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2대 파라오 아멘호테프 1세 Amenhotep 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아멘호테프(Amenhotep)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1504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525년 ~ 기원전 1504년[1] (약 20년 7개월) | ||
전임자 | 아흐모세 1세 | |
후임자 | 투트모세 1세 | |
부모 | 아버지 : 아흐모세 1세 어머니 : 아흐모세 네페르타리 | |
배우자 | 아흐모세 메리타몬 | |
자녀 | 아흐모세 등 | |
무덤 | 왕가의 계곡 KV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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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제2대 파라오.2. 통치
아멘호테프 1세는 선대 파라오인 아흐모세 1세와 네페르타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원래 아멘호테프 1세 앞에 아흐모세 사파이르와 아흐모세 앙크라는 2명의 이복 형들이 있었기에 왕위를 승계받을 것이라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복 형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멘호테프 1세가 왕위를 자연스럽게 물려받게 되었다. 그가 파라오에 즉위했을 무렵 지나치게 어린 나이였기에 즉위 직후에는 모후인 네페르타리가 일시적으로 섭정을 맡아 이집트를 통치했다. 아멘호테프 1세는 그의 이복누이인 아흐모세-메리타몬을 왕비로 맞아들였다.아멘호테프 1세의 여러 이름들 중 하나는 '땅을 정복하는 황소', '공포를 불러오는 자' 등으로, 이를 통해 아멘호테프 1세가 상당히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쳤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멘호테프 1세는 친정을 시작한 이후부터 남진정책을 펼쳤고, 특히 누비아쪽의 쿠시 왕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파라오는 사이 지방에 신전을 세우고 나일 강의 제3폭포까지도 영역을 확장했으며, 이집트인들의 거주지를 건설했다. 또한 제2중간기 시대에 사하라 사막 동부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들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는데, 아멘호테프 1세는 이 오아시스 도시들에 군대를 파견하며 사하라 동부에 대한 통치력을 회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멘호테프 1세가 직접 사하라로 서정을 갔다는 기록은 없으나 그의 칭호들 중 하나에 '오아시스들의 총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중요한 증거다. 다만 시리아나 레반트, 시나이 반도에 대한 정복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3]
군사 분야에서는 나름 업적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건축이나 예술 분야에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아멘호테프 1세가 지은 건축물들의 대부분은 카르나크 신전을 제외하고는 후대 파라오들에 의해 헐려나갔다. 또한 아멘호테프 1세를 묘사한 석상들은 이집트 각지에서 꽤 많이 발견되고 있으나, 이중 대부분이 후대의 람세스 2세나 람세스 3세 등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들이었다.[4] 아멘호테프 1세 시대에 건설된 대부분의 건물들은 중왕국 시대의 것들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사후세계의 지침서인《사자(死者)의 서》가 아멘호테프 1세의 통치기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완벽한 형태의《사자의 서》가 그의 후계자인 투트모세 1세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의학서인 《에베루스 파피루스》가 이 시기에 쓰여졌으며, 세계 최초의 물시계가 등장하기도 했다.[5]
아멘호테프 1세가 묻힌 원 무덤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6] 고고학자들이 왕가의 계곡에 있는 KV39 무덤을 그나마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으로 특정하고 있으나 인근의 무덤인 ANB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의 무덤은 제20왕조나 제21왕조 즈음에 이미 도굴당했고, 신관들은 왕의 미라를 고이 꺼내 다시 붕대로 싸맨 후 데이르 엘 바하리의 공동묘지에 다른 파라오들과 함께 재안치했다. 아멘호테프 1세의 미라는 발견했을 때부터 굉장히 정교한 데스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이때문에 고고학자들은 마스크를 벗기다가 미라가 훼손될 것을 우려해 그의 붕대를 풀지 않았다. 이때문에 아멘호테프 1세의 미라는 수많은 파라오 미라들 중에 유일하게 붕대를 풀지 않은 미라다. 결국 2019년 5월 4일에야 CT로 미라를 촬영했다. 연구 결과 아멘호테프 1세는 대략 35세 즈음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콧구멍에는 향유를 적신 리넨 천이 들어가 있었다. 또한 도굴꾼 때문에 머리, 왼쪽 팔, 오른손, 오른발이 떨어져 나가 신관들이 겨우 붙여놓은 상태였다고 한다.[7]
[1] 기원전 1506년이라는 설도 있다.[2] 다만 훗날 무덤이 도굴당하면서 미라를 다른 곳에 재안장했다. 그의 미라는 1880년대에 데이르 엘 바하리에서 다른 파라오들의 미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3] 아멘호테프 1세가 시리아로 원정을 갔다는 학설도 있기는 하다. 그의 후계자였던 투트모세 1세가 시리아 원정을 떠나는 동안 그 어떠한 상대도 그를 대적할 만한 힘을 갖지 못했다고 쓰여 있는데, 상식적으로 투트모세 1세 이전의 파라오가 시리아를 미리 쓸어버리지 않았다면 시리아 지방이 그렇게 지리멸렬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4] 이때문에 아멘호테프 1세 당시의 건축 양식이나 조각법에 대해 연구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는 해도 그의 재위기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5] 이집트에서는 밤의 길이를 12등분해서 시간을 쟀다. 따라서 계절이 변하고 밤의 길이가 변함에 따라 시간의 기준이 끊임없이 늘어났다가 줄어났다를 반복했다. 그래서 물시계를 쓸 때도 물의 양을 조절했다.[6] 람세스 9세 시대에 대대적으로 무덤들의 도굴 여부를 확인한 결과,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은 안전하다고 보고되었으나 무덤 위치는 써놓지 않았다.[7] 아직도 아멘호테프 1세 미라는 붕대를 풀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