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16:42:01

수에토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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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황실 비서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트란퀼리우스
Gaius Suetonius Tranquillus
파일:Gaius Suetonius Tranquillus.jpg
출생 69년?
사망 130년 이후?
저서 《황제열전》
《명사열전》
1. 개요2. 생애3. 《황제열전》(De vita Caesarum)4. 저서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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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플라비우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로마 제국 초기 12명의 황제를 기록한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의 저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책 외에는 대부분의 많은 저서들이 분실되었다고 한다. 로마사 연구자들이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황제열전》을 많이 참고하거나, 인용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에 대해서는 로마판 황색언론이라는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2. 생애

북아프리카히포 레기우스[1] 출신으로 속주 출신의 기사계급 사람이었다. 네로 황제가 자살한 지 20년이 지난 뒤에 자신이 청년이 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으므로 대략 서기 69년 즈음 태어난 듯하다. 그의 아버지인 수에토니우스 라에투스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기사계급으로 로마 내전기에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따랐고,[2] 69년 비텔리우스와의 전투에도 종군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성인이 된 이후, 대햑 90년대 즈음부터 고향인 아프리카 속주를 떠나 로마로 건너가 살았다.

로마로 건너온 이후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였던 소 플리니우스[3]와 친분을 맺었다.[4]

원로원 의원 소 플리니우스를 통해 정계에 입문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당시의 황제였던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쪽 인사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고, 셉티키우스 클라루스 등의 추천 아래 마침내 황제의 개인비서 자리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기 11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황후인 비비아 사비나에게 불경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고, 공직 생활 중 부정 혐의 등이 적발되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진노해 즉시 해임됐다. 이때 이야기에 따르면, 수에토니우스가 사비나 황후를 가리켜 불쾌하고 저질스러운 부정적인 발언을 했고, 비열한 행동까지 했는데, 이 광경을 하필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직접 듣고 목격하여 문제가 상당히 커졌던 일련의 사건이 수에토니우스 해임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비비아 사비나 황후가 수에토니우스와 그동안 친분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관용을 베풀고 용서해, 수에토니우스는 추방이나 사형만은 면했다. 하지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를 용서하지 않았고, 수에토니우스가 황후에게 속임수를 쓰고 친분을 이용해 제대로 처벌을 피했다며 간통법까지 적용해, 그를 엄하게 처벌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심기를 제대로 건든데다가[5], 평소 황제의 성격이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봐주지 않는다."는 스타일이라서, 이 사건 이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알려진 뒷이야기라면, 수에토니우스 때문에 황제와 황후가 서로에게 삐쳐서 한동안 각 방을 썼다는 이야기와 황제가 수에토니우스와 친하게 지낸 몇몇 인사들(셉티키우스 클라루스 등)에게도 똑같은 조치를 내려 수에토니우스와 그를 공직에 추천한 이들에게 다시는 공직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몰락시켰다는 것 정도이다. 이때 함께 처벌받은 이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제대로 찍혔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처가 식구들에게도 분노를 산 나머지, 하드리아누스 사후 즉위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절에도 고위직 복귀 기록이 없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수에토니우스는 황제와 로마 최고위층에게 완전히 찍힌 탓에 다시는 공직을 맡지 못했고, 귀족들에게까지 사회적으로 매장됐다.

수에토니우스는 평생 미혼으로 살다가 대략 130년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3. 《황제열전》(De vita Caesa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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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토니우스는 로마 제국 초기 12명의 황제를 기록한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을 저술했다. 수에토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때 몇 번이나 비서관(秘書官)과 공문서관(公文書館)의 감독 업무를 맡았고, 덕분에 로마 관보 같은 공문서 기록들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그것을 토대로 《황제열전》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문서와 관보 등을 참고해 일부 사실을 확인해서 적었어도, 대부분[6]은 이탈리아와 저자의 고향인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떠돌던 야담 및 소문 등을 그대로 옮겨 적거나, 본인이 추측해 각색한 후 저술했다.

《황제열전》은 그가 잠시 공직에 몸담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때 대체로 저술된 것으로 보이며, 수에토니우스의 친구에 의해 서기 119년, 정무총감 가이우스 셉티키우스 클라루스(Gaius Septicius Clarus)[7]라는 인물에게 헌정되었다.

《황제열전》은 종신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시작으로 도미티아누스 황제까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플라비우스 왕조 시대 12명의 역대 황제를 다루고 있다. 수에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초대 황제로 보고 있으며, 책의 제목 역시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이를 통해 당대 로마에서는 카이사르를 최초의 황제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근대까지만 해도 대중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카이사르가 로마 최초의 황제라는 인식이 절대적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원수정[8]이라는 개념이 정립되면서 최초의 원수(프린켑스)인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를 최초의 황제로 서술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가십 형식의 내용이 대부분이고, 온갖 뜬소문과 저자 개인의 추측들이 더해져 만들어진 책이지만, 그 내용이 극적이고 강렬한데다가 로마 시대에 저술된 역사서치고는 현대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덕분에, 대중에 알려진 로마의 이미지 형성에 이 《황제열전》이 끼친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당장 유명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에 고 외쳤다거나, 암살 당시 죽기 직전 중얼거렸다는
"브루투스, 너마저?[10]"
라는 말도 《황제열전》에 나온
"너도냐, 내 아들아[11]"
라는 대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수에토니우스의 저서를 제외하면 이런 발언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카이사르가 실은 간질을 앓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키가 엄청 작았다"
"칼리굴라가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벌였으며, 맨 앞의 관객들을 맹수밥으로 던져줬다"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킨나 시절에 칼에 맞아 죽었다"
는 이야기도 이 사람의 대표적인 거짓 기록이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역대 황제들 중 칼리굴라가 벌였다고 알려진 수많은 악행들과 그의 근친상간 이야기, 티베리우스 황제가 손자인 칼리굴라의 손에 질식사했다거나 베스파시아누스가 젊은 시절 조영관으로 있다가 칼리굴라에게 찍혀 고생했다 등의 뜬소문같은 이야기들도 수에토니우스의 손에서 나왔다.

이런 까닭에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은 연대기 순으로 사건을 나열하면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어떠어떠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있다.”
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생김새가 어떻게 생겼다던가,[12] 이 사람이 태어날 때 무슨 일이 있었다던가, 계보가 어떻게 된다던가, 자신이 그 내용을 어디서 인용했는지에 대해서 적고, 이후의 어떤 황제들에 대해서든 일관된 순서로 경력과 공적(일화에 가깝기는 하지만)을 적고 있으며,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작정하고 쓴 역사서라기보다는 대중용 또는 비방용으로 저술한 역사 이야기집 같은 느낌이 든다. 로마판 나무위키

다만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수에토니우스 본인이 심각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안티였고, 사실이 아닌 내용을 진짜 이야기처럼 실감나게 실어 넣었다는 점이다[13]. 따라서 이 책에서 언급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명의 황제들에 대한 기록들은 상당히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고, 저자 본인이 칼리굴라를 다룬 <가이우스> 편 말미에는 그 증오심까지 느껴진다는 평가이다. 그래서 그가 적은 내용들이 당대 로마의 기록인 까닭에 한때 후세 학자들에게 그대로 믿어지게 만들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고대 로마 연구가 활발해질수록 사실이었던 기록마저 그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다.

수에토니우스 본인이 로마에서 비서관이나 공문서 관련 공직을 맡았고, 로마 관보를 조사해 황제들의 행적을 조사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수에토니우스가 살았던 시기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100년 쯤은 후대였던 데다가 수에토니우스 본인도 자신이 조사한 공문서 기록 외에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가십거리들을 주워 모아서 실제 사실인 양 같이 기록해 놨다는 비판을 듣고 있으며[14], 심지어 일부는 자기 창작을 넣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까닭에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있어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기록과는 달리 로마 시대의 저서들 중 분실되지 않고 전해짐에도 불구하고, A급 사료로 평가받기보다는 B급 수준으로 평가받거나 그 이하로 취급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래서 심할 경우에는 당대에 작성된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15], 유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대 플리니우스, 소 플리니우스, 요세푸스 등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제정 시대의 풍속들을 알아보는 용도로 참고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왜냐하면 다른 책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의 기록들이 상당히 많은데다가, 일일이 당대 기록이나 다른 역사가들의 저서들과 대차대조하기 전까지는 사실로 오인되는 주장들 및 작가 개인의 상상과 분석이 더해져 완성된 내용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16]

《황제열전》의 한국어 번역은 1998년에 풀빛미디어에서 펴낸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 황제》(전2권)와 2009년에 다른세상(출판사 이름이다)에서 펴낸 《12명의 카이사르 - 고대 로마 역사가가 쓴 황제 이야기》가 있다. 전자는 《갈리아 전기》나 《타키투스 연대기》의 역자(중역)로 알려진 박광순이 번역한 것이고[17] 후자는 로버트 그레이브스[18]의 영역본을 조윤정이 중역한 것이다.나무위키에서 해당 관련 항목을 만든 사람들의 경우는 후자를 많이 참조한 듯 싶다.

예수에 관해 언급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예수/역사 항목 참조.

4. 저서

가장 유명한 저서는 라틴어로 쓰여진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이지만, 그리스어로 작성된 저서도 두 권이나 있다.

《황제열전》 말고도 고대 로마의 명사들에 대한 《명사열전》(De Viris Illustribus)을 남겼는데, 현재는 그중 <문법가열전>, <웅변가열전> 및 <시인열전>의 일부만이 전하고 있다. 한국에는 2013년에 한길사에서 《로마의 문법학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번역자는 안재원.

분실된 저서들도 꽤 많은데 로마 창녀들의 생애를 다룬 《유명한 창녀들의 삶》, 각 풍속들을 다룬 《로마의 축제》, 《로마의 복식》 등이 있다.

5. 평가

(수에토니우스의 저술은)진실을 속이고, 자신의 영광과 그 저서로 이득을 얻고자 한 부류의 것이다.
헤로디아누스
"12명의 카이사르 중 네 번째인 칼리굴라(공식적으로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는 변덕스럽고 폭발성 있는 1세기의 대중주의자였으며, 아마도 불공평하게도 제국의 가장 폭군적인 통치자로 기억되고 있다. 고대 로마의 마이클 울프인 수에토니우스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결코 모욕을 잊지 않았고, 밤에 몇 시간만 잤으며, 마지막으로 밀로니아라는 여자와 여러 번 결혼했다."
뉴욕 타임스, '호르티 라미아니 발굴 및 복원'
"칼리굴라의 방탕한 생활 방식과 사치에 대한 욕망에 대한 묘사를 감안할 때, 우리는 이 디자인이 매우 촌스러울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수에토니우스 덕에 칼리굴라는 역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고 뜨겁고 완강한 논쟁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 출처에는 분명히 편향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더라도 그를 좋은 황제로 상상하기는 여전히 어려울 겁니다. 다만, 이 새로운 발견이 그의 성격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될지는 여전히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고, 그가 원했던 것만큼 낙원 같은 곳임을 보여줄 것이라고 봅니다."
데이지 던, 2021년 칼리굴라의 호르티 라미아니 내 기쁨의 정원 복원 후 결과 보고 중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출처의 논쟁적 편향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텍스트가 그 자체로 정확하다고 믿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인파미아(infamia)[19]의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에 인용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을 핵심으로 여긴다. 수에토니우스가 그러한 출처를 사용한 것은 우리가 로마인들이 그러한 비난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여겼는지 어느 정도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키케로는 여러 구절에서 그 자체로는 거의 믿을 수 없어 보이는 성적 주장의 시사적 성격을 언급한다. 진정으로 효과적이려면 연설가는 인파미아에 대한 기존 소문을 붙잡고 , 그것을 바탕으로 고정관념적인 여성성(vir mollis)의 나머지 모든 특징을 첨부해야 했다."
마트진 이크스, 에릭 시라예프

수에토니우스의 대표 저서 《황제 열전》는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편찬한 황제들의 전기 저술방법에 활용됐고,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도 일부 저술 방법을 활용할 정도로, 일부 로마인에게 꽤 인상적인 저술 방법으로 주목 받았다. 이는 중세에도 비슷해, 수에토니우스의 저서는 투르에 남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의 예처럼 살아 남고, 여러 지식인들의 저술 방법 차용에 많이 애용됐다. 9세기 아인하르트는 샤를마뉴 전기를 쓸 때, 인물의 성격과 외모 묘사를 수에토니우스 방법으로 활용했고, 고대 로마 주화 수집에 있어 그의 저서에 나온 12명의 카이사르들은 컬렉션 주제로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그렇지만 동로마 제국 일대에서는 평가에 있어, 옛 서로마 일대와 달리,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처럼 동시대, 후대 로마인에게 호불호를 넘어, 부분적으로 허구화되고 의도적인 인파미아 기술의 전형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영향만큼이나 논란이 많았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 아래에서 수에토니우스 저서 필사본은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의 것과 달리 프랑스 투르에서 시작돼 제작된 오래된 필사본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저술 방법을 강하게 비판한 헤로디아누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저서가 필사본으로 복제되고 찬사받았다.

이렇게 로마, 동로마 사회 안에서 수에토니우스의 평가가 옛 서로마 일대와 달리 좋지 않았던 것은, 로마사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로마법상 법적 또는 사회적 지위 의 상실을 의미한 인파미아에 핵심을 두고 있어, 그 진의가 매우 의심스럽고, 가치 중립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에토니우스는 분명 다른 전기 작가들과 달리 공문서 보관소 내의 황제 서신을 일부 참조했지만, 그 못지 않게 자신의 정치적, 개인적 신념에 맞춰 저술했다. 인파미아로 불린 로마법의 기술 용어로 검열관이나 법무관이 법적 처벌로 부과한 로마 시민권 의 특정 보호에서 법적으로 배제되는 것을 의미한 기술 방법을 활용했다고 현대까지 비판받고 있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인데, 이 점은 그가 변호사 경력, 황실 비서관 경력과 함께 묶여, 악의적이라고 악평을 받는다. 즉, 수에토니우스는 저술 의도의 불순한 의도가 언급될 정도로, 그 평가가 나쁜 것을 넘어, 의도된 악의 속에서 벌인 나쁜 전기 작가의 표본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악평처럼 수에토니우스의 저서는 로마 제국의 유적, 유물, 금석문 연구 등을 통해, 교차 검증 속에서 그 평가가 나빠지고 있다. 따라서 《황제 열전》으로 대표된 저서의 서술 방법은 대중들의 시선을 이끌고, 일부 작가들에게 애용된 기술법으로 사랑받음에도, 저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신빙성 내지 신뢰도는, 그 평가가 시간이 지날수록 나빠지고 있다. 이는 후대의 로마인들 중 헤로디아누스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로 대표되는 이들에게도 비슷했다. 이들은 수에토니우스의 서술과 저서가 인파미아 활용을 노골적으로 한 점 등을 이유로 좋게 여기지 않았다. 가령 헤로디아누스의 경우, 서론에서 수에토니우스와 같은 저술 방식을, 진실을 속이고 자신의 영광과 그 저서로 이득을 얻고자 한 부류의 것이라고 지적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역시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수에토니우스식의 저술 방식을 옳게 여겨 적은 방법이 정치적 목적성 아래에서 진실인양 독자들을 속인다며 혹평을 가했다. 이는 위서로 공인되다시피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저술한 황실 작가들도 비슷했다. 그들은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많이 활용한 수에토니우스 방법의 저술 방법에 따라, 자신들이 모신 황제를 위해 일부 사실을 왜곡함에도,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술과 그가 참고한 수에토니우스식 저술 스타일을 이렇게 비평하면서 비난하다가, 참다 못해 점잖은 표현으로 의문까지 표시했다.
"추잡하고 저열하다."

이런 혹평처럼 수에토니우스의 인간성과 행적들 역시 그가 거짓 증거까지 들이밀면서 비난한 황제들보다 저열하다고 까이고 있다. 수에토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비비아 사비나 황후로부터 호의를 받고, 황실 비서관까지 올랐지만 끝내 파면되었다. 그런데 이는 그가 비비아 사비나 황후를 성적으로 희롱한 농담을 하고, 불경을 여러 번 벌였기 때문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지나칠 정도로 입체적이고 까칠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수에토니우스에게 가혹할 정도로 벌을 내리면서 "불륜" 혐의를 내세웠다고 한들, 수에토니우스가 몰락하고 난 이후의 상황을 보면, 그 저술 방법이 단순히 황제에게 밉보여 몰락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따라서 대표 저서들은 현재 신뢰성이 떨어지고, 수에토니우스 본인 역시 인간적으로도 이중적이고 저열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실정이며, 그의 저서 중 비슷한 방법으로 저술됐다는 다른 저서는 현재 필사본조차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다만, 수에토니우스를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추천을 여러 번 해준 소 플리니우스는 그를 "조용하고 학구적이며 글쓰기에 헌신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1] 지금의 알제리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인 안나바로 튀니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2] 내전 당시 갈바를 암살하고 황제가 된 오토를 지지해 라인 강 서쪽에서 비텔리우스의 군단을 격파한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와 씨족이 같다.[3] 삼촌인 대 플리니우스와 구분해 '소 플리니우스'로 불리며, 서기 79년 8월 24일에 벌어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삼촌과 함께 폼페이 멸망의 순간을 가까이에서 직접 목격하고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편지로 증언한 인물이다. 그 날 함께 폼페이 최후의 날을 목격했던 삼촌 대 플리니우스는 미세눔 함대의 해군 사령관으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피난민들을 구조하다가 화산 폭발과 함께 뿜어져 나온 유독성 가스에 질식해 순직했으며, 저서로 《박물지》를 남겼다.[4] 소 플리니우스는 수에토니우스가 이탈리아의 조그만 부동산을 구입할 때도 미혼에 자식이 없었던 수에토니우스에게 면세특권을 인정해주도록 당시의 황제였던 트라야누스와 사이에서 주선 역으로 나서기도 했다. (보통은 아들을 세 명 둔 아버지에게 이 특권이 인정되었다.) 수에토니우스도 110년부터 112년까지 소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 속주와 폰투스 속주의 프로콘술로 부임할 때 함께 갔다.[5]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아내에게 뭔가 부정적인 발언 또는 예의 없는 행동을 조금이라도 하면,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해, 반역죄 수준으로 엄하게 처벌하면서 간통법 처벌 조항까지 적용해, 해당 인물과 추천인까지 숙청하기로 유명했다.(이는 노예, 해방노예에겐 적용하지 않고, 기사계급 출신 관료들에게 많이 적용됐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까칠하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시종, 노예, 하층민, 속주민에게는 관대했다.) 누나 부부에게 얼음장같이 차갑고 사무적이었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는데, 이런 황제의 성격은 종잡을 수 없어 사비나 황후까지 힘들게 했다. 추가로 황제와 사비나 황후는 서로 냉담하고 서먹서먹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를 신경 쓰고 챙기는 부부 사이였다.[6] 특히 카이사르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명의 황제들[7] 동생이 집정관까지 올랐고, 이 사람 역시 군인 및 관료로 꽤 높은 자리를 역임한 서기 2세기 황금기의 전형적인 로마 귀족이었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와 마찬가지로 황후 비비아 사비나에게 불경을 저지른 죄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단단히 찍혀 그 직위가 박탈되고, 공직에서 추방되었다.[8] Principatus, 프린키파투스[9] Alea iacta est[10] Et tu, Brute?[11] καὶ σὺ, τέκνον[12] 칼리굴라의 외모에 대해서 "칼리굴라는 염소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 '너 사형'이라고 외칠 만큼 싫어했다"고 적어 놓기는 했지만 실제 남아 있는 칼리굴라의 조각상을 보면 그렇게까지 기괴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수에토니우스의 지나칠 정도의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혐오감을 엿볼 수 있다. 칼리굴라 항목 참조.[13] 덤으로 공화정의 옹호자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는 역사가 타키투스와도 동일하다.[14] 예를 들어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하렘을 조성해 놓고, 온갖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겼다거나, 죽을 때 칼리굴라와 관련된 에피소드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에 대한 비판은 티베리우스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따라서 틴토 브라스 감독의 영화 <칼리굴라>도 이러한 수에토니우스의 저술을 따라 기본 스토리가 전개되었다.[15] 캄파니아 지방의 명문가 출신 정치가, 군인, 역사가로 《역사》라는 제목의 역사책을 쓴 저자이다. 8년간 게르마니아에서 군단장을 했고 재무관과 법무관 등을 지낸 오랜 경험과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곁에서 직접 여러 국가적인 문제를 경험했던 인물인데, 특유의 날카롭고 간결한 수사학적 기법으로 사건들을 서술한 것으로 유명하다.[16] 티베리우스 황제를 예로 들면, 타키투스는 비슷한 시기의 후세 사람이었고, 티베리우스를 굉장히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나 세간에서 많이 믿는 이야기들은 간략히 한 줄로 끝내면서 넘어가거나, ‘길거리에서는 이런 항간의 뜬소문이 있다고 하더라’식으로 언급한 뒤 소문임을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이런 서술 방식은 후대 로마의 역사가였던 디오 카시우스 역시 비슷하며, 그리스인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경우에는 검증되지 않은 티베리우스의 악행은 아예 언급조차 안 했다. 반면 수에토니우스는 세 사람과 달리 듣거나 들었다고 주장되는 그 소문을 언급식으로 적은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상상과 추측을 덧붙여 책에 적었으며, 풍자작가들이 황제들을 희화화하면서 풍자한 우스개소리까지 진짜처럼 적었다.[17] Vindex를 "빈데쿠스"라고 쓰는 등 일본어스러운 고유명사 표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본어 중역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중역의 대상이 된 번역 자체에 누락이 있었는지, 원문과 비교해 보면 번역이 통째로 누락된 문장이 간간히 보인다(...).[18]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의 저자이다.[19] 법적 또는 사회적 지위 의 상실을 의미한다. 로마법의 기술 용어로 검열관이나 법무관이 법적 처벌로 부과한 로마 시민권 의 특정 보호에서 법적으로 배제되는 것을 의미하며, 정치적 이유로 사용한다면 그 대상을 공격함과 동시에 본인의 책임이 정당하다는 뜻을 내포한 무기가 됐다. 따라서 황제를 대상으로 이 의도로 저서나 풍자시를 쓸 경우, 전기 작가나 풍자작가가 대놓고 그를 혐오하고 있고, 거짓이더라도 진실과 같다는 악의적 비방을 뜻했고, 선군으로 유명한 트라야누스 황제와 같은 사람에게 걸릴 경우일지라도 반역죄로 혹독히 처벌할 만큼, 그 처벌은 사형 이상의 것을 각오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