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Marcus Velleius Paterculus) |
출생 | 기원전 19년경 |
사망 | 미상 |
직위 | 트리부누스 밀리툼, 게르마니아 기병대장, 원로원 의원, 법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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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1세기와 서기 1세기에 활동한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역사가. <로마 역사>를 집필했다.2. 생애
기원전 19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캄파니아의 카푸아 출신 에퀴테스 가문인 벨레이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이 가문은 저명한 로마 귀족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클리엔테스였다. 조부 가이우스 벨레이우스는 폼페이우스의 부관이었으며,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부관으로서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 참전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따랐지만,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굴복한 뒤에는 옥타비아누스를 추종했다.가이우스 벨레이우스의 손자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일찍부터 군대에 입대하였고, 트라키아 전쟁에 참전해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의 총독 푸블리우스 비니키우스 휘하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활약했다. 이후 티베리우스의 측근이 되었으며, 기원전 1년경 동방 순행을 떠난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고문을 맡았다. 훗날 그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이때의 목격담을 기술하였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행적과 성격을 자세히 기술했다. 그 후 서기 4년 게르마니아의 기병대장이 되어서 티베리우스의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의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모든 게르마니아가 로마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이름조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든 종족이 정복되었다고 서술했다.
서기 6년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에서 발발한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티베리우스의 참모장으로서 활약했다.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게르마니아로 출진한 티베리우스와 동행하였고,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새 황제로 즉위한 뒤 이듬해(서기 15년)에 형제 마기우스 세네르 벨레이우스와 함께 법무관이 되었다.
서기 30년경 마르쿠스 비키니우스에게 <로마 역사>를 헌정하였으며,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31년 티베리우스 암살을 시도하고 제위를 노린 근위대장 세야누스와 친분이 두터웠고, 30년 공개적으로 세야누스를 칭찬하고 찬사한 글이 여럿 있었다는 점에서 31년 10월 18일 세야누스 처형일 이후 사형 선고를 받고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타키투스는 <연대기>를 통해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를 공개적으로 칭찬하면서 글을 쓴 다음 발표한 인사 등을 모조리 기소했다는 것 등을 적고 있어, 벨레리우스 파테르쿨루스 역시 이때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고 그 재산은 몰수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평가처럼 세야누스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파테르쿨루스와 그의 자녀들은 모두 세야누스가 처형되고, 세야누스파에 속한 세야누스 친구들이 전부 기소된 다음 남녀노소 상관없이 처형되거나 추방 또는 원로원 의석이 박탈된 과정에서, 황제나 원로원에게 구명되거나, 과거를 감안해 추방으로 끝났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로마에서는 이런 경우 연좌제가 마구잡이로 적용되지 않아, 기록이 없더라도 파테르쿨루스 일가 전체가 세야누스 일가와 달리 멸족했다는 추론 역시 의문이 많다. 당장, 파테르쿨루스의 아들 가이우스, 루키우스 모두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볼 증거 역시 많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남긴 저서나 생전의 서한은 살아 남았다. 왜냐하면 세야누스 일당에 속했음에도 그의 저서와 서한들은 세야누스와 함께 벌인 사건들과 전부 무관했기 때문이다.
이름 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뒀다. 장남은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차남은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이다. 하지만 이들에 관한 기록은 세야누스 숙청 이후부터 많지 않다. 다만,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의 손자들에 대한 기록은 있다. 파테르쿨루스의 손자는 모두 보결 집정관이 됐는데, 손자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60년 보결 집정관이었고, 또 다른 손자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서기 61년 보결 집정관에 올랐다. 다만, 이 인물이 그의 차남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어 그 여부는 논란이 많다. 하지만 관련 글이 남은 빈도보나(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빈) 비문에 따르면 이 인물의 아버지는 루키우스로 소개되어 있어, 유럽과 미국 고전 사학자들은 대체로 61년 집정관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를 역사가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의 손자로 많이 보고 있다. 왜냐하면 명확하게 루키우스의 아들이라고 적힌 상황에서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61년 보결 집정관인 그는 서기 18년생이다.
3. 로마 역사(Roman History)
파테르쿨루스가 저술한 <로마 역사>의 원제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게 없으며, 1515년 알자스의 무르바흐 수도원에서 필사본을 발견한 빌데 폰 라이나우가 5년 후 출간하면서 '로마 역사'라고 이름붙였다. 이 필사본의 발견은 즉시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필사본에 서술된 로마인과 게르만인간의 전쟁, 특히 토이토부르크 숲에서의 전투에 대한 서술은 독일 대중의 인기를 끌었으며,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갈등과 연관시키기도 했다.파테르쿨루스의 '로마 역사'는 로마 제국 초창기에 기술된 역사서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문헌 자료이다. 이유는 황제 자체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부정적이거나, 제정 자체를 진심으로 혐오한 다른 고대 기록들과 달리, 황제와 황제 지지자 입장에서 작성된 매우 귀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로마 역사>는 2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첫번째 책은 트로이 전쟁으로부터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종식되고 카르타고가 파괴될 때까지의 기간을 다루었다. 하지만 시작 부분과 로마 건국을 다루는 8장의 다음 부분을 포함하여 여러 부분이 전해지지 않는다. 두번째 책은 그라쿠스 형제부터 서기 30년 마르쿠스 비니키우스가 집정관에 취임할 때까지의 기간을 다루었다.
파테르쿨루스는 첫번째 책에서 비로마인(특히 그리스인)의 업적을 상세하게 서술했으며, 올림피아 제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서술했다. 이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고, 시리아와 이집트에 잇달아 뻗어나가는 등 세력을 떨쳤지만,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뒤에는 초심을 잃고 타락하였다고 서술했다. 두번째 책에서는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의 부패상을 서술한 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다뤘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게르만족과의 전쟁, 미트리다테스 전쟁, 술라의 독재 정치 등을 간략하게 서술했다. 그 후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해적을 토벌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를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 폼페이우스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게 된 과정을 서술하였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가 삼두 정치를 한 일,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했다가 카르헤 전투에서 졸전 끝에 최후를 맞이한 일,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한 뒤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일, 종신 독재관이 되어서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암살당한 일 등을 기술했다.
'로마 역사'는 카이사르의 죽음부터 보다 상세한 서술을 남겼다. 그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가 남긴 유언장에서 후계자로 지목된 뒤 로마의 진정한 지도자가 될 때까지의 과정을 서술하면서, 옥타비아누스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꺾고 공화정을 회복시켰다고 밝혔다.
내전은 20년만에 끝났고, 외국과의 전쟁도 종식되었고, 평화는 회복되었으며, 모든 곳에서 광란의 무력 투쟁은 잠잠해졌다. 법률에 대한 유효성, 법원의 권한, 원로원의 존엄성이 회복되었다. 법무관의 권한은 기존의 8명에 2명이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이전으로 돌아갔다. 공화국의 오래된 전통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아우구스투스의 통치에 회의적인 견해를 종종 내비쳤다. 그는 대 율리아의 탈선에 그의 책임이 있다고 하였으며,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가 기원전 19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뒤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무리를 선동하던 마르쿠스 에그나티우스 루푸스의 차기 집정관 선출을 저지한 뒤 음모를 밝혀내어 처형한 것을 칭송하면서,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지켜보기만 했던 아우구스투스에게 비판을 가했다. 또한 자신이 추종하는 티베리우스와 동생 대 드루수스의 활약을 칭송하면서, 두 사람의 활약 덕분에 한때는 게르마니아 전역이 로마에게 복속되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에 대해서는 의외로 "훌륭한 성품과 선의의 사람"이라고 호평하면서, 용기가 부족했다기보다는 찰나의 순간에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패망했다고 밝혔다.
그의 로마 역사는 자신의 주군인 티베리우스를 드높이려는 목적에서 기술되었으므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1911년판에서는 그를 "역사가라기보다는 궁정 연대기 전문가"로 평하면서, 그의 역사서는 일관성이 없고 피상적이며, 실제 사건과 거리가 멀다고 비평했다. 또한 문체의 과장이 심하고 문장이 서투르고 복잡해서 문학적 훈련이 충분하지 않다고 하였다. 하지만 역사학자 프레데리크 W. 쉬플리는 "한 장교가 편찬한 로마 역사 개론서는 위대한 역사나 위대한 문학으로 평할 수는 없지만,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해지는 로마 역사의 모든 요약본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다."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