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크니도스의 크테시아스 (Ctesias of Cnidus) |
출생 | 기원전 5세기경 |
사망 | 미상 |
직업 | 의사, 역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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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케메네스 왕조 궁정에서 의사로 일했던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페르시카>와 <인디카>를 저술했다.2. 생애
10세기 동로마 제국의 백과사전인 <수다(Suda)>는 크테시아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크니도스 출신의 크테시아르코스 또는 크테시오쿠스의 아들이다. 의사로서, 페르시아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부름을 받고 주치의로 일했다. 페르시아의 역사를 다룬 저서 24권을 집필했다.
그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서쪽 끝에 있는 카리아의 고대 도시인 크니도스에서 출생했다. 현존하는 그의 기록에서 상처에 대한 묘사를 매우 상세하게 하고 의사들의 말을 자주 인용한 걸 볼 때, 의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페르시아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하나, 언제 포로로 잡혔는지는 불분명 하다. 일부 고대와 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401년 키루스 왕자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참여했다가 쿠낙사 전투 때 포로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본인의 기록에 따르면, 쿠낙사 전투 때 부상당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주치의로서 치료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이전부터 페르시아 궁정의 주치의로 일했을 것이다.
기원전 420년 리디아의 사트라프인 피수트네스가 다리우스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시아 사령관 티사페르네스는 피수트네스에게 고용된 그리스 용병들을 구슬렸고, 용병들은 피수트네스를 죽였다. 기원전 414년 피수트네스의 아들 아모르게스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카리아와 아테네의 지원을 받았다. 티사페르네스는 곧바로 진압에 나서 아모르게스를 죽이고 상당수의 키리아인과 아테네인을 붙잡았다. 크테시아스는 바로 이 시점에서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얼마 안가 실력을 인정받아 페르시아 궁정의 주치의가 되었고, 17년간 샤한샤의 건강을 돌봤다고 한다.
기원전 398년경,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페르시아 영토의 사트라프 파르나바주스는 스파르타의 침략에 시달렸다. 그는 키프로스의 왕 에우아고라스가 스파르타 해군을 두려워한다는 걸 눈치채고, 그와 연합하여 스파르타 해군을 무찌르고 싶었다. 에우아고라스는 파르나바주스의 제안에 동의하고 아테네 출신의 해군 제독 코논을 함대 사령관으로 기용했다. 문제는 대규모 함대를 일으킬 돈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파르나바주스는 바빌론에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며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청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기꺼이 따랐다. 기원전 394년 8월, 스파르타 함대는 크테시아스의 고향인 크니도스 해안에서 페르시아-키프로스 연합함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 크테시아스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간 뒤 페르시아의 역사와 인도의 역사를 집필했으며, 의학과 관련한 저서도 집필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는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 페르시카(Περσικά)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중동의 역사를 집필한 역사서로, 원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오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 플루타르코스, 클라우디우스 아엘리아누스, 아테나이우스, 포티오스 등 후대 저자들에게 자주 인용되었다. 이중 페르시카의 내용을 가장 많이 발췌한 것은 포티오스의 <비블리오테카>이다. 크테시아스는 자신보다 먼저 페르시아 역사를 다룬 헤로도토스의 저작 <역사>를 많이 참고했던 것으로 보이나, 정작 헤로도토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서문에서 그리스인들의 페르시아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을 것이라면서, 특히 헤로도토스가 거짓말을 많이 했다고 비난했다.페르시카는 아시리아의 역사에 관한 3권의 책으로 시작한다. 이 책들은 아시리아를 건국하고 니네베에 대도시를 세우고, 서아시아의 많은 지역을 정복한 니누스의 통치, 전설적인 여황 세미라미스의 통치와 인도 침공, 니냐스와 사르다나팔루스의 통치, 메디아와 바빌론의 반란 후 마지막 군주 사르다나팔루스의 최후를 다뤘다. 그 다음 3권의 책에서는 메디아의 역사를 다뤘는데, 아르바케스의 통치, 아스티아게스의 통치,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게 패배할 때까지의 일대기를 기술했다.
7~9권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의 일대기를 다뤘다. 그런데 포티오스의 요약본에는 키루스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인 바빌론 공략이 언급되지 않는다. 9세기 동로마 제국 최고의 학자였던 포티오스가 이 중요한 대목을 생략했을 리 없으니, 크테시아스가 모종의 이유로 생략했거나 포티오스의 시대 이전에 그 대목이 실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12권은 캄비세스 2세, 다리우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를 다뤘다. 16~17권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치세, 이집트에서 일어난 이나루스와 메가비조스의 반란을 다뤘다. 제18권은 크세르크세스 2세와 소그디아누스, 다리우스 2세의 잇다른 집권을 다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크세르크세스 2세와 소그디아누스는 기원전 424년경에 잇따라 피살되었다고 한다. 19권부터 23권까지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치세 중 기원전 398년까지를 다뤘으며, 마지막에는 아시리아의 건국자 니누스부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까지의 왕들의 목록을 쭉 서술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일각에서는 페르시아 궁정에서 주치의로서 17년간 일한 그가 '왕실의 기록 보관소' 또는 '왕실의 양피지'에 접근할 기회가 많았을 거라며, 그의 기록을 신뢰할 만하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그러나 오직 황족이나 최고위 관직에 오른 자만이 그곳에 접근할 수 있었지, 일개 의사였던 그가 과연 그럴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포티오스 등에 의해 전해지는 그의 기록 상당수는 그리스와 중동 사회에서 구전으로 떠돌던 이야기와 이전 작가들이 언급했던 일화였음이 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졌다. 게다가 진실을 밝히겠다는 호언장담과는 달리, 그의 기록은 고대부터 신뢰성이 너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생애>에서 페르시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과장되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의 완벽한 잡동사니다."
실제로 페르시카는 지리학적으로 상충되는 내용이 여럿 존재한다. 티그리스강변에 있었던 니네베가 유프라테스강변에 세워졌다고 기술한 게 그 예이다. 또한 현대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통해 찾아낸 아시리아와 메디아의 왕들에 관한 쐐기 문자로 작성된 점토판에는 크테시아스가 서술한 내용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으며, 페르시아에 대해 다룬 내용 역시 키루스 대왕부터 다리우스 1세까지의 초기 역사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지며, 앞뒤가 다른 부분이 많고, 사건 순서를 잘못 배열하기도 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궁정에서 오랫동안 의사로 일했기 때문에, 크세르크세스 1세의 그리스 원정에 관한 페르시아의 시각이 잘 드러나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등장 이전까지의 페르시아의 역사에 대해 참고할 만한다.
4. 인디카(Ἰνδικά)
크테시아스의 저작 인디카는 인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나, 포티오스의 <비블리오티카> 등 후대의 저자들이 남긴 저서에 종종 인용되었다. 그는 페르시아인들이 인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귀담아 듣고 저서에 그대로 실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왜곡되고 과장된 이야기가 많다. 이에 따르면, 인더스 강의 최대 폭이 20마일에 달하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발이 무척 커서 우산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한 피그미족은 키가 90cm이고 생식기가 무척 크며, 매우 긴 턱수염을 외투로 사용한다고 한다. 늑대나 개의 머리를 가진 수인계인 키노케팔로이족의 설명도 여기에 있다.이렇듯 그는 인도를 모든 것이 기괴하고 신비로운 나라로 묘사했으며, 페르시아가 인도를 완전히 정복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각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공통된 시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더스강까지 진격한 뒤 인도의 실상에 관해 좀더 정확한 정보가 들어오게 되면서 자연히 사장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