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5:02:56

하드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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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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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년 보결 121년 보결 121년 보결 122년 122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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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트레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티누스 티투스 프리페르니우스 게미누스 티투스 살비우스 루피누스 미니키우스 오피미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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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년 보결 124년 보결 125년 125년 보결 1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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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두케니우스 베레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루키우스 티티우스 에피디우스 아퀼리누스 푸블리우스 루키우스 코스코니아누스 가이우스 에기우스 암비불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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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프로핀쿠스 루키우스 쿠스피우스 카메리누스 티투스 아틸리우스 루푸스 티티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바로 퀸투스 티네이우스 루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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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플라니우스 사르두스 바리우스 암비불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율리우스 발부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아페르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콰르티누스
131년 131년 보결 132년 132년 보결 133년
세르기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세리우스 아우구리누스 가이우스 아킬리우스 프리스쿠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히베루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루피누스 퀸투스 파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트레비우스 세르기아누스 아울루스 카시우스 아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뭄미우스 시센나
133년 보결 133년 보결 134년 134년 보결 134년 보결
퀸투스 플라비우스 테르툴루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티쿠스 헤로데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 티투스 하테리우스 네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판사
퀸투스 유니우스 루스티쿠스 푸블리우스 수페나스 베루스 티투스 비비우스 바루스 루키우스 아티우스 마르코
135년 135년 보결 135년 보결 136년 137년
루키우스 투틸리우스 루페르쿠스 폰티아누스 마르쿠스 쿠티우스 프리스쿠스 메시우스 루스티쿠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아리우스 프로쿨루스 율리우스 켈수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파비아누스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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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년 138년 보결 138년 보결 139년 139년 보결
카누스 유니우스 니게르 마르쿠스 빈디우스 베루스 푸블리우스 카시우스 세쿤두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나탈리스 콰드로니우스 베루스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카메리누스 푸블리우스 팍투메이우스 클레멘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무키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루스티쿠스 루키우스 클라우디우스 프로쿨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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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바르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티투스 호에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피시바누스 티투스 카이세르니우스 스타티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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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키무스 벨리우스 피두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포블리콜라 프리스쿠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파이투스) 마르쿠스 폰티우스 라일리아누스
145년 보결 145년 보결 146년 146년 보결 146년 보결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파디우스 루푸스 섹스투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 퀸투스 리키니우스 모데스티누스 (섹스투스) 아티우스 라베오 푸블리우스 뭄미우스 시센나 루틸리아누스
가이우스 비크리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비크리우스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아라비아누스 티투스 프리페르니우스 파이투스 로시아누스 노니우스 아그리콜라 가이우스 라베오 테티우스 게미누스
146년 보결 146년 보결 146년 보결 147년 147년 보결
그나이우스 테렌티우스 호물루스 유니오르 퀸투스 보코니우스 삭사 피두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롱구스 가이우스 울피우스 파카투스 프라스티나 메살리누스 아울루스 클라우디우스 카락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안니아누스 베루스 퀸투스 코르넬리우스 프로쿨루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라르구스 퀸투스 푸피키우스 코르누투스
147년 보결 147년 보결 147년 보결 148년 148년 보결
쿠프레세누스 갈루스 섹스투스 코케이우스 세베리아누스 호노리누스 루키우스 옥타비우스 코르넬리우스 푸블리우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아이밀리아누스 사티리우스 피르무스
퀸투스 코르넬리우스 콰드라투스 티베리우스 리키니우스 카시우스 카시아누스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카루스 페도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토르콰투스 가이우스 살비우스 카피토
148년 보결 148년 보결 149년 149년 보결 150년
루키우스 코엘리우스 페스투스 가이우스 파비우스 아그리피누스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살비디에누스 스키피오 오르피투스 퀸투스 파시에누스 리키누스 마르쿠스 가비우스 스퀼라 갈리카누스
푸블리우스 오르피디우스 세네키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제노 퀸투스 폼페이우스 소시우스 프리스쿠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비투스 섹스투스 카르미니우스 베투스
150년 보결 150년 보결 150년 보결 151년 151년 보결
[…]mus 마르쿠스 카시우스 아폴리나리스 가이우스 쿠르티우스 유스투스 섹스투스 퀸틸리우스 콘디아누스 마르쿠스 코미니우스 세쿤두스
가이우스 La[berius 프리스쿠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마메르티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율리아누스 섹스투스 퀸틸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아티디우스 코르넬리아누스
152년 152년 보결 152년 보결 152년 보결 153년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세베루스 푸블리우스 수페나스 [베루스] 가이우스 노비우스 프리스쿠스 푸블리우스 클루비우스 막시무스 파울리누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루스티쿠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호물루스 루키우스 다수미우스 툴리우스 투스쿠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로물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실라누스 아울루스 유니우스 루피누스
153년 보결 153년 보결 153년 보결 154년 154년 보결
섹스투스 카이킬리우스 막시무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아페르 가이우스 카티우스 마르켈루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프리페르니우스] 파이투스
마르쿠스 폰티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세다티우스 세베리아누스 울리우스 아케르 메틸리우스 네포스 루피누스 티베리우스 루틸리아누스 켄소르 퀸투스 페티에디우스 갈루스 티투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마크리누스
154년 보결 154년 보결 154년 보결 155년 155년 보결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에트루스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스타티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윤쿠스] 섹스투스 칼푸르니우스 아그리콜라 티투스 유니우스 세베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루피누스 사비니아누스 마르쿠스 가비우스 …
155년 보결 155년 보결 156년 156년 보결 156년 보결
안티우스 폴리오 [데키무스 루필리우스] 세베루스 마르쿠스 케이오니우스 실바누스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우리나티우스 콰드라투스 퀸투스 카누시우스 프라이네스티누스
미니키우스 오피미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세리우스 아우구리누스 스트라보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루시우스 스파르수스
157년 157년 보결 157년 보결 157년 보결 158년
마르쿠스 베툴레누스 키비카 바르바루스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콤모두스 오르피티아누스 퀸투스 빌리우스 프로쿨루스 (또는 퀸투스 비리우스 라르키우스 술피키우스) 섹스투스 술피키우스 테르툴루스
마르쿠스 메틸리우스 아퀼리우스 레굴루스 네포스 볼루시우스 토르콰투스 프론토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아일리아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binus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클레멘스
158년 보결 158년 보결 159년 159년 보결 159년 보결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파비아누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포니우스 무사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마르쿠스 피시바니우스 레피두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덱스테르
퀸투스 얄리우스 바수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유베날리스 마르쿠스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 리키니우스 이탈리쿠스 루키우스 마투키우스 푸스키누스 ignotus
159년 보결 160년 160년 보결 160년 보결 160년 보결
아울루스 쿠르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아피우스 안니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 아울루스 플라토리우스 네포스 칼푸르니아누스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프라스티나 파카투스
ignotus 티투스 클로디우스 비비우스 바루스 마르쿠스 포스투미우스 페스투스 […] 플라부스 마르쿠스 켄소리우스 파울루스
160년 보결 160년 보결 161년 161년 보결 161년 보결
티베리우스 오클라티우스 세베루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 가이우스 율리우스 게미누스 카펠리아누스
[퀸투스] 닌니우스 하스티아누스 [… N]ovius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퀸투스 카무리우스 누미시우스 유니오르 티투스 플라비우스 보에투스
162년 162년 보결 162년 보결 162년 보결 163년
퀸투스 유니우스 루스티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폰테이우스 프론티니아누스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인스테이우스 비티니쿠스 마르쿠스 폰티우스 라일리아누스
루키우스 티티우스 플라우티우스 아퀼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ignotus ignotus 아울루스 유니우스 파스토르 루키우스 카이센니우스 소스페스
164년 164년 보결 165년 166년 166년 보결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마크리누스 티베리우스 하테리우스 사투르니누스 마르쿠스 가비우스 오르피투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푸덴스 마르쿠스 비비우스 리베랄리스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 켈수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아비투스 루키우스 아리우스 푸덴스 루키우스 푸피디우스 폴리오 푸블리우스 마르티우스 베루스
167년 167년 보결 168년 168년 보결 169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덴틸리아누스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아프로니아누스 옥타비우스 프리스쿠스 퀸투스 툴리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세네키오 소시우스 프리스쿠스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쿠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팔라스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파울루스 ignotus 푸블리우스 코엘리우스 아폴리나리스
170년 170년 보결 171년 172년 172년 보결
가이우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 티투스 호에니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세베루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스키피오 오르피투스 가이우스 모디우스 유스투스
마르쿠스 가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ignotus 루키우스 알피디우스 헤렌니아누스 섹스투스 퀸틸리우스 막시무스 ignotus
173년 174년 174년 보결 175년 175년 보결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마케르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플라쿠스 코르넬리아누스 ignotus 푸블리우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마르쿠스 디디우스 세베루스 율리아누스
176년 177년 178년 179년 179년 보결
티투스 폼포니우스 프로쿨루스 비트라시우스 폴리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카이사르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디에누스 오르피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아누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아페르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데키무스 벨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마르티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윤쿠스
179년 보결 180년 181년 182년 182년 보결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루스티쿠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 (아우렐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프로쿨리아누스 섹스투스 퀸틸리우스 콘디아누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아티디우스) 코르넬리아누스
183년 183년 보결 183년 보결 183년 보결 184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투틸리우스 폰티아누스 겐티아누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세쿤두스 티투스 팍투메이우스 마그누스 루키우스 코소니우스 에기우스 마룰루스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 ignotus 마르쿠스 에그나티우스 포스투무스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플라쿠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아일리아누스
184년 보결 185년 186년 186년 보결 186년 보결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빈덱스 트리아리우스 마테르누스 라스키비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노비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사부키우스 마이오르 카이킬리아누스
카시우스 아프로니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쿠스 아피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 레길루스 아티쿠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루키우스 안니우스 라부스 발레리우스 세네키오
187년 188년 189년 189년 보결 190년
루키우스 브루티우스 퀸티우스 크리스피누스 푸블리우스 세이우스 푸스키아누스 둘리우스 실라누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실라누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실라누스 비텔리우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셉티미아누스
190년 보결 191년 192년 193년 193년 보결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포필리우스 페도 아프로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소시우스 팔코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아풀레이우스 루피누스 (또는 아툴레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브라두아 마우리쿠스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 비비아누스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스카풀라 프리스쿠스
193년 보결 193년 보결 193년 보결 194년 194년 보결
마르쿠스 실리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메살라 루틸리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가비니우스 바르바루스 폼페이아누스
ignotus 가이우스 아이밀리우스 세베루스 칸타브리누스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셉티미우스 알비누스 카이사르 ignotus
195년 196년 197년 198년 198년 보결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스카풀라 테르툴루스 프리스쿠스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티투스 섹스티우스 마기우스 라테라누스 푸블리우스 마르티우스 세르기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클레멘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또는 가이우스) 쿠스피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갈루스 ignotus
199년 200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
마르쿠스 아우피디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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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로마 제국 제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
Hadrianus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st_Hadrian_Musei_Capitolini_MC817.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Hadrianus
출생 76년 1월 24일
로마 제국 히스파니아 속주 이탈리카
사망 138년 7월 10일 (향년 62세)
로마 제국 바이아이
재위 기간 로마 황제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21년)
전임자 트라야누스
후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
부모 친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
양부 트라야누스
모친 도미티아 파울리나
배우자 비비아 사비나
자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양자)
안토니누스 피우스 (양자)
종교 로마 다신교
1. 소개2. 생애 (76 ~ 138)
2.1. 즉위 전
2.1.1. 출신 가문과 직계 조상들2.1.2. 어린 시절과 청장년기
2.2. 의문스러운 즉위 과정2.3. 통치 (117 ~ 138)
2.3.1. 제국 순행(순방), 하드리아누스 방벽2.3.2. 유대인 문제2.3.3. 국방 정책과 군대 개혁2.3.4. 속주 행정2.3.5. 관료제 재편, 확대 작업2.3.6. 항구적 '황제 자문 회의' 창설2.3.7. 법률 정비와 사회 개혁
2.4. 후계자 선정과 사망
3. 성격 및 기행4.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사회적 변화와 결과5. 평가6. 창작물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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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지칠 줄 모르는 일꾼(immensi laboris)
로마 제국 최전성기로 알려진 오현제의 세 번째 황제이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세 번째 황제. 본명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즉위 후 제호로 취한 정식 명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Traianus Hadrianus Augustus)'였다.

업적이 제대로 평가되기 전에는 훌륭한 통치자라기 보다는 교양과 예술에 뛰어난 황제로 인식됐다. 하지만 오늘날 여러 가지 역사적 사료 등을 통해 재평가되어 제국의 내정 개선에 힘을 기울인 실용적인 명군으로 평가되며, 트라야누스가 최대로 확장한 로마 제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여 반석 위에 올려놓은 황제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제위 초부터 광대한 제국을 순행하고 감찰하는 등 끊임없이 행정적인 업무와 제국 곳곳의 문제해결에 몰두했다.[1] 하지만 이러한 지속적이고도 광범위한 순행으로 건강을 해쳐 말년에는 크게 고통을 겪기도 했다.

통치자로서의 면모가 주목되기 이전에는 보통 그리스 문화에 대한 심취로 유명했다. 예를 들어, 이전까지 로마의 지도자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는 것을 불문율과 같이 삼고 있었으나, 하드리아누스 이후로 이러한 문화가 생기기도 했다. 그 외에도 양성애자라는 점,[2] 뛰어난 심미적 취향과 감각으로도 유명했다. 이처럼 복잡하고 흥미로운 면모들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후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으며, 이는 훌륭한 통치자라는 점에서는 비슷했으나, 실질강건을 표상했던 전임자 트라야누스와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생애 (76 ~ 138)

2.1. 즉위 전

2.1.1. 출신 가문과 직계 조상들

본명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로, 위로는 누나 도미티아 파올리나가 있었다.

76년 1월 24일생으로 누나와 마찬가지로 로마 태생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가 그의 누이처럼 로마 출신인가에 대해, 의문이 있다고 한다. 물론, 로널드 사임의 경우에는 로마가 고향이라는 주장도 배제하지 않았지만, 메리 보트라이트 등의 대다수 로마사 권위자들은 로마가 고향이라는 이야기가 일부 전기 작가의 주장인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하드리아누스의 고향은, 그의 양부이자 오촌당숙 트라야누스처럼 속주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의 도시 이탈리[3]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이탈리카 태생설이 더 유력해보인다. 전임 황제이자 양부 트라야누스와 동향이었고,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가 외사촌관계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촌수 기준으로 따지면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촌수는 5촌이었으며, 6촌 관계까지를 같은 가문 사람으로 본 로마 기준으로도 같은 집안 친척이었다.

출신 가문을 살펴보면, 코그노멘에서 드러나듯 가문의 기원은 아드리아해와 가까운 이탈리아 중동부의 피케눔이다. 하드리아누스의 직계조상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히스파니아를 정복하고 그의 휘하 퇴역병들이 이탈리카를 건설될 당시 정착한 이탈리아 출신 로마인으로 백인대장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즉, 하드리아누스의 가문은 3세기 이전 히스파니아의 로마인 식민도시 이탈리카에 정착한 본국 이탈리아계였다. 다만, 페루자 근교의 토디에서 기원한 트라야누스 가문과 달리 이탈리아 통일 후 로마공화국에 편입된 이탈리아 혈통 로마인임에도 하드리아누스 일가는 로마 중앙 쪽과 그 연줄은 훨씬 깊었다. 반면 어머니쪽의 경우에는 오늘날의 스페인 남서부 카디스 태생의 부유한 히스파니아계 로마인 귀족가문이었다.

주의할 것이 있다면, 하드리아누스 친가 일가는 트라야누스 일가와 비교해,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 첫 조상 시절부터 이미 이탈리카 전체에서 엄청난 지역유지였고, 그 기반이 탄탄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배경은 하드리아누스가 히스파니아와 이탈리카를 본인의 고향 내지 본적으로 여기기보다는 인연 있는 지역으로 여긴 이유가 됐다고 한다.

사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직계 조상인, 피케눔에서 태어나 로마군으로 퇴역 후 이탈리카에 정착한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는, 일반적인 퇴역병사가 아니었다. 그는 단순한 로마군 병사, 백인대장이 아니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휘하 직속 백인대장으로 코르넬리우스 스피키오 가문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상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명으로 히스파니아에 세워진 이탈리아인 식민정착도시 이탈리카를 건설한 뒤, 지역 유지로 이탈리아인들이 거주한 도시에서 본국과의 연락 역할도 담당한 사람이었다. 즉, 이탈리카에 정착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직계 조상은 일개 퇴역병사 내지 백인대장 출신 퇴역병사가 아니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하드리아누스 본가 사람들은 이미 로마 중앙 정계와 연줄이 있었는데, 기원전 2세기 당시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친가는 코르넬리우스 가문 전체를 대표한 대귀족 스키피오 일가와 긴밀한 사이를 맺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집안 직계는 고조부 시절부터 로마 중앙 정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고조부,증조부, 조부 이름은 똑같이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마룰리누스였다. 이들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직속 백인대장 출신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의 직계들로, 모두 로마군 장교였고, 에퀴테스 신분으로, 상당한 수준의 문무를 겸비한 당대 엘리트들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고조부 마룰리누스는 히스파니아의 이탈리카 출신으로, 이탈리카에 정착한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의 직계손이다. 그는 능력이 뛰어난 로마군 장교였는데, 학자들은 그가 카이사르폼페이우스 아들들 간의 내전에서부터 카이사르를 도왔고, 이를 기반 삼아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 지지를 한 카이사르군 장교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본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마룰리누스는 제2차 삼두정치 시절의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에게 직접 추천을 받아, 집안 최초로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됐다. 그는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을 준 노부스 호모였고, 이탈리카가 고향임에도 원로원에 첫 입성한 입지전적의 인사로 기록됐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증조부는 상술한 마룰리누스의 아들로, 통상적으로 아일리우스 마룰리누스 혹은 마룰리누스 2세라고 부르는,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마룰리누스다. 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증조부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원로원 의원이었다. 또 그는 원로원 의원직을 세습받기 전까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 프라이토리아니 장교를 거쳤다. 즉,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본가는 이미 증조부부터 가문이 원로원 의석을 세습할 수 있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마룰리누스 2세는 대표적인 히스파니아 출신 정치인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조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마눌리누스는 그의 조부 마룰리누스 1세, 부친 마룰리누스 2세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그는 동명이인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구분코자 통상적으로 하드리아누스 마룰리누스 또는 마룰리누스 3세라고 한다. 마룰리누스 3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직계 조상 중 고향만 이탈리카일 뿐, 거의 일평생 로마에서 살았던 로마인이었다. 그는 아버지 마룰리누스 2세처럼 원로원 의석을 세습받기 전까지 고등 훈련을 받은 프라이토리아니 출신 장교였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마룰리누스 3세 역시 아버지처럼 장교 생활 이후 원로원 의석을 세습받았다. 즉, 트라야누스 일가와 달리 3대째 원로원 신분을 가진 유지했던 것이다. 마룰리누스 3세는 집정관에 오르지 못했고, 법무관도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프라이토리아니와 밀접한 인연이 있어 실제 영향력이 대단했다. 또 마룰리누스 3세는 점성술 지식이 해박하고, 이를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해, 이 부분에서도 원로원 안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그는 종종 몇가지를 예언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이중에는 자신의 손자가 후일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도 있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고조부부터 증조부까지의 삶과 경력을 보면 알듯이, 원로원 의석을 3대에 걸쳐 세습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친가는 법무관, 집정관만 배출하지 못했을 뿐, 로마 귀족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는, 마룰리누스 3세가 동향 출신인 트라야누스 황제의 고모 울피아와 결혼해 낳은 외아들이다. 그의 외조부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할아버지인데, 트라야누스 황제의 고모 역시 마룰리누스 3세처럼 고향만 이탈리카일 뿐, 거의 대부분 삶을 로마에서 살았던 귀부인이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 아페르는 이런 가족 그대로 로마에서 태어났고, 이탈리아와 로마에서 살다 죽었으며, 본인 스스로를 히스파니아 출신, 이탈리카 출신이라는 자각 대신 이탈리아 출신 로마인이라는 자각이 훨씬 더 강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카는 종종 여행삼아 들릴 뿐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고향 이탈리카에 대한 애정이 강하지 않았고, 트라야누스처럼 히스파니아 출신 인재들을 측근에 임명하는 일이 극히 적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아버지는 대대로 전체 이름에서 마룰리누스 대신 아페르를 사용 중이다. '아페르'는 로마인이 말하는 푸닉 지방인,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해안 중 아프리카 속주 출신의 이탈리아계 아프리카인을 뜻한다. 그래서 이를 별칭으로 삼고 있는 것은 특이한데, 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아버지가 푸닉 일대에서 얻은 호평과 원로원 동료들의 칭찬 아래 붙여진 자랑스러운 아그노멘(칭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 아페르는 재밌게도, 푸닉 지방으로 통칭해 불린 아프리카 속주, 누미디아 속주, 트리폴리타니아 속주가 아닌 마우레타니아 지방 근무 당시에서 세운 공적과 명성으로 '아페르'를 얻게 됐다. 그렇지만 이때 원로원 동료들에게 탁월한 봉사 정신으로 훌륭히 공적 임무를 수행했다며 받게 된 칭호 '아페르'는 그가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가문 최초로 명예로운 경력 중 고위직으로 불리는 법무관이 되는 배경이 됐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법무관까지 올랐고, 이는 그가 본인의 외삼촌, 사촌형제인 트라야누스 부자를 도울 수 있는 배경이 됐다. 또 본인의 사촌 형제이며,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귀족 신분을 얻게 된 트라야누스 가문과 트라야누스에게 그가 유언을 통해 구속된 형태로 유언을 따르게 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2.1.2. 어린 시절과 청장년기

고조부부터 세습 원로원 의원이었고, 아버지가 법무관까지 지낸 배경 그대로 하드리아누스는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출신의 귀족 자제들보다 훨씬 부유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이때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는 가문에서 거액을 들여 고용한 가정교사들이 아닌, 그를 친부모처럼 돌보고 훈육한 그의 유모 게르마나 부부였다. 게르마나 부부는 모두 게르만인들이었는데, 이들과 하드리아누스의 유대 관계는 오늘날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무척 깊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들을 자신의 친부모처럼 대우하고 그들에게만은 매우 상냥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게르마나 부부가 자신들의 주인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부모가 모두 일찍 세상을 떴음에도, 소년 하드리아누스를 본인들의 친자녀 이상으로 훈육하고 사랑을 베풀면서, 상상이 풍부하고 자유 분방한 하드리아누스를 위해 진심으로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이들 부부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하면서, 일찌감치 자유를 줬고, 게르마나 부부의 자녀들과도 그 유대 관계가 친가족처럼 대단했다. 이는 누나에게조차 무척 신경질적이고, 본래부터 성격이 까칠하고 잔정 없는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의외일 정도였다.

소년 시절 하드리아누스에 대해 그나마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본인을 부모 이상으로 돌보고 사랑을 베푼 게르마나 부부에게 자유를 줬고, 게르마나 부부는 자유를 받고 해방됐음에도, 하드리아누스를 일평생 부모 이상으로 돌봐줬다고 한다. 이들은 하드리아누스를 끝까지 부모처럼 돌보며 헌신했는데, 이 모습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사촌형 아페르의 유언을 지키는 정도에서 보호자 역할을 해준 당숙 트라야누스와 다른 모습이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이들에게 죽을 때까지 무척 다정다감했는데, 황제가 된 뒤에는 게르마나 부부를 위해 로마에 좋은 거처를 마련해주고 형제처럼 지낸 이들 부부의 자녀들에게도 큰 호의를 베풀었다고 한다. 게르마나 부부 중 하드리아누스의 어머니 역할을 해준 유모 게르마나는 하드리아누스보다 장수했다고 하며, 하드리아누스의 호의로 그가 살았던 티볼리의 하드리아누스 별장에서 하드리아누스 생전 거주하면서, 말년에 까칠해진 하드리아누스의 수발을 모두 들면서, 노년의 하드리아누스에게 더 큰 감동을 줬다고 한다.

86년, 하드리아누스는 불과 10살의 나이에 아버지 하드리아누스 아페르를 여의였다. 이때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후견인으로, 대대장이었던 사촌 트라야누스와 역시 같은 고향 사람이던 기사계급에 속한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지명했다. 트라야누스와 아티아누스는 하드리아누스 아페르에게 일찍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고,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가지고 있어,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10살때부터 트라야누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와 아티아누스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오촌 당숙 트라야누스가 엄청난 인내력으로 참으려고 노력해도 힘들 만큼, 다루기 힘든 소년이었다. 그는 부잣집 도련님답게 오락이나 사냥같은 취미생활을 더 좋아했고,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으며, 자신이 진심으로 따른 유모 게르마나 부부 등 극소수 외의 사람들에게는 자상하게 행동하지 않아, 트라야누스와 아티아누스의 속을 단단히 썩였다고 한다.

따라서 오촌당숙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15살이 되었을 때, 사실상 양자인 하드리아누스의 정신머리를 고쳐 놓고, 규칙적인 삶을 몸에 익히겠다며, 강제로 군복무를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하드리아누스의 사냥 취미 탓에 무산됐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의 매부가 될 예정이었던 세르비아누스[4]가 참다못해 하드리아누스의 무절제한 생활을 보호자 트라야누스에게 알렸다고 한다. 이때 트라야누스는 화가 크게 난 나머지 이탈리카에서 사냥에 열중하고 있던 하드리아누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엄중하게 감시했고, 그가 로마시 상속 법정 중 한 곳의 판사가 되도록 힘을 썼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이탈리카에서 로마로 불러들였고, 하드리아누스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때문에 트라야누스 시대와 하드리아누스 시대 동안 이탈리카 출신들이 제국 요직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5]

로마로 돌아온 하드리아누스는 새로운 일에 열중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오히려 그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에서 곧바로 군복무를 시켰다.

하드리아누스가 배속된 군단은 제2군단 아디우트릭스였고 그의 직위는 군단장이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군복무를 하면서 상당히 잘했다고 한다. 따라서 제2군단장을 한 이후, 도나우 강에 주둔 중인 제5군단 마케도니카 군단장을 역임했는데 도미티아누스가 죽고 네르바가 제위에 올랐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한 후 병사했다. 그리고 97년 당숙 트라야누스가 네르바 황제의 양자가 되었던 해에는 라인 일대 사령관 트라야누스가 새로운 제위 계승자가 된 의미에서 군대 축하 메시지 전달 사절에 뽑히는 영예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네르바가 죽고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올랐는데, 이때 로마의 고대 기록들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에게 네르바의 사망 소식을 전달하는 첫 주자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자신을 질투하면서 방해한 다른 사절들을 제끼고, 그들이 놓은 여러 장애물들을 다 헤친 뒤 걸어간 노력 끝에 트라야누스에게 제위 등극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친밀한 사이 이상이 되어 그는 최측근 중 한 명이 되었는데,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재위 기간동안 친족이 몇 없는 황제 밑에서 승승장구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제2차 다키아 전쟁이 벌어진 105년에서 10년 동안 제1군단 미네르비아 군단장으로 있으면서 다키아 전쟁을 지휘했고, 전후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106년도 법무관이 되었다. 그리고 107년에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하 판노니아 총독을 지냈고, 이듬해 집정관까지 지냈다. 이후 그는 114년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진할 당시, 황제가 출정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될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되었다.

2.2. 의문스러운 즉위 과정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와 5촌 관계였고, 트라야누스 치세 동안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데다가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 전쟁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승진과 공적, 혈연 관계에도 불구하고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자신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이야기나 확실한 징후는 전혀 없었다. 아울러 그는 트라야누스 시대의 정복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확장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 확장 정책을 주도했던 측근들과 대립했기 때문이다.[6]

그 결과, 트라야누스 치세 후반에 일어난 파르티아 전쟁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측근들의 견제로 후방인 시리아 속주 총독 직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나마 이것도 트라야누스의 황후로, 하드리아누스에겐 어머니나 다름없었던 당숙모 폼페이아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지지로 얻어낸 자리였다. 그러나 파르티아 전쟁은 실패로 돌아갔고, 병을 얻은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가다 서기 117년 8월 9일에 셀리누스 항구에서 병사했다. 죽기 직전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117년 양자 지명과 즉위 당시, 하드리아누스의 제국 내 위치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주고 어머니 역할을 해준 황후 플로티나의 지지 외에는 상당히 확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죽음 당시, 그 옆에 있던 이는 플로티나였고 뚜렷한 유언장 같이 플로티나와 하드리아누스의 주장을 뒤집을 만한 것도 전무해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이어 로마 제국 황제에 올랐다. 하드리아누스의 공식적인 입장에 의하면 트라야누스가 죽기 이틀 전 하드리아누스가 양자 및 후계자로 지명되었는데, 이 부분에서 불분명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의 제위 등극에 대해 당대부터 많은 의문들이 제기되어 왔다.

트라야누스의 재위 기간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정식 집정관직을 얻지 못하고 보결 집정관 1회(108년) 역임에 그치는 등 원로원 내의 다른 유력자, 차기 제위 경쟁자들과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지 못했다. 티베리우스, 티투스까지는 아니더라도 트라야누스가 네르바에게 받았던 지위조차[7] 받지 못했으며 그의 공직 생활도 후원자인 당숙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역할이 컸던 걸로 보인다. 즉, 하드리아누스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남자 혈족임에도 양자가 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또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사이에 반감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였고,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끊임없이 자신의 측근들과 대립했음에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생전에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정해서 왕조를 열겠다라고 연상시킬 수 있는 일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아들을 원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아우구스투스가 그랬던 것처럼), 하드리아누스가 아닌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L. Neratius Priscus)를 후계자로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루머도 돌았다.

마지막으로,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내릴 때 동석했던 인물들이 다 하드리아누스를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트라야누스의 명령이 진실이었냐는 점에 대해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좋은 황제이든 나쁜 황제이든 즉위 과정이 불분명한 건 사실이며, 트라야누스 본인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이상 논란이 없을 수는 없다.

이에 대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통치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 동안 원로원 의원을 지낸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8]는 베일에 쌓인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황제 등극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로 인한 계승 음모를 거론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는 그럴듯한 이야기였다고 하는데, "트라야누스는 실제로 하드리아누스를 입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등극과 양자 입적은 당숙모 폼페이아 플로티나 황후가 꾀한 일이고, 며칠 동안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망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또 디오 카시우스는, 플로티나 황후가 그 동안 하드리아누스의 입양을 알리는 편지들을 로마 원로원에 보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당대 로마인들조차 의문점을 제기한 증거는 황후가 보낸 '트라야누스의 편지'에 "왜 트라야누스 황제의 서명 대신 황후 플로티나의 서명이 있느냐"였다고 한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의 등극 직전 플로티나 황후는 이에 대해 "황제가 너무 허약해져서 서명을 할 수 없었다"는 구실을 댔을 것이라고 전한다. 또 다른 소문에 따르면 플로티나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방에 누군가를 몰래 들여보내서 황제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하게 하면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후계자 지명을 알렸다고 하는데 분명한 사실은 플로티나 황후가 트라야누스의 사망 소식을 알린 것은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이 확실해진 순간이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디오는 그 당시 원로원 내 분위기 등을 근거로, "하드리아누스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한 트라야누스 뒤를 이어서, 죽은 황제의 부인 플로티나의 정부라는 유일한 칭호만을 가지고 공식적으로 황제가 되었다"고 말하며 여러 소문 등으로 하드리아누스 즉위는 의문이 많았음을 지적했다.

게다가 로마에서 발굴된 한 묘비가 이런 음모론에 힘을 더해주는데, 이 묘비의 주인 해방노예 마르쿠스 울피우스 파이디무스(Marcus Ulpius Phaedimus)는 트라야누스의 음료 담당 시종이라고 쓰여있었고, 사망한 날짜가 트라야누스가 사망한 3일 후였으며 사망 당시 겨우 28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종이 플로티나의 명을 받고 트라야누스의 목숨을 끊은 후 입막음으로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어쨌든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베일에 쌓인 과정에서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시리아 총독으로 재임 중이었고, 트라야누스 사망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총독으로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셀레우키아로 향한 뒤 양자 자격으로 황제의 시신을 셀레우키아로 운반해 화장 후 선박을 이용해 황제의 유골을 로마로 보내고, 트라야누스 기념 기둥 기단에 안치하도록 했다.

이후 그는 로마를 향해 먼 길을 갔는데, 그 동안 자신이 복무했던 도나우 방어선의 도나우 강 하류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군사적 위기 순간을 해결했고, 102년 트라야누스가 병합한 영토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만큼 뛰어난 정치를 펼치고 싶어했고, 이를 자신의 국정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의 즉위 과정과 정통성에 의문점이 많았기 때문에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 4명의 저명한 원로원 의원들이 국가 전복 혐의로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처형된 이들은 모두 최고 고위직(집정관)을 지낸 사람들이어서 로마인들에게 이 사건은 '네 명의 집정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당시 트라야누스의 뒤통수를 치고 많은 로마인을 학살한 유대인들의 '키토스 반란'을 진압한 명장 루시우스 퀴에투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팔마 프론토니아누스(99년과 109년 집정관), 루키우스 푸블릴리우스 켈수스(102년과 113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110년 집정관, 현직 다키아 총독)였다. 이 4명의 전직 집정관을 처형한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은 마침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인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였다.

"네 명의 집정관 사건"에 대해 디오 카시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내세운 명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며, 하드리아누스가 네 명의 국가 원로를 숙청한 이유는 그들의 부와 영향력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드리아누스가 이때 이들의 처형에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부인했기 때문에 사건의 전체 흐름이 꼴사나워졌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고대 로마의 전승 기록들에 따르면 지금은 사라진 하드리아누스의 자서전에서도 이 사건이 나온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자서전을 통해 "원로원이 자신의 승인도 받지 않고 그들의 처형을 명령했다"고 한다.

어쨌든 하드리아누스의 즉위는 등극 당시부터 다소 암울하게 시작됐는데, 그는 로마 도착 이후 자신이 사건에 책임이 없고 모든 것은 아티아누스의 과잉 충성 때문이었다는 서약을 해야 했고,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앞으로는 적절한 재판 절차 없이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아티아누스를 근위대장에서 해임했다.[9] 그러나 이런 그의 행동에 대해 원로원은 공개적인 비판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모양새를 취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2.3. 통치 (117 ~ 138)

2.3.1. 제국 순행(순방), 하드리아누스 방벽

황제의 순방은 121년 갈리아와 레누스[10] 일대를 시작으로, 다음해 브리타니아 방문으로 이어졌다. 이때 그는 오늘날의 스코틀랜드잉글랜드 접경 지역에 남아 있는, 그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방벽 공사 계획을 직접 점검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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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방벽, 안토니누스 방벽[12]

이후 그는 오늘날의 잉글랜드 남부를 거쳐 갈리아 서부와 히스파니아 일대를 통과해 히스파니아에서 겨울을 보냈다. 다음해 봄, 하드리아누스는 모로코 일대의 로마인 식민 도시들이 무어인들의 공격을 받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파르티아가 평화 협정을 깼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아나톨리아 반도의 에페수스로 향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도착한 이후, 집결한 군대를 사열했으며 근동 일대의 군사, 행정, 외교 사무를 직접 책임졌다. 그는 신전, 공중 목욕탕, 수로와 군용 도로 정비 및 보수 공사를 명하고, 극장 건축을 비롯해 시지쿠스 신전 건설 등을 명하고 지켜봤다. 황제는 소아시아헬레니즘 문화권 주민들과 직접 소통하고, 그들의 청원과 불편 사항을 듣고 직접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128년 황제가 북아프리카 일대로 떠나기 전까지 동방 속주 일대는 현지 총독들의 비리와 실정을 황제가 관리, 감독 후 상벌을 내리는 일련의 감독, 규찰이 하드리아누스의 관리, 감독 아래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128년 하드리아누스는 황제 소유 사유지를 시찰하면서, 풍요로운 북아프리카 일대의 토지 이용 방법을 보고 받고 이를 논의했다. 그러나 이듬해 겨울부터 황제는 아테네로 건너갔고, 아테네에 머물며 그리스 일대의 오락과 축제를 주재했다. 이때 그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만든 신전을 재건립해 올림푸스제우스 신에게 봉헌했으며, 아테네 근교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신도시 하드리아노폴리스를 건설하고 이 도시 안에 스토아라고 불린 건축물과 판헬레니온을 세워 이를 "낭만적으로 이상적인 그리스 통일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바쳤다.

129년 봄, 하드리아누스는 다시 그리스 아테네에서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동해 이 일대의 그리스 도시들을 들리며, 이 일대의 인프라 건설을 지시 내렸다. 하지만 후술할 132년 유대인 반란을 비롯해, 이집트 방문 중 총애한 안티누스가 나일강 유람 중에 익사해 죽는 일을 겪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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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하드리아누스의 아나톨리아 남부 아탈리아(Ἀττάλεια) 방문을 기념하여 세워진 개선문 형태의 성문

이처럼 하드리아누스는 재위 기간의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속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통치 상태를 점검했고, 공공 건축물을 새로 세웠다. 실제 하드리아누스의 예방 조치 덕분에 로마는 이후 흔들리던 시기에도 버텨낼 수 있는 기반을 쌓았다는 것은 긍정적 부분으로 인정받고 있다.

반면 그의 속주 순방은 수도에서의 황제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며 당대 원로원 계급으로부터 비판받기도 했으며[13], 제국의 재정을 비효율적으로 소모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당대부터 나왔다.

실제 하드리아누스가 히스파니아를 떠나 아프리카 속주와 이집트, 그리스 등을 순방할 당시부터 부유하기로 유명한 이 일대 도시들은 황제와 그 일행들의 체류비용을 떠맡은 탓에 적지 않은 재정 부담을 피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때 황제와 원로원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일대에 지진피해가 벌어지자, 이런 사정을 감안해 복구 자금을 투입해줘야만 했다.

또 그의 제국 순방 중 명령들은 당시 로마제국의 법들과 각 속주에서 내려온 전통 모두를 무시한 독재행위했다. 좋게 말하면 "순방"과 "꼼꼼한 황제의 열정"이었을 뿐, 로마인들과 속주민들 눈에는 황제가 법과 전통을 어기고, 권한을 남용해 들리는 지역마다 "감놔라 배놔라"하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로마인과 속주민 모두에게 "특유의 이중적이고 자기 과시와 잘난척을 숨기기 위한 열정과 과장"이라고 비난받았다.[14]

따라서 속주민들에게도 하드리아누스가 취한 제국 순방은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겠다면서 모순되게 황제가 원로원, 각 속주의 지방정부에 직접 개입해 황제 입맛대로 현지사정을 무시했다고 욕을 먹었다. 그 결과 치세 후반부터는 "황제가 각 지역 사정에 개입해, 지역마다 다른 민족별 자치를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범그리스적인 헬레니즘을 강요하느냐"는 비난이 나오고 이는 사후에도 그가 좋게 평가받지 못한 이유가 됐다.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에 따른 재정낭비란 말은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하는 곳이 항상 '속주의 주도나 대도시'란 전제가 되어야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화려한 축제를 하거나 속주 유지들에게 대접을 받을수있기 때문이다.[15] 물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아테네같은 그리스 도시를 갔을때나 이집트를 방문했을때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시간과 돈을 쓴것은 맞지만, 줄곧 힘든 순행길에 나섰던 황제에게 이정도의 사치는 허용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순행이 전성기에 도달해 있던 제국의 재정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어렵다.

파일:하드리아누스의 순행로1.jpg
하드리아누스의 순행로[16] (AD 117~134) (원로원 속주(분홍) / 황제직할 속주(보라) / 동맹국(클리엔테스)(연보라))

파일:하드리아누스의 순행로2.jpg
하드리아누스의 순행로 2 (AD 121~132의 순행로)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을 수행했던 역사가 플로루스반어법을 써서 하드리아누스를 칭송하는 시를 바쳤다고 한다.
저는 카이사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브라타니아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게르마니아 사람들 사이에서 나쁜 짓을 하려 몸을 숨기고
스키타이의 혹독한 추위에 고난을 겪어야 하니까요.

이에 하드리아누스는 아래의 답시를 지었다고 한다.
나는 플로루스가 되고 싶지 않소.
여관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싸구려 술집 사이에서 나쁜 짓을 하려 몸을 숨기고
배부른 벼룩들 사이에서 고난을 겪어야 하니까.

2.3.2. 유대인 문제

하드리아누스는 즉위 직후 전임자인 트라야누스 시절 일어난 유대인 대반란인 키토스 전쟁을 해결해야 했다. 하필이면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에 원정을 나가 있을 때 뒷통수를 친 것인지라 제국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반란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으며, 무척 강경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은 132년 또 다시 대규모 반란인 바르 코크바의 난을 일으켰다.[17] 하드리아누스는 134년 이를 진압한 이후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할 겸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강제이주시켰다. 그렇다고 유대 전체에서 유대인을 몰아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추방했을 뿐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유대인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어가면서 많은 유대인이 외지로 이주한 것은 사실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고 바꿔버렸는데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성이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유피테르를 기리는 신전이 있는 로마의 언덕이었다. 이는 로마 입장에서 유대인에 대한 인내심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유대인들 특유의 디아스포라 성향은 그 전에도 강했으며, 생각과는 달리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해서 로마인으로 동화된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한편, 역으로 유대교로 개종해서 유대인 집단에 합류하는 기존 로마인들도 많았다.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를 이후 로마 제정이 계속 엄수하진 않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예루살렘에 다시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모여들긴 했다. 그러므로 현대의 유대 문제를 하드리아누스에게 묻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 일어난 유대인 반란, 일명 바르 코크바의 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면 다음 링크를 참조할 것. 링크

2.3.3. 국방 정책과 군대 개혁

즉위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확장 정책을 중단하고, 방위 우선 정책으로 제국의 기본 기조를 변동시켰다.[18] 그는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수도 로마에 머무르지 않고 곳곳을 돌아 다니며 제국의 방위 체제와 행정 체계를 재정비했다. 121년부터 시작된 그의 순행은 제국 곳곳에 발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영국에 건설된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들 수 있다. 트라야누스가 시행한 확장 정책은 제국의 판도를 상승시키는 데 큰 공헌은 했으나, 공격 위주의 정책 시행으로 말미암아 제국 내부의 이완과 균열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제국 곳곳을 순행해 행정을 바로잡고 군단을 시찰하며 문제점을 바로잡아 나갔다. 이러한 그의 공적은 당대에는 별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이후 로마 제국이 위기에 빠져들었을 때 강화된 군단과 잘 정비된 행정 체계로 인해 제국의 위기를 어느 정도 지연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 대단한 선견지명과 넓은 시야로, 군주로서의 하드리아누스가 가장 평가를 잘 받아야 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제국 전역을 순행하면서(경비, 하사금, 건축자금) 엄청나게 돈을 써버려서 유대 전쟁으로 인한 지출과 함께 제국 재정을 악화시켰다. 그로 인해서 후임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때 은화 함유량을 줄이면서 긴축 모드에 돌입하게 된다.

또 전임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브리타니아(브리튼 섬)의 스코틀랜드를 제외하고 정복했으나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이 자주 남하하자 그 경계에 거대한 장성, 즉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라고 일컬어지는 성을 쌓았다. 이 장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122년 브리타니아 시찰 도중 내린 명령에 따라 5년여의 공사 끝에 완성한 폭 3m, 높이 5m의 장대한 성벽이었다. 섬의 동쪽 끝인 뉴캐슬에서 서쪽 끝인 칼라일까지 장장 118km를 거의 일직선으로 건설했다. 장성에는 모두 15개의 요새를 설치했고, 요새마다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500∼1,000명의 병사를 주둔시켜 북방의 동향을 살피도록 했다. 또 성벽 바깥으로는 폭 8m, 깊이 2.5m의 해자까지 둘러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오해하면 안되는게 성벽에는 문이 있었고 북부 지역에 로마식 도로가 깔려 있었으며 로마인 도시도 있었다.[19]

로마 제국 쇠퇴 후에는 잉글랜드가 이 장성을 17세기까지 스코틀랜드에 대한 방벽으로 이용했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정치적 독립을 향유했고 전통 문화도 지켜냈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장성은 그 원형이 대부분 보존돼 있어 로마 시대의 축성술과 군제 연구에서 귀중한 자료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로마군에서 카타프락토이가 처음 도입되었으며 (ala I Gallorum et Pannoniorum catafractata) 알란족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 창을 들고 팔랑크스 형태의 방진을 짜는 군단병이 기록에 등장했다.[20]

2.3.4. 속주 행정

하드리아누스는 황제가 로마에 있지 않아도 충분히 제국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티베리우스 이후 100여년만에 다시 로마인들에게 보여줬다. 그의 치세동안 이탈리아는 다른 속주와 다를바 없는 위치처럼 보였다. 특히, 그의 치세기간 중 주목할 부분은 속주 행정 부분이었다.

로마 제정 시대의 황제들은 속주 총독, 재무담당관, 속주행정장관, 황제대리인들이 보내온 보고서와 편지 등을 받고, 그들과 끊임없는 서한 교환을 통해 속주 행정을 처리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아예 순방길에 나선 뒤 직접 속주에 들려 이 일대를 시찰하고 속주민들의 불편사항을 황제가 직접 받아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는 매우 지엽적이고 사소할 수도 있는 방법이지만, 하드리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한 이후에도 이런 문제에 상당히 신경썼다. 특히 하드리아누스는 다른 황제들과 달리 "휴밀리오레스 콘트라 호네스티오레스"라고 불린 속주 내 백성을 보호하고, 토착세력과 파견관리의 탐관오리 같은 악행을 황제가 직접 개입해 관리하고 처벌한 일을 직접 맡아 처리할 정도로 꼼꼼했다.

이런 이유로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이르게 되면 제국의 도시화와 문화 발전 및 경제력 향상은 절정에 달했고, 로마 시민권 취득 비율 역시 증가하고 그 대상도 확대됐다. 아울러 하드리아누스는 도시 평의회, 지방 원로원으로 해석되는 데쿠리오네스 의원들과 속주 정무관들에게 "라티움 마이우스"라는 이름의 라틴권을 수시로 부여해, 속주 행정과 속주 내의 로마 시민권 보급에 힘을 쏟았다. 왜냐하면 이는 세수확대와 병력 자원 대상을 확대하는 실질적 효과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2.3.5. 관료제 재편, 확대 작업

당시 로마는 더 이상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이후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의 관료체제만으로 공무를 처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팽창한 상태였다. 이는 하드리아누스 개인이 꼼꼼하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특유의 성향과 맞물린 탓에, 제국 관료제 재편과 확대로 이어졌다.

하드리아누스는 황제를 최정점으로 하는 관료제를 새롭게 보완해 다시 만들면서, 오늘날 관료제와 마찬가지로 로마 중앙정부 관리들에게 행정실무능력과 체계화된 처리능력, 황제와 국가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규정해 이를 요구했다. 또 그는 관료들에게 넉넉한 보수를 지급하고, 업무 난이도에 따라 보수액을 지급하는 차등보수제도도 적용시켰다.

다음으로 그는 클라우디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 아래에서 정비된 네 개의 행정부서 외에 각료급 두 부서를 새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클라우디우스보다는 베스파시아누스처럼 행정부서의 책임자에는 해방노예가 아닌, 기사계급 로마인들을 기용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아울러 관료들의 직위도 에그레기우스, 비르 페르펙티시무스 같은 칭호를 붙여 다양화시키고, 직위분류제에 따라 봉급체계도 세분화시켜 운영케했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로마 황제 관료들은 서열에 따라 연봉을 받게 되었는데, 그 예로 프로쿠라토르(지방징세관)의 경우에는 계급에 따라 최하계급 공무원은 6만 세스테르티우스, 최상위계급은 3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연봉으로 받았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 시대 후반을 기준으로 로마 정부의 부처는 다음과 같이 완성되게 된다.
  • 4부 :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창설, 베스파시아누스 시대때 일부 조정
    • 아브 에피스툴리스(우정부)
    • 아 리벨리스(법무부)
    • 아 라티오니부스(재무부)
    • 아 스투디이스(교육부)
  • 각료급 2부처 : 하드리아누스가 창설
    • 제국 우편 및 통신 담당관
    • 교통 담당관

이중 새롭게 창설된 각료급 부처 2개는 징세 체계, 특히 5%의 상속세 징수 업무도 처리했는데, 하드리아누스는 여기에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했다. 따라서 프로쿠라토르를 감독하는 국가기관이 세금징수회사들을 감독하게 됐으며, 제국 각지로 파견된 프로쿠라토르들은 제국 전역에 파견된 다음 빠르게 상속세와 직간접세를 징수해 이를 로마로 옮겼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이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처럼 기사계급들을 프로쿠라토르에 임명하면서도, 그들과 달리 군미필자들을 민간부서 고위 행정담당 관료에 임명했다. 또 그는 국고 담당 대리인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면서, 기사계급 출신이 군대에 가지 않아도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으며, 로마 국가행정 내 민간업무와 군사업무를 분리시켰다. 따라서 이 조치 이후 기사계급들은 군경험 없이도 고위직 진출이 가능해지게 됐다.

현대에 이르러 하드리아누스의 내정 개혁은 과거처럼 마냥 좋게 평가받고 있지 않고, 일정부분 과장되고 고평가받고 있다고 지적받는다. 실제 그의 조치들은 문제가 많아, 후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조치들을 원상복귀시켰다. 또 그의 결정들은 군사령관들이 민간행정업무에 무지해지는 상황을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2세기 중후반~3세기에 이르러 행정상 큰 약점을 드러냈는데, 이는 점증된 군국화를 유발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이 방치되면서 군인황제시대로 불리는 3세기의 위기 기간에는 이런 혼란을 심화되게 된다. 또 속주 내 군행정과 민간행정의 분리로 이어진 탓에 3세기부터는 관료와 군대의 업무 공조 등과 같은 부분에서 여러 혼선과 갈등도 유발했고, 황제들이 적절하게 개입하지 않는 이상 문민통치의 군대 종속화를 심화시켰다. 또 황제가 군훈련만 받으면 고위 행정담당업무를 맡도록 한 조치 역시 원로원과 기사계급 내의 군기피 풍조도 조장하는데 일조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하드리아누스의 결정들은 로마 경제 순환마저 수동화시켜 경제적 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받는다. 이런 이유로 효율성과 연속성을 중요시여긴 하드리아누스의 여러 개혁 중 일부 개혁은 학자들에 따라 그 의견이 갈리고 있고, 부정적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는 실정이다.

2.3.6. 항구적 '황제 자문 회의' 창설

하드리아누스는 관료제를 재편해 4개 부처 외의 2부처를 만들면서, 아우구스투스 이래 만들어진 비공식 자문 회의를 아예 항구적인 형태의 황제 자문 회의(프린켑스 자문 회의)로 만들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회의 기구 안에 법률가와 원로원 의원, 고위 관리들을 구성시켜 황제가 민법과 형법을 제정하고 해석하는 것에 도움을 얻도록 하면서, 정책 수립도 용이할 수 있게 변모시켰다. 하지만 이런 프린켑스 자문 회의의 항구적 창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레 원로원의 행정적 조정 기능을 약화시켰다.

2.3.7. 법률 정비와 사회 개혁

하드리아누스는 스토아 학파에서 주장한 내용과 본인의 철학에 따라 약자와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에 상당히 노력했으며, 법률 정비와 프린켑스 이름으로 발의된 칙령, 고시, 명령서, 답변 역시 효율성과 논리, 법적 근거의 명확성 등에 의거해 발표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가 취한 법률 정비에서 주목할 부분은 후임자 시대때 더 정교해지게 된, 일관된 판결과 그 법적 구속력의 확립이었는데, 이는 동로마 제국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로마법을 정비할 때, 높이 평가되고 활용될 정도였다.

황제는 살비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명해, 법무관들이 황제나 원로원의 결의에 의하지 않고는 임의적인 수정, 첨가를 허용하지 못하게 법적 구속력을 만드는 고시를 만들었다. 이는 하드리아누스가 평소 법무관들이 논리적이고 법률적이기보다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전임자들의 태도와 절차를 따른 것을 매우 못마땅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 황제의 고시 덕에, 법무관들은 공화정 초기부터 내려온 전임자들의 선례를 그대로 답습하고 오래되고 유연하지 않는 옛 규칙들을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임의적으로 해석하기 힘들게 됐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에 있는 법무관들이 관장하는 법원의 과중한 공판 일정을 완화시키고, 황제와 법무관들의 업무 경감을 위해 노력했다. 본국 이탈리아를 네 개의 사법구역으로 분할해, 각 구역에는 집정관급 순회판사에게 맡겼다. 황제, 법무관들의 업무 과중 원인인 상속, 신탁, 후견인 소송을 순회판사가 담당케 했다. 그러면서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인들의 불만을 초래한 지나치게 느린 판결 속도가 신속하고 일관되게 진행토록 바꿨는데, 이탈리아 내 자치체 형태의 법원들로부터 받은 항소 문제도 순회판사들이 담당케했다. 따라서 황제의 이런 개혁은 로마인들에게 호평을 받았는데, 반대로 원로원은 불만이 많았다.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가 법무관들이 논리적, 법적 근거에 따라 일처리를 하게 하고, 원로원 내 사법 권한을 조정하자 하드리아누스를 불쾌하고 꼬장꼬장한 노인네로 치부하고 미워했다. 그래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즉위 후, 원로원의 불평해소를 위해 하드리아누스의 이런 조치를 되돌렸다. 하지만 이는 현명치 못한 결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황제와 법무관들의 업무량을 과중시켰고, 로마인들의 불편을 야기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사후, 즉위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개혁조치 방법을 복원시켰고, 하드리아누스처럼 법률문제를 다뤘다.

이러한 법률 정비와 개혁처럼 하드리아누스는 황제가 가진 권위와 권력을 활용했다. 그는 노예와 가정폭력 피해자 등을 위한 약자보호, 법과 정의를 통한 비인륜적 범죄자 처벌에 자신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과거의 도미티아누스와 비슷했는데, 하드리아누스는 주인이 노예를 죽이고, 거세 또는 고문하는 것을 불법으로 명확히 명문화했고, 노예들이 검투사로 팔리거나, 불륜과 성욕을 위한 목적으로 팔리는 것 역시 악의적인 불법으로 규정해 그들을 보호했다. 또 그는 파테르 파밀리아스(가부장)들의 생사여탈권을 법적으로 박탈해, 미성년자들이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버림 당하는 것을 막았으며, 부모가 죽은 뒤 미성년자녀들이 친인척에게 재산 상속과 소유 권한을 뺏기거나 일부만 받는 일 역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이들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그들을 황제의 권력을 이용해 도왔다.

이 외에도 하드리아누스는 네르바, 트라야누스의 이탈리아 내 빈민 가정 자녀 양육 기금을 분배하고 집행하기 위해 아동복지 감독관을 임명했으며, 제국 각지의 은퇴교사와 중등교육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 운영했다.

2.4. 후계자 선정과 사망

오랜 시찰과 여행은 그의 체력을 빼앗아 갔다. 40대의 한참 나이에 즉위했고, 사자 사냥을 취미로 여길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자랑했으나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제국 변경 시찰에 쏟다 보니 자연히 가혹한 자연 환경에 노출되었고,[21] 성격과 업무 스타일 역시 지나칠 정도로 완벽주의자인데다 논리적이고 열정이 넘친 터라, 황제의 체력은 132년부터 확실히 약화됐다.

결국 재위 기간 발생한 유대 분쟁 직후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근교의 티볼리 황제 별장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관해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일종의 수종 증세로 인해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목숨을 끊으려고 여러 번 시도했는데 그때마다 시종과 측근들의 만류로 모두 실패했다. 이때 그는 독약을 마시려고 하거나, 단검을 들어 자결하려고 했고, 마스토르라는 이름의 황실 노예에게 자신의 옆구리를 검으로 찔러 죽이라고 명령한 다음 젖꼭지 바로 아래의 지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스토르는 오랜 설득에도 차마 자신이 모시는 황제를 찌르지 못하겠다고 줄행랑을 쳤고, 다른 시종들도 마스토르처럼 황제의 간곡한 명령을 한사코 따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하드리아누스는 절망에 빠졌는데,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말년의 이런 자살 시도와 까칠해진 성격 탓에 인망도 잃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하드리아누스는 책임감이 강한 탓에 국정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귀국한지 2년째가 되는 서기 136년, 건강이 갈수록 악화된 하드리아누스는 후계자 선정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그해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라는 에트루리아 지방 출신의 로마 귀족 청년을 양자로 입양하면서, 이름을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게 했다. 이 귀족 청년은 금발머리와 벽안을 가진 상당한 미남으로, 그 가문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부터 내려온 귀족 집안이었고 그 평판은 원로원과 로마 안팎에서 대단히 훌륭했다.

더군다나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118년 네 명의 집정관 사건때 처형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의 사위인 데다,[22] 원로원 내의 유력 가문들과 끈끈한 인맥으로 연결된 터라 원로원과 사이가 냉담한 늙은 황제에게 훌륭한 후계자감이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양자로 삼은 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된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136년 집정관에 임명했다.

그런데 이때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매부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루수스 세르비아누스가 자신의 이런 결정을 반대한다고 생각해, 90살의 세르비아누스를 반역죄로 기소했다. 또 하드리아누스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남자혈육이었던, 누나 도미티아 파울리나와 세르비아누스의 18살 손자(하드리아누스의 생질손)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23]도 함께 기소해 그들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이때 아흔이 넘은 세르비아누스와 황제의 생질손 푸스쿠스는 황제의 양자 선정 결정 이후에도, 쿠데타를 시도하거나 그 세력을 과시하지 않은 탓에 위협요소가 아니었다고 한다.[24]

따라서 90이 넘은 세르비아누스는 향을 피워놓고 신들에게 기도하는 등 자신과 손자의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까칠해지고 예민해진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호소에도 그들이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해 자살을 강요했고, 그들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자택에서 자결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세르비아누스는 유언으로 "유피테르 신이시여, 하드리아누스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고통을 겪게 해주시오!!"는 말을 남겼다. 이 사건 후, 하드리아누스의 까칠해진 성격과, 그가 자신의 누이 일가를 비롯한 혈육들과 아내에게 매정했던 일화가 다시 조명됐다.

이렇게 하드리아누스는 매부와 생질손을 죽인 뒤, 양자로 삼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밀어줬는데 다음해 판노니아 총독으로 떠났던 후계자는 폐결핵에 걸려 138년 1월 요절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군대와 백성들에게 지불한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잃어버렸다."며 분통을 터트렸고, 다시금 후계자 고민에 빠져들었다. 따라서 그는 138년 오랜 친구이자 인척관계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사위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운 후계자로 선정한 뒤 통치권을 넘겨주고, 아예 로마를 떠나 바이아이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138년 7월 10일 붕어했다.

하드리아누스가 붕어할 당시, 그의 명에 따라 건설되고 있던 하드리아누스 영묘(산탄젤로 성))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던 터라, 로마 전기 저자들은 황제의 유해가 화장돼 맨처음 묻힌 곳은 로마가 아닌 바이아이 근처의 푸테올리였다고 전한다. 묻힌 곳은 공화정 말의 정치인 키케로의 소유지였던 곳이었다고. 그러나 하드리아누스의 유골함은 얼마 안 가 로마로 이송됐고, 영묘 완공 전까지 도미티아가 공동묘지[25]에 임시안치됐으며 다음해가 되고 하드리아누스 영묘가 완성되자 아내 사비나의 유해와 함께 나란히 매장됐다.

3. 성격 및 기행

파일:하드리아누스 조각상(복원).jpg
하두리아누스 조각상 색상 복원.
이전 황제들과 달리 풍성하게 기른 수염이 특징이다.
  • 로마 엘리트 중에서 가장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었으며, 덕분에 그리스 철학에도 꽤 뛰어난 학문적 식견이 있었다. 위의 조각상에서도 보이듯이 그리스 문화의 상징인 수염을 기른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26] 하드리아누스 이후 상당수의 황제가 수염을 기르면서 유행을 선도했다. 네로처럼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황제였지만, 네로는 취미에 매몰되어 국정을 소홀히 한 반면 하드리아누스는 그렇지 않았다.[27] 굳이 흠을 잡자면 티볼리에 엄청난 돈을 들이 부어 별장을 지은 정도. 다만 그가 평소에 제국 운영에 쏟아부은 열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애교라고 봐줘도 될 듯하다. 이후 로마 황제들은 수염을 기르는 황제들이 많아지게 된다.[28] 한마디로 엄친아.
단, 제국 내 최고 대학인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에서 학자들과 학술 토론을 벌여 그들을 제압했다는 일화에 진지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매우 우스꽝스러운 짓으로, 이는 오히려 하드리아누스 특유의 성격적 결함을 보여주는 일화에 불과하다. 거기 있던 학자 중 하나는 "토론이란 등 뒤에 30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있는 남자가 늘 이기는 거라고" 훗날 진지하게 언급했었는데, 이는 단순한 볼멘 언급이 아니다. 철학 부분에서 당대 지식인 평균을 웃돌긴 했으나 석학급은 분명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만심과 허영심이 대단히 강한 하드리아누스가 권력으로 토론회를 열어 학자들을 찍어눌러 잘난 척 했던 것이 진실이다. 자신이 예수의 제자인 12사도와 동등하다고 생각했던 말년의 콘스탄티누스 1세조차도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자기 학식을 전문가 집단에게 과시하진 않았었다
  • 젊은 시절부터 상당한 미남이었지만, 완벽주의자였고 아내와 누나 일가에게 꽤나 무관심했고 차가운 면모가 많았다. 이런 이유로 하드리아누스는 전임자 트라야누스, 후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많이 비교됐다. 특히 하드리아누스 특유의 누나, 아내를 존중하면서도 얼음처럼 차갑고 사무적으로 대한 이중적 태도는, 그의 회의주의적이고 복잡한 성격과 맞물리면서 세간에 크게 비난받았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태도에도, 누나 부부와 달리 아내 비비아 사비나 황후에게는 늘 예의를 갖췄으며 많은 여행에 아내 사비나 황후를 동반하는 등 자신이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함을 보여줬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와 사비나 황후는 겉으로는 서로 성적 매력조차 없는 부부 사이 같으면서도, 미묘하고 복잡했다고 한다.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이러한 분위기를 잘못 읽지 않는 것은 당시 비서관들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내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가 하드리아누스 귀에 들어갈 경우 이는 곧 불경이자 반역으로 엄하게 처벌됐기 때문이다. 이는 사비나 황후가 설령 관용으로 용서해준다고 해도, 통하지 않았는데 이 문제로 황제와 황후는 크게 서로에게 삐쳐서 꽤 오랜시간 각방을 사용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한 비서관은 이 일로 목숨만 건질 정도로 크게 처벌받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역사가로 잘 알려진 수에토니우스다. 이때 하드리아누스는 수에토니우스의 저질적이고 비방적인 발언과 비열한 행동을 자신이 직접 본 직후 격분했다. 따라서 사비나 황후의 용서에도 황제는 그의 목숨만 살려줬을 뿐, 즉각 파면조치케 한 다음 공직 근처로 얼씬도 못하게 만들면서, 가차없이 수에토니우스의 남은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 오늘날에는 오현제 중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로마 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찬사를 받지만, 당대 로마인들에게 비난도 꽤 많이 받았던 황제였다. 수많은 로마인들에게 하드리아누스가 비난받은 첫 번째 이유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스러운 즉위과정과 지나친 빵과 서커스 제공 때문이었다. 이중 후자는 의외의 평가일 수도 있는데, 당시 로마인들은 하드리아누스가 몇 주에 걸처 계속 원형경기장에서 축연을 베풀자 "우리에게 이런 것이나 즐기면서, 당신이 왜 황제에 올랐는지 무시하라는거냐"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 다음으로 그가 비난받은 이유는 하드리아누스의 정책과 예술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이었는데, 이 부분에서 로마인들은 "우리에게 네로에 대한 기억과 악몽만 되살려준다"고 비판했다. 실제 로마인들은 하드리아누스가 과거 네로처럼 노래를 하고 그림을 그리며, 시를 쓰는 행동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는 그가 사후에도 트라야누스나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보다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 성격이 상당히 복잡한데다, 자기 모순적이었고 말년에는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며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어느 정도로 복잡한 지, 젊은 시절부터 보통은 친절하고 밝으면서도 화가 나거나 자신의 기준에 어긋나면 무서울 정도로 잔인하고 냉혹했다. 또 개인적으로는 회의주의자이자 신을 크게 믿지 않는 이성적인 사람임에도, 막상 폰티펙트 막시무스로서 자신처럼 신을 생각하면 가차없이 처벌하고 용서치 않았다. 또 과거 티베리우스 황제처럼 하드리아누스 역시 점성술과 별점을 즐기고 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의 언행을 기록한 《황제 실록》에 따르면 '성격은 복잡하고 변덕스러웠다'. 나중에 늙었을 때는 '노친네 성격 한번 드럽게 까칠하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29] 가까이 하기 어려운 성격임에는 분명해서, 젊었을 때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했던 것도 그의 까칠한 성격이 한 원인이었다.
  • 하지만 의외로 훗날의 콤모두스가 그랬듯 기독교도들에게 대단히 유화적인 황제였다. 고발 자체를 거의 받아주지 않았던데다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는 걸 여러 차례 밝힌 나머지 적어도 그의 치세에는 두드러지는 박해가 없었고, 전임자 때보다는 기독교도들이 살기가 훨씬 나아졌다. 전임자 트라야누스는 대놓고 색출해서 탄압하거나 한두 사람의 무고로 잡아죽이는 걸 꺼렸을 뿐 본심은 탄압에 있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생각보다 적극적인 기독교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태도였다. 이것은 트라야누스, 콤모두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과의 성격 차이가 큰 이유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기독교에 대해 보다 알게된 후에는 의외로 헬레니즘과 꽤 비슷하면서도 다른 기독교 사상의 특이한 면모 탓에 기독교 혐오적 생각과 함께 당시 위기에 처해 있었던 제국의 상황 탓에 기독교에 대해 베풀 관용이 거의 없었던 반면, 하드리아누스 때 제국은 상당한 여유가 있었던 데다 하드리아누스 자신이 기독교도들 자체를 대단히 재미있고도 유치한 웃기는 인간들로 봤기 때문에 탄압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던 게 이유였다. 콤모두스는 전반적으로 제국 통치든 철학이든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놓아둔 것이었고,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와는 달리 기독교에 대해 진심 어린 경멸의 감정은 없었기에 하드리아누스보다는 좀 더 진지하게 대했던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딱히 기독교에 잘해준 것도 없었기에 기독교와 하드리아누스는 서로 피해도 비방도 주지 않은 쿨한 관계에서 끝났다.
  • 까칠하고 모난 성격과 별개로 재능은 상당히 뛰어났다. 문학, 수학, 기하학, 회화, 악기 등에서 초일류였고, 젊은 시절부터 사냥을 즐길 정도로 무예에 굉장히 능했다. 로마 황제들 중에서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이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물은 매우 드물었다.[30]
건축가로도 뛰어났다. 지금까지도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남은 판테온은 그가 착안해 설계한 것이며[31][32] 티볼리에 지은 광대한 별장에도 그의 취미나 미적 감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뒤에서 설명하듯 하드리아누스는 엄청난 그리스광이었는데, 황제 권력을 이용해서 아테네에 도시 하나를 지어서 바쳐버렸다. 이후 자기가 지은 신도시와 원래 도시를 구별하는 지점에 여기까지는 테세우스의 도시, 여기서부터는 자기의 도시라는 개선문을 만드는데, 허영심이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33][34] 이 신도시 지역은 오늘날에도 아테네의 대표적인 부촌으로 꼽히는 플라카 지역으로, 이곳에 그가 만든 개선문과 아고라의 유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와 가까워서 사람들은 이곳도 그냥 고대 그리스 때 도시려니 하고 그냥 지나친다. '아드리아노플'로도 불리는 '하드리아노폴리스'(에디르네)도 그가 지어 그의 이름을 딴 도시이다.
그는 123년 클라우디오폴리스(현 터키의 볼루)를 여행하던 중 안티노우스(안티누스)라는 청년과 만난 후 연인 관계가 되었다. 제국은 순회할 때에도 안티노우스를 늘 동행하고 다녔다고. 그러다 130년 이집트에서 그가 죽었을 때 이집트에 안토니오폴리스라는 도시를 세워줬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안티노우스는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 물려 죽었는데, 마침 이집트에선 악어에 물려 죽은 사람은 신이 된다라는 믿음이 있는 걸 안 하드리아누스는 즉시 안티노우스를 신으로 삼아 신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안티노우스 신앙은 그리스 문화권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거기에 더해 안티노우스를 조각한 석상을 제국 전역에 뿌렸다. 전역을 시찰할 때마다 보기 위해서였던 듯? 정확히 말해 황제가 명령했을 수도 있지만 안티노우스 신앙에 빠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지금도 세계의 아무 고전 석상 박물관에 가보면 하드리아누스 석상과 안티노우스 석상은 늘 함께 둔다.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우스가 연인 관계였고, 하드리아누스가 안티노우스를 진심으로 아꼈다는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는 매우 많지만, 정작 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나 연인 관계가 되었고 그 후 관계가 어떠했으며 등에 대한 내용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안티노우스의 죽음도 사실 미스테리다. 하드리아누스는 나일강에 빠져 악어에게 끌려가 질식사했다는 식으로 결론내고, 안티노우스 신앙을 퍼트렸지만, 안티노우스가 타살되거나 자살했다는 의혹도 많다. 가령 황제와 안티노우스의 친밀한 관계를 질투한 궁중 암투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식이다.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우스가 이집트를 방문할 당시는 오시리스 축제 기간이었는데, 하드리아누스가 큰 병에 걸리자 자신의 희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현지 믿음을 듣고 스스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안티노우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었고, 하드리아누스 본인이 인신공양을 증오해 제국 내에서 완전히 금지했다는 것들을 보면 둘 다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37] 안티노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많이 남지 않은 이유는 하드리아누스 본인이 제거했기 때문이란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아무래도 종교화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인간 내력은 별 도움이 안 되는 데다, 안티노우스와의 사생활은 자신의 기억과 추억만으로 충분하다고 봤을 수도.
  • 대중들에게는 남자애인이자 최측근이며 친구 역할을 한 안티노우스가 유명하나, 하드리아누스는 엄연히 아내가 있었던데다 놀랍게도 애처가였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내 이름은 비비아 사비나(Vibia Sabina)인데, 그녀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친혈육으로 지체 높은 공주였다. 비비아 사비나는 남아있는 조각상, 동전 도안 등에서 드러나듯 오늘날 기준으로도 대단한 미녀였는데,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까칠하고 변덕스러운데다 괴짜 기질이 다분한 남편 하드리아누스의 성미를 잘 이해해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아내를 무척 존중하고 세심한 부분까지 챙겨준 애처가였고, 아내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 매년 발행하는 주화에 반드시 아내의 얼굴도 넣도록 하고 이를 발행케했다. 또 모든 순행에 아내를 대동해 먼저 편의를 봐주고, 아내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주거나, 누군가 아내에게 안 좋은 소리나 뒷담화를 했다고 보고가 올라오면 확인 후 반역죄로 엄히 처벌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하드리아누스는 '자식 새끼 있어봤자 머리만 아파'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 조작된 서술들로 가득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아내를 홀대하고 구박해 자살로 몰아 넣었다고 한다. 허나 하드리아누스는 아내가 자신보다 먼저 사망했을 때 진심으로 슬퍼했고, 호사가들의 주장과 악명 높은 위서 내용처럼 설령 그렇게 하려고 해도 상술했듯 비비아 사비나 황후한테 그렇게 할 수 없던 위치였다. 왜냐하면 아내의 모친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조카딸이었고, 아내의 외할머니는 황제의 하나뿐인 누나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촌수로는 멀어보일 수 있어도, 누나의 자녀 및 그들의 딸, 사위 외에는 친혈육이 전무한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하드리아누스의 장모는 황제의 친딸과 같은 위치였던데다 비비아 사비나는 친혈육 그 이상으로 선황이 무척 아낀 공주였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가 남자애인들에게 빠져 아내의 아우구스타 직위를 박탈했다거나, 아내를 구박해 자살로 몰아 넣었다는 이야기는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취급받고 있다.
  • 어린 시절부터 괴팍하고 워낙 입체적인 성격을 가진데다, 잔정도 없었음에도,소수에게는 대단히 자상했고, 애뜻했다.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당숙모이자 양어머니인 플로티나 황후이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녀를 자신의 어머니로 여기고 진심으로 그녀를 따랐던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고대 기록들에 따르면, 정적들은 둘이 불륜 관계 비슷하지 않느냐고 할 정도로 그 사이가 친모자 사이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대부터 이보다 유명하고, 하드리아누스가 진심으로 애뜻한 이들은 유모 게르마나와 그녀의 남편 및 이들 자녀들이다. 이들은 모두 게르만족으로 해방노예였는데, 하드리아누스는 이들을 아랫사람으로 취급한 누나와 달리, 그들을 가족이자 부모로 여겼고, 게르마나 자녀들을 친구이자 의형제로 생각했다. 하드리아누스는 게르마나 부부와 이들 부부 자녀들에게 일찍 자유를 줬는데, 본인이 즉위하자마자 이들을 해방노예 이상의 기사계급으로 일찍부터 대우했다. 특히, 유모 게르마나 부부는 그에게 평생 특별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이들을 제국 순방에 데리고 갔으며, 자신이 죽은 뒤에도 로마 근교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이들 일가에게는 따로 본인 재산 일부를 줬다.[38] 물론, 게르마나와 그 남편, 자녀들은 하드리아누스에게 평생 헌신하면서, 하드리아누스의 온갖 기행과 짜증도 이해할 만큼, 주변이 볼 때 그 충정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들 외에도 하드리아누스가 자상하고 애뜻하게 여긴 대상은 아내 비비아 사비나의 이부자매인 소 마티디아,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들에게 매우 예의바르고 신사적으로 대했는데, 형식적으로만 존경을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두 사람에 대한 존경을 수없이 내보이면서, 두 사람의 요청은 따로 들어줬다.
  • 이미지와 달리 애처가였고, 결혼 전부터 장모 살로니아 마티디아가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좋아한 사위인데다, 아내의 자매들인 소 마티디아와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를 친남매처럼 여겼을 정도로 처가 식구 전체와 사이가 매우 좋았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하드리아누스는 처가 쪽 남자혈육들을 일찍부터 본인 가족으로 여겼고, 이들에게 다음 황제와 다다음 황제를 모두 맡겼다. 이중 그가 신경 쓴 쪽은 아내 비비아 사비나의 자매 중 유일하게 자녀를 둔 처제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였다. 이유는 그가 존경하고 존중한 처형 소 마티디아와 아내 비비아 사비나가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자녀와 사위, 손주를 "내 아들", "내 사위", "내 손자" 등으로 아낀 점도 컸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장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머니, 소 파우스티나의 외할머니이다. 추가로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남편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인데, 그는 하드리아누스와 동서 지간을 넘어,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말한 친구이자 친형제 이상의 돈독한 관계였다. 이런 이유로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에게 친누나도 있고 누나에겐 장성한 남자 손자까지 있음에도 이들을 철저히 무시하거나,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입양한 직후 모조리 자살하도록 명령했다.
  • 당대 로마인답게, 상당히 명예를 중요시 여겼다. 이런 특징 때문에 몸이 심하게 병들어 본인 의지대로 움직임이 어렵게 되자 말년의 어느날 괴로움을 더는 참지 못해 호신용 단검으로 자살하려 여러 차례 시도했다.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늙어 심신이 다 소모되면 추하게 사느니 자살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고 그도 그러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단검을 빼앗아 막자 그 다음엔 자신을 존경해 온 그리스 출신 주치의 헤르모게네스[39]에게 독약 제조를 명령했다. 명령을 안 따를 수도, 그렇다고 존경하는 황제를 죽일 약을 만들 수도 없었던 이 불쌍한 의사는 결국 조제한 독약을 자기가 먹고 자살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사건에 충격받아 그 후 다시는 자살 시도를 안 했지만, 대신 땡깡이 한층 더 심해져서 주변 사람들을 더욱 괴롭게 하는데, 그럼에도 고령의 게르마나 부부는 내색없이 황제의 투정을 모두 받아줬다고 한다. 이들은 황제의 대소변을 모두 받는 등 지극정성이었는데, 게르마나는 남편이 먼저 죽은 뒤에도 자녀들과 함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지극정성이었다. 따라서 화가 풀릴 때까지 매일 난동을 피운 하드리아누스는 고령임에도 일평생 자신을 돌본 유모 부부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용서를 구했다.[40]
  • 어느 날 공중목욕탕에 갔는데 과거 자기 휘하의 백인대장으로 있었던 노인이 벽에 등을 문지르고 있어 왜 그러냐고 물어봤는데, 때밀 돈이 없어서 그런다는 말을 듣고 때밀이 노예를 두 명이나 하사하고 유지비까지 대줬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목욕탕에 가보니 온 사람들이 죄다 벽에다 등을 문지르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걸 본 하드리아누스가 사람들에게 서로의 등을 밀어주라고 했다고.
  • 곱슬머리에 키가 상당히 크며 체격이 좋은 강인한 미남이었지만, 볼에 난 푸른 반점이 콤플렉스라서 수염을 길게 길렀다. 그런데 이 수염이 우아하면서도 고풍스럽고 멋진 금발 수염인 까닭에, 이렇게 수염을 기른 이후부터 이 스타일은 원로원, 기사계급을 넘어 일반 로마평민들까지 유행처럼 따라하기 시작했다.

4.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사회적 변화와 결과

하드리아누스라는 사내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이탈리아 혈통이나 분명 속주 출신 로마시민권자였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로마, 이탈리아 사회 안에서 그의 지위는 세습 원로원 의원임에도 속주 출신의 상류층이었고 그 배경은 칼리굴라의 측근으로 데뷔해 클라우디우스 황제 밑에서 꽃을 피운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와 일정 부분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드리아누스는 기원전 6세기 시작된 공화정 이후 로마를 지배한 파트리키, 노빌레스와는 혈연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로마의 지배자였고, 그 가문은 프린키파투스 이후 제국 관료에서 원로원 의석을 차지한 케이스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 이후, 서기 첫 두 세기의 로마 제국의 변화는 귀족층의 확대였다. 이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두 율리우스 가 황제와 두 클라우디우스 가의 황제 시대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하드리아누스 시대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육들인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3대 못지 않는 로마 제국의 사회적 변화 흐름을 보여줬다.[41] 하드리아누스 시대는 이전까지 갈리아, 히스파니아, 달마티아를 중심으로 확대된 아우구스투스 ~ 도미티아누스 시대까지의 제국 상층부의 교체가 다시 한번 바뀐 굴곡점이 됐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드리아누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동방 속주와 푸닉 지방 출신 부자들이 원로원 의석을 차지하고, 제국의 각계를 장악하게 된 조치가 컸다. 그는 즉위 후 동방 속주 도시들에게 후원을 하면서, 헬라어에 능하고 고급 웅변, 수사학에 능한 그리스, 아나톨리아, 푸닉 출신들을 적극 기용했다. 이 지역 출신 부자, 고대 그리스 폴리스 아래에서의 오래된 그리스 귀족들,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부와 권세를 누린 헬레니즘 세계의 그리스인들, 포에니 전쟁 이후 푸닉지방을 차지한 퇴역병 후손들이 그들인데,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 견제 차원에서 이쪽 인재들을 기용한 도미티아누스를 능가할 정도로 이쪽 출신들을 선호하고 그들이 고위직을 독점할 수 있는 여러 조치를 하사했다. 그 결과, 2세기 중반부터 로마 제국의 상층부는 1세기부터 변호사, 의사, 시인, 작가, 교사, 사업가 등으로 활약하면서 로마와 이탈리아 부동산을 사들인 동방, 푸닉 출신들이 원로원 의석을 꿰차고, 황제 개인비서, 개인교사와 같은 요직을 차지한다. 수에토니우스, 헤로데스 아티쿠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디오 카시우스의 아버지)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합류는 로마 제국의 문화를 꽃피우고 그리스 문화가 로마 제국에 녹아내려 다채로운 문화적 부흥을 꽃피웠다. 하지만 이런 시대적 변화에도 로마 제국은 제국 방어와 정책 결정 등에 필요한 실무에 능한 관료, 군인 집단의 양적, 질적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상류층 그리스인, 푸닉 농장주들을 위해 건국 이래 당연시 됐던 엘리트 집단의 군사 훈련과 군경력 의무를 해제하고, 그들의 로마, 이탈리아 부동산 장악을 태클 걸지 않는다. 황제 입장에선 원로원 안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그들이 자리잡는 것만으로도 이득인 상황에서, 총독이나 군단장으로 나가면 야심을 드러낼 확률이 적은 그들이 더 나았던 배경도 이런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2세기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 로마 제국은 가까스로 유지된 인재풀의 한계를 경험해 군대와 민간에서 두루 활용할 인재에 대한 갈증에 시달린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이는 20세기 후반, 3세기의 위기와 세베루스 왕조의 개혁에 관한 연구가 금석문 해석, 고고학의 발전으로 심화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확인 중이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의 개혁은 오늘날 과거처럼 완벽하다고 찬사받기보다는 그 평가가 조금씩 부정적으로 변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증명하듯, 원로원 구성 역시 다수가 이탈리아 출신과 적절히 섞인 서방, 동방 속주 인재 조합에서 동방 출신들의 약진과 그들의 제국 고위직 장악 흐름으로 바뀌게 된다. 물론, 이런 변화는 네로, 도미티아누스 시대동안 황제가 델라토르 제도, 반역죄, 간통죄 등을 악용해 마구잡이로 공화정 귀족 가문들의 씨를 말리거나, 그들을 몰락귀족으로 만들어 배제하면서 벌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원로원 입성 조건에서 부유한 그리스, 아나톨리아, 푸닉 일대 기사계급, 헬레니즘 귀족 후손들이 우위를 점했던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허나 하드리아누스의 동방 도시 엘리트 선호는 이전의 베스파시아누스, 트라야누스와 같은 방법과는 차이가 있었고, 이런 부분에서 비슷한 비판을 동시대인들에게 들은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명과 암이 뚜렷했다. 권세가들의 파벌화를 심화시키고 제국의 인재풀 한계를 가속화됐다. 디오 카시우스, 헤로데스 아티쿠스, 마리우스 막시무스로 대표되는 그리스, 아나톨리아, 푸닉 출신의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들이 라틴어를 모국어로 사용한 동료 원로원 의원들을 천박하고 헬라어도 모르는 집단으로 깔보는 흐름도 이때부터 가속화되면서, 세베루스 왕조 시대때 벌어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의 여러 갈등 원인이 됐다.

그래서 이런 변화에 대처하고자 한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를 몇가지 철폐한다. 허나 이런 노력에도 하드리아누스가 터트린 둑방의 거센 흐름은 잡히지 않았다. 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흐름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도움 아래 황제가 몸소 서방 일에 신경쓰고 다른 방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책에 불과했다. 그래서 다섯 황제의 해를 거쳐 집권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이런 문제를 해결코자 대대적인 황제 중심의 원시적 도미나투스 개혁을 추진한다.

5. 평가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는 전쟁보다는 평시의 학문과 웅변술에 더 뛰어났다. 동방에 평화가 다시 찾아오자 로마로 돌아온 그는 제사의식, 법, 체육, 교사들에게 관심을 쏟았고, '아네타이움'이라는 학술 기관을 설립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열전>
당대 로마인들과 로마 제국 후기의 고위 관료이자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로 대표되는 후기 로마인들에게 하드리아누스는 늘 변덕스럽고 전쟁보다는 교양과 예술에 심취한 황제로 평가됐다. 또 황제 하드리아누스라는 평가는 적극적인 현군과 변덕스러운 폭군, 놀기 좋아하는 암군이라는 평이 늘 세트로 따라 다녔다.

원로원과 지식인들은 그가 전임 트라야누스와 달리 변덕스럽고 잔혹한 면이 있음을 이유로 그를 네로의 재림이라고 불렀고, 대중들 역시 노래를 잘하고 예술이나 그리스 문화와 심취한 그를 네로의 선한 버전 정도로 평가해 극찬하면서도 불만을 종종 표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전임 트라야누스와 달리 생전부터 악평도 상당했고, 그의 치세 내내 로마 원로원은 이런 저런 이유로 그의 치세를 의심의 눈초리로 봤다.

이런 황제로서의 평가처럼 하드리아누스라는 한 사람으로의 평판도 입체적일 뿐, 극찬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성격이 엄격하면서 때론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까다롭고 냉혹했으며, 불성실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진짜 성실한 입체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생활 방식도 비슷했는데, 하드리아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쾌락을 추구하고 플레이보이 같으면서도 알고 보면 금욕적이고, 짠돌이 같은데 알고 보면 통이 크고 사치로운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저렴한 물품으로 한껏 멋쟁이스러운 면모가 많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여기에 더해 누나 가족과 아내에게 항상 신경질적이고 잔혹할 정도로 비정하면서도, 자신의 아내에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무심하게 챙겨주는면서도 늘 투덜대는 츤데레였다. 또 그는 아랫 사람들(노예와 하층민)에게는 한없이 온화하고 관용을 베푸면서도, 개인 비서들이나 관료들에게는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잔혹해보일 정도로 무자비했다.

수에토니우스가 그 대표적 사례다. 수에토니우스 본인이 사비나 황후와 개인적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황후와 황제 뒷담화를 하고 저질 농담까지 했다가 하드리아누스에게 딱 걸려 본인은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추천인과 친분있는 이들은 죄다 공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본인이 화를 자초한 면이 크다고 해도, 이때 수에토니우스가 저지른 죄에 비해 과하게 처벌된 것은 맞았기 때문에 사비나 황후는 이 일로 남편의 이상한 성격에 제대로 토라졌다고. 물론 하드리아누스도 아내가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토라졌다고 한동안 각방을 썼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도, 로마 제국의 장자 격 후손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양인들에게도 하드리아누스는 인격적으로 파탄자 내지 사회에서 마주 치고 싶지도 않은 부류의 인간이라고 평을 받았다. 이를 반영하듯,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로 이탈리아 대중적 국사책을 저술한 몬타넬리는 하드리아누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하드리아누스의 죽음은 위대한 황제의 죽음과 동시에, 전 시대의 역사를 통해서 가장 복잡하고 불안정한 성격을 가진 불쌍한 인물이자 고대 세계에서 가장 근대적인 인물의 죽음을 상징했다.

그렇지만 인격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당대 로마인들에게도 정치적으로는 호평 받았으며, 현재도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내정 개혁과 방어 체계, 지나친 속주 자치 개입 문제의 악영향이 비판받더라도 호평받고 있는 명군, 실용적인 황제 등으로 찬사받고 있다. 오현제 시대로 알려진, 2세기 팍스 로마나 아래의 다섯 황제 중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로마 제국의 평화 지속을 위해 상당히 노력했다는 평은 늘 따라온다.

이는 전통적 관점으로는 극찬을 받았지만, 1940년대 이후 그 그림자가 상당했다는 트라야누스와 다른 점이다. 실제 하드리아누스의 내정 개혁들은 오늘날 종종 고평가되었다고 지적받고, 그의 내정 개혁은 부작용이 많아 부정적 재평가도 따라오지만, 하드리아누스의 치세는 트라야누스보다 훨씬 건전하고 실용적으로 대처했다고 전반적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더해 그가 제국 순방을 벌이며, 제국 각 도시들에게 부담감을 안겨줬어도 황제가 외부와의 전쟁 없이도 순행만으로도 속주행정에 개입한 부분 역시 도미나투스로 향하고 있는 황제 권력 강화 흐름에서 마냥 부정적이었다는 의견이 덜 나오는 이유다.

6. 창작물에서의 등장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하드리아누스의 생애를 그린 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을 지었는데 이 책 한 방으로 그녀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5년 세계사에서 출판된 1권짜리였으나 현재는 절판되었고, 지금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간행된 2권짜리 번역본을 구할 수 있다. 또 그만큼 과감하면서도 불문학 특유의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니 시간이 있으면 일독을 권한다.

만화 테르마이 로마이에 등장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바로 이 사람이다. 테르마이 로마이의 주인공, 루시우스 퀸투스 모데스투스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며, 하드리아누스의 죽음으로 만화가 막을 내린다. 위에 언급된 건축가로서의 자질, 동성애를 즐기는 것 모두 가감없이 나온다. 성우는 구판 기준 오오츠카 아키오, 넷플릭스판 기준 이소베 츠토무.

PSP 게임 로스트 레그넘에서는 최종보스로 등장. 이미 죽었으나 영혼만이 남아 악령이 되었다.

Fate/Grand Order에서는 로물루스 스토리에서 불완전 소환된 역대 황제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서는 그냥 고스트지만. 키르슈타리아 보다임이 그의 팬이라고 한다.

[1] 이러한 순행에는 문화에 대한 심취와 같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제국의 통치를 위함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2] 안티노우스가 대표적인 상대로 알려져 있다.[3] 지금의 세비야 근처의 마을로, 지금까지도 같은 이름의 마을이 존재한다. 전형적인 로마 식민도시의 예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 있다. 이탈리카는 당연히 이탈리아에서 나온 이름이고, '하드리아누스'는 아드리아 해에서 따온 이름이다. 하드리아누스 가문이 빼도박도 못하는 이탈리아 출신임을 보여준다.[4] 하드리아누스보다 31살, 트라야누스보다 8살이 많았다. 히스파니아 태생으로 장군으로서는 능력이 평범했지만 트라야누스 밑에서 고지 게르마니아 총독까지 지냈고,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아래에서 총 세번의 집정관을 역임했다. 트라야누스의 측근이었다고 하며, 하드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를 당시 그를 지지해줬다고 한다. 그러나 환갑이 지난 뒤 후계자를 물색하던 하드리아누스의 심기를 건든 죄로 156년 90살이 넘은 나이에 자신의 18살 된 손자 푸스쿠스(하드리아누스 누나의 손자, 하드리아누스의 생질손)와 함께 반역죄로 기소돼 처형됐다.[5] 아직도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들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을 때니 조심스러웠겠지만 말이다.[6] 심지어 하드리아누스는 전임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다키아 지방조차 포기하려고 했다. 반대가 심해서 결국 그만두긴 했지만, 이 황제가 얼마나 확장 정책에 부정적이었는지를 가늠하는 초석은 될 수 있다.[7] 카이사르 칭호, 황제와의 공동 정규 집정관직[8] 디오 카시우스의 부친도 원로원 의원이었고, 이 집안 자체가 아나톨리아 일대에 영향력이 상당한 그리스계 세습 원로원 가문인 것을 생각하면 근거없는 소문은 아니다.[9] 하지만 원로원 의원 직은 유지시켰다.[10] 오늘날의 독일 라인강.[11] 일반인들에게는 하드리아누스 본인보다 이 하드리아누스 방벽(= 성벽)으로 유명할 것이다.[12] 안토니누스 방벽은 하드리아누스 방벽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막상 지어놓고 보니 방비가 너무 힘들다고 판단하여 건설 후 불과 8년 만에 버려지고 만다. 이 당시 브리타니아 북부 지형의 험악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려 천 년 이후인 잉글랜드 왕국 시절에도 스코틀랜드 지역은 험준함으로 유명하여 농업도 상업도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을 지경. 카이사르 시대 이미 한번 정벌을 마쳤음에도 로마 제국은 최전성기 시절에도 브리타니아 중부 지역을 넘어가지 않았다. 남부 지역 정도가 상대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을 환경이었기 때문.[13] 1세기의 황제 네로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비난이다. 당시 원로원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 심지어 속주 내 지식인들에게 황제나 사회지도층의 기본 책무는 자신의 직책이 요구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면서, 다른 부분을 책임지는 이들과 협력하며 일처리를 수행하는 것이 추앙받았다. 간단히 말하면 후대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전대의 트라야누스가 어떻게 치세기 동안 내치와 외치를 담당했는지 생각하면 편하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네로 같이 순전히 그리스적인 그리스인"이라고 비난받았고 이런 비난은 로마인들이 가진 하드리아누스의 이미지였다.[14] 로마 제국의 속주 통치 방식은 황제와 속주 총독 간의 직접 서신, 보고서 교환과 지방정부별로 운영된 자치정부와 로마 정부간의 상호 협력으로 운영됐다.[15] 현대인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되겠지만, 로마인들은 다신교사회로서 수많은 신들에게 바치는 축제를 자주 벌이는 민족, 국가였다.[16] 이렇게 순행로를 자세히 알수있는 것은 하드리아누스가 통화발행시마다 방문지를 상징하는 그림과 문자를 넣었기 때문에 추적 가능했다. 그리고 순행지마다 필요한 것을 해결하게 조치를 취하게 하기때문에 그런 건설물이 생긴곳에는 관련사항이 적힌 '기념비'가 세워진다. 이런 것들을 통해 순행지의 대부분이 변경지역과 군사기지인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순행의 주목적이 '방위시설 시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17] 이때 반란에 가담한 유대인들의 수가 무려 40만 명에 달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 제국은 모든 군사력의 3분의 1에 달하는 약 12만 명의 군대를 유대로 보내야했다. 유대인들이나 로마나 모두 전력을 다해 싸웠던 셈이다.[18] 로마 제국은 확장 정책을 중단한 적이 없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직접 통치 기회를 포기한 의도는 알 수 없고, 아우구스투스 방식으로 돌아간 것 뿐이며(동맹 왕국, 지도자를 통한 간접 통치) 다만 자신의 치세에는 제국의 재정비가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인데 죽을 때까지 하고도 부족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19] 괜히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안토니누스 방벽을 만든게 아니다.[20] 이러한 로마군의 변화는 3세기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후기 로마의 많은 부분이 로마의 전성기라고 하는 오현제 시대때 태동하고 있었다.[21] 로마는 위로는 독일, 아래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서로 정반대의 기후대에 놓인 거대한 나라였다. 거기에 더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제국의 향방을 결정하는 막중한 결정을 계속해서 내려야 했음으로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상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하드리아누스는 군단 점검 중에 마차에 앉아 지켜보기는커녕 완전군장을 직접 짊어지고 병사들과 같이 행군하면서 직접 상태를 파악하는 일도 많았다. 거기에 더해 여행 중 그의 심신을 위로하던 동성의 애인도 잃었으니...[22]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의 일가는 그리스 출신의 로마 제국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를 후원한 귀족 집안이기도 했다.[23] 하드리아누스의 유일한 남자혈육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일찍부터 여러 특권과 영예를 선사받은 상태였다.[24] 하드리아누스가 136년 갑자기 마음을 바꿔 양자를 지명하자 세르비아누스와 푸스쿠스가 불만을 표했다는 또 다른 고대 기록과 그 이야기도 있다. 만약 이 이야기가 맞다면, 하드리아누스의 친족 자결 명령은 황제가 예민해지고 의심이 심해진 탓에 내린 명령보다는 본인 사후의 정국 안정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25] 네로의 본가인 도미티우스 일가의 공동묘지로 네로가 묻힌 곳으로 유명하다.[26] 정확히는 네로가 턱수염을 슬쩍 기르려고 시도한 적이 있긴 하다. 평이 안 좋아서 그만뒀지만. 거기다 현재 보존된 네로의 두상을 보면 턱수염이라기보단 구레나룻을 상당히 길러 목까지 뻗어 있는 정도이지 실제 턱 부분은 깔끔하게 면도했다.[27] 하지만 과도하게 그리스 출신을 원로원 의원으로 많이 임명하였다.[28] 콘스탄티누스 대제부터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딱히 반헬레니즘적이었던 건 아니며 기독교적 전통과 구레나룻 사이에는 별반 상관 관계도 없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도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데 반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수염을 길렀다. 기독교도 로마 황제들 중에도 수염 기른 사람은 많았다. 사소한 데 너무 큰 의미를 두진 말도록 하자. 더욱이 앞에 소개된 황제들보다 훨씬 과거의 인물인 군인 황제 시대의 고르디아누스 3세도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29] 이건 젊어서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심신을 혹사시킨 탓에 말년에 몸이 망가지면서 만성적인 고통에 시달렸고, 게다가 후계자까지 지명해 둘 정도로 할 일도 다 해놓아서 뒷 일 걱정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더이상 거리낄 게 없어진 탓도 컸다.[30] 이전 황제 중에서 티베리우스도 일부 분야에서 취미가 꽤 비슷했던 케이스였다. 다만, 이 황제의 경우에는 그리스 작가 문체로 시를 짓더라도 혼자 놀기를 극도로 좋아하는 천재였고, 낯을 무척 가렸던 부류인데다 청교도적인 엄격함과 검소함을 미덕으로 생각한 황제였다. 따라서 그는 하드리아누스와는 그 결이 많이 달랐다. 반면 갈리에누스는 로마인들에게 하드리아누스와 많이 비슷하다고 평가받았고, 여러 부분에서 많이 똑같았다. 그는 학식도 대단했고 군대 지휘 능력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던 황제로, 하드리아누스 사후 체제 전반에 걸쳐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혁을 실천했던 오랜만에 등장한 개혁 군주였다.[31] 구체적인 실무야 건축가들에게 맡겼겠지만, 어쨌든 돔형 지붕이라는 아이디어는 그가 냈다. 판테온은 원래 아그리파가 지은 건축물이었지만, 불탄 후 하드리아누스가 완전히 다시 설계해 재건했으므로 그가 지은 건물이라 봐야 한다.[32] 여담이지만, 트라야누스 시절에 도나우 강에 트라야누스 대교를 놓은 로마의 대 건축가 아폴로도루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설계한 '베누스와 로마 여신 신전'을 보고는 '신들이 일어서면 지붕이 뻥 뚫리겠군.'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세간에 퍼져 하드리아누스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이후 아폴로도루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처형당한다. 다만, 하드리아누스의 개입에 의한 아폴로도루스의 추방과 사형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의거한 것으로 해당 부분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에 대해 학자들(예를 들어, R. T. Ridley)이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33] 이는 아테네의 학자들과 아가리 파이팅을 하다가 권력으로 찍어누른 유명한 일화에서 또 드러난다.[34] "30개 군단을 지휘하는 인물에게 어떻게 반항한다는 말이냐?"라는 투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이 남아 있다.[35] 후술하듯, 황후가 존재는 했으나 대개의 로마 황족들이 그렇듯 정치적 목적의 결혼이었다. 황제가 그녀(이성)와 관계를 가지는 것조차 기피한 것인지 그저 생기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둘 사이에는 친자가 없었다.[36] Greek love. 보통은 그리스 시대에 흔했던 남성 간의 동성애 관계, 특히 소년애 관계를 지칭하곤 한다.[37] 더 나아가 안티노우스가 더 이상 늙기 싫어 거세 시술을 받아 사고로 죽었다는 주장까지 있는데... 이미 20살이 넘어간 사람에겐 거세 시술을 한다고 카스트로가 될 수 없다는 건 이미 로마 시대에도 알던 거고, 고대 로마에선 거세는커녕 포경수술조차 금기시해 종교적 죄악으로 보고 있었다.(유대인 탄압이라는 말도 있다.) 게다가 당시 포경=할례 였는데... 그걸 범죄자를 골라서 해버리는 시대였고 그렇게 명령을 내려서 시행을 한 게 하드리아누스 본인이다.[38] 유모 게르마나는 하드리아누스보다 장수했고, 하드리아누스가 온갖 짜증을 티부르 별궁에서 부릴 때, 남편과 함께 별궁에 마련된 방에서 살면서, 24시간 내내 황제의 모든 투정을 들어줬다. 그래서 유모 부부가 고령임에도 자신에게 부모처럼 대한 모습에 하드리아누스는 짜증을 내다가, 화를 다스리면서, 용서를 구하거나 사과했다고 한다.[39] 심지어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순방에도 함께 할 정도로 황제를 존경했으며, 하드리아누스도 그를 매우 신뢰했다.[40] 안토니누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적은 자서전에서도 "그런 소동을 일으켜서 미안하다" 라는 투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적기도 했다.[41] 율리우스 가의 세 황제(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아래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기사계급들이 프라이토리아니, 원로원, 소방대, 황제령 아이깁투스 행정장관 등을 거쳐 원로원 의석을 얻고 귀족으로 편입돼, 공화정기의 파트리키, 노빌레스들과 경쟁했다. 이는 세 황제의 의도 때문이었는데, 이때 등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칼리굴라에게 추천받아 법무관이 되고, 클라우디우스 즉위 직후 게르마니아 군단장을 거쳐 원로원 의원이 된 이탈리아 세리 가문 출신의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베스파시아누스 형제다. 클라우디우스 시대는 황제의 적극적인 추천 아래 갈리아, 히스파니아 출신 이탈리아 혈통 로마인들이 기용돼 귀족 반열에 오르는데 이때 원로원에 합류한 이가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명장 아그리콜라, 이 문서의 주인공인 하드리아누스의 부친 하드리아누스 아페르와 그 사촌인 트라야누스의 부친 트라야누스 장군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