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23:13:03

람세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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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제20왕조 제2대 파라오
람세스 3세
Ramesses III
파일:c0444315-800px-wm.jpg
람세스 3세의 무덤 KV11의 벽화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람세스 3세(Ramesses III)
출생 기원전 1217년
사망 기원전 1155년 (향년 62세)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1186년 ~ 기원전 1155년
(약 31년)
전임자 세트나크테
후임자 람세스 4세
부모 아버지 : 세트나크테
어머니 : 티이-메레네세
배우자 티티, 이시스-타헴제르트, 티예
자녀 람세스 4세, 람세스 6세, 람세스 8세
무덤 왕가의 계곡 KV11

1. 개요2. 통치
2.1. 바다 민족의 침략2.2. 경제 쇠퇴
3. 암살 시도와 사망4. 대중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20왕조의 2대 파라오. 기원전 1186년부터 기원전 1155년까지 약 31년 정도 고대 이집트를 통치했다. 일반적으로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라고 알려져 있다.

람세스 3세는 뛰어난 무략가이자 지력가였고, 내치와 외치 모두 안정적으로 수행한 능력있는 파라오였다. 그의 시대까지만 해도 이집트는 여전히 외견상으로는 람세스 2세 시대의 전성기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고, 심각할만한 문제나 사건이 터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능력으로도 이미 쇠락하기 시작한 이집트를 다시 되살리기는 무리였다. 람세스 3세의 재위 기간 내내 이집트의 쇠퇴는 눈에 띄지 않을만큼 서서히 이루어졌고, 한 번 시작된 쇠퇴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람세스 3세가 자신의 왕국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눈을 감고 부정하면서 이집트는 이른 개혁의 기회조차 놓치고야 만다.

2. 통치

당시 이집트 신왕국은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 대왕 시절의 최고 전성기를 지나 서서히 쇠락세를 타고 있었다. 람세스 2세 사후 단명한 왕들이 연달아 등장하면서 왕권은 상당히 약화되었고, 반대로 아문을 모시는 신관들의 권력이 강해져 파라오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제19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투스레트[1]가 집권 2년 만에 대귀족 세트나크테의 반란으로 쫒겨나면서 신왕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제19왕조가 무너지고 제20왕조가 새롭게 들어선다. 세트나크테는 약 2년 11개월 정도 짧은 기간 동안 재위하면서 왕조 교체기에 따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카르나크 신전을 복구하여 민심을 추스르는 한편, 각지에 할거하던 반란군들을 진압했다. 덕분에 세트나크테는 왕권을 다시 어느 정도 강화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는 후일 람세스 3세가 안정적으로 이집트를 다스릴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세트나크테의 아들인 람세스 3세는 기원전 1217년에 태어나 왕위 계승자로 대접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부왕인 세트나크테가 사망하자 기원전 1186년에 파라오직에 즉위해 이후 31년 1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이집트는 서서히, 그러나 꾸준하게 기나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람세스 3세는 전 이집트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마지막 군주였으며, 람세스 3세가 죽은 뒤 즉위한 후계 파라오들은 다시는 그만큼의 권력을 누릴 수가 없었다.

2.1. 바다 민족의 침략

파일:Who-Are-The-Sea-Peoples-min.jpg
파일:sea-peoples.jpg
바다 민족과 이집트 군대의 전투 상상화 바다 민족을 묘사한 이집트 벽화
바다에서 온 자들이 음모를 꾸몄다. 그들의 공격에 모든 땅과 사람들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그들의 공격에 견딜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히타이트, 아르자와, 알라시아, 카르케미쉬 모두 멸망당했다. 아무루 지방의 사람들은 모조리 몰살당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는 것 같은 땅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이집트를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들을 위해 불꽃을 준비해두셨다.
메디네트 하부 신전 2번째 기둥

당시 지중해 세계에는 한창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가 일어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무력 집단인 바다 민족들이 침략해 지역을 주름잡던 강대국들을 약탈하면서 문명 세계가 무너지고 잠시 동안의 암흑 세계가 도래한 것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가장 대표적으로 지중해의 미케네 문명,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제국 등이 이들의 침략에 엄청난 타격을 입고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개중 가장 강력했던 이집트 역시 이들의 침략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바다 민족들은 해적 선단을 꾸려 나일 강지중해가 만나는 곳에 있는 항구도시들을 집중적으로 약탈했으며, 심지어는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와 도시들을 습격하기까지 했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람세스 3세는 재위 8년 되는 해에 대군을 이끌고 바다 민족과 대전투를 벌였다. 람세스 3세는 바다에서 한 차례, 육지에서 한 차례 대전투를 치렀고, 이 두 전투에서 모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바다 민족들의 침입을 일단락지었다.

이집트 해군은 육군에 비해서 확실히 약한 감이 있었으나 람세스 3세의 뛰어난 지휘 능력 덕분에 해적들을 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갈고리를 상대 갑판에 옭아매어 끌어당긴 다음 적의 배로 올라타 전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해적들에 맞섰고,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난전이나 백병전에는 누구보다 강했던 이집트 병사들이었기에 일단 남의 배에 올라타 가까이 접근하기만 하면 해적질에만 익숙했던 바다 민족들을 손쉽게 깨부술 수 있었던 것. 람세스 3세는 포로로 잡힌 바다 민족들을 노예로 삼아 척박한 토지를 개간하도록 만들었고, 아니면 혹독한 건설 사업이나 치수 프로젝트에 넣어 써먹었다고 한다.

2.2. 경제 쇠퇴

그러나 이 같은 바다민족과의 전쟁이 언제나 영광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람세스 3세는 허구한 날 쳐들어오는 바다 민족들을 포함해 중동 민족, 리비아 유목민, 누비아인 등 수많은 적대 세력들과 끝없는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당연히 쉬지 않고 전쟁을 벌이니 막대한 전비가 차출되었고, 이로 인해 국고는 비어갔으며 국가의 재정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공무원이나 관료들에게 줄 월급마저도 줄어들거나 조금씩 밀리는 상황이 연이어 일어났는데 때문에 람세스 3세의 재위 25년에는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파업이 일어났다. 왕가의 계곡에서 파라오와 귀족들의 무덤을 건설하는 일을 맡은 세트 마트(Set Maat, 현대 이집트 아랍어 명칭은 데이르 엘 메디나)의 노동자들이 배급받아야 할 밀이 오지 않자 불만이 폭발해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들은 재상에게 편지를 써서 밀 배급이 없다고 불만을 제기했고, 마을 지도자들이 설득을 하자 '배가 고프다', '이번 달이 18일이나 지났는데 배급을 못 받았다.'고 대답했다. 이에 파업에 놀란 파라오가 이들에게 밀린 월급을 지불하고 술을 보내 위로하면서 파업은 잦아들었지만 신왕국 시대에 유례를 찾기 힘들었던 파라오에 대한 파업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당시 쇠퇴하고 있던 이집트의 사회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연재해도 겹쳐 발생했다. 아이슬란드의 헤클라 화산에서 거대한 대폭발이 일어나 화산재를 쏟아냈고, 이 화산재들이 하늘에 떠서 태양빛을 막으며 연이어 흉작이 들었다. 이로 인해 약 20년 정도 동안 전세계의 식물들의 성장 속도가 감소했다는 연구 자료가 있을 정도로 헤클라 화산 폭발은 세계적인 재앙이었다. 상대적으로 아이슬란드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2] 이집트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농작량은 갈수록 저점을 찍었고 반대로 곡물 가격은 상승했다. 이집트인들의 주식인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곡물가가 올라가자 배를 곯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먹을게 없는 이들이 강도나 도둑으로 돌변하면서 사회는 흉흉해지기만 했다. 람세스 3세 역시 이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워낙 전세계적으로 닥쳤던 자연적 대재앙이었던 터라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암살 시도와 사망

파일:xCkpzVxqpFrqaLv9DiGGLa.jpg 파일:5416415965_26c4c3e771_c.jpg
람세스 3세의 미라 람세스 3세의 석관[3]
람세스 3세의 재위 말년에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벌어졌다. 3명의 아내들 중 하나였던 티예 왕비가 그를 죽이고 제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음모를 꾸민 것. 당시 람세스 3세는 후계자로 람세스 아멘헤르케세프, 즉 후일 람세스 4세를 낙점해놓은 상태였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티예 왕비가 자신의 아들 펜타웨레트[4][5]와 함께 일을 터뜨렸다. 파라오가 될 생각에 눈이 멀은 펜타웨레트는 각지의 관료들을 선동하여 음모에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하렘의 궁중책임자, 시종관, 보물 담당관들을 합류시키는 데까지 성공했다. 티예 왕비와 펜테웨레트는 람세스 3세가 테베의 하렘 궁전 서쪽 탑에서 쉬고 있을 때 급습했다. 파라오의 하렘은 정말 제한적인 인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고, 이 곳에서 파라오를 죽이려 한다면 아무도 도와주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

음모자들이 람세스 3세를 일격에 죽였을지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다만 람세스 3세의 미라를 부검해본 결과 목 뒤쪽에 식도가 드러날 정도로 날카롭고 깊숙한 상처가 나있었고, 학자들은 만일 람세스 3세가 이런 상처를 입었다면 설사 암살자들로부터 일시적으로 도망쳤을지라도 얼마 못가 사망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게다가 람세스 3세의 엄지발가락 역시 잘려나간 상태였는데, 뼈의 재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도끼처럼 무언가 무거운 둔기로 발가락이 잘린 뒤 바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파라오가 발가락이 잘려나갈만한 일은 암살 시도 밖에 없었으니 발가락의 절단과 목의 치명상이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 학계에서는 람세스 3세가 암살 시도로 인한 치명상으로 인해 거의 즉시, 길어야 며칠 후 죽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티예 왕비와 펜타웨레트는 왕에게 치명상을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제 꿈을 이루지 못했다. 람세스 3세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한 왕족이 발빠르게 대처해 왕궁을 확보했고, 왕세자였던 아멘헤르케세프가 도시로 진입해 펜타웨레트를 포함해 음모자들을 모두 체포하면서 펜타웨레트의 꿈은 헛물로 돌아갔다. 람세스 3세가 완전히 사망하자[6] 아멘헤르케세프는 람세스 4세로 즉위했고, 즉위 직후 12명의 신하들을 골라 수사관직을 맡겼다. 5번에 걸친 재판 끝에[7] 총 28명의 암살 가담자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주도자인 펜타웨레트는 왕족이라는 이유로 자살을 허락받았다.[8] 펜타웨레트와 함께 주요 요인이었던 티예 왕비에 대한 처우는 나와있지 않다.[9] 람세스 4세는 이렇게 쿠데타를 정리하고 새롭게 왕위에 올랐으나, 람세스 4세의 치세부터 이집트는 본격적인 몰락의 길을 걷는다.

4. 대중 매체에서

  • 토탈 워 사가: 트로이의 이벤트 파라오의 선물에서 플레이어 팩션한테 조각상 선물을 보내는 파라오가 바로 람세스 3세다. 그외에도 에티오피아의 멤논이 트사가에서는 파라오의 명으로 트로이를 돕기 위해 파견된 걸로 각색되었는데 정황상 멤논을 파견한 파라오는 람세스 3세일 가능성이 높다. 트로이 전쟁 시기와 람세스 3세의 재위기간이 겹치기 때문.
파일:IMG_4011.jpg
토탈 워: 파라오에서의 모습
* 토탈 워: 파라오의 표지모델이자 메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트레일러에서 자신의 손 위로 떨어진 쇠똥구리를 보고 희망을 얻어 대규모의 이집트군을 이끌고 수많은 바다 민족들과 전투를 벌인다. 캠페인 시작시에는 메르넵타 치하에서 대장군 세트나크테의 아들로 시나이 반도의 방어를 맡고 있으며 이후 파라오 등극을 노린다. 고증오류로 캠페인 시점이 메르넵타가 통치하고 있는 기원전 1208년인데 람세스 3세의 나이는 9세(기원전 1217년생 추정)임에도 성년으로 등장한다.토탈 워: 파라오/이집트/람세스 3세 항목 참조.

[1] 참고로 여성이었다.[2] 물론 아시아아메리카 대륙에 비해서....[3]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4] 펜타웨레트는 본명이 아니라 하술할 토리노 법정 파피루스의 기록자가 설정한 일종의 가명이다. 기록자는 티예를 제외한 모든 가담자를 가명으로 기록하였는데, 대부분 '~신이 증오한다' 같은 식의 모욕적인 작명이었다.[5] 펜타웨레트의 이름 뜻은 '위대한 어머니에게 속한 자'라는 뜻으로, 토리노 법정 파피루스에서 이러한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암살가담자들에 대한 저주와 증오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나 왕자인 펜타웨레트의 이름의 의미는 어머니인 티예와 함께 암살계획을 획책했던 점에서 고려해보면 "마마보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볼 수 있다.[6] 이미 상처를 입은 직후 사망했다는 말도 있다.[7] 이 재판의 경과는 '토리노 법정 파피루스'에 상세히 나와있다. 이 파피루스는 완곡한 어조로 마치 살아남은 람세스 3세가 이 재판을 시행한 것처럼 쓰고 있다. 이 때문에 한때 학자들도 정확한 사건의 순서를 확신하지 못했으나, 상술했듯 람세스 3세의 미라가 다시 분석되어 그가 치명상을 입었음이 명확해진 후로는 람세스 4세가 재판을 시행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8] 람세스 3세의 무덤 인근에서 제대로 된 관에도 묻히지 못한 한 삐쩍 마른 미라 한 구가 발견되었다. 정식으로 미라 처리가 된 것도 아니고 불결한 염소 가죽에 싸여 있었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펜타웨레트의 미라일 것이라 본다. 고고학적 정황과 더불어 유전적 증거도 힘을 실어준다. 람세스 3세의 미라와 부계 하플로그룹 및 상당수의 유전자가 일치하기 때문. 최근에는 이 미라가 목매어 숨졌다는 분석까지 나와 완전히 확실시되는 분위기이다. 분석에 따르면 그는 사망 당시 18-20세였다.[9] 다만 고고학자들은 몰래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