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Publius Clodius Pulcher | |
생몰년도 | 기원전 93년 ~ 기원전 52년 1월 18일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보빌라이 |
지위 | 파트리키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조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버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큰 형)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작은 형) 클라우디아 테르티아(누나) 클라우디아 콰르타(여동생) 클라우디아 퀸타(여동생) 풀비아(아내)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아들) 클로디아 풀크라(딸) |
직업 | 로마 공화국 호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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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호민관.공화정 후기 전체 역사에서 문제적 반항아 내지 극단적 선동정치가의 대명사로, 당대부터 논란이 많은 인물로 유명했다. 로마 정계 굴지의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소속으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나쁜 이미지를 언급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문제아로 평가된다.
2. 생애
2.1.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지낸 아피우스의 손자이며, 킨나 일파에게 추방된 아피우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메텔루스 가문 출신이며, 매형은 루쿨루스였다.출신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일족 중 풀케르(Pulcher: 잘생긴)라는 코그노멘을 쓰는 그의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부터 시작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 역할을 했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맡아 드레파나 해전을 치렀다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함선 120척 중 93척이 격침되는 참사를 야기하고 말았고, 전투 직전에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하던 중 닭들이 모이를 먹질 않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
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능과 불경죄로 재판을 받다가 판결 직전 자살했다. 여기에 여동생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 속에 쳐넣었을 것을!"
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하지만 푸블리우스의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해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냈다. 그는 명장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가담하여 기원전 213년부터 벌어진 시라쿠사 공방전에 참여했다. 뒤이어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와 동맹을 끊고,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한 카푸아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2년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른 끝에 마침내 카푸아를 정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에게는 세 아들 아피우스, 푸블리우스, 가이우스가 있었는데, 모두 집정관을 역임했다. 장남 아피우스는 기원전 185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차남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184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3남 가이우스는 기원전 177년 집정관, 기원전 169년 감찰관을 역임했다. 또한 딸 클라우디아가 있었는데, 기원전 217년 카푸아의 행정관이었던 파쿠비우스 칼라비우스와 결혼했다.
기원전 177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의 장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143년 집정관을 역임하여 알프스 부족인 살라시족을 공격해 승리했다. 이후 딸 클라우디아를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결혼시켰으며, 그라쿠스의 농지 개혁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의 사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에 살해되었고, 그 역시 기원전 130년에 뒤따라 사망했다.
그에게는 두 아들 가이우스와 아피우스가 있었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92년 집정관을 역임한 것 외에는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피우스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지지자로서 기원전 88년 법무관을 맡다가 가이우스 마리우스 일파에게 추방되었고, 기원전 84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가 죽자 로마로 돌아와 기원전 79년 집정관을 지냈고, 기원전 78년부터 기원전 76년까지 마케도니아 총독을 지내다가 기원전 76년 마케도니아에서 사망했다.
기원전 79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는 세 아들과 세 딸이 있었다. 장남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5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차남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행적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3남 푸블리우스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장녀 클라우디아 테르티아는 기원전 68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와 결혼했다. 차녀 클라우디아 콰르타는 기원전 60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와 결혼했으며, 3녀 클라우디아 퀸타는 로마의 명장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결혼했다.
2.2. 초기 경력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직에 발탁될 수 있는 나이 제한을 규정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법을 근거로 기원전 93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유년기가 어땠으며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키케로는 그가 부친 사망 후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일삼고 음탕한 노인들과 추잡한 관계를 맺었다고 비난했지만,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평가받는다.[1]당대 로마 최고의 권세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슷한 나이대인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 등과 친분을 맺었다. 그는 기원전 70년 정식으로 쿠르수스 호노룸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기원전 73년,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주 티그라네스 2세와 결혼동맹을 맺고 비티니아 속주를 침공한 뒤, 뒤이어 아시아 속주를 침공했다. 이에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를 물리치기 위해 출진했다. 루쿨루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로 연전연승했고, 미트리다테스 6세가 아르메니아로 망명하자 아르메니아까지 쳐들어가서 티그라네스 2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를 공략했다. 그러나 기원전 69년, 군단병들은 약탈을 잘 허용하지 않고 인색하게 구는데다가 캅카스까지 진격하려는 루쿨루스에게 반감을 품었다. 당시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루쿨루스의 군대에 복무하고 있었던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군단병들의 불만을 부추겨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클로디우스는 루쿨루스와 함께 군복무를 하고 있었고, 자신이 마땅히 명예를 얻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본인이 1인자라고 믿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뒤쳐졌다. 이에 불만을 품고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의 휘하에 있다가 루쿨루스에게 귀순했던 병사들에게 접근해 루쿨루스에 대항하도록 선동했다. (중략) 클로디우스의 선동에 의해 분노에 휩싸인 루쿨루스의 군대는 티그라네스와 미트리다테스에 맞서 그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루쿨루스는 이로 인해 군사 활동을 더이상 이어갈 수 없었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 티그라네스 2세는 로마군이 지리멸렬해진 틈을 타 반격을 개시해 빼앗긴 영토를 탈환했다. 푸블리우스 풀케르는 루쿨루스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기원전 67년 처남인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가 총독을 맡고 있었던 소아시아 남부 킬리키아 지방으로 피신했고, 마르키우스로부터 함대 지휘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해적 토벌을 맡았다가 오히려 사로잡히고 말았다. 키프로스 섬의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해적들이 요구한 몸값을 지불하도록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나중에 폼페이우스가 해적들을 토벌할 때까지 억류되어야 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풀케르는 투옥 기간 동안 해적들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야 했다고 한다.
해적들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풀려난 뒤, 안티오키아로 가서 마르키우스의 후원을 받던 필리포스 2세 필로로마이오스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국왕에 등극하게 하고자 시민들에게 안티오코스 13세를 버리고 필리포스 2세를 따르라고 선동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안티오코스 13세가 죽이려고 들자 시리아의 해안가로 도피한 뒤 로마로 귀환했다. 이후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루쿨루스가 그가 자신의 부인인 클로디아 퀸타와 근친상간을 했다고 고발했지만, 누구도 그 고발을 믿지 않았기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루쿨루스는 부인과 이혼하고 미식에 탐닉하며 여생을 보냈다.
기원전 64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를 부패 혐의로 고발했지만 패소했다. 그 후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총독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의 휘하에서 활동했지만, 어떤 공직을 맡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키케로는 그가 그곳에서 공문서를 위조하고 살인 및 기타 범죄를 저지르는 등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았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무레나와 친분을 돈독히 했고 기원전 63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무레나를 지원했다. 무레나는 당선된 직후 유권자들을 매수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키케로의 변호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그 후 카틸리나 음모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는 키케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카틸리나 추종자들을 분쇄하는 데 일조했다.
2.3. 여장과 여성전용구역 침입
기원전 62년 재무관 선거에서 당선된 푸블리우스 풀케르는 그해 말 로마에서 이듬해 재무관으로 부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해 12월 4일에서 5일 사이의 밤,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을 역임하고 있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보나 데아(Bona Dea: 순결과 출산의 신) 여신에게 바치는 비밀 제의가 열렸다. 순결의 여신을 모시는 만큼, 남자의 접근이 일체 불허되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도 짤없이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그런데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여인들이 제의 준비로 분주한 틈을 타 여장을 하고, 짝사랑하던 카이사르의 둘째 아내 폼페이아 술라를 보러 잠입했다. 그러나 하녀 한 명이 여장을 눈치채며 비명을 질렀고, 다른 여인들이 곧바로 그 쪽으로 달려들었다. 원칙대로라면 당장 태형 후 생매장 감이었지만, 풀케르의 얼굴을 알아보고 일이 커질 걸 우려한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가 여인들을 진정시킨 뒤 풀케르를 쫒아냈다.
카이사르도 명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기에 사건을 덮으려 했지만, 하녀들을 통해 소문이 점차 퍼지면서 사건이 세간에 알려졌다. 기원전 61년 1월 1일, 풀케르는 신성모독을 저지른 혐의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 등에게 고발당했다. 법무관이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원로원이 집행하려 하자, 호민관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가 반대했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 적대적인 법무관들이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려고 배심원들을 임의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동방에서 귀환한 폼페이우스에게 이 법안을 지지하는지 물었지만, 폼페이우스는 별다른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현직 집정관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 역시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만큼은 민회가 배심원을 구성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원로원은 이를 거부했지만,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친구 쿠리오가 이끄는 클라우디우스 추종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어쩔 수 없이 피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민회가 배심원단을 선출했고, 재판은 4월 중순에 열렸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카이사르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침입했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재판관 한 명이
"그렇다면 어째서 아내인 폼페이아와 이혼했는가?"
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지고한 공화국 로마의 최고 제사장에게는 처와 관련된 어떠한 추문도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와 행사에 참여한 다른 여인들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만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폼페이아는 증언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외의 많은 증인들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과거에 저지른 악행을 거리낌없이 진술했고, 그가 여신전에 출입했음을 암시하는 증거도 여럿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자신은 그 당시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그가 카이사르의 집에 잠입하기 몇 시간 전에 로마에서 자신과 만났다고 키케로가 증언했으며, 풀케르가 신성모독을 저지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유죄 판결이 내려질 위기에 몰렸지만,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막대한 뇌물을 배심원들에게 주며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지지하게 했고, 며칠 후 31대 25로 무죄가 선고되면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시칠리아 섬으로 파견되어 재무관으로서 활동했지만, 이 일로 명예가 실추되어 더 이상의 출세는 사실상 막히게 되었다.2.4. 명문 귀족 신분을 버리다
기원전 60년 로마로 귀환한 그는 키케로에게 복수하고자 호민관들을 설득해 키케로를 탄핵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아예 자신이 호민관이 되어 민회를 조종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파트리키 신분이었던 그가 평민 출신만 될 수 있는 호민관에 선출될 수는 없었다.이에 평민 계급이 되기로 결심하고, 이를 위해 푸블리우스 폰테이우스라는 평민의 양자로 들어가기로 했다. 한 가문의 구성원을 다른 가문에 입양하는 것은 로마 사회에서 유서깊은 관행이었지만, 귀족이 평민의 양자로 들어가는 건 극히 드물었다. 또한 로마법은 중년 이상의 남성만 입양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그를 입양할 푸블리우스 폰테이우스는 그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럼에도 기원전 60년 5월 24일 사제들의 입회하에 입양 의식을 감행했고, 그때까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였던 이름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로 개명했다. 그가 평민임을 강조할 의도만은 아닌 대중적인 노림수 아래 이런 행동을 취했다. 이는 철저한 의도 때문이었는데, '클로디우스'는 평민들에게 있어 대중적인 색채가 강한 병용 표기로, 홍보하기 용이했던 선전이 한몫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는 귀화 형태로 로마에 합류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역사와도 연관되었다.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같은 사비니계의 발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칼푸르니우스 가문 등과 달리, 시조인 아피우스가 로마에 귀순하기 이전부터, 사비니족의 풍습을 누구보다 지키고 이를 독특한 풍습으로 한 가풍이 깊었다. 하여 이들 가문의 남성들은 파트리키, 플레브스 상관없이 목덜미까지 머리 뒤를 기르거나, 사비니 풍습을 공유하고, 서명 역시 'au', 'o'를 병용해 클라우디우스/클로디우스를 함께 사용한 특징 등이 있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라는 성씨를 포기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클로디우스를 그 상징처럼 꼼수로 내세운 그의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속내가 분명했다.
더군다나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의 본가 역할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내 파트리키의 색채가 아주 강한 풀케르 가문에서는 이런 사비니 풍습이 더욱 강했으니, 그가 클로디우스를 내세움은 이런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깊은 역사와 관련이 있음를 알고 있을 다른 귀족들에게는 그가 포풀라레스에 가면서 본인의 본가 세력을 이용할 목적성까지 보였다. 따라서 최고위 행정관들과 원로원은 이를 승인하지 않고, 그가 호민관에 출마하는 것도 금지했다. 그렇지만 기원전 59년 삼두정치를 결성한 덕분에 집정관에 선출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런 클로디우스의 행동이 자신에게 나쁘지 않고, 그를 포섭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줬다. 왜냐하면 자신과 대적하는 키케로를 사적인 원한이 깊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공격해주면, 본인으로서는 키케로를 직접 공격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평민의 양자로 들어가는 걸 허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평민이 될 수 있었지만, 정작 삼두정치를 결성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카이사르에게 그다지 협조적이지는 않았다. 아르메니아에 사절로 보내겠다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고, 농지법 시행을 담당하는 위원회에 가담하라는 제안도 거부했다. 카이사르는 이에 분노하여 그가 평민의 양자가 되도록 허용했던 걸 취소하고자 재판에 회부했지만, 배심원단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자기 뜻을 따르지 않으면 곡물 유통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오히려 반감만 샀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고위 관직을 제시하여 자기 편으로 삼으려 했지만, 이 역시 거절당했다. 결국 삼두정치파와 클로디우스는 다시 손을 잡았고, 그는 기원전 58년 호민관으로 선출되었다.
2.5. 정치적 열정과 복수심 사이에서
기원전 59년 12월 10일 호민관에 취임한 클로디우스는 삼두정치파 인사들이 집정관과 법무관 등을 꿰차고 있는 점을 이용해 왕성한 정치 활동을 벌였다. 그는 먼저 렉스 드 콜레지스(lex de collegiis)를 제시했다. 이 법은 기원전 64년에 해산된 칼리지아 콤피탈리시아를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칼리지아 콤피탈리시아는 로마 왕국의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가 설립했다고 알려진 문화 단체로, 원로원은 카틸리나 사건 후 이 단체가 파괴적인 사상의 확산을 야기했다며 해체시켰다. 몇몇 호민관들은 반대했지만, 로마 지식인들은 열렬하게 환영했고, 기원전 58년 1월 4일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때 키케로는 클로디우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는지 그의 제안에 찬성한다고 밝혔다.그는 뒤이어 렉스 프루멘타리아(lex frumentaria)를 민회에 제출했다. 당시 로마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곡물을 싼 가격에 주기적으로 배급하고 있었다. 그는 이 배급을 무료로 시행하고, 수혜자 수 제한도 없애자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서는 6,40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연간 지출이 추가로 필요했는데, 그는 이 비용을 키프로스를 합병해서 추가로 생기는 수입으로 상쇄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지난날 해적에게 붙잡혔을 때 몸값 지불을 거부한 키프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복수하려는 심산이었다. 이 법안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통과되었고, 로마군이 키프로스를 접수하자 그곳의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살했다.
한편, 클로디우스는 앞으로 민회의 투표는 아무 날이나 열릴 수 있으며, 그 날에 하늘의 징조를 관찰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는 지난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가 카이사르가 정한 표결 투표일에 대해 불길한 징조가 있으니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했던 걸 겨냥한 것이었다. 호민관의 발의는 기원전 58년 1월에 민회에서 승인되었고, 이후로는 누구도 투표일에 관해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또한 감찰관의 권한을 규제하는 법안을 제시했다. 감찰관은 원로원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모든 사람의 목록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인구 조사에 따라 시민을 여러 범주로 세분하는 작업을 처리했다. 이들은 시민들의 정치 생활을 규제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두 감찰관 중 한 명이 자신에게 할당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취한 결정은 동료의 거센 반대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는 앞으로는 감찰관의 결정이 원로원의 검토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최근에 원로원에 입성했으나 감찰관에게 추방될 위험이 있는 상당수 사람들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렇듯 4가지 법안을 제시하여 모두 통과시킨 뒤, 입법 활동에서 비정상적인 행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고발당한 전년도 호민관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를 변호했다. 바티니우스는 친 카이사르파 인사였기에, 그에 대한 재판은 사실상 카이사르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는 자신과 비티니우스의 지지자들을 이용해 재판정에 압력을 행사했고, 결국 재판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는 뒤이어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재판 중에 원로원과 집정관의 개입을 제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또다른 법안을 제안했다. 특히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민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로마 시민을 재판 없이 처벌한 자를 추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이 법안은 명백히 카틸리나 사건 때 여러 시민을 재판 없이 처형한 키케로를 겨냥한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카틸리나 사건을 지나치게 섣불리 처리했다며 후회했고, 수많은 시민을 재판 없이 처형한 걸 최고의 업적으로 내세우는 키케로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 삼두정치 세력 역시 자신들에게 협조적이지 않는 그를 로마에서 쫓아내길 원했다. 키케로는 옵티마테스 파 인사들에게 지지를 호소했지만, 신참자인 그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던 그들에게 외면당했다. 결국 그는 법안이 통과되기 전날에 로마를 떠나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키케로가 이탈리아 국경에서 400~500마일 이내로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금지 구역 안에 있는 동안 그를 접대한 사람은 누구든지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었다. 또한 키케로의 재산을 모조리 압류했으며, 집을 허물고 '자유의 여신'을 기리는 신전을 세우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곧 폼페이우스와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폼페이우스는 티그라네스 2세의 아들이었으며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뒤 로마에 귀순한 티그라네스 왕자를 로마로 데려갔다. 그는 폼페이우스의 반대를 무시하고 왕자를 아르메니아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안티오키아에 상륙했을 때 폼페이우스의 추종자들이 티그라네스 왕자를 이송중이던 자들을 공격해 몇 사람을 살해했지만, 티그라네스 왕자는 결국 아르메니아로 돌아갔다. 이후 양자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기원전 58년 8월 11일에는 한 노예가 체포된 뒤 클로디우스가 자신더러 폼페이우스를 죽이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했지만 유야무야 처리되기도 했다.
클로디우스는 뒤이어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있을 때 시행했던 법률을 폐기하기로 마음 먹고, 비불루스와 함께 그 법률이 협박에 의해 억지로 통과되었으니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불루스가 다른 회의에서 클로디우스의 입양은 무효이며, 따라서 호민관으로서의 활동 역시 무효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는 곧 카이사르의 법안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 그가 이 시점에서 카이사르의 법안을 폐기하려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재무관들이 무역 활동을 하는 걸 금지하는 법안을 입안했다고 한다.
2.6. 복수에 실패한 정치깡패
클로디우스의 호민관 임기가 만료될 무렵, 폼페이우스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클로디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키케로를 복귀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폼페이우스의 의중을 확인한 원로원과 새로 선출된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는 키케로의 귀환을 제안하는 법안을 입안했으나 클로디우스에게 거부당했다. 그러다 클로디우스의 임기가 만료된 뒤, 키케로 복귀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새로 선출된 호민관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원로원은 기원전 57년 1월 23일 키케로의 복귀를 공식 안건으로 내놓았다. 클로디우스가 이를 막고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포럼을 점거하고 정치 테러를 자행하자, 밀로는 검투사 무리를 고용하여 대항했다.이로 인해 많은 이가 죽거나 중상을 입는 등 혼란이 가중되면서 키케로 복귀 문제가 미뤄지자, 폼페이우스는 지지자들을 로마로 소환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클로디우스는 7월 5일에서 13일 사이의 루디 아폴로나레스 경기가 열릴 때 또다시 소요를 일으켰지만, 오히려 민심의 이반만 초래하고 말았다. 렌툴루스는 소요를 계기로 망명자의 귀환을 막으려는 자는 누구든지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고, 원로원은 8월 1일 키케로의 복귀안이 통과될 때까지 모든 공공 활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사흘 후 민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될 때, 클로디우스는 지지자들을 포럼에 모아 법의 통과를 막으려 했지만, 폼페이우스의 동원력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최후의 방책으로 카이사르가 군사 개입을 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키케로의 복귀안이 통과되었고, 키케로는 기원전 57년 8월 말에 이탈리아에 돌아왔다. 뒤이어 자유의 신전을 다른 곳에 옮기고 키케로의 집을 재건하기로 했다. 클로디우스 일당은 집을 재건중이던 인부들을 공격하고 키케로의 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정치 테러를 이어갔지만, 대세를 바꾸지 못했다.
2.7. 키케로의 도발
이렇게 양측의 공방전이 오고 가는 동안, 원로원 동료들은 클로디우스와 키케로에게 잠시 화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때 키케로가 나름 예의를 갖추던 클로디우스에게 무례하게 말하며 비꼬았고, 이 사건은 그나마 친해질 기회마저 없앴다. 왜냐하면 이렇게 키케로가 클로디우스를 모두의 앞에서 근친상간을 하는 인간말종이라고 폄하하고 조롱하면서, 제대로 원한을 샀기 때문이다.클로디우스 : "(사람들이 붐벼 정치 회합 연회장에 앉지 못하고 계속 서 있자)서 있을 자리도 없군요."
다른 귀족들: "죄송합니다. 자리를 준비하도록 하지요."
키케로 : "그럴 필욘 없을 것 같소. (클로디우스에게 비꼬는 투로)그럼 집으로 귀가해서 당신 누이 옆에 눕지 그러시오!"
다른 귀족들: "죄송합니다. 자리를 준비하도록 하지요."
키케로 : "그럴 필욘 없을 것 같소. (클로디우스에게 비꼬는 투로)그럼 집으로 귀가해서 당신 누이 옆에 눕지 그러시오!"
이 사건 이후, 클로디우스는 완전히 키케로와 친해지지 못하겠다고 생각했고, 클로디우스 지지자들은 분노했다.
2.8. 암살
기원전 56년 조영관에 부임한 클로디우스는 민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대하고 화려한 검투 및 경마 경기를 연이어 벌이는 한편, 키케로의 집을 경비하기 위해 무장 요원들을 고용한 밀로를 공공 폭력 혐의로 기소했다.그러나 밀로의 재판은 클로디우스 패거리와 밀로 패거리 간의 격렬한 시가전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방해받았고, 결국 그는 고소를 취하해야 했다. 이후 기원전 54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형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선거 자금을 마련하고자 비잔티움에 가서 여러 지방 유지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아냈고, 아피우스는 동생의 지원에 힘입어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53년 여름, 그는 차기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당시 집정관 선거엔 그의 정적인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 메텔루스 스키피오, 그리고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힙사이우스도 출마했다. 그는 힙사이우스와 동맹을 맺었고,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밀로는 이에 맞서 한 편이 되었다. 양자가 곧 격렬한 시가전을 벌이면서 로마는 대혼란에 휩싸였고, 선거일은 기원전 52년 1월로 연기되었다. 그러던 기원전 52년 1월 17일, 그는 친구 2명과 무장한 노예 30명과 함께 로마를 떠나 아리치아로 가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로마에 돌아와, 로마 근교의 아피아 가도에 위치한 소도시 보빌라이로 갔다. 보빌라이에는 클로디우스의 별장이 있었고, 그는 이 별장에 머물렀다. 같은 날 밀로도 로마를 떠나 사제 선출을 주관해야 하는 라누비움으로 갔다. 밀로는 아내와 함께 마차를 탔으며, 수많은 노예와 무장한 검투사들의 호위를 받았다.
기원전 52년 1월 18일 오후, 두 무리는 보빌라이의 보나 데아 신전에서 마주쳤다. 양자는 곧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는데, 클로디우스의 노예들이 밀로의 검투사들에게 압도당했다. 클로디우스는 밀로의 부하 비리아에게 공격당해 어깨에 중상을 입고 근처 선술집으로 피신했지만, 곧 체포되어 길거리로 끌려나온 뒤 밀로의 부하들에게 잔혹하게 짓밟혀 목숨을 잃었다.[2] 시신은 한동안 길가에 버려졌다가, 뒤늦게 수습되어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그의 저택에 안치되었다. 얼마 후, 추종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저택으로 달려가 시신을 쿠리아 호스틸리아(원로원 의사당)에 옮긴 뒤 건물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곧 사방으로 번졌고, 급기야 쿠리아 호스틸리아를 비롯한 여러 유서깊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밀로는 긴급 소집된 원로원 회의에서 "나는 클로디우스의 매복에 단순히 반응했을 뿐이다"라고 변명했지만, 민중은 이를 믿지 않고 시내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를 그의 선조들 기념비가 서 있는 아피아 가도에서 살해한 행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다!"
키케로, <PRO MILONE>
키케로, <PRO MILONE>
클로디우스와 대척점에 선 원수였던 키케로는 클로디우스 지지자 무리와 밀로의 폭력성을 규탄한 이들을 싸그리 착각 속에서 죄를 짓고도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은신처를 제공한 공범들과 같다고 신랄하게 비난해, 밀로를 위한 변명문을 남겼다. 하지만 키케로의 생각과 별개로, 문제의 인물이더라도 클로디우스의 인기는 생각 이상으로 높았다.
원로원은 혼란을 수습하고자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하려 했지만, "독재관이 아니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하라"는 소 카토 등의 강한 요구에 따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그 후 폼페이우스는 폭동 주동자들을 대거 처형하여 혼란을 잠재웠고, 밀로는 기원전 52년 4월에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뒤 마르세유로 망명했다.
3. 평가
문제적 인물이라는 평가 그대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논쟁이 많다.클로디우스는 고대 역사가들로부터 로마 공화국 말기의 혼란상을 가중시킨 원흉이라고 비난받았다. 정적인 키케로는 그를 "사나운 짐승"으로 매도하며, 카이사르가 이 자를 풀어준 건 잘못된 일이었다고 비판했다. 플루타르코스 역시 클로디우스를 "대담하고 뻔뻔한 자"라고 묘사하며, 그의 주위에 모인 패거리들의 악행을 규탄했다. 하지만 많은 현대 학자들은 그가 정치 폭력에 의존했던 건 사실이지만, 호민관 시절에 시행한 개혁 정책이 상당부분 유용한 점이 많았으며, 단순히 삼두정치파에게 끌려가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을 정도로 정치적 역량이 상당했다고 재평가하고 있다.
4. 후손
기원전 62년경, 그라쿠스 형제 중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외손녀 풀비아와 결혼했다. 풀비아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기원전 60년 또는 59년생인 아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아버지가 암살당한 직후, 친가의 결정으로 다시 파트리키로 신분이 복귀된 소년으로 당대부터 유명했다. 클로디우스의 아들인 그는 법무관을 역임했는데, 논란의 인물인 부모의 행보로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31년 이후 기록이 없어 대체로 이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버지를 잃은 직후 어머니 풀비아가 두 번이나 재혼해 이부형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 율루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살았다. 이때 그는 기원전 44년 기록에서 확인되듯이, 소년이었고, 친가와 어머니 사이를 오고 가며 살면서, 친모 풀비아의 야망에 따라 거취가 정해졌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죽은 뒤, 의붓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밑에서 형식상 보호를 받으며 자랐는데, 그의 후원자 섹스투스 클로엘리우스가 안토니우스에게 추방됐다. 이에 그는 계부와 연을 끊고, 옥타비아누스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이름 미상의 아내와 결혼해, 기원전 11년 화폐감독관을 지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얻었다.
딸 클로디아 풀크라는 아우구스투스의 첫번째 아내가 되었다. 다만 페루시아 내전이 벌어지기 직전, 양쪽은 서로의 정치적 이득이 없다는 점에서 상호 합의 아래 이혼했다. 옥타비아누스와 이혼 후 그나이우스 라르티우스라는 남성과 결혼해, 사이에 외동딸 라티아를 얻었다. 클로디우스의 외손녀 라티아는 성인이 된 뒤,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풀케르, 풀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우르굴라니우스를 얻었다. 이중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는 클라우디우스 1세의 첫 아내였고,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아내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가, 되레 본인이 아내에게 가정폭력을 당해 매일 맞다가, 부부싸움 중 흥분한 아내가 난투 중 창 밖으로 떨어져 추락사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누명을 벗은 일로 세간을 떠들석하게 했다.[3]
[1] 후술하겠지만, 키케로는 이런 발언을 본인 저서에 남겨 출판한 것을 넘어,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그 일가 앞에서 대놓고 퍼부어, 클로디우스에게 큰 원한을 샀다.[2] 그가 젊은 시절 카이사르의 집에서 제사의식을 방해했던 보나 데아 여신의 신전 앞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를 여신의 신벌이라고 여기기도 한 듯.[3] 이 사건의 파장은 엄청 컸다. 누나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와 그의 형제들이 전부 이 사건 전에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처가 식구들에게 살인교사 혐의로 누명을 쓰고 기소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며느리이자 조카 소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의 막내아들로 아우구스투스의 양손자인 제위계승 5순위 클라우디우스가 법정 증인으로 매일 소환되어,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화제가 대단했는지, 당시 카프리 섬으로 스스로 들어간 티베리우스 황제마저 평소 시큰둥하던 태도 대신 큰 관심을 보였다. 따라서 재판은 내내 로마인들의 관심을 모았는데, 티베리우스 황제가 직접 이 재판을 챙겨, 거의 살인죄 유죄 판결 직전까지 간 실바누스가 무죄를 받는다. 이때 소 안토니아, 클라우디우스 모자와 황실 식구들은 그동안 본인들 이름이 사람들 밥상머리에서 계속 언급된 일에 제대로 열받는다. 그래서 부부관계가 완전히 파탄난 클라우디우스는 아내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하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임신 중이던 우르굴라닐라가 해방노예들과 불륜을 하면서 임신한 것이 들통이 나고, 우르굴라닐라 친정에서 갓 태어난 딸에게 인지 없이 클라우디아라는 이름을 지어줘, 리비아 드루실라, 소 안토니아, 클라우디우스가 이 문제로 또 재판 소송을 제기하는 일련의 막장극으로 이어진다. 이와 동시에 황제에게 무죄판결을 받은 실바누스가 할머니에게 단검을 받으면서 "자살해라"고 권유 받아, 이 문제로도 로마 안에서는 티베리우스 시대 내내 갑론을박이 펼쳐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