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8B0000 0%, #AC0D0A 20%, #AC0D0A 80%, #8B0000); color: #FED600"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
아케메네스 | 테이스페스 | 키루스 1세 | ||
제4대 | 제5대 | 제6대 | ||
캄비세스 1세 | 키루스 2세 | 캄비세스 2세 | ||
비정통 | 제7대 | 제8대 | ||
바르디야 | 다리우스 1세 | 크세르크세스 1세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 크세르크세스 2세 | 소그디아누스 |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다리우스 2세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 ||
제15대 | 제16대 | 비정통 | ||
아르세스 | 다리우스 3세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 | ||
추존 | ||||
아리아람네스 · 아르사메스 | ||||
아르게아스 · 페르시스 · 사산 이란: 셀레우코스 · 파르티아 · 사산 · 사파비 왕조 · 아프샤르 왕조 · 잔드 왕조 · 카자르 왕조 · 팔라비 왕조 · 이란 라흐바르 · 이란 대통령 | }}}}}}}}}}}} |
아케메네스 제국 제5대 황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𐎠𐎼𐎫𐎧𐏁𐏂 | |
<colbgcolor=#941517><colcolor=#fff,#fff> 제호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es I)[1] |
출생 | 불명 |
아케메네스 왕조 | |
사망 | 기원전 424년 |
아케메네스 왕조 수사 | |
재위 기간 | 아케메네스 왕조 샤한샤 |
기원전 465년 ~ 기원전 424년 (42년) | |
전임자 | 크세르크세스 1세 |
후임자 | 크세르크세스 2세 |
부모 | 아버지 : 크세르크세스 1세 어머니 : 아메스트리스 |
배우자 | 다마스피아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clearfix]
1. 개요
아케메네스 왕조의 제9대 샤한샤. 부황 크세르크세스 1세가 살해된 후 황위에 올라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명군이다.2. 생애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로, 다리우스 1세의 치세 때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65년 부황이 신하 아르타바누스에게 암살된 후 황위에 올라 아르타바누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였다. 하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기회를 노렸고 정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한 뒤 아르타바누스와 그의 아들들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 황권을 되찾았지만 당시 제국은 페르시아 전쟁 실패의 여파로 심각한 혼란에 휩싸인 상태였다. 아테네, 스파르타 등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에게 해 섬들과 해안지대를 연이어 습격했고, 아나톨리아의 안보를 위협했다. 또한 이집트에서 반란의 조짐이 일었으며, 각지의 사트라프들은 중앙 정부의 명령에 불복종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꾀하는 등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그가 한 노력으론 우선 테미스토클레스의 포용이 있다. 기원전 471년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르고스로 도망쳤다가 나중에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인 이오니아로 이동했다. 그는 아테네로 복귀할 가망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로 향하여 막 즉위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대면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그가 부친의 패배를 설욕하고 그리스를 정복하는 걸 기꺼이 도와주겠다며, 페르시아어와 관습을 배우고 샤한샤를 충실히 섬길 수 있는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1년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처음엔 그를 불신했으나 그의 능력을 보고는 신뢰하며 아버지의 원수였음에도 용서하고 기꺼이 받아줬다. 3개 도시의 총독에 앉혔으며,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아테네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그와 합류하는 걸 허락했다. 이후 테미스토클레스는 마그네시아 총독을 맡다가 66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샤한샤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정면 대결하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했다. 그 대신, 그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를 이간질하기로 하고, 비밀리에 스파르타에게 거액의 금화를 제공하였다. 당시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하고자 델로스 동맹을 창설한 뒤 점점 더 강력해지고 부유해지는 아테네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 점을 잘 활용해, 스파르타가 아테네와 더 이상 협조하지 않고 아테네를 견제하도록 부추겼다. 이런 공작은 효과를 꽤 본 것으로 보이는데 기원전 460년, 스파르타는 헤일로타이 반란 진압을 위해 아테네에 군대 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아테네는 기꺼이 군대를 파병했는데 오히려 스파르타인들의 야유만 잔뜩 받다가 돌아온 통에 당시 아테네의 지도자였던 키몬이 실각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기원전 460년, 리비아 왕자 이나로스 2세가 이집트에서 아테네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을 일으켰고 아르티크세르크세스 1세는 메가비조스 장군이 지휘하는 페르시아 함대를 이집트로 파병해 이집트의 사트라프인 아크헤메네스와 협력해 반란군을 상대하게 했다. 초기에는 아크헤메네스가 멤피스에서 축출당하고, 페르시아 해군 역시 아테네 해군에게 고전하는 등 밀리는 양상이었지만 기원전 454년, 메가비조스 장군이 이끄는 함대가 아테네 해군을 상대로 델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아테네의 지원을 끊는데 성공했고 아크헤메네스는 이 틈을 타 기세가 꺾인 반란군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해 대승을 거두고 이나로스 2세를 사로잡았다.
그리스 역사가 크테시아스에 따르면, 이나로스 2세와 50명의 그리스 장군들은 수사로 끌려갔는데,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어머니 아메스트리스는 당장 저들을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진압군 사령관 메가비조스는 그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의 약속을 존중하려 했지만, 아메스트리스의 강압에 못이겨 이나로스 2세와 그리스 장군들을 모조리 처형하게 하였다. 메가비조스는 이 일에 분노하여 이집트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켰고, 자신을 진압하러 온 페르시아군을 물리쳤지만 사로잡은 장수들을 후대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어머니가 포함된 사절들을 보내 사과하면서 화해하자고 제안했다. 메가비조스는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여기고 이를 받아들이고 샤한샤의 사트라프로 돌아갔다고 한다.
기원전 450년경, 아테네는 코린토스와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키프로스를 공략하기 위한 함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리스 함대는 메가비조스에게 격퇴되었고, 지휘관 키몬은 전사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테네에 사절을 파견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고, 아테네는 양면 전쟁을 지속하는 건 어리석은 짓임을 확실히 깨닫고 칼리아스를 수사로 보내 협상하도록 했다. 그 결과 그리스는 아나톨리아, 특히 이오니아 해안에 대한 페르시아의 권위를 인정, 페르시아는 에게 해의 무역 장려 및 이오니아 신민들에게 자치권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정전에 합의하였고, 양자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남은 통치 기간 동안 전쟁을 재개하지 않았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와의 전쟁을 종결한 뒤 토목 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다리우스 1세의 궁전이 대화재로 파괴된 뒤 재건 사업을 주도하였으며, 수사에 여러 기념비와 신전들을 세웠고, 페르세폴리스에서 부친에 의해 시작된 100개 기동의 건축물을 완성했다. 한편, 성경에 따르면 에즈라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재건하고 모세의 율법을 규범화하는 걸 허락하였으며, 술잔을 바치는 신하 느헤미야가 유대의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의 성벽을 건축하여 유대인들을 보호하게 해줬다고 한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마스피아 왕비와 결혼하여 크세르크세스 2세를 두었고, 첩실을 통해 소그디아누스, 다리우스 2세, 파르사티스를 포함한 많은 자녀를 별도로 낳았다. 424년경 자연사했고 적자 크세르크세스 2세가 새 샤한샤로 등극했다.
3. 여담
고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오른팔이 왼팔보다 길어 '롱기마누스(긴 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유전병인 신경섬유종증의 결과로 신체 차이가 발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이탈리아의 극작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는 그의 이야기를 담은 오페라 <아르타세르세(Artaserse)>를 만들었다.
이 대본을 바탕으로 작곡가 레오나르도 빈치, 요한 아돌프 하세,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등이 오페라를 써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