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7대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 Amenhotep I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아멘호테프 2세(Amenhotep II)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1401년/1397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427년 ~ 기원전 1401년/1397년 (약 26-30년) | ||
전임자 | 투트모세 3세 | |
후임자 | 투트모세 4세 | |
부모 | 아버지 : 투트모세 3세 어머니 : 메리트레-하트셉수트 | |
배우자 | 티야 | |
무덤 | 왕가의 계곡 KV35 |
[clearfix]
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7대 파라오.아버지 투트모세 3세의 뒤를 이어 그가 정복한 막대한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만큼 활발하게 군사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고, 대신 외교적 방법을 더 선호했던 군주였던 아멘호테프 2세는 중동의 강대국 미탄니와의 적대적 공존 관계를 이어가며 중동 세계에서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했다.
2. 통치
아멘호테프 2세는 전임 파라오인 투트모세 3세와 메리트레-하트셉수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러나 아멘호테프 2세는 정실 왕비 소생이나 장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메리트레-하트셉수트 왕비는 투트모세 3세의 후실 왕비였고, 정실 왕비인 사티아 왕비는 아메넴하트라는 이름의 왕자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사티아 왕비와 아메넴하트 왕자가 투트모세 3세 재위 24년[1]에 동시에 불명의 이유로 사망하며 투트모세 3세는 새로운 왕비를 들일 수 밖에 없었고, 이때 들어온 메리트레-하트셉수트 왕비 사이에서 아멘호테프 2세가 태어난 것이다.아멘호테프 2세는 전통적인 수도인 테베가 아닌 북쪽의 멤피스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멤피스 항구의 목재 선적 감독직을 맡고 있다가 나이가 들자 하이집트의 최고 신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최고 신관으로 봉직하는 동시에 군사령관으로도 동시에 봉사하면서 자신의 군공을 떨쳐나갔다. 특히 아멘호테프 2세는 자신의 무공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한 뼘이나 되는 두께의 구리판을 화살로 뚫어버릴 정도의 힘을 가졌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그의 신체 능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200명의 선원들이 노를 젓는 함선과 자신이 홀로 노를 젓는 배를 몰고 경주를 해서 이겼다는 이야기까지 남아있는데 이집트학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일화가 사실인지 아니면 그냥 미화용 선전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다만 확실한 건 아멘호테프 2세가 어느 정도 탁월한 군재를 갖고 있긴 했다는 것.
재위 7년차 되는 해에는 이집트의 봉신국이었던 시리아 지방의 나하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학자들은 아마도 이집트의 최대 적대국이었던 미탄니에서 나하린을 선동하여 이집트에 반기를 들도록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멘호테프 2세는 즉각 군대를 파견해 나하린의 반란을 진압했고, 충성 맹세를 받아낸 후 다시 돌아왔지만 특별한 대전투나 공로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나하린은 이집트 군대가 떠난 직후 바로 다시 반란을 선포했고, 나하린은 완전히 미탄니 쪽으로 붙었다. 아멘호테프 2세의 마지막 원정은 그가 재위 9년차 되는 해에 치러졌으며 아무리 많이 가봤자 갈릴리 호수 이북으로는 가지 않았고,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아멘호테프가 이 원정에서 101.128명의 노예들을 잡아왔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아멘호테프 2세의 마지막 원정 이후 미탄니와 이집트는 대체적으로 평화로이 지냈다. 이집트 측의 기록에는 바빌론, 미탄니, 히타이트의 왕들이 아멘호테프 2세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하는 말이 남아있는데, 물론 실제로는 그냥 대등한 관계에서 선물을 주고받은 것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중동 정세가 상대적으로 훨씬 평화롭게 유지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특히 카르나크 신전에는 미탄니의 왕자가 이집트에 축하 사절로 왔다는 내용도 적혀있을 정도다. 참고로 당시 미탄니가 이집트에게 평화 스탠스를 취했던 것은 당시 국제 정세와 관련된 문제도 있었다. 중동에서는 미탄니 북쪽에서 각각 히타이트와 아시리아가 발흥하고 있었고, 미탄니는 이들을 상대하기도 힘에 벅찼다. 이집트와의 평화를 통해 남쪽 국경의 안정을 도모해야만 겨우 버틸 수 있었던 형국이었던 것. 이집트 역시 이미 시리아 지방에 막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교역로를 통해 큰 수익을 올리고 있던 상황이어서 미탄니와의 더이상 싸움은 원치 않았다.
부왕인 투트모세 3세가 카르나크 신전 확장에 열을 올렸다면, 반대로 아멘호테프 2세는 전국에 있는 소규모 신전들을 확장하는 데 더 관심을 쏟았다. 나일 강 삼각주에는 아버지 때부터 공공부 재상으로 일해왔던 민모세를 시켜 삼각주에 흩어져있는 신전들을 감독하고 공사를 벌이도록 지시했으며, 상이집트 지방에는 메다무드, 엘 토드, 카르나크 등지에 중소규모 신전들을 개건했다. 특히 누비아 지방에도 아마다 신전을 포함해 수많은 신전들을 지었으며, 테베의 왕실 묘지에 자신의 장제전을 지어 파라오의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다.
3. 미라
KV35 |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 |
그의 미라는 1903년에 가스통 마스페로가 하워드 카터[2],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비싱, 피에르 라카우와 함께 처음으로 분석했다. 1907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연구팀이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를 따로 연구하기도 했다. 연구 결과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는 키가 167cm였고, 아들인 투트모세 4세와 굉장히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멘호테프 2세는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팔은 가슴 위에 겹쳐져서 얹혀져 있었고, 오른손은 꽉지고 있었던 반면 왼손은 상대적으로 더 풀어진 상태였다. 그의 몸 전체의 피부에 검은 결절들이 돋아 있었는데 생전의 병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미라 처리 과정에서 생겼는지는 확실치 않다. 미라에 생긴 자국을 통해 한때 목걸이와 반지 등이 미라에 끼워져 있었던 것을 알아낼 수 있었지만, 도굴꾼들의 약탈로 모두 사라졌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그가 대략 4-50대에 죽었다고 한다.
2021년 4월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가 다른 신왕국 파라오들의 미라와 함께 카이로 박물관에서 이집트 문명 박물관으로 재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