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12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2세 Ptolemy XII Auletes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프톨레마이오스 12세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1] | |
출생 | 기원전 117년경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키프로스 | ||
사망 | 기원전 51년 3월 22일 이전 (향년 66세)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1차 | |
기원전 80년 ~ 기원전 58년[2] (약 22년) | ||
이집트 파라오 2차 | ||
기원전 55년 ~ 기원전 51년 (약 4년) | ||
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11세 베레니케 3세 | |
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클레오파트라 7세 | |
부모 |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9세 | |
배우자 | 클레오파트라 5세 | |
자녀 | 베레니케 4세, 클레오파트라 7세, 아르시노에 4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프톨레마이오스 14세 | |
종교 | 이집트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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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12대 파라오. 집권 이래 무능한 통치로 일관하다가 딸 베레니케 4세에게 축출되어 로마로 망명했다. 이후 로마의 지원을 토대로 이집트에 복귀하여 베레니케 4세를 처형한 뒤 4년간 이집트를 다스렸다.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버지다.2. 생애
아버지가 프톨레마이오스 9세라고 전해지나, 어머니의 신원은 불분명하다. 키케로와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는 적법한 아들이 전혀 없었으며, 그는 사생아였다고 한다. 학계는 이를 토대로 그의 어머니가 첩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의 어머니는 클레오파트라 4세이며, 클레오파트라 3세가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압박해 클레오파트라 4세와 이혼하게 한 뒤 그를 사생아 취급하게 했을 거라 주장한다. 그는 기원전 109년에 프톨레마이오스 9세로부터 알렉산드로스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07년 클레오파트라 3세가 차남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함께 정변을 일으켰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로마로 달아났다. 이때 그는 아버지와 함께 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102년 클레오파트라 3세에 의해 코스 섬으로 보내졌다.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6세가 코스 섬에 상륙했을 때, 그는 모종의 이유로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를 폰토스로 끌고 가서 인질로 삼았다. 이후 조용히 지내던 그는 기원전 80년 베레니케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잇따라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진 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초청을 받고 이집트로 귀환하여 파라오가 되었다. 당시 그에게는 형제인 프톨레마이오스(일명 키프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형제를 키프로스의 왕으로 세워서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즉위 직후 친척 중 한 명인 클레오파트라 5세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로 삼았다. 그는 클레오파트라 5세와의 사이에서 베레니케 4세, 클레오파트라 7세를 낳았다. 기원전 69년 8월 이후엔 클레오파트라 5세의 기록이 사라졌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때 이혼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태어난 아르시노에 4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어머니의 신원은 불확실하다.
기원전 88년 키프로스 공략전을 치르던 중 전사하기 전,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로마에 막대한 자금을 빌리면서 남은 상속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기가 죽으면 로마에게 이집트를 맡기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로마 공화국은 이를 빌미삼아 이집트에 내정간섭하기 시작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어떻게든 로마에 잘 보이려고 친로마 정책을 꾸준히 지속했지만, 로마의 간섭은 갈수록 심해졌다. 급기야 기원전 65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이집트를 아예 합병하자고 제안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 정치가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찔러서 이를 간신히 저지했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를 제압하고 동방 영토를 재편성하고 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그에게 황금 왕관을 보냈으며 8,000명의 기병에 대한 급여와 유지비를 제공했다. 그러면서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반란을 진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렇게 막대한 자금을 로마에 바치다보니 재정이 바닥날 지경이 되자, 그는 세금 인상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 했다. 그러자 헤라클레오폴리스의 왕실 토지 농부들이 불만을 품고 집단 파업을 일으켰다. 한편, 그는 가이우스 라비리우스 포스투무스 등 로마의 채권자들로부터 자금을 빌렸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경제적으로도 로마에 예속되었다. 기원전 60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로 가서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접근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이집트의 연간 총수입과 맞먹는 6,000 달란트를 지불하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고, 두 사람은 이를 수락하여 기원전 59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로마인의 친구로 추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기원전 5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키프로스를 로마의 속주로 삼자는 법안을 원로원에 상정해 통과시켰다. 이보다 앞서, 풀케르는 킬리키아 해적들에게 붙들렸을 때 키프로스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몸값을 지불하길 거부했고, 풀케르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 그는 키프로스를 로마의 속주로 삼는 것으로 복수했다. 로마군이 키프로스에 상륙했을 때, 키프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자결했다. 형제가 비참하게 죽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가 두려워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막대한 세금을 강제 징수해서 로마에 그대로 바치고, 로마가 키프로스를 독단적으로 빼앗아갔는데도 되찾으려 하지도 않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다. 결국 그들은 봉기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 베레니케 4세와 클레오파트라 6세를 공동 파라오로 추대했다. 클레오파트라 6세는 1년만에 사망했고, 베레니케 4세가 단독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는 로마로 망명한 뒤 폼페이우스에게 의탁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 그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채권자들이 그를 복위하지 않으면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강한 압력을 가하자, 결국 기원전 57년 복위해주기로 결의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집트인들은 무능한 파라오의 귀환을 몹시 싫어해 100명의 사절을 파견하여 결의를 취소해달라고 청하려 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사절단 지도자인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를 독살했다. 여기에 채권자들로부터 빌린 돈을 남은 사절들에게 뇌물로 찔러줘서 그들이 자신에 대한 의견을 바꾸게 하였다.
기원전 55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폼페이우스의 부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은화 10,000 달란트를 줄 테니 군대를 동원하여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가비니우스는 폼페이우스의 허락을 받고 유대 지방에 주둔 중이던 2,000명의 로마 군단병과 500명의 속주 보조병을 이끌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이집트로 호송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알렉산드리아로 입성했고, 이집트 수비대는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항복했다. 그는 권력을 되찾은 뒤 딸 베레니케 4세와 그녀의 지지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후 채권자들이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지만, 당시 이집트 재정은 베레니케 4세의 지나친 사치로 인해 거의 파탄나 있어서 빚을 단시일에 갚을 수 없었다. 그는 고심 끝에 가장 많은 돈을 빌려준 가이우스 라비리우스 포스투무스를 디오케테스(dioiketes: 재무장관)로 임명해서 민중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게 했다. 그러나 포스투무스가 지나친 착취를 일삼는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했고, 파라오는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포스투무스를 일단 가두었다가 나중에 몰래 풀어줬다. 한편, 그는 자금을 마련하고자 주화의 가치를 낮추기로 했다. 그의 통치 말기에 이집트 주화의 가치는 그의 통치가 시작되었을 때의 가치의 50% 이하로 떨어졌다.
기원전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딸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해야 하며, 로마가 이를 보증해달라고 부탁했다. 폼페이우스는 이 유언장을 승인하여 두 사람이 서로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로 집권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두 남매는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고자 암투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