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58대 황제 안테미우스 ANTHEMI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PROCOPIVS ANTHEMIVS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 |
출생 | 미상 |
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사망 | 472년 7월 11일 |
로마 제국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467년 4월 12일 ~ 472년 7월 11일 (5년 92일) | |
전임자 | 리비우스 세베루스 |
후임자 | 올리브리우스 |
배우자 | 아일리아 마르키아 에우페미아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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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58대 황제로, 서방 제국의 황제이며, 동방 제국의 황제 마르키아누스의 사위. 어쩌면 마요리아누스 황제 다음으로 가장 노력한 황제로 열심히 노력했으나 끝내 서로마 제국 최고 권력자에게 사망하게 된다.2. 상세
테오도시우스 2세의 유년기에 섭정을 한 동방 대관구장(Praetorian prefect of the East) 안테미우스[1]의 외손자이며[2], 발렌스 황제 때의 반란자이자 율리아누스의 이종사촌이던 프로코피우스의 친 증손자(아들의 아들의 아들)이다.[3] 453년경 마르키아누스의 딸 아일리아 마르키아 에우페미아와 결혼했다.마르키아누스가 죽은 이후 실세 아스파르는 안테미우스 대신 본인의 부하 장수인 레오를 옹립했는데, 이는 안테미우스는 여러 고위 귀족 및 황제의 인척이거나 후손이라 마음대로 조종하기에 부담스러웠던 반면 레오는 그런 혈연이 전혀 없는 평민 출신이기 때문에 조종하기 쉬웠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때문에 레오가 즉위하고 나서도 안테미우스의 존재는 불안 요소였다. 레오 1세는 나름대로 군사적인 능력이 있었던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임명해서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을 방어할 겸, 그리고 그게 불가능해도 서로마에서 알아서 제거하게 할 생각으로 멀리 쫓아내고자 하였고, 결국 성공했다. 당시 서로마 황제 직위가 이런 동로마 내 계승 투쟁에서 밀린 사람을 차도살인용으로 밀어내는 정도로 전락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안테미우스는 서로마로 유배당했는데 서로마로 가던 도중 뜻밖의 우군을 얻게 된다. 당시 달마티아 지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사령관)으로 있던 마르켈리누스(Marcellinus)는 서로마제국의 직전 황제였던 마요리아누스의 휘하에 있던 장수였는데, 마요리아누스가 리키메르에게 살해당하자 리키메르에게 반기를 들고 반독립 세력이 되어 있었다.
안테미우스가 새로운 서로마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켈리누스는 안테미우스와 손을 잡고 그의 호위세력을 자처하게 된다. 이로써 달마티아는 다시 서로마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안테미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직에 오른 후 당시 서로마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권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Flavius Ricimer)에게 딸 알리피아를 시집보내면서 정치적으로 연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안테미우스는 그리스인이고 철학자였기 때문에 이교를 부활시킬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고, 실제로 친한 친구였던 이교 철학자 메시우스 포이부스 세베루스에게 로마 시장(Praefectus urbi)과 집정관직을 맡겼다. 또한 (저 위에 사진에 있듯이) 그가 발행한 동전의 뒷면에는[4] 네메아의 사자를 때려잡는 헤라클레스를 새겼는데, 이는 사라졌던 로마 다신교를 부활시킨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런 이교적 성향 때문에 안테미우스는 서로마에서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안테미우스와 리키메르의 사이도 점점 벌어졌는데, 허수아비 황제를 두고 편하게 통치하려던 리키메르의 의도와는 달리 안테미우스는 능력 여부를 떠나 일단 황제로써의 역할에 욕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리키메르와 알리피아의 부부관계도 좋지 않았던데다 안테미우스의 지지 기반이었던 마르켈리누스는 리키메르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 때 동로마 황제 레오 1세가 반달족을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는데, 아프리카 원정에 앞서 마르켈리누스가 시칠리아에 있던 반달족을 쫓아내고 시칠리아를 정복한다. 마르켈리누스는 이어 아프리카의 반달 정벌에도 참여하려고 하지만 리키메르의 반대로 무산되고 시칠리아 방어에 주력하게 된다.[5]
마르켈리누스가 빠진 반달족 정복계획은 결국 대실패로 돌아가는데, 당시 해군 총사령관을 맡은 레오 1세의 처남 바실리스쿠스의 무능함 때문이었다.[6] 이 원정의 실패를 끝으로 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가 고토를 회복할 때까지 아프리카의 곡창지대를 영영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시칠리아에 있던 명장 마르켈리누스마저 암살당한다. 누가 암살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암살의 배후에도 리키메르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로마의 대함대를 격파하고 승리한 반달 왕 가이세리크는 기세를 몰아 올리브리우스를 앉히고자 압력을 넣었다. 올리브리우스와 가이세리크의 아들 후네릭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들을 각각 아내로 맞은, 한국식으로 말하면 동서였기 때문이다. [7] 이런 가운데 안테미우스는 갈리아의 남부 서부를 거의 장악하고서 몇 안 남은 로마령이었던 아를을 포위한 서고트 왕국에 맞서 아들 안테미올루스를 출진시켰는데 결국 서로마군은 크게 패하고 안테미올루스 또한 전사하며 갈리아 일대의 몇 안 남은 거점들마저 뺏기게 되었다. 안 그래도 제위 유지가 위태위태하던 안테미우스에게 이는 치명타가 되었다.[8] 리키메르는 올리브리우스를 새 황제로 옹립하였고, 472년 로마에 있는 안테미우스를 공격한다.
싸움은 안테미우스가 리키메르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안테미우스의 강력한 우군이었던 마르켈리누스는 이미 죽었고 동로마 제국은 애초에 차도살인의 목적으로 안테미우스를 서로마에 보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싸움에 신경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안테미우스는 얼마 안되는 병력으로 로마에서 몇달간 버텼지만 결국 리키메르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로마는 함락되었다. 로마는 안테미우스가 고용한 게르만족 용병들에게 약탈당했고[9] 안테미우스는 거지로 변장하여 성당으로 숨어 들어갔지만, 결국 리키메르에게 들켜 살해당했다.[10] 안테미우스의 죽음으로 인해 그가 꿈꿨던 로마 다신교의 부활도 무산되었다.
이로써 권신 리키메르는 아비투스, 마요리아누스, 세베루스, 안테미우스 네 명의 황제를 살해하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리키메르 역시 안테미우스가 죽은 지 40여일이 지난 후에 알수 없는 이유로 급사하고[11] 새로 황제가 된 올리브리우스도 리키메르의 조카 군도바트에게 즉위 후 3개월여만에 살해당한다.
그리고 고작 4년만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1] 당시에 아직 어렸던 황제 대신 테오도시우스 성벽 건설을 진두지휘했다.[2] 영어 위키백과 Anthemius (praetorian prefect) 중 'Through his daughter's marriage to magister militum Procopius, he became maternal grandfather to the later Western Emperor Anthemius.'[3] 영어 위키백과 Procopius (usurper) 중, 'His first wife was probably Artemisia, having married secondly the dowager Empress Faustina, while the Roman general of the 5th century Procopius and his son, the Emperor Anthemius, were among his descendants, the first being the son of his son Procopius.'[4] 애초에 허수아비 격으로 앉힌 데다가, 몇 년 밖에 재위 못했고, 서로마가 망하려면 10년도 안 남았는데 동전을 2종 이상 찍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5] 리키메르가 마르켈리누스의 반달 원정 참여를 반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학자들은 대체로 안테미우스의 힘이 커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6] 반달족 왕 가이세리크가 평화 협정을 제안하자 거기 넘어가 아무 대책 없이 카르타고 항에 기항했다가 야습을 받아 절반의 함대를 날려먹고 콘스탄티노플로 퇴각했다. 이 때문에 해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나머지 공격 부대도 반달족의 연이은 기습을 받아 궤멸된다. 이 전투는 본 곶 해전으로 알려져 있다.[7] 영어 위키백과 Ricimer 중, 'Genseric supported Olybrius' candidacy for emperor. Genseric had family ties with Olybrius as both Olybrius and Genseric's son Huneric had married the two daughters of Valentinian III. With Olybrius on the throne, Genseric would become the real power behind the throne in the West, replacing Ricimer.'[8] 영어 위키백과 Battle of Arles (471) 중, 'Alarmed with this development, Emperor Anthemius sent an expedition under Anthemiolus across the Alps against the Visigothic king Euric, who was besieging Arles. Euric crushed the Roman army and killed Anthemiolus and three Roman counts. Euric subsequently captured Arles and much of southern Gaul. The defeat in Gaul was a direct cause of the subsequent overthrow of Anthemius as emperor by Ricimer.'[9] 이 때 리키메르가 고용한 용병 중에는 나중에 서로마를 멸망시키는오도아케르도 있었다.[10] 영어 위키백과 Ricimer 중, 'Disguised as a beggar, the emperor was caught attempting to flee the city at the Church of Santa Maria in Trastevere, where he was beheaded on July 11, 472.'[11] 암살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