 사랑을 받는 람세스)
파일:아부심벨 신전7.jpg
아부심벨 대신전에 조각된 람세스 2세의 석상

1. 개요2. 통치
2.1. 즉위 이전2.2. 66년 간의 통치
2.2.1. 군사 원정2.2.2. 카데시 전투2.2.3. 히타이트와의 평화
2.3. 토목공사
2.3.1. 피람세스2.3.2. 아부심벨 대신전2.3.3. 라메세움
2.4. 말년
3. 성경출애굽기와 람세스4. 가족과 역사적 평가5. 대중문화에서6. 기타7. 여권

[clearfix]

1. 개요

파일:이집트 람세스.jpg
이집트 신왕국 제19왕조의 제3대 파라오로,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파라오 중 한 명이다. 인생무상을 상징하는 시로 유명한 오지만디아스가 바로 이 사람.[3] 소설《람세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흔히 알려진 람세스는 그리스식 명칭이고, 히에로글리프의 특성상 모음을 표기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 이집트인들이 불렀던 정확한 발음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콥트어와의 연결 고리를 통해 라메수가 가장 가깝다고 추정할 뿐이다. 최근에는 프티모세, 투트모세, 아흐모세처럼 라-모세[4]가 본래 이집트식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성서모세도 그렇고 이 모세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름이 고대 이집트에서는 매우 흔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20대에[5] 왕위를 물려받았고, 그 후 60년 이상[6]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러니까, 대충 90살에 죽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신도시이자 새로운 수도 피람세스(Per-Ramesesu)[7], 아부심벨 대신전을 비롯한 대규모 건축물을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는 이집트 제19왕조의 황금기뿐 아니라 이집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

2. 통치

파일:이집트 역사.jpg
멤피스에서 람세스 2세의 거상을 청소하는 박물관 직원[8]

2.1. 즉위 이전

람세스 2세가 즉위하기 이전 이집트 신왕국은 제18왕조의 하트셉수트 여왕, 투트모세 3세, 아멘호테프 3세에 걸친 기나긴 평화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특히 정복왕이라고도 불리는 투트모세 3세시리아로 진격해 중동의 강대국 미탄니빈집털이해 막대한 전리품을 챙겨왔고, 레반트 지방을 심심할 때마다 털어대며 이집트의 영향권을 크게 넓혔다. 투트모세 3세 이후 즉위한 아멘호테프 3세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아멘호테프 3세는 해외 침공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대신 궁전이나 신전들을 크게 지어대는 등 내치에 집중했다. 아멘호테프 3세는 말카타에 당대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궁전을 건축하고 파라오를 찬양하는 세드 축제를 연달아 개최하는 등 위엄을 과시하고 이집트의 풍요를 만끽했다. 제18왕조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아멘호테프 3세 아래 이집트는 꾸준한 평화기를 누렸고 예술은 왕실의 후원을 받아 크게 발달했다.

아멘호테프 3세가 죽은 이후 신왕국은 한 차례 격랑에 빠져든다. 아멘호테프 3세 사후 즉위한 아멘호테프 4세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름을 아텐에게 사랑받는 자라는 뜻의 아케나텐으로 바꾸었다. 아케나텐은 기존의 아문 신앙을 모조리 부정하고 오직 태양신이자 유일신아텐만이 정당한 신이라는 신앙을 내세웠다. 당연히 기존의 신관 계급은 왕의 종교 개혁에 격렬히 반대했고, 아케나텐과 신관들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았다. 아문 신관들이 꼴보기 싫었던 아케나텐은 아예 수도를 새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아케나텐은 아텐의 지평선이라는 뜻의 아케타텐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고, 진흙 벽돌로 새로운 왕궁과 아텐 신전을 신축해 그곳에 머물렀다. 참고로 아케나텐 시대의 이집트 예술은 그 이전, 이후의 예술과 확연히 차이가 있었기에 따로 아마르나 미술이라고 부른다. 아케나텐의 도시 아케타텐이 현재의 아마르나 지방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아케나텐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종교 개혁은 아케나텐이 죽자 바로 무위로 돌아갔다. 아케나텐의 후계자가 바로 그 유명한 투탕카멘이다. 그러나 투탕카멘은 즉위 당시 너무나도 어렸고, 파라오 대신 섭정들이 이집트를 통치했다. 섭정들은 아케나텐의 정책을 혐오했기에 투탕카멘 시대의 이집트는 아케나텐 이전으로 빠르게 회귀했다. 투탕카멘은 8년에서 9년 정도 재위했는데, 이집트의 수도는 다시 테베로 돌아왔고 어린 파라오가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동안 아문 신관들의 권한은 확실히 강력해졌다. 투탕카멘은 18살 정도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9] 투탕카멘이 사망한 후 재상이었던 아이가 새로운 파라오가 되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노환으로 사망하며 유력 군사령관 출신 호렘헤브가 왕권을 거머쥐었다. 호렘헤브는 강력한 리더십과 휘하의 군권을 백분 활용해 연이은 파라오들의 교체로 혼란스러운 이집트를 안정시켰다.

호렘헤브는 기원전 1292년 경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호렘헤브가 죽자 그가 군사령관 시절이었을 때부터 곁에서 보좌했던 장교 출신의 람세스 1세가 새로운 파라오가 되니 이를 제19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선대 파라오 호렘헤브가 워낙에 이집트를 안정시켜 놓았기에 람세스 1세는 갑작스러운 즉위에도 불구하고 나름 이집트를 평화롭게 통치할 수 있었다. 람세스 1세는 처음으로 람세스라는 이름을 사용한 파라오였는데, 이는 "에 의해 태어났다."라는 뜻이다. 람세스 1세는 즉위한 지 16개월 만에 늙어 죽었다. 람세스 1세가 죽자 세티 1세파라오로 등극했다. 당시 세티 1세에게는 즉위하자마자 한창 서아시아 지방에서 힘을 키우고 있던 히타이트를 견제해야 하는 중대한 과업이 주어져 있었다. 히타이트의 급부상은 이미 아케나텐의 시절부터 일어나고 있는 대사건이었으나, 아케나텐의 종교 개혁이 워낙에 엄청난 사건이었기에 국외에 신경 쓸 틈이 없었고, 이미 세티 1세 시대의 히타이트는 이집트와 맞먹는 강대국이 되어버렸다. 세티 1세는 이 상황 속에 직접 군대를 몰아 시리아로 진격해 카데시를 함락했고,[10] 누비아리비아를 연달아 정복하며 이집트의 옛 강역 상당수를 회복했다.

2.2. 66년 간의 통치

2.2.1. 군사 원정

파일:external/1.bp.blogspot.com/Ramses+II.jpg
파일:c0444305-800px-wm.jpg
옛 시리아 지방 원정에 성공한 세티 1세는 이집트인들의 많은 추앙을 받았다. 특히 신의 현신이라 불릴 정도로 고귀하게 여겨졌던 파라오가 직접 전쟁에 나가 칼을 휘둘렀다는 사실 자체는 수많은 이집트인들의 감탄을 샀고,[11] 그 덕에 세티 1세는 이집트인들에게 명군으로 여겨졌다. 세티 1세의 재위기에 이미 예비 파라오이자 공동 통치자로 임명된 람세스 2세는 이를 옆에서 그대로 지켜보며 세티 1세, 그리고 전 제18왕조의 투트모세 3세를 롤모델로 삼아 파라오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람세스 2세는 이미 왕세자 시절부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제 근처에 세력을 불렸고, 파라오에 즉위할 즈음에는 대부분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기반을 탄탄하게 다진 시점이었다.

람세스 2세가 즉위한 직후의 이집트는 이전의 전성기에는 못미치는 상황이었다. 세티 1세의 원정으로 다시금 북아프리카-소아시아 일대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였으나, 하트셉수트투트모세 3세, 그리고 아멘호테프 3세의 황금기 시절에 비교하면 여전히 국력이 약한 편이었던 것. 북쪽에서는 막 등장한 신흥 강대국 히타이트가 세력을 확장하며 이집트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해상에서는 바다 민족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해적 집단들이 지중해 동부부터 나일강 하구에 이르기까지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이 바다 민족들은 아직도 밝혀진 것이 많지 않은 민족이다. 그리스계, 소아시아계, 페니키아계 등 곳곳에서 이동해 합쳐진 잡다한 인간들이 모인 해적 집단이라는 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 이들은 함대를 꾸려 지중해미케네 문명, 소아시아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공격하면서 끊임없는 노략질을 펼쳤다. 이들의 약탈 때문에 지중해의 해상 활동은 극도로 제약되기 시작했으며, 해안 도시들은 국가를 막론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나일강과 지중해가 만나는 곳에 점점이 흩뿌려져 있던 이집트의 항구도시들 역시 바다 민족들의 침략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특히 이집트는 워낙에 부유했기에 나일강의 항구도시들은 바다 민족에게 군침 흘릴 만한 먹이였던 것. 바다 민족들은 이집트로 끊임없이 쳐들어왔고, 그에 따라 상당한 피해가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했기에 막 즉위한 람세스의 첫 번째 타겟은 바다 민족이었다. 람세스는 재위 2년 만에 바다 민족의 한 일파인 셰르덴인들을 토벌했는데,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선호했던 이 바다 민족을 단 한 차례의 기습작전으로 소탕했다고 알려져 있다. 람세스 2세는 일부러 미끼를 흘려 셰르덴인 해적 함대를 유인한 후 갑작스럽게 기습해 함대를 탈취하는 고급 전략을 사용했다. 이는 람세스가 지상전뿐만 아니라 해상전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해안선을 비롯한 당시 지형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람세스 2세는 포로로 잡은 셰르덴 해적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일부는 척박한 농지를 주고 개간하도록 했으며, 실력이 좋은 몇몇은 직접 뽑아 친위대직을 맡기기까지 했다. 이들은 카데시 전투 때까지도 람세스 2세를 곁에서 지켰다고 한다.

바다 민족들을 깨부수면서 자신감을 얻은 람세스 2세는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던 히타이트를 견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람세스 2세는 총 4차례에 거쳐 히타이트 인근의 시리아로 원정을 떠났다. 재위 4년 만에 첫 시리아 원정을 통해 북벌을 준비했고, 1차 원정에서 무려 현재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42km 떨어져 있는 비블로스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람세스 2세는 비블로스에 다다른 이후 기념 석비를 세웠고,[12] 그곳에서 히타이트의 봉신국들 중 하나였던 아무루를 복속시켰다. 첫 원정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한 번 시리아를 체험해본 람세스 2세는 본격적인 대원정을 기획했다. 아버지 세티 1세 시절 왕세자 자격으로 그를 따라 시리아의 카데시 지방까지 진출했던 람세스 2세는 그때의 추억을 잊지 못했고, 아버지를 뛰어넘고자 했기에 독자적으로 카데시까지 진출하고 싶어했다. 시리아와 가까운 나일강 삼각주에 '피람세스'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도를 지어 시리아 원정의 전진기지로 활용했고, 매주 1,000여 자루의 무기들과 2주마다 250여 대의 전차들을 쏟아내도록 기술자들을 닦달했다.

2.2.2. 카데시 전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카데시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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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카데시 전투.gif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자 람세스 2세는 대대적인 시리아 2차 원정을 준비했다. 람세스 2세는 약 1만 6천 명의 보병, 2,000여 대의 전차, 4,000여 명의 용병들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당시 히타이트의 명군 무와탈리 2세가 다스리고 있던 레반트 일대로 진군했다. 람세스 2세는 군대를 아문 부대, 부대, 세트 부대, 프타 부대로 나누어 이끌었다. 그렇게 4개의 부대들을 끌고 앞으로 나아가던 도중, 람세스 2세는 2명의 민간인들을 붙잡았다. 그들은 파라오에게 히타이트의 왕이 이집트군을 두려워하여 이미 카데시 요새를 떠나 북쪽으로 도망쳤고, 모든 곳에서 동맹군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이를 철석같이 믿은 람세스 2세는 그대로 진군해 성급하게도 비어 있던 카데시 요새에 진입하기로 결심한다. 세티 1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 람세스는 군대를 재촉해 빠르게 말을 몰았고, 이동을 서두르다 보니 부대들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람세스 2세가 최선두에 서서 전차를 타고 있었고 그 뒤를 아문, 라, 세트, 프타 부대가 상당한 간격을 두고 뒤따르고 있었던 것.

람세스 2세가 오론테스 강을 건넜을 무렵 이집트 군이 히타이트 척후병들을 잡아왔고, 이들을 심문한 파라오는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예상보다 지나치게 히타이트 군대가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아문 부대는 이미 오론테스 강을 건너 북상하고 있었고 라 부대는 막 오론테스 강을 건너고 있었으며 세트와 프타 부대는 아직 강에 도착하지도 못했다. 람세스 2세는 가능한 빨리 세트와 프타 부대를 아문, 라 부대에 합쳐야 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나 늦었다. 강을 건너던 라 부대 앞에 마침내 히타이트의 전차 부대가 회전하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창 강을 건너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라 부대는 그대로 쓸려나갔고, 앞에 먼저 가던 아문 부대 역시 예상치 못한 기습에 궤멸당했다. 앞의 두 부대를 끝장낸 히타이트 군대는 람세스 2세의 목을 따기 위해 파라오에게 달려갔다. 여기까지는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기록이 일치하지만 이후부터는 기록이 갈린다. 이집트 측은 이 급박한 상황 속, 람세스 2세가 갑자기 신으로 변해 히타이트 군대를 박살냈다고 적었다. 히타이트 측의 기록은 히타이트 군대가 압승을 거두고 파라오는 겨우 도망쳤다고 나와있다. 고고학자들은 곤경에 빠진 람세스 2세를 메자이 등 친위부대가 호위해 히타이트 진영 사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역사에 남을 만한 대전투가 바로 카데시 전투이다.

일반적으로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히타이트의 무승부 혹은 이집트의 패배로 본다. 람세스 2세는 후방에서 진군하던 세트, 프타 부대와 합류했다. 아문, 라 부대를 한꺼번에 잃어버려 도저히 카데시 요새를 공성할 만한 병력이 아니라고 판단한 람세스 2세는 눈물을 머금고 군대를 물렸다. 람세스는 다마스쿠스를 거쳐 이집트로 후퇴했고, 이 과정에서 히타이트의 동맹 도시나 소국들을 여러 차례 약탈하면서 돌아갔다. 히타이트 군대는 후퇴하는 이집트군의 뒤를 쫒아 당시 이집트의 중요한 군사거점이던 우피 지방을 점령했고, 전투가 벌어진 지 1년 만에 아무루는 다시 히타이트의 봉신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이집트의 아시아 영향력은 가나안 지역만으로 축소되었다.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에게 쫒겨나는 모양새가 연출되자 이집트의 핍박을 받고 살던 수많은 가나안인들은 이에 고무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가나안마저 히타이트의 손아귀에 떨어지면 바로 이집트 본토가 적에게 노출되는 형세였기에 절박해진 람세스 2세는 결국 재위 7년 만에 다시 시리아로 3차 원정을 떠나야만 했다.

2.2.3. 히타이트와의 평화

람세스의 3차 원정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람세스 2세는 한꺼번에 군대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이번에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었다. 군대를 두 개로 나누어 한 갈래는 자신이 직접,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들이자 왕세자였던 아문헤르케페세프에게 맡겼다. 아문헤르케페세프가 이끌던 군대는 셈족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네게브 사막을 지나 사해까지 따라가 결국 모두 포로로 잡거나 살해한 후 가나안의 대도시들 중 하나였던 에돔을 점령했다. 에돔을 떨어뜨린 이후에는 모압 지방마저 점령하기 위해 모압 쪽으로 진군했다. 한편 람세스 2세 본인이 이끌던 군대는 가나안 지방의 핵심 대도시였던 예루살렘예리코를 공격했다.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끝낸 람세스 2세는 아문헤르케페세프와 합류하기 위해 모압으로 향했고, 모압에서 아들과 군대를 다시 합쳤다. 람세스 2세는 대군을 이끌고 헤스본, 다마스쿠스, 쿠미디 지방까지 진군했고, 다마스쿠스 인근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자 2차 원정 시절 히타이트에게 빼앗겼던 우피 지방을 다시 되찾으며 이집트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에 일부 성공했다.

3차 원정으로 인해 이집트는 카데시 전투 이전의 영향력을 일부 되찾아왔다. 고무된 람세스 2세는 재위 8년 즈음에 다시 시리아로 4차이자 마지막 원정을 떠났다. 파라오는 대군을 끌고 강을 건너 아무루 지방까지 북진해 다푸르 인근까지 군대를 몰고 가 자신을 묘사한 작은 석상을 세웠다. 람세스 2세는 지난 원정의 격전지였던 카데시를 그대로 지나쳐 튜니프 일대까지 진출했는데, 이는 몇백여 년 전의 정복왕 투트모세 3세 이래 그 어떠한 파라오도 밟지 못했던 곳이었다. 람세스는 튜니프에 공성전을 펼쳐 결국 도시를 떨어뜨리고 그곳에 제 위엄을 자랑하는 석비를 세웠다. 4차 원정으로 인해 람세스 2세는 가나안 지방과 튜니프, 카데시를 잇는 가느다란 띠 형태의 영토를 얻어냈다. 물론 이런 모습의 영토가 오래 갈리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히타이트의 영향권으로 도로 들어갔고, 람세스 2세는 또다시 다푸르에 진압군을 보내야 했다. 어찌되었든 람세스는 4차 원정을 통해서 이집트의 군사력이 여전히 강대하다는 것을 여러 군주들에게 알려주었다. 카데시 전투의 패배로 인해 흔들리는 듯 보였던 이집트의 군사력은 다시 공고해졌다. 다만 히타이트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데에는 실패했고, 중동에서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의 불안정한 소강 상태가 유지되었다.

이 불안정한 소강 상태는 히타이트의 무르실리 3세가 쫒겨나 이집트로 망명하면서 종결된다. 무르실리 3세는 카데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무와탈리 2세의 후계자로, 지나치게 힘이 강력했던 제 삼촌인 하투실리 3세를 견제해 없애려 했으나 실패해 오히려 자신이 왕좌에서 쫓겨났다. 갈 곳이 없던 무르실리 3세는 히타이트의 적국인 이집트로 향했다. 무르실리 3세를 쫒아내고 왕으로 즉위한 하투실리 3세는 당연히 후환을 자르기 위해 람세스 2세에게 무르실리 3세의 송환을 요구했다. 람세스는 처음에 무르실리 3세의 행방을 모른다면서 뻗대었고 이로 인해 히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의 관계는 최악을 향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는 기원전 1258년에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마침내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끝난다. 참고로 이는 양측이 대등한 관계에서 맺은 평화 조약 중 증거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협정이다. 재미있게도 양측 기록이 모두 "상대가 청해서 우리가 관대하게 화평을 받아들였다."라는 식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 조약으로 인해 히타이트 공주와 결혼하고 소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된 람세스가 좀 더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렇게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의 국경은 정리되었고, 이 지역에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13] 최초로 양측이 대등한 관계에서 맺은 평화 조약이라는 중요성 때문에 이 조약문은 현재 국제연합 본부에 복제본이 전시되고 있다.[14]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 가장 격렬하게 싸웠기에 보통 그쪽으로만 잘 알려져 있으나 사실 누비아리비아와도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른 군주였다. 특히 남쪽에 있는 이집트의 전통적인 영향권 누비아를 끊임없이 때렸는데, 22세의 나이에 나일의 제1폭포까지 진출했고 비협조적인 부족들을 포로로 잡거나 모두 쓸어버렸다. 람세스는 누비아 북부까지 진출한 뒤 그곳에 자신을 섬기는 신전과 조각상, 석비들까지 다수 건립했다. 그 석비들 중 하나의 내용에 의하면 람세스 2세가 친히 다른 병사들의 도움 없이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누비아 부족민들과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도 있다.[15] 지중해와 인접한 리비아와도 전투를 치렀다. 다만 람세스 2세 시기에 리비아와 벌인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람세스 2세가 부왕 세티 1세 시기부터 리비아인들과의 전투에 참전했다는 점, 그리고 리비아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는 점, 그리고 군대를 보내 국경을 확립하고 공성을 펼쳤다는 점에서 리비아에 대한 군사 활동도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3. 토목공사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으레 그렇듯이, 람세스 2세도 자신의 흔적을 이집트 전역에 남기는 데 열심이었다. 고대 이집트 최고의 신전인 카르나크 신전을 대대적으로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나일강변을 따라 이집트와 누비아, 리비아 근방에 수많은 신전과 사원들을 개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겨넣었다. 람세스 2세 시대에 세워진 가장 대표적인 건설 프로젝트에는 신도시이자 수도였던 '피람세스'[16], 이집트의 랜드마크아부심벨 대신전, 자신의 장례 신전인 '라메세움' 등이 있다. 스스로를 이집트 역사상 제일의 파라오라고 자랑스러워했던 람세스 2세는 정말 건축물들을 짓고 후세에 제 이름을 남기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신전뿐만 아니라 관공서 등 도시 구획을 정비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여 당시 이집트의 생활을 개선하고 일자리까지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람세스는 그의 얼굴을 새긴 조각상을 이집트 전역에 세웠는데, 때로는 이전 파라오의 조각상에 새겨진 이름을 지우고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도둑질을 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 희생양이 바로 아케나톤투탕카멘이다. 호렘헤브가 시작한 '이단 파라오 박해'[17]는 람세스 2세 시기에 그 끝장을 보았다.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 은근슬쩍 전대 파라오들의 이름을 긁어내고 제 이름을 넣었던 것. 그런 주제에 후대의 파라오가 자신의 이름을 파낼까 염려하여 석공들에게 그의 이름을 굉장히 깊이 새기도록 명령했는데, 이집트 곳곳에 퍼져 있는 람세스 거상의 경우 약 15cm 깊이로 파내어진 이름도 있다.

2.3.1. 피람세스

파일:pi-ramesses.jpg파일:ad783385b763dfa9215ff72d738f322b.jpg
람세스 2세는 즉위 초에 시리아 원정을 기획하면서 전진기지로 나일강 삼각주 북쪽에 신도시인 피람세스(Per-Ramesesu)를 조성하고 천도했다. 이렇게 지어진 피람세스는 조상의 터전과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 - 팔레스타인 지역에 진출하겠다는 람세스의 의지를 상징하기도 했다. 세티 1세 시절에는 그저 여러 여름 궁전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피람세스는 이 때 엄청나게 성장하여 궁전과 사원, 많은 조각상과 장식물들로 꾸며졌고, 호루스의 길이라 불리우는 이집트-소아시아 교역로에서 들어오는 물산들로 인해 상당히 번영하였다. 람세스 2세는 재위 기간 대부분 동안 피람세스의 궁전에서 머물면서 아시아에서 들어오는 외교 사절단들을 발빠르게 맞이할 수 있었다. 아시아 쪽에서 유목 기병이나 히타이트 군대가 쳐들어올 때를 대비해서 일부러 수도를 국경 쪽에 만들어 신속한 대처가 가능하도록 만들었고, 이 전략은 성공하여 이집트는 아시아 쪽의 정치 상황을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다.

피람세스는 람세스 2세의 최전성기 시절 그 인구가 30만 명에 달하며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들 중 하나였다. 이같은 성세는 꽤 오래 지속되어서 람세스 2세가 죽고 난 후에도 100여 년 넘게 번영을 지속했다. 아케나텐이 세웠던 신도시 아케타텐, 즉 현재의 아마르나 지방은 아케나텐이 죽고 난 직후 바로 버려졌던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 피람세스의 길이는 6km, 너비는 3km에 달했고 중앙에는 거대한 태양 신전이 서있었다. 고고학자들이 레이더로 지면 아래를 훑어본 결과, 서안의 강변을 따라 귀족들이 살던 거대한 별장과 저택들이 줄서 있었고 그 주변에 수많은 꼬불꼬불한 시가지들이 늘어섰다. 도시 동쪽에는 상대적으로 평민들이나 빈곤한 사람들이 살던 작은 주택들이 밀집해 있었다. 또한 피람세스 내부에는 수많은 운하와 인공호수들이 파여 있어서 '물 빛깔의 도시'라고도 불렸는데, 이때문에 고대 이집트의 베니스라는 별칭이 있다. 또한 마구간에도 선진적인 공사가 되어 있어 마굿간의 바닥을 청결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수도를 깔거나 저수로를 만들어 학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다만 람세스 2세 사후 100년이 지나자 나일의 흐름이 바뀌며 제21왕조는 피람세스를 버리고 인근의 타니스로 천도했다. 제21왕조의 파라오들은 피람세스의 건물들을 뜯어갔고, 이가 지속되면서 피람세스는 결국 폐허로 전락했다.

2.3.2. 아부심벨 대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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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람세스 2세 건축물.jpg
파일:f5af47d725ab9845d39e9a006bcae3db.jpg
람세스 2세의 상징이자 이집트의 상징인 아부심벨 아부심벨 내부
아부심벨 대신전아스완에 있는 거대한 암벽 신전으로, 그 압도적인 위용과 인상깊은 모습으로 람세스 2세를 넘어 이집트 자체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람세스 2세는 거대한 건축물들을 많이 지었지만, 개중 특히 누비아 지방에 신경을 많이 썼다. 누비아 자체는 오래 전에 이집트의 영향권 내에 편입되었으나 아직 완전한 이집트화는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람세스 2세는 누비아의 이집트화를 위해 많은 신경을 썼는데,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아부심벨 대신전이다. 누비아 상부와 하부 사이에 지어진 아부심벨 신전은 건축하는 데 무려 22년이 걸린 대공사였고, 람세스 2세의 재위 24주년에 맞추어 완공되었다. 아부심벨은 크게 람세스 2세를 모시는 대신전과, 왕비인 네페르타리에게 봉헌된 소신전으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아부심벨의 모습은 람세스 2세에게 바쳐진 대신전의 모습이다. 눈에 띄는 외관과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강렬한 모습 때문에 람세스 2세가 지은 수많은 신전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는다.

아부심벨 대신전의 정면에는 높이 20m에 달하는 4기의 거대한 거상들이 버티고 있다. 4기의 거상들 모두 람세스 2세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아우르는 통치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이중관 프셴트를 착용하고 있다. 보면 4기의 조각상들 중 왼쪽에 있는 조각상 1개의 얼굴과 상체가 떨어져 나갔다. 이는 지진으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발굴 과정에서 얼굴과 왕관 일부를 포함한 조각을 조각상의 발치에서 찾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신 발견한 바로 그 자리, 즉 발치 아래에 조각을 그대로 놔두고 있다. 람세스 2세의 거상들 사이에는 보다 조그만 크기로 네페르타리 왕비를 비롯한 아멘헤르케세프, 메리타멘 등 파라오의 자식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람세스 2세의 거상 뒤의 파사드는 높이 33m, 너비 38m로 상당히 크다. 파사드의 위쪽 모서리에는 22마리의 바분들이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한 입구의 문 바로 위에는 큼직한 벽감이 하나 파여졌고, 벽감 안에는 태양신 의 입상이 들어 있다.

거상들 사이에 있는 문을 통해 들어가면 람세스 2세의 모습을 묘사한 8기의 석상들이 도열해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방의 길이는 18m, 폭은 16.7m 정도다. 왼편에 있는 석상들은 상이집트의 백색 왕관을 쓰고 있고 오른편에 있는 것들은 이중관을 착용하고 있다. 마치 파라오를 죽음의 신 오시리스처럼 묘사한 것이 대표적인 특징. 사이사이의 벽화에는 카데시 전투를 포함한 전투의 내용들이 상세히 그려져 있고, 가장 유명한 그림은 전차에 올라 활을 쏘는 람세스 2세를 담은 벽화이다. 아부심벨 신전의 내관은 여타 이집트 신전들과 비슷하게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방이 좁아지는 형태인데, 맨 안쪽의 성소는 사람 몇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다. 8개의 석상들이 세워진 방을 지나면 더 조그맣고 4개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이 방에는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내용의 아름다운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람세스 2세가 네페르타리 왕비와 함께 라의 태양 방주를 타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장면이 유명하다. 여기서 마지막 방이자 가장 중요한 방인 성소로 들어갈 수 있다. 성소 내부에는 아문 라, 프타, 라 호라크티 등이 모셔져 있었다.

2.3.3. 라메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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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amesseum-Thebes-Egypt.jpg
파일:luxorPylon4.jpg
라메세움은 람세스 2세의 장례 신전이다. 현재 상이집트 지방의 룩소르, 즉 옛날의 테베에 위치해 있으며 이집트 역사상 최대의 신전들 중 하나였다. 스스로를 최고의 파라오로 여겼던 람세스 2세는 자신을 위한 장례 신전이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정도로 장대하기를 바랐다. 당시 장례 신전, 아니면 장제전은 파라오가 죽은 후 고인이 된 파라오에게 매년 제사를 올리는 장소였는데, 이는 곧 장제전이 후손들이 파라오를 가장 잘 떠올리는 장소였다는 의미였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장제전이 최고의 장제전이 되기를 원했고, 즉위하자마자 장제전 공사를 시작하도록 했다. 그리스어로 '람세스의 신전'이라는 뜻을 가진 라메세움은 20여 년에 걸친 긴 공사 기간 끝에 완공된다. 완성될 당시 라메세움은 이집트에서 가장 화려한 신전이라고 칭송받았다. 다만 람세스 2세 사후 신왕국이 서서히 쇠퇴하면서 라메세움도 함께 그 빛을 잃어갔고,[18] 결국 이집트 말기 왕조 들어 완전히 사회가 무너지며 라메세움도 철저히 약탈되었다. 로마 시대와 이슬람 시대를 거치며 라메세움은 폐허로 전락했고 현재는 일부 돌덩이들만 남아 있다.

라메세움에는 너비가 60m에 달하는 2쌍의 탑문들이 연달아 세워져 있었다. 탑문 2쌍을 지나면 48개의 거대한 기둥들이 받치는 열주들의 숲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기둥들의 홀을 지나면 마침내 최내각의 지성소로 향했고, 그 안에는 람세스 2세의 조각상과 그의 영혼이 출입하는 '가짜 문'이 새겨졌다. 탑문과 홀, 그리고 기둥 등 모든 장소들은 파라오가 전투를 벌이거나 신들을 찬미하는 내용의 벽화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라메세움의 건축물들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후대 파라오들에게 뜯겨나갔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2번째 중정 일부와 탑문 기단, 그리고 몇 남지 않은 오시리스 신상들밖에 없다. 벽에는 파라오가 카데시 전투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위쪽 대들보에는 풍요의 신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한 람세스 2세의 모습이 있다. 그나마 왕좌에 앉아 있는 람세스 2세의 석상이 흔적이나마 조금 남아 있는데, 이 석상들 중 머리 하나는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라메세움은 현재 그다지 볼 것은 많지 않고, 단지 그 시대에는 어땠을까 하고 영광을 추억하는 정도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권력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는 소네트 오지만디아스의 배경이자 모티브가 바로 이곳이다.

2.4.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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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한 정복 활동과 토목 공사로 이름을 떨쳤던 람세스 2세는 무려 66년 2개월 동안 이집트 신왕국을 통치했다. 람세스 2세의 재위 말년에 이미 파라오의 나이는 90세를 넘긴 상태였다. 현대 기준으로도 엄청난 고령의 나이였던 람세스 2세는 이쯤 되자 온 몸에 고질병들을 달고 살았다. 관절염부터 시작해 동맥경화까지 매우 많은 질병들에 시달렸고, 심지어는 심각한 충치까지 걸려 입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고통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19]

재위 말년에 이른 파라오는 후계자인 메르넵타에게 섭정을 맡기고 점차 저물어갔으며, 결국 기원전 1213년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람세스 2세의 시신은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라메세움에서 입을 여는 의식을 치른 뒤 왕가의 계곡의 KV7 무덤에 안치되었다. 이집트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람세스 2세가 사망하며 신왕국도 서서히 쇠락했다. 후의 이집트의 마지막 위대한 파라오라 불리는 람세스 3세 시대가 지나자 더욱 가파르게 쇠퇴했고, 이집트는 결국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람세스 2세는 생전 누릴 수 있는 영광은 모두 누렸지만 안타깝게도 죽은 이후에는 딱히 평화롭지 못했다. 람세스 2세의 무덤은 정말 엄청난 규모로 지어져 있었고, 당연히 그 규모에 걸맞게 막대한 보물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 하지만 무덤이 나일강홍수가 날 때마다 물에 잠기는 장소에 지어졌기에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는 상태다. 워낙 오랫동안 물이 빠졌다 다시 차올랐다를 반복하면서 벽화도 내부도 딱히 볼만한 것이 없다. 만일 남아 있었다면 이집트 왕릉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지녔을 무덤이 확실했기에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수많은 도굴꾼들이 무덤을 털기 위해 달려들었고, 결국 람세스 2세의 무덤은 허무하게도 만들어진 지 몇백 년도 채 되지 못해 털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람세스 2세의 무덤을 확인하고 그 안의 부장품들이 모조리 털려나간 것에 경악한 신관들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미라[20]를 수습, 다시 붕대를 감은 다음 일시적으로 왕비의 묘에 보관했다. 파라오들의 미라를 지키는 데에 결사적이었던 극소수의 신관들은 미라가 능욕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파라오들의 미라[21]도 한꺼번에 모아 데이르 엘 바하리에 위치한 한 대신관의 묘에 묻었다.[22] 학자들은 이 묘지를 TT320 무덤이라고 부른다. 람세스 2세의 미라는 몇천 년이 지난 후 이 TT320 무덤에서 발견되었고, 현재는 카이로의 고대 이집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로 학자들이 람세스 2세의 미라를 부검해본 결과 파라오는 붉은색 머리카락에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3. 성경출애굽기와 람세스

탈출기 본문은 이집트 탈출 당시 파라오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23]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며 출애굽한 지 480년이 지났다고 말한다. 성전 건축 시점으로부터 시점을 되짚어보면 출애굽 연도는 기원전 1446년이 되며[24] 이는 이집트 제18왕조 아멘호텝 2세 시기와 맞물린다고 주장하지만, 아멘호텝 2세는 실제로는 기원전 1427년 ~ 1397년까지 통치한 파라오로 해당 연대와 무관하다. 애초에 당시는 람세스 2세와 더불어 이집트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파라오인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년 ~ 1425년)가 가나안까지 영향력을 확장한 시기이기에 출애굽은 불가능했으며, 이러한 전성기는 아멘호텝 3세와 아케나켄의 치세 때까지 이어졌기에 이집트의 국력을 약화시킬 만한 출애굽 같은 사건은 제18왕조 동안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족보를 이용한 연대기적 접근 대신 출애굽기 1장 11절의 '유대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비돔과 라암셋(람세스) 성을 세웠다'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당시의 파라오를 람세스 2세로 보는 후기설이 존재하며, 오늘날 다수의 성서 고고학자들은 이를 따른다.

물론 람세스 2세의 다음 파라오인 메르넵타의 치세 이전에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메르넵타의 비문[25]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가나안에서 일어난 정복전쟁의 흔적/증거들은 모두 메르넵타의 치세 초기나 람세스 2세의 치세 말을 가리키기 때문에, 출애굽이 있었다면 메르넵타보다는 람세스 2세 때 일어났을 것이다.[26]

후기설의 여러 근거 중 하나는 지명이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지명인 피람세스(라암셋), 비돔, 숙곳, 믹돌, 바알스본, 비하히롯, 얌수프(홍해[27])는 모두 이집트 제19왕조의 기록에서만 확인되지 그 이전의 시대의 기록에서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제19왕조의 기록인 Papyrus Anastasi V (20:2-3)는 믹돌이 피람세스를 지은 세티 1세에 의해 건설되었다[28]고 기록하며, Papyrus Sllier IV에서는 바알스본(Baˁal-Zephon)[29]이라는 장소를 언급하고, 또 다른 제19왕조의 기록인 Papyrus Anastasis III (2:11-3:4)[30]에서는 갈대바다(p Ȝ ṯwfy)에서 피람세스로 가는 길에 비하히롯(pr-ḥwt-ḥrt)이 위치해있다[31]고 기록한다.

후기설의 다른 주요 근거는 아바리스가 버려진 시기이다. 고센 땅의 셈족(이스라엘 족속 포함)의 도시인 아바리스[32]는 힉소스의 몰락 이후에도 완전히 버려지지 않고, 제18왕조[33] 동안에 번성했으며, 유목민의 인구와 도시 전체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가나안(셈족) 양식의 유물과 그들이 거주했던 흔적은 제2중간기 뿐 아니라 신왕국 시대(투트모세 시대)에서도 확인된다[34]제18왕조가 시작될 무렵,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도시의 왕궁과 절반 이상이나 되는 부분이 버려졌지만, 적지 않은 인구의 셈족 유목민들이 이집트를 떠나지 않고 남았으며, 그 이후 아바리스는 18왕조 동안에는 아예 버려지지도 않았고, 이집트 내 셈족의 도시와 이집트 밖 가나안의 셈족 도시들이 모두 번성하였다. 람세스 2세가 이집트의 셈족 도시인 아바리스의 세트[35] 신전의 건립 4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비문(Year 400 Stela)은 힉소스 시대 초기의 종교가 람세스 시대까지 존속되고 보존되었음을 보여주며, 나아가 힉소스 잔당의 후예들 또는 힉소스 시대에 이집트로 온 요셉과 같은 히브리인들이 람세스 시대까지 400-430년의 세월 동안 아바리스에서 삶을 이어나갔음 역시 보여준다.[36]. 하지만 그랬던 아바리스는 제19왕조(기원전 1292-1189년)의 어느 순간에 완전히 버려졌다[37][38]. 일반적으로는 해당 도시가 버려져 피람세스의 주민들에 의해 무덤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가 파라오 람세스 2세가 그 옆의 신도시인 피람세스(라암셋)를 건축하기를 끝마친 시기 즘으로 추정되기에 이를 근거로 신도시가 구도시를 압도했기 때문에 구도시 곧 아바리스가 버려진 것으로 보기는 하지만,[39][40] 성서 학자들과 일부 이집트 학자들은 도시에 살던 셈족들이 도시를 버리고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으로 보며, 이를 출애굽과 연결시킨다.

후기설 중에는 아케나톤이 시작한 유일신 아톤 신앙을 믿던 잔당들에 모세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아케나톤, 투탕카멘 이래로 몰락한 유일신 사제들이 그 나름의 세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인 모세를 중심으로 무력을 동반한 대 탈주극을 벌였다는 것. 모세의 이름이 이집트 문자 mese[41]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때 그가 이집트 출신임은 확실하며, 히브리 유일신교의 배타적 성향이 아케나톤의 급진적 종교개혁과 상당히 닮아 있다는 것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에서 나오는 모세의 이미지는 이러한 이미지의 종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수많은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 갸날픈 어린이로 나오는 파라오의 장자도 사실은 대리청정에 준하는 위치의 장성한 아들이었을지도 모른다나.[42] 람세스가 하도 장수해서 그 아들들이 그보다 일찍 죽었다는 것 자체가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43] 그러나 후기설의 람세스 2세와 더불어서 출애굽 당시 파라오 후보로 오른 전기설의 아멘호테프 2세 또한 웨벤세누라고 하는 장자가 있었고, 그 경우에는 진짜로 10살 남짓한 나이에 일찍 죽어서 웨벤세누의 동생인 투트모세 4세가 왕이 된 전례가 있긴 하다.

이렇게 후기설과 전기설이 대립하는 것과 다르게 역사가 마네토, 멘데의 프톨레미(Ptolemy of Mendes), 요세푸스와 초대 교회 교부들인 에우세비우스, 히폴리투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타시아노, 데오빌루스는 출애굽과 힉소스 패퇴를 연결시켰으며[44], 출애굽의 파라오를 아흐모세 1세로 보았고, 현재 근동학계와 이집트학계의 대부분의 세속주의 학자들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전기설과 후기설 모두 지지하지 않고 출애굽을 힉소스 패퇴와 동일한 사건이라 본다.[45] 곽민수 소장 역시 출애굽을 힉소스 패퇴에 대한 기억과 연결시켰다. 실제로, 이집트가 기록한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한 셈족 이동은 기원전 16세기의 힉소스 패퇴가 유일하며, 시나이 반도를 거쳐 가나안으로 돌아간 셈족 유목민 역시 힉소스인들이 유일하다.[46] 힉소스인들이 이스라엘인의 선조였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논쟁의 요소가 있으며,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의 경우,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가나안 저지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을 힉소스 패퇴에 대한 전승을 수입한 것으로 본다.[47] 물론,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은 람세스 시대인 제19-20왕조 동안에 수십 또는 그 이상의 규모의 셈족 노예들이 도망쳤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를 표했으며, 이것이 출애굽의 기원이 되었거나 힉소스 패퇴처럼 전승에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다는 것에 대해서 열린 입장을 취하고 있다[48].

여담으로 게리 렌즈버그(Gary A. Rensberg)라는 개신교 성서학자는 람세스 3세설을 주장하였다. 람세스 2세의 증손자인 람세스 3세설도 나오게 되었다.이집트 탈출 람세스 3세가설

4. 가족과 역사적 평가

첫 번째 정비인 네페르타리를 비롯해 여러 명의 왕비후궁을 두었다.[49] 그들과의 사이에서 카엠와세트,[50] 형들이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 바람에 다음 왕위를 물려받은 메르넵타 등 매우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하도 오래 산 나머지 자기 큰딸이 자라자 큰딸도 후비로 맞아들여 그 사이에서 외손자 겸 아들인 자식도 얻었다... 이집트에서야 흔한 일이지만, 그야말로 근친상간의 극치. 이 때문인지 람세스의 자식들이 친자인가 양자인가에 대한 논란도 몇 차례 있었다.

가족 중에서도 첫 번째 왕비 네페르타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녀를 위해 직접 신전을 지어 주고 그녀의 아부심벨 소신전이라 불리우는 아부심벨 대신전 근처의 신전이 바로 그곳이다. 람세스가 조성한 건축물, 기념물에 이시스 여신과 함께 그려지거나 람세스 2세와 함께 조각된 모습 등으로 유명한데, 일반적으로는 '람세스 2세와 함께' 조각된 곳에서는 람세스 2세의 수십분의 일 크기로 람세스 2세의 발치에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아부심벨 소신전에서는 람세스와 같은 크기로 새겨지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곳곳에 새겨둔 네페르타리의 무덤은 왕비들의 계곡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로 자리잡았다.

람세스 2세는 66년 동안 통치를 했고 90살에 죽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젊었을 때 낳은 자식들은 다 죽었고 그보다 먼저 죽은 손자, 손녀들도 많았다.[51] 고대 이집트 전체 역사에서 2번째로 오래 살고 2번째로 오래 재위했다.[52]

오랜 치세동안 이집트 신왕조의 국경을 확립하였으며, 가장 훌륭한 파라오 중 한 명으로 지금까지도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세운 유적, 유물도 매우 많고.. 어찌나 존경을 받았는지 혈족상으로 그와 전혀 관계 없는 후대의 파라오들이 람세스라는 이름을 사용할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사실상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명군인데, 한 세대 뒤 선대의 후광을 이어받은 제20왕조의 람세스 3세(기원전 1183 ~ 1152)의 문화 번영기를 끝으로 이집트는 남북으로 분열되거나 람세스가 정복했던 리비아[53]누비아[54] 출신 왕조가 계승을 주장하는 등 여러모로 영락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마지막 황제.

...후손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준비해두셨는데, 유네스코 등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된 엄청난 건축들을 많이 남겼다. 본문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던 아부심벨 신전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관광객으로 붐빈다. 여담으로 쿠푸왕이 있던 제4왕조는 람세스와 1200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미 이 시대에도 '천 년 넘은 고대 유적'이었단 이야기이다.

현대 이집트에서도 위인으로 평가받으며, 카이로의 람세스역, 람세스 광장, 람세스 ll 전차 등이 람세스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5. 대중문화에서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는 클레오파트라 7세 혼자서 나온 문명 3을 제외한 전 작품에 등장했다. 문명 2와 최신작 문명 6에서는 클레오파트라[55], 문명 4에서는 하트셉수트와 함께 출연. 문명마다 개성이 생긴 문명 3 이후로는 불가사의를 짓는 데 이점이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출애굽기와의 관계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수의 학자들이 람세스가 성경에 있는 모세의 일화에 나온 파라오라고 생각했으며, 그에 따라 성경과 관련된 매체에 여러 번 등장했다. 출애굽기 속 선대 파라오 보다는 모세가 직접 맞대응을 해 라이벌의 면모가 강한 후대 파라오로 주로 등장한다. 이집트 파라오로서는 뛰어난 인물이지만 고대 이집트가 대중매체에서는 성경 아니면 전설 속 신비주의 국가로 주로 써먹히고 고대 이집트사 그 자체가 주역이 되는 작품이 드물다 보니 주인공에게 당하는 악역으로 등장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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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에서의 람세스 2세. 전설적인 명배우 율 브리너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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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왕자》에서의 람세스 2세. 목소리 연기는 레이프 파인스.
흔히 악행을 저지른 아버지의 의지를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람세스 2세와 이집트를 편파적인 시선으로 악역으로 만들었다는 식의 오해가 많지만, 실상 단순한 찌질이 악역이 아닌 모세에 대한 우애와 파라오의 의무감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적인 인물로 묘사되는지라, 권선징악이라는 묘사와는 전혀 다르다.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가 전혀 아닌, 모세와 람세스의 인간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집트 왕자에서는 람세스가 무능하다는 묘사는 전혀 없으며[56] 모세를 극진히 아끼는 의붓형의 면모와 동생과 원수가 된 자의 갈등, 아버지로서의 면모가 강조된다. 람세스의 아버지인 세티 역시 왕조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잔인한 짓을 저질렀을 뿐 그 자체는 잘못된 행동임을 자각하고 있고 모세를 사랑하는 아버지이자 너그러운 군주로 그려진다. 본작을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히브리인 학살의 진실을 알게 된 모세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세티 1세, 모세가 끌고 온 재앙에 그를 원망하면서도 단둘이 있을 때 남동생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왜 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걸까?"라며 안타까워하고, 결국 외아들이 죽고 나서야 요람을 끌어안고 미안해하는 모세를 외면하며 "당장 너희 민족을 이끌고 나가라."라고 하는 람세스를 절대 단순한 악역이라고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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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더스: 신들과 왕들[57]에서의 람세스 2세. 조엘 에저튼이 연기했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장편 소설 《람세스》에서도 등장한다.

Fate/Prototype 창은의 프래그먼츠라이더로 나왔다. 해당 문서 참고.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되고 있는 《모래와 바다의 노래》라는 웹툰은 람세스 2세가 다스리던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국 출신의 여주인공 에이비가 오빠에게서 선물받은 팔찌를 찼다가 고대 이집트에 와서 '네페르타리'라는 이름을 본의 아니게 사칭해 람세스 2세의 눈에 들게 된다는 이야기.

도미네이션즈》에서 람세스 2세의 아부 심벨이 월드워 전당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의 DLC인 <파라오의 저주>에서 사후세계의 보스 중 하나로 등장한다. 해당 DLC의 다른 파라오들이 테베의 유물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과 다르게 이쪽은 죽고나서도 편하게 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중이라 바예크가 아내인 네페르타리를 도와 그를 쓰러뜨리고 영면에 들게 하는 것이 스토리다. 고대 이집트 최고의 정복군주 답게 키만 3~4m는 되보이는 거구와 갑옷, 한두대만 맞아도 빈사상태에 빠지는 중형 둔기를 들고 나온다.[58] 다른 파라오들도 흉악한 난이도라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무기로 공격하는데 비해 람세스 2세는 바예크를 맨손으로 잡고 땅바닥에 패대기를 쳐버리거나 베어허그 공격을 가해 척추를 으스러뜨리는 등 유독 인상적인 공격들이 많다. 게다가 싸울 때 주기적으로 모래 폭풍이 불어닥치면 시야가 한치 앞까지 줄어들어 람세스 2세 본인은 물론이고 체력 바조차 보이지가 않기 때문에 상당히 애를 먹는다.

도라에몽 생일 스페셜 수수께끼의 피라미드 ︎이집트 대탐험》에서도 등장한다.

6. 기타

람세스 2세의 미라(링크대체)

빨간 머리매부리코를 지녔다고 한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적발과 매부리코를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는데, 빨간 머리는 자기 가문의 수호신이자 전쟁의 신인 세트의 자손[59], 매부리코는 주신인 호루스의 자손이라고 선전하는데 이용했다.[60] 미이라를 분석해본 결과 80~90세의 노인이며 관절염으로 심하게 고생을 했을 거라고 한다. 물론 위대한 통치자인 만큼 얼굴 조각상은 매우 잘생겼다. 참고로 사인은 당뇨 합병증으로 추정되며 그로 인해 관절염 외에도 발가락 일부나 다리가 썩어들어간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람세스도 죽어서는 영화롭지 못했다. 일단 사후 미라를 만들 때 원래 몸에서 떼어내면 안되는 심장을 실수로 떼어냈다가 황금 실로 다시 꿰매붙인 흔적, 목이 부러져서 널빤지로 목을 받쳐서 만든 흔적이 있다.[61] 다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으니...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부유한 파라오인 데다가, 당시 전세계에 명성이 알려졌기에 그의 무덤(KV7)은 19왕조가 끝나자마자 수천 년에 걸쳐 탈탈 털렸으며[62] 아주 제대로 털려서 미라의 속옷까지 벗겨갔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남은 것은 크게 가치가 없는[63] 샤브티[64], 카노푸스 항아리 조각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도굴된 유물들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65] 더구나 그의 무덤은 지대가 낮아 일찍이 자주 침수되었고 지반 약화로 무너질 위기에 놓여 관람 금지 구역이 되었다.

다행히 그의 미라는 고대 사제들이 그의 무덤에서 꺼내 다른 비밀 무덤(DB320)에 다른 파라오들과 재매장한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다.[66] 물론 그의 육신 자체가 보존된 것이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보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미이라가 카이로로 운반되는 도중 엉뚱한 모욕을 당했다. 술에 취한 이집트인 관리가 람세스 2세의 미이라를 말린 생선 수입품이라며 과세하는 소동을 벌였다.

인터넷에는 람세스가 왼손잡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출처는 아마도 미국 작가가 쓴 책인 'A Left - Handed History of the World'.[67] 다른 왼손잡이들도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별 근거가 없는 걸 봐서는 그냥 단순한 불쏘시개용이다.

이집트군은 자국의 전차에게 해당 인물의 이름을 부여하였다. 람세스 ll 문서 참고.

7. 여권

1976년, 람세스 2세의 미라 보존 상태가 나빠져 곰팡이를 제거하기 위해 프랑스로 잠시 이동시켰는데 이 때 프랑스 정부국가원수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의장대를 동원하여 영접했다.

그리고 이집트 정부가 람세스 2세의 여권신분증까지 발급한 걸로 유명한데 신원 불명의 시신을 항공기에 태울 수 없고 반드시 신분증을 제시하거나 신원을 보증해줄 수 있는 관계자가 동행하여야 가능하다는 당시 국제법의 한계[68]로 인해 만든 것이다. 실제 발행된 여권은 실물이 공개된 적이 없으며, 당시 여권이라고 돌고 있는 사진들은 전부 후대의 창작이다. 당시 이집트 여권은 말 그대로 수첩 형태로 수기 기록되었으며 기계 가독 영역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가로 배치가 아니라 세로 배치임을 추측할 수 있는 게 전부다.

곰팡이를 제거하기 위해 냉온요법, 방사선 치료 등 다양한 방법이 제안되었으나 냉온 요법은 미라의 모양을 잡기 위해 미라 속에 넣은 송진이 온도 변화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결국 방사선 치료를 했다. 다행히도 치료는 성공적이었고, 이후 람세스 2세의 미라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제공한 고대 아마포로 다시 싸였다.

미라를 쌀 때, 과학자의사들은 람세스 2세를 위해 고대 이집트 의식을 재현하여 나름 당시의 문화를 존중하였다고 한다. 미라를 싸는 의식은 매우 복잡하다. 신체 부위마다 사용하는 붕대가 다르고, 붕대가 바뀔 때마다 외워야 하는 주문과 싸는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국가원수 대접을 받고 수천년 전의 의식까지 고증하는 특급 대우를 받았으나, 정작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는 정반대의 대접을 받았다. 이렇게 곰팡이를 제거한 후 유해가 자국인 이집트에 귀환했을 땐 물건으로 취급됐다. 이집트 당국에선 람세스 2세의 미라를 건어물로 취급해 통관했다.[69]

[1] 이름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파라오들은 다섯 가지 이름을 가지기 때문이다.[2] 출처 미라 조사 결과에서 나온 키이다.[3] 즉위명의 일부분인 Usermaatre (User Maat Ra)그리스식으로 읽으면 오지만디아스가 된다.[4] 뜻은 신께서 영광을 내리셨다.[5] 24세로 추정된다.[6] 66년 추정.[7] 람세스의 집이라는 뜻이다. 페르라메수라고도 불린다.[8] 해당 거상은 기제에 세워질 그랜드 이집트 박물관에 세워져 전시될 예정이다.[9] 성년이 되어 직접 통치하기 바로 직전의 오묘한 시점에 죽었기에 학자들은 암살이라 보는 경우가 많다.[10] 이때 이미 왕위 계승자였던 람세스 2세 역시 동행했다.[11]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대를 이은 근친혼 중첩 등 여러 문제로 인해 건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12] 이 석비는 현재까지도 남아 있지만 풍화 작용 때문에 거의 내용을 알아볼 수 없다.[13] 참고로 평화 조약의 발단이 되었던 무르실리 3세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투실리 3세가 상식적으로 전 왕을 놔둘 리는 없었으니 아마 히타이트에게 암살당했거나 강제 송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4] 비판적인 학자들은, 카르나크 신전의 부조를 비롯한 평화 조약과 카데시 전투에 대한 윤색된 선전들이 군사 개혁을 비롯한 각종 번영의 싹을 잘라버렸고, 이후 이집트가 쇠퇴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평가한다. "거짓말은 자기 스스로가 제일 먼저 속는다."라는 말.[15] 다만 파라오가 그럴 가능성은 적고 람세스의 개인 무력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이라고 본다.[16] 람세스 이후에도 국경도시로서 중요시되었으나, 후대에 나일강의 지류가 바뀌면서 피람세스로 들어가는 수로가 말라붙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려졌다.[17] 아케나톤의 종교 개혁과 관련된 파라오에 대한 박해를 말한다.[18] 게다가 라메세움이 세워진 장소 자체가 나일강의 강물이 수시로 범람해 침수되는 장소라 입지가 좋지 않았다.[19] 고대 이집트에서는 밀가루를 반죽할 때 모래가 종종 섞여 들어갔고, 이로 인해 빵을 먹다가 모래를 씹어서 치아가 손상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또한 당시 왕족과 귀족들은 일반인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꿀이나 대추야자 같은 단 음식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충치에 걸리는 경우가 흔했다.[20] 미라의 붕대 속에는 귀중한 금제 부적이나 보물들이 곳곳에 넣어져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도굴꾼들은 붕대까지 풀어버리고 철저히 보물들을 털어갔다.[21] 이들의 묘지도 이미 오래 전에 도굴당했다.[22] 이 모든 내용이 람세스 2세를 싸고 있던 붕대에 기록되어 있었다.[23] 이런 기록 방식이, 적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이집트 관행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24] 이는 마소라 사본(서기 9세기)을 기준으로 한 연대이며, 70인 역본(기원전 3세기)을 기준으로 하면 기원전 1406년이 된다.[25] 이스라엘 족속(민족으로 언급된다.)은 황폐하여 뿌릴 씨앗이 전혀 없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26] 광야 생활 40년을 고려.[27] 홍해는 번역 오류이며,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로는 갈대바다를 의미한다.[28] 일단, 믹돌이 세티 1세의 치세 동안 만들어졌으며, 출애굽기에서 믹돌을 언급하기에 출애굽이 있었다면 적어도 세티 1세의 치세 이후였을 것이다.[29] 스본(zephon)은 "북쪽"을 뜻하는 셈어로, '바알스본'은 "북쪽의 바알"을 의미한다.[30] 메르넵타의 치세 동안 작성된 문서이다.[31] 갈대바다의 근처에 비하히롯의 잎과 녹지가 있었다고 한다.[32] 피람세스(라암셋)과 같은 도시라고 국내에는 잘못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둘 사이의 거리는 무려 2km 되며, 둘은 인접한 도시였을 뿐 완전히 다른 도시였다. 피람세스는 제19왕조의 람세스 1세 또는 세티 1세 때 처음 건축된 신도시였다.[33] 아흐모세 1세 ~ 호렘헤브[34] Bietak, Manfred. "The Aftermath of the Hyksos in Avaris." Culture Contacts and the Making of Cultures: Papers in Homage to Itamar Even Zohar, by Rakefet Sela-Sheffy and Gideon Toury, Tel Aviv University- Unit of Culture Research, 2011, pp.19-65.[35] 세트는 셈족에 의해 그들의 폭풍의 신 바알-하닷과 동일시되었다.[36] Bietak, Manfred (2015). "On the Historicity of the Exodus: What Egyptology Today Can Contribute to Assessing the Biblical Account of the Sojourn in Egypt". In Levy, Thomas E.; Schneider, Thomas; Propp, William H. C. (eds.). Israel's Exodus in Transdisciplinary Perspective: Text, Archaeology, Culture, and Geoscience. Springer. pp. 17–37. ISBN 978-3-319-04768-3.[37] Manfred Bietak, Nicola Math, and Vera Müller, “Report on the excavations of a Hyksos Palace of Tell el Dabᶜa/Avaris.” Ägypten und Levante 22/23 (2013): 15-35.[38] 제18왕조 때(아멘호테프 2세)는 이집트 귀족의 왕궁 하나 정도만 버려졌지만 도시 전체 규모에 비교하면 1/10도 안된다.[39] Marc van de Mieroop, "A History of Ancient Egypt", 2021, p. 125.[40] 아바리스 도시 전체는 제19왕조 동안에 버려졌지만, 도시의 항구만은 지속적으로 유지되다가 제20왕조 이후 피람세스와 함께 버려졌다. 참고로, 아바리스로부터 2km 정도 떨어진 피람세스(라암셋)는 제20왕조 때까지 사용되다가 나일강의 물길이 바뀌어서 버려지게 되었다.[41] 상단에 있는 람세스의 카르투슈에서도 이 문자를 찾을 수 있다. 좌측 카르투슈 우측 하단의 세 줄 문자.[42] 실제로 이집트 비문에 나오는 람세스의 장남은 장군으로 출정까지 했을 정도로 장성했으나 갑자기 죽은 것으로 나온다.[43] 람세스 사후 왕들이 죄다 빌빌거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44] 성서 학자들은 힉소스와 관련해서는 출애굽기 보다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에 주목하여, 히브리인 요셉이 이집트의 재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봉사한 왕조가 같은 아시아 출신인 힉소스 왕조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위에 나온 것처럼 힉소스 왕 중에 '야쿱-헤르'라는 왕이 있는데 야쿱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매우 비슷한 이름이기도 하다.[45] Finkelstein, Israel; Silberman, Neil Asher (2002). The Bible Unearthed. Free Press. ISBN 978-0684869124. p. 68-69.[46] The Bible Unearthed, p. 62–63.[47] 참고로, 핑켈슈타인은 출애굽 전승은 기원전 7-6세기 사이 이집트와 유다 왕국의 관계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뼈대가 되는 배경은 네카우 2세(성서의 느고 왕)의 치세 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48] [49] 람세스 2세의 아버지 세티 1세가 평생 동안 어머니 튜야 한 사람을 정비로 둔 것과는 대조적.[50] 죽은 뒤에도 이집트 민담 속에 마법사 세트네-카엠와세트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재미있게도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제 꾀에 제가 넘어가 망한다.[51] 사실 고대 이집트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오히려 람세스 2세 본인의 경우가 엄청나게 특이한 거다.[52] 1위는 재위 94년, 100살의 나이로 죽은 페피 2세(BC 2284~2184). 실제로 장수한 왕들 참조.[53] 제22, 23왕조. 기원전 10세기 ~ 8세기, 9세기 ~ 8세기[54] 제25왕조. 기원전 8세기 ~ 7세기[55] 사실 여성 파라오가 드물었고, 더욱이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고대 이집트와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인물이다.[56] 훗날 자신의 석상을 선왕 세티의 것보다 크게 지은 장면을 통해 최소한 선왕의 유지를 이을 능력은 있음을 보여준다.[57] 다만 이쪽은 역사적, 시대적, 배경 고증에서 평가가 나쁜 편이다.[58] 그나마 낮은 난이도에서 빈사상태라는 거지 고난도로 올라가면 흉갑을 별의 조각까지 써서 풀업해도 그냥 즉사기가 되어버린다.[59] 아버지의 이름 '세티'도 세트 신에게서 딴 이름이다.[60] 호루스와 세트 모두 파라오의 권능을 상징하는 신들이다.[61]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메르넵타도 사후 미라를 만들 때 비슷한 굴욕을 당했다. 미이라를 만들던 중 그의 성기가 훼손되어 고환이 빠져 나오자 다시 집어넣고 대충 때워놓은 흔적이 있다.[62] 이미 20왕조 때 그의 무덤에서 금박을 벗기고 보물을 훔친 도굴꾼들이 체포된 기록이 있을 정도다.[63] 물론 당시 기준이다.[64] 돌, 나무, 석고 등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조각으로 무덤에 부장하여 사후에도 노예로 부릴 수 있도록 한 부장품이다. 야만적이었던 순장에서 발전한 풍습이었다.[65] 존재감이 없던 투탕카멘조차 무덤에서 엄청난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람세스의 거대한 무덤에는 얼마나 많은 유물들이 매장되어 있었을 지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66] 고대 이집트에서는 선대 파라오들의 무덤 도굴이 너무나 빈번해서 선대 파라오들의 무덤 유지보수가 큰 국무였다. 그리고 선대 파라오들의 무덤을 보수할 때, 다른 파라오들의 미라도 재수습해서 재매장해줬다. 생뚱맞은 무덤에서 신왕조 시대의 파라오 미라 다수가 발견되는 이유인 것이다.[67] 국내 번역명은 '왼손이 만든 역사'[68] 물론 수천 년 전에 사망한 람세스 2세에게 그와 관련된 관계자가 있을 리가 없다.[69] 이 역시 '유해 및 유골' 통관의 복잡성에 기인한 행정편의적 조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해외반출에 국제법과 외국법이 적용되었던 것과는 달리 반입 이후에는 자국 관세법을 국내실정에 따라 적용하면 되므로 이집트 당국 입장에서도 아예 물건으로 해석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만일 '유해' 나 '유골' 항목을 엄밀히 적용했다면 국내법에 대해서도 국제법의 한계와 비슷한 딜레마를 한번 더 거친 뒤 수천년 전 미라의 사망진단서와 방부처리증명서 등등을 발급해둬야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