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10대 파라오 베레니케 3세 Berenice II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베레니케 3세 Βερενίκη | Berenice | |
출생 | 기원전 115/114년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사망 | 기원전 80년 4월 (향년 34-35세)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1차 | |
기원전 101년 ~ 기원전 88년[1] (약 23년) | ||
이집트 파라오 2차 | ||
기원전 81년 ~ 기원전 80년 (약 1년) | ||
부모 |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9세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 |
배우자 | 프톨레마이오스 10세 프톨레마이오스 11세 | |
자녀 | 클레오파트라 5세 | |
종교 | 이집트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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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10대 파라오. 기원전 101년부터 기원전 88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렸고,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사망한 뒤 1년 간 이집트를 통치하다가 프톨레마이오스 11세와 결혼했으나 19일 만에 피살당했다.2. 생애
기원전 115년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딸로 출생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궁정은 정치적 암투로 점철되고 있었다. 기원전 116년 6월 28일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붕어했을 때, 당시 궁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9세보다는 차남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선호했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유언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파라오로 옹립하라고 했다고 주장하며 일을 진행시키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세우라고 요구하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공동 파라오로 선임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키프로스 총독으로 선임했다.하지만 클레오파트라 3세는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아내 클레오파트라 4세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하라고 강요했다. 당시 클레오파트라 4세는 남편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와 마찰을 벌였던 반면,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대체로 순종적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어머니의 압박에 못 이겨 클레오파트라 4세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새 아내로 들였고, 클레오파트라 4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9세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간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자, 클레오파트라 3세는 그를 축출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결국 기원전 107년 키프로스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이집트로 잠입한 뒤 파라오를 칭했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로마로 달아났다가 키프로스를 장악한 뒤 어머니와 동생을 상대로 맞섰다.
기원전 101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사사건건 간섭하는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에 반감을 품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빠져나온 뒤 군대를 끌어모아 어머니에 대항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두 아들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화해를 시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기꺼이 응하겠다며 기원전 101년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왔지만, 도착한 즉시 어머니를 체포하여 파라오 직위에서 폐위시킨 뒤 처형했다. 이후 기원전 101년 10월 31일 이전에 베레니케 3세와 결혼했다. 당시 그녀는 매사에 겸손한 모습을 보였고 그리스와 이집트 신 모두를 경건하게 모셨기에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두 사람은 테오이 필라델포이(Theoi Philadelphoi: 형제를 사랑하는 신들)로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숭배 의식에 함께 들어갔다.
기원전 88년 5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10세에 반기를 들었다. 유대인을 지나치게 후대한 것에 그리스계 시민들이 반발했다는 설, 알렉산드로스 3세의 황금 석관을 녹이고 유리 석관으로 대체한 것에 민중이 반발했다는 설이 제기되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군대를 투입해 폭동을 진압하려 했지만, 군대마저 민중의 편을 들자 아내 베레니케 3세와 함께 로마로 망명했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키프로스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파라오로 추대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이집트를 탈환하기 위해 로마 공화국에 막대한 자금을 빌리면서, 자신이 후계자없이 사망할 경우 이집트를 로마 공화국에 맡기겠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이후 해군을 소집한 뒤 키프로스를 침공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베레니케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사망한 뒤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가 기원전 81년 이전에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이집트로 돌아갔다.
기원전 81년 8월 5일,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딸 베레니케 3세를 공동 파라오로 승격시켰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베레니케 3세가 단독 파라오로 집권했다. 그녀는 6개월 간 나라를 나름대로 잘 다스렸지만, 로마의 집권자 술라가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유언장을 빌미삼아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를 공동 파라오로 세우라고 요구했다. 베레니케 3세는 요구를 받아들여 프톨레마이오스 11세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19일 후 베레니케 3세를 살해했다가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피살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사생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시민들의 추대로 파라오에 즉위했다.
[1]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협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