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20왕조 제10대 파라오 람세스 11세 Ramesses XI | ||
콘수 신전에 새겨진 람세스 11세의 부조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람세스 11세(Ramesses XI)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1107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107년 ~ 기원전 1078/1077년 (약 30년) | ||
전임자 | 람세스 10세 | |
후임자 | 스멘데스 1세 | |
부모 | 아버지 : 람세스 10세 | |
배우자 | 텐타문 | |
무덤 | 불명[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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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20왕조의 10대이자 마지막 파라오. 한때 고대 이집트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왕국은 람세스 11세를 끝으로 멸망한다. 신왕국 멸망 후에는 혼란기인 제3중간기가 시작된다.2. 통치
람세스 11세는 람세스 10세의 아들로 추정되지만 확실치는 않다. 제20왕조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를 버텨냈지만 국력은 쇠약해졌고, 파라오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상 기후로 인한 곡물 수확량 감소로 빈발하는 기근, 사회 불안정, 리비아와 누비아인들의 준동같은 사태를 맞았고, 여기에 람세스 6세때부터는 룩소르의 아문 대신관의 권력이 갈수록 커지면서 파라오와 맞먹는 수준이 되었다. 람세스 11세 생전에 중부와 상이집트는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 장악하고 사실상 독자 정권을 수립했고, 파라오가 있는 하이집트마저도 아문 대신관의 아들로 추정하는 훗날 제21왕조를 개창하는 스멘데스의 손에 있었다.람세스 11세는 30년 넘게 왕위에 앉아있었다. 이는 제20왕조 내에서도 람세스 3세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긴 재위기간이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람세스 11세가 딱히 남긴 업적은 없다. 그는 왕궁을 하이집트의 타니스 지방으로 옮겼고, 결국 기원전 1078년 즈음에 그대로 사망했다. 람세스 11세가 죽자 스멘데스가 그의 장례식을 집전했고, 선대 파라오의 장례를 치른 자가 새로운 파라오로 즉위하는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제21왕조의 새로운 파라오로 즉위하니 이를 곧 이집트 제3중간기의 시작으로 본다. 참고로 스멘데스의 영향력 역시 하이집트 일대에 밖에 이르지 못했으며, 중부와 상이집트는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 장악하고 사실상 파라오처럼 다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1왕조가 조각나지 않은 것은 하이집트의 파라오와 상이집트의 아문 대신관이 혈연으로 이어진 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2]
그는 왕가의 계곡 KV4에 자신의 미라가 묻히기를 원했다. 그러나 람세스 11세가 실제로 KV4 무덤에 묻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은 지어지다가 중간에 중단되었는데, 아마도 왕가의 계곡이 남쪽의 테베와 지나치게 가까워 도굴이나 시체 훼손을 우려한 신관들이 어쩔 수 없이 멤피스 인근에 따로 무덤을 새로 만들어 안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KV4 무덤은 관의 매장실이 지하 10m보다 더 아래 깊이에 있는 등 굉장히 꽁꽁 숨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왕들의 무덤이 연이어 도굴당하거나 털렸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참고로 람세스 11세의 무덤은 건설이 중단된 후 그대로 버려져서 제21왕조의 테베 아문 대신관인 피네젬 1세가 자신의 무덤으로 활용하려고 시도했으나 포기한 것으로 보이며,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의 무덤에서 꺼낸 부장품을 재활용하는 보물창고로 쓰였고 중세에는 콥트 교회의 수도자들이 은거하는 동굴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의 미라는 아직도 발견되지 못했다.
[1] 미완성된 무덤이 왕가의 계곡에 있으나, 그의 미라가 실제로 매장된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2] 아예 리비아인 출신인 대 오소르콘,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시아문을 제외하면 제21왕조의 파라오들은 당대 테베의 아문 대신관의 아들이거나 그 자식이었다. 스멘데스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불명이지만 그의 어머니인 흐레레가 아문-레 신의 하렘장을 맡고 있었기에 아문 대신관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