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5 18:44:17

사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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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제5왕조 2대 파라오
사후레
Sahure
파일:King_Sahure_and_a_Nome_God_MET_DP-1691-04.jpg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갤러리 103에 있는 사후레의 회암[1] 조각상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사후레(Sahure)[2]
부왕 우세르카프
선대 우세르카프
후대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묘지 사후레의 피라미드
왕비 메레트네브티(Meretnebty)
자녀 라네페르(Ranefer)♂
네체리렌레(Netjerirenre)♂[3]
호렘사프(Horemsaf)♂
라엠사프(Raemsaf)♂
카카레(Khakare)♂
네반크레(Nebankhre)♂
재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25세기 초반
재위기간 13년 5개월 12일
1. 개요2. 가족3. 통치4. 태양 사원5. 피라미드 단지6.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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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후레는 이집트 고왕국 제5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로 약 13년간 통치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제5왕조의 정치적, 문화적 절정기를 나타낸다. 사후레는 레바논 해안 지역과 중요한 무역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여러 해상 원정을 통해 여러 진귀한 물품들을 확보했다. 또한 이집트 해군을 발전시켜 통해 푼트(Punt) 지역으로의 최초 원정을 단행하여 많은 몰약, 공작석, 호박금(electrum)을 가져왔다. 또한 시나이에 위치한 터키석구리 광산으로 원정을 보내고, 서부에 위치한 리비아 지역에 대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사후레는 아부시르에 피라미드를 건설했으며, 이곳의 장례 신전의 장식과 건축은 매우 정교했다. 그의 피라미드 복합 단지는 고대 왕국 시대 동안 최고 수준의 예술 형태를 나타내며, 이후 파라오들과 왕비들의 무덤에서 모방되었다. 또한, 사후레는 "의 들판"이라는 이름을 가진 태양 신전을 건설했으나, 아직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후레의 장례 숭배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이집트 고왕국 말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이집트 중왕국 시대에는 왕실 조상으로 숭배되었다.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는 사후레가 여신 세크메트의 한 형태로 여겨졌고, 이 독특한 숭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2. 가족

2000년대 초 미로슬라프 베르너(Miroslav Verner)와 타렉 엘-아와디(Tarek El-Awady)의 지휘 아래 아부시르에 있는 사후레의 피라미드를 발굴한 결과, 제5왕조 초반 왕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피라미드 단지의 계곡 신전과 장례 신전을 연결하는 제방에서 발견된 부조에 따르면, 사후레의 어머니는 네페르헤테페스 2세 왕비로 밝혀졌다. 그녀는 파라오 우세르카프의 아내였으며, 그의 피라미드 옆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두고 "왕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지녔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우세르카프가 사후레의 아버지일 가능성을 높이며, 사카라의 우세르카프 장례 신전에서 발견된 사후레의 카르투슈는 사후레가 아버지가 만들기 시작한 구조물을 완성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는 사후레가 켄트카우스 1세 왕비의 아들이며, 그녀가 제4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솁세스카프의 아내이고 우세르카프나 네페리르카레의 형제라는 이전 이론을 반박한다.

사후레의 후임 파라오는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인 것으로 밝혀졌다. 2005년까지 그는 사후레의 형제로 여겨졌으나, 그 해 미로슬라프 베르너와 타렉 엘-아와디가 사후레의 피라미드 제방에서 발견한 부조에서 그의 아들 라네페르가 네페리르카레 카카이로서 왕위를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문구가 발견되었다. 라네페르네체리렌레는 둘 다 "왕의 장남" 칭호를 지녔으며, 쌍둥이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네체리렌레는 나중에 솁세스카레라는 이름으로 짧은 기간 동안 왕위를 차지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부조에는 사후레의 왕비이자 라네페르와 네체리렌레의 어머니인 메레트넵티 왕비도 묘사되어 있다. 사후레의 장례 신전 부조에는 다른 세 아들, 카카레, 호렘사프, 네반크레도 등장하지만, 이들의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다. 네체리렌레는 종교적 직함을 지니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대신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사후레의 시대에는 왕자들이 대신직에서 배제되는 과정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3. 통치

사후레의 통치 시기는 역사 기록, 동시대 유물 및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잘 확립되어 있다. 그는 우세르카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 계승 순서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 치세에 마네토가 쓴 《아이깁티아카(Aegyptiaca)》[4]에서도 언급된다. 《아이깁티아카》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나,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와 유세비우스의 후대 저작을 통해 알려져 있다. 비잔틴 학자 조지 신켈로스에 따르면, 아프리카누스는 《아이깁티아카》에서 제5왕조 초기에 "Usercherês → Sephrês → Nefercherês"로 계승되었다고 언급했다. 이 이름들은 각각 우세르카프, 사후레, 네페리르카레의 헬레니즘화된 이름으로 여겨진다. 마네토의 재구성은 아비도스 역대 파라오 목록과 사카라 석판에도 일치하며, 이 목록들은 각각 세티 1세람세스 2세 치세에 작성되었다.

사후레의 통치 기간은 19왕조 초기 람세스 시대에 작성된 토리노 파피루스에 따르면 12년 5개월 12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동시대 제5왕조 시기에 만들어진 팔레르모 석에는 그의 2년, 3년, 5년, 6년 및 마지막 13년 또는 14년의 통치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사망일은 셰무 1월 28일[5]로 명시되어 있다. 이 정보를 종합하면, 사후레의 통치 기간은 13년 5개월 12일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토리노 파피루스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다. 또한 이 기록들은 마네토의 《아이깁티아카》에 언급된 13년과도 가깝다.

사후레는 투트모세 3세 치세에 작성된 카르나크 역대 파라오 목록의 세 번째 항목과 람세스 2세 치세에 작성된 사카라 석판의 26번째 항목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 자료는 그의 통치 기간을 언급하지 않는다. 사후레의 통치 절대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를 기원전 25세기 전반으로 보고 있다.

사후레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외국과의 접촉이 많았으며, 주로 경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의 피라미드 단지의 부조에는 레바논으로 향한 해상 원정대가 귀환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배에는 귀중한 레바논시다와 "아시아인"이라 불리는 성인과 어린이들이 탑승해 있었다. 이들은 노예나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부조는 통역사가 배에 타고 있어 외국과의 무역을 촉진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레반트 해안에서 가져온시리아불곰과 12개의 시리아산 붉은 항아리가 공물로 보인다.

사후레의 통치 동안 비블로스와의 무역도 이루어졌으며, 바알라트-게발 신전에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설화 석호가 발견되었다. 이 신전의 네 번째 층의 설계는 사후레의 계곡 신전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제5왕조 시기 레반트와의 무역을 뒷받침하는 추가 증거로, 레바논에서 이 왕조 파라오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석제 용기가 발견되었다. 고고학자 그레고리 멈포드(Gregory Mumford)는 사후레가 당시 국제 관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왕이며, 그의 통치 기간에 비례하여 시나이에서 가장 많은 비문이 새겨졌다고 언급했다.

사후레는 그의 집권 마지막 해에 소말리아 해안으로 여겨지는 푼트(Punt) 지역으로 첫 원정을 보냈다. 이 원정대는 팔레르모 석에 기록되어 있으며, 80,000개의 몰약, 공작석, 6000개의 호박금, 2600개 또는 23,020개의 흑단 심재를 가져왔다. 또한, 사후레는 시나이에 있는 와디 마가레(Wadi Maghareh)와 와디 카리트(Wadi Kharit)의 구리터키석 광산으로 원정을 보내 6000개 이상의 터키석을 가져왔으며, 이 원정은 두 개의 부조로 기록되었다. 또한 사후레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부심벨 근처의 섬록암 채석장을 지속적으로 이용했다.

사후레의 군사 활동은 주로 그의 장례 복합 단지에 있는 부조에서 알려져 있다. 그는 북서부 사막에 위치한 티제메후라고 불리던 리비아인들에 대한 원정을 수행했으며, 많은 가축을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이 부조에는 사후레가 지역 족장들을 무찌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나, 이러한 묘사들의 역사적 진실성은 의문이다. 또한 이 장면은 후대의 파라오들도 즐겨 사용했으며, 사후레가 더 오래전에 쓰인 장면을 복제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후레는 서부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감독관들을 임명했으며, 이는 이집트-리비아간 국경을 관리하기 위한 중요한 행정적 결정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장례 신전에 에피루스 해안에서 온 해적들이 나일 델타를 습격한 최초의 기록이 있다.

사후레는 주변 땅과 부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여러 부조를 통해 표현했다. 부조에는 신 애쉬(Ash)[6]가 파라오에게 "이 리비아 땅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 "외국 땅의 모든 자원과 이집트에 적대적인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 주겠다", "서쪽과 동쪽의 모든 외국 땅과 모든 이운티족과 몬티우족들을 당신에게 주겠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사후레의 종교적 활동 중 대부분은 팔레르모 석에 기록된 활동들이다. "첫 여행의 해"에 사후레는 엘레판티네(Elephantine) 요새를 방문하여 누비아 족장의 항복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섯 개의 파라오 동상의 입을 여는 의식을 수행했다.[7] 통치 5년 차에 사후레는 헬리오폴리스에서 신성한 배를 만들고, 200명의 사제를 임명했으며, , 하토르, 네크베트(Nekhbet)[8], 와제트에게 매일 빵과 맥주를 바치는 양을 정했다. 또한, 1에서 204 아루라(0.7에서 거의 140 에이커)에 이르는 땅을 신전에게 기부했다. 하이집트에 관한 기록에는 삼각주 지역의 아트리비스[9] 도시에서의 최초 언급이 있다.

사후레는 "효과적인 일을 하는 왕"이라는 의미의 타이틀을 사용한 최초의 왕으로, 이는 그가 개인적으로 마아트의 존재와 지속을 보장하기 위한 종교 활동을 수행했음을 나타낸다. 이 타이틀은 1500년 후 헤리호르[10] 시대까지 사용되었다. 또한, 사후레의 통치 기간 동안 "송아지를 모는 의식"이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오시리스 신화와 관련된 중요한 의식으로 발전했다.

사후레는 그의 어머니 네페르헤테페스 2세의 장례 복합 단지를 재건설했으며, 우세르카프가 사카라에 건설한 그녀의 신전 입구에 현관을 추가하여 입구가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를 향하지 않도록 했다.

사후레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 해군이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푼트와 비블로스 원정은 해상 해군의 존재를 보여주며, 그의 장례 복합 단지의 부조는 이집트에서 해양 선박을 묘사한 최초의 사례로 여겨진다. 일부 배는 100큐빗[11] 정도의 길이였을 것이다. 과거 학자들은 사후레가 이집트 해군을 설립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과장된 것으로 현재는 인식되고 있다. 이유는 우세르카프의 신전 부조와 제3왕조 초기의 고대 항구 와디 알자르프(Wadi al-Jarf)[12]의 존재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후레는 지중해를 넘어 시리아로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 해군을 사용한 최초의 파라오로 알려져 있다.

사후레의 장례 복합 단지에 새겨진 장면들은 군사 및 의식 훈련을 위한 경주용 배가 건조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배에서의 특정 밧줄을 사용하였는데, 특히 호깅 트러스의 사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부조는 배의 건조에 대한 정확한 추정치를 제공하며, 예를 들어 해양 선박의 중앙부 갑판 높이가 1미터였고, 당시 사용된 돛대는 역 Y자 형태였음을 나타낸다. 또한, 장식된 돛을 단 배의 선미에 서 있는 파라오와, 경주 중 파도 패턴에 따라 노를 젓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후레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고위 관리들이 그들의 무덤과 왕의 장례 사원 장식에서 알려졌다. 사후레의 주치의이자 역사상 최초의 비뇨의학과 의사로 알려진 니앙크세크메트(Niankhsekhmet's)는 왕에게 자신의 무덤에 가짜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으며, 사후레는 이를 허락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후레는 투라 지역에서 채취한 석회암으로 가짜문을 만들었으며, 현관을 파란색으로 장식하고, 작업을 매일 점검했다. 또한 사후레는 니앙크세크메트에게 장수를 기원하며 축복을 내렸다고 한다.

궁전의 감독관이자 파라오의 가수였던 쿠푸앙크(Khufuankh)도 유사한 일화가 남아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불명이다. 다른 관리로는 파라오의 왕관 관리인이자 이발사 총 감독관이였던 헤텝카(Hetepka), 우세르카프 시기의 제사장이자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시기때는 재상이었던 페헤네우카이(Pehenewkai), 사후레의 어머니인 네페르헤테페스의 장례 제사장인 페르센(Persen), 사후레의 제사장이자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시기의 재상이었던 와시프타(Washptah), 그리고 니우세르레 이니 시기 때 재상으로 승진한 프타솁세스(Ptahshepses)의 기록이 남아있다.

사후레 시기의 재상으로는 카프레의 아들이자 우세르카프와 사후레 시기 모두 재상을 맡았던 세켐카레와 사후레의 재상으로 왕의 장례 사원에서 확인된 워르바우바(Werbauba)가 있다.

사후레는 왕족이 아닌 인물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우세르카프의 정책을 이어갔다. 이는 재상 직책에서 두드러지며, 제4왕조 중반부터 제5왕조 초기까지 "왕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가진 왕족이 독점적으로 재상을 맡았으나, 사후레 시대부터는 왕족이 재상직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왕권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측된다. 사후레 통치 초기에 왕자 출신 재상 세켐카레가 재직했지만, 그의 후임 워르바우바는 비왕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변화로 인해 국가 행정은 비왕족 인물을 더 많이 포함하게 되었다.

사후레 통치 기간 동안 개인 무덤과 관련된 건축 및 예술 혁신도 나타났다. 페르센의 무덤에서 처음 발견된 마감재와 처마 장식이 예로, 이는 이후 일반적인 양식이 되었다. 또 다른 혁신으로는 니앙크세크메트의 무덤에서 처음 발견된 일곱개의 성유와 같은 특이한 제물의 묘사가 있다. 제물의 목록도 이 시기나 그 직전에 왕족의 무덤에서 등장하여 비왕족 고위 관리의 무덤으로 퍼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중 첫 사례는 사후레 시대의 세솀네페르 1세(Seshemnefer I)의 무덤이다.

4. 태양 사원

사후레는 제5왕조의 두 번째 태양신 에게 헌정된 신전의 건설을 시작했다. 이 신전의 이름은 "라의 들판"을 의미하는 세케트레(Sekhetre)로 알려져 있으며, 팔레르모 석의 비문과 24명의 행정 관리들의 무덤에서 언급되었다. 이 신전의 석회암 벽돌의 일부는 사후레의 네 번째 후계자인 니우세르레 이니의 장례 사원 벽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니우세르레가 사후레의 신전을 해체하여 건축 자재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3]

최근 팔레르모 석의 새로운 분석 결과, 신전의 건축과 기부 목록을 언급하는 추가 비문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세케트레가 우세르카프의 태양 신전인 네켄레와 별개의 존재였음을 확립했지만, 신전이 어쩌다 버려졌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세케트레의 이름의 변형 버전에서 일부에서는 오벨리스크가 없는 점은 신전이 사후레의 치세 후에 오벨리스크를 추가했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우세르카프는 아부시르에 태양신전을 처음 건설한 파라오였다. 이 신전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라의 요새"라는 의미의 네켄레(Nekhenre)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사망 시점에는 미완성이었다. 이후 최소한 네 번의 건축 단계에 걸쳐 공사가 계속되었으며, 첫 번째 단계는 사후레 치세 동안,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와 니우세르레 이니 치세 동안 진행되었다.

5. 피라미드 단지

파일:1280px-Pyramide_de_Sahourê_Abousir.jpg
이름카바 사후레(Khaba Sahure)
사후레의 영혼이 나타나다
높이47~48m
경사50°11'40''~50°30'

사후레는 자신의 무덤과 장례 제사를 위해 카바 사후레(Khaba Sahura)라는 피라미드 단지를 건설했다. 이는 "사후레의 바(영혼)가 나타나다" 또는 "사후레의 영혼이 영광스럽게 나타나다"로 번역된다. 사후레의 장례 단지에서 일한 건축가와 장인들은 피라미드와 장례 신전을 연결하는 길 옆에 위치한 폐쇄된 피라미드 마을에 거주했다. 이 마을은 이후 니우세르레 치세에 번영했으며 제1중간기에도 여전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후레의 피라미드는 크기와 부피, 그리고 조악한 건축 기법을 사용한 점에서 피라미드 건축의 쇠퇴를 상징한다. 그러나 주변 건물들에 사용된 돌의 품질과 다양성은 증가했고, 장례 신전은 그 당시까지 지어진 것 중 가장 정교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는 다양한 건축적 혁신을 포함하여, 사후레의 복합 단지 전체 구조는 이후 6왕조 말까지 300년 동안 모든 장례 복합 단지의 밑바탕으로 사용되었다. 장례 복합 단지의 벽을 장식한 다채로운 색상의 부조는 고왕국 시대 전체에서 최고 수준의 기술과 풍부한 구상을 보여준다.

사후레는 자신의 피라미드 단지를 아부시르에 건설하기로 선택하면서, 이전까지 왕실 묘지였던 사카라와 기제를 버렸다. 사후레의 이러한 결정은 우세르카프의 태양 신전이 아부시르에 존재했기 때문일 수 있으며, 이는 사후레가 우세르카프의 아들이라는 가설을 지지한다. 사후레의 선택에 따라 아부시르는 5왕조 초기의 주요 네크로폴리스가 되었고, 이후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네페레프레, 니우세르레 이니, 그리고 아마도 솁세스카레가 그곳에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왕족의 많은 작은 무덤들이 아부시르에 지어졌으나, 일부 고위 인사들은 여전히 기제나 사카라에 매장되기를 선택했다.

사후레의 장례 신전은 약 10,000m²의 정교한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장식은 사후레의 생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235m 길이의 둑길의 벽도 다채로운 저부조로 덮여 있었다. 미로슬라프 바르타(Miroslav Bárta)는 이 부조를 기원전 3천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부조 중에 가장 큰 컬렉션으로 묘사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영안실 단지를 장식한 부조의 많은 조각들은 매우 높은 품질을 자랑하며, 이전 영안실 사원보다 훨씬 정교하다. 이중에는 사후레가 궁전에서 몰약나무를 키우는 장면, 시리아불곰을 묘사한 부조, 피라미드 단지 완공을 기념하는 의식을 보여주는 부조가 있다. 부조는 동물, 예를 들어 고슴도치뛰는쥐같은 동물들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영안실, 둑길 및 계곡 사원의 많은 부조들은 야생 황소하마를 사냥하는 사후레, 네크베트에 의해 젖을 먹는 사후레, 파라오가 낚시와 새 사냥을 하는 장면, 신 솝두(Sopdu)[14]가 아시아 포로를 이끄는 장면 등을 묘사하고 있다. 이 중 일부는 아직도 남아있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후레의 사원은 기념비적인 혁신으로 처음으로 야자수 모양의 기둥을 특징으로 하며, 구리로 덮인 사후레의 칭호가 새겨진 거대한 화강암 대들보, 사자 머리 물받이, 검은 현무암 바닥 및 화강암 벽판이 특징으로 있다.

사후레의 피라미드는 건설 당시 47m의 높이로, 이전의 4왕조 피라미드들보다 훨씬 작은 규모를 가지고 있다. 피라미드의 내부 거칠게 다듬어진 돌들로 계단식으로 쌓아졌으며, 두꺼운 진흙 모르타르[15]로 고정되었다. 이 건축 기법은 더 저렴하고 빠르게 수행될 수 있었지만, 내구도가 낮다는 단점이 있다. 실제로 외장석이 도난당한 이후 피라미드는 대부분 무너져 지금은 잔해로 이루어진 더미로 남아 있다.

피라미드의 코어가 건설되는 동안, 무덤의 방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열려 있었고, 무덤 방은 별도로 건설되었으나 후에는 남은 돌과 잔해로 덮여버렸다. 이 건축 전략은 이후의 미완성 피라미드들, 특히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에서 볼 수 있다. 이 기법은 3왕조의 스타일과 유사하며, 4왕조의 다슈르와 기제의 거대한 피라미드 건설자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쓰이지 않았으나 다시 유행하게 되었다.

피라미드의 북쪽 입구는 붉은 화강암으로 된 짧은 하강 통로를 지나 무거운 석회암 대들보로 이루어진 박공형 지붕이 있는 매장실로 이어진다. 현재 이 대들보는 모두 파손되어 피라미드 구조를 약화시키고 있다. 19세기 중반 존 셰이 페링(John Shae Perring)이 처음으로 매장실을 조사했을 때, 이곳에서 사후레의 것으로 보이는 현무암 관 조각이 발견되었다.

피라미드 주변의 장례 신전에는 왕의 영혼(Ka)을 위한 작은 제단 피라미드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원래 약 12m(39ft)의 높이였을 것이다.

6. 사후

사후레의 장례 신전에 있는 채색 부조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최고의 예술적 성취로 인정받았다. 아부시르에서 발견된 신왕국 시대의 비문은 이 신전을 보름달이 비치는 하늘에 비유하며 그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후대의 예술가와 장인들은 사후레의 부조들을 모방하려 했으며, 이를 고왕국 시기의 파라오와 왕비들의 무덤 장식의 본보기로 삼았다. 사후레의 신전의 배치는 당시에는 새로운 것이었으며, 이후 모든 고대 왕조 피라미드 단지의 표준이 되었다. 특히, 종려나무 형상의 기둥과 같은 건축 요소들은 이집트 건축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후대에도 지속되었다. 예를 들어, 중왕국 시대의 세누스레트 1세는 자신의 신전을 위해 사후레의 부조를 완전히 복제하였으며, 사후레의 피라미드 단지의 혁신적인 배치를 다시 채택했다. 이는 엘-타리프(El-Tarif)와 데이르 엘-바하리(Deir el-Bahari) 근처의 언덕에 있는 사프(saff) 무덤[16]에 매장된 11왕조 파라오들의 관습과는 극명히 대조된다.

사후레는 사후에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숭배는 고왕국 말기까지 약 3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를 위해 최소 22개의 농업용 영지가 설립되어 예배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했다. 둑길의 상단 부분에 장식된 부조들은 사후레를 위해 창설된 150개 이상의 의인화된 장례용 영지의 행렬을 나타내며, 왕의 장례식 숭배와 관련된 정교한 경제 시스템의 존재를 보여준다. 사후레의 장례 신전 및 태양 신전으로 유입되는 엄청난 양의 제물들은 하토르와 같은 다른 종파에도 혜택을 주었으며, 그 신전에서도 제사장이 예배를 주관했다.

사후레의 장례 신전이나 태양 신전에서 봉사한 여러 제사장들은 사카라와 아부시르의 그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문과 유물 덕분에 알려졌다. 이들에는 사후레,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네페레프레, 니우세르레의 태양 신전 감독관이였던 티(Tjy)가 포함된다. 또한 사후레, 네페리르카레, 네페레프레, 니우세레의 장례 신전 제사장 카바우프타(Khabauptah)와 네페르카이(Neferkai), 제6왕조 때 사후레의 태양 신전 제사장 아트제마(Atjema), 네페리르카레와 니우세르레 통치 기간 동안 사후레의 장례 신전 제사장 쿠옘스네위(Khuyemsnewy), 사후레 신전의 제사장 및 곡물 창고 서기관들의 감독관 니카레(Nikare) 등이 있다. 다른 제사장으로는 우세르카프와 사후레 시기 신전의 제사장이였던 세네완크(Senewankh), 우세르카프의 태양 신전에서 의 제사장이자 파라오의 친구라는 칭호를 가진 세다우그(Sedaug), 우세르카프와 사후레를 포함한 제4왕조부터 초기 제5왕조 파라오들의 제사장으로 아부시르에 묻힌 테페만크(Tepemankh) 등이 있다.

중왕국 시기 사후레의 장례 예배를 담당한 제사장은 아직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장례 의식은 행해졌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한 증거는 제12왕조의 파라오 세누스레트 1세카르나크 신전에서 수행한 의식에 기초한다. 그는 카르나크 신전에 고왕국의 파라오들을 포함해 사후레의 동상을 헌정했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동상과 다른 선왕들의 동상은 이전 파라오들의 숭배가 여전히 존재했음을 나타내며, 이를 "제한된 형태의 신성한 숭배"로 묘사했다. 사후레의 동상은 현재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있으며, 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높이는 50cm이다. 사후레는 주름진 치마를 입고 둥근 곱슬머리의 가발을 쓴 채 왕좌에 앉아 있으며, 왕좌의 양쪽에는 이 동상이 세누스레트 1세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나타내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사후레의 숭배는 중왕국 시대에도 충분히 이어져 웨스트카 파피루스에서도 언급되었다. 이 파피루스제12왕조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가장 오래된 사본은 제17왕조 시기에 속한다. 이 파피루스는 제5왕조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설명하며, 우세르카프, 사후레,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의 아들이자 레데제트(Rededjet)라는 여성의 아들로 묘사하여 쿠푸왕조를 대체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전한다.

사후레는 신왕국 시대에도 숭배의 대상이 돼서 종교적 공물을 계속 받았다. 사후레는 투트모세 3세카르나크 신전인 아크메누의 벽에 새겨진 카르나크 역대 파라오 목록에도 등장한다. 이 목록은 순수히 종교적 목적으로, 숭배되어야 할 고왕국의 파라오들을 열거한 것이다.

18왕조 후반기와 19왕조 동안 많은 방문자들이 사후레의 장례 신전에 명문, 비석 및 동상을 남겼다. 이 활동들은 투트모세 3세 시기부터 사후레의 신전에서 수행된 숭배와 관련이 있으며, 이 숭배는 '사후레의 세크메트'라는 이름으로 세크메트와 관련된 신격화된 파라오에게 바쳐졌다. 예를 들어, 서기 프타무이아(Ptahemuia)와 동료 서기들이 람세스 2세의 통치 30년째에 사후레의 신전을 방문하여 세크메트에게 110년의 긴 수명을 부여해달라고 기원했다.

신왕국 시대에 '사후레의 세크메트' 숭배가 나타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숭배는 하이집트에서만 일어나는 지역적인 현상만이 아니었다. 상이집트의 다르 엘 메디나(Deir el-Medina) 마을에서도 매년 두 번의 축제가 열렸다고 한다.[17]

같은 시기에 람세스 2세의 아들 카엠와세트(Khaemwaset) 왕자는 이집트 전역에서 무너진 피라미드와 신전을 복원했다. 이는 그의 아버지의 건설 프로젝트를 위해 석재를 확보하면서 과거의 건물들을 복원한다는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사후레의 피라미드에 새겨진 명문은 이 시기에 이러한 작업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사후레의 세크메트' 숭배로 인해 사후레의 장례 신전은 이 시기에 피해를 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숭배의 영향력은 람세스 2세의 통치가 끝난 후 감소하여 지역적인 숭배로만 남았다.

25왕조 말기에 타하르카는 사후레의 신전 부조를 복사했으며, 여기에는 스핑크스로서 적을 무찌르는 파라오의 이미지도 포함되었다. 이후 26왕조 말기에 사후레의 조각상이 카르나크 신전의 숨겨진 동상들 중 하나로 발견되어, 이 시기까지도 숭배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아부시르 지역의 피라미드를 해체하는 시기가 시작되었으나, 사후레의 피라미드는 '사후레의 세크메트' 숭배로 인해 다시 한번 피해를 면했다. 이 숭배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까지도 지속되었으나, 그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아흐모세 2세, 다리우스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까지의 여러 낙서들은 이곳에서 계속된 숭배 활동을 증명한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에는 호리브(Horib)라는 인물은 '사후레의 세크메트 신전의 세크메트의 제사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사후레의 피라미드 해체는 로마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는 주변에서 발견된 맷돌 생산지, 석회 생산 시설 및 노동자들의 쉼터들에 의해 증명된다.



[1] 섬록암화강암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지는 암석[2] Sahura라고 쓰기도 하며, 라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이다.[3] 솁세스카레와 다른 인물일 수도 있다.[4] '이집트 역사'라는 뜻이다.[5] 셰무는 이집트의 추수기이자 나일강의 수위가 낮은 시기를 의미한다. 셰무는 4개월로 나뉘어져 있다.[6]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으로, 오아시스의 신이다.[7] 이 의식의 의미는 죽은 자에게 사후 세계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근본적인 감각을 제공한다는 믿음에서 이루어졌다.[8] 상이집트의 수호신이자 네케브(Nekheb) 지역의 수호신[9] 현재는 텔 아트리브(Tell Atrib)라고 불린다.[10] 람세스 11세 시기 이집트 군 장교이자 아문의 대제사장[11] 약 50미터[12] 수에즈에서 남쪽으로 119km 떨어진 곳에 있었던 항구[13] 사실 이런식의 선왕의 무덤을 해체하고 자신의 무덤과 건축물을 만드는 방식은 이집트 역사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14] 이집트 신화에서 하늘과 동부 국경 지역의 신[15] 시멘트, 석회, 모래, 물을 섞어서 물에 갠 것[16] 사프 무덤은 개방된 안뜰 앞에 여러 개의 입구가 있는 지하 통로와 방들로 구성되어 있다.[17] 페레트(겨울) 첫 번째 달 16일과 네 번째 달 11일에 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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