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38대 황제 타키투스 TACIT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Marcus Claudius Tacitus) |
출생 | 미상 |
로마 제국 이탈리아 인테람나[1] or 도나우 강 인근 속주 | |
사망 | 276년 6월 |
로마 제국 카파도키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75년 12월 ~ 276년 6월 (7개월) | |
전임자 | 아우렐리아누스 |
후임자 | 플로리아누스 |
가족 | 플로리아누스 (이부동생)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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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로마제국의 제38대 황제. 즉위 전 이름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개인비서 에로스의 농간으로 암살된 뒤, 무려 2개월이 지난 후 군대의 요청에 따라 원로원의 선출로 즉위했다. 군의 요청과 원로원의 선출로 즉위한 황제인 데다 온화한 성품과 검약한 성품 탓에 군인황제시대 황제 중 자연사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가 진짜 노환 혹은 전염병으로 죽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조시무스에 따르면, 그가 병사들에게 암살당했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200년경 태어났다고 하나, 정확히 몇년도에 태어났는지는 의문이다. 출생일처럼 고향에 대해서도 의견이 오늘날까지도 엇갈린다. 통상적으로 많이 활용된 고대 기록들에 따르면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의 도시 인테람나(오늘날의 테르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학자 중 스카레, 하지 등은 여러 증거를 이유로, 그가 도나우 강 일대의 속주에서 태어난 로마인이라고 말한다.고향도 불분명하고, 아내와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음에도 그 이름이나 행적은 알려지지 않다. 미궁의 경력 중 그나마 알려진 사실은 어머니가 적어도 두번 결혼해 두명의 남편 사이에서 타키투스와 그 이부동생 플로리아누스를 얻었다는 것과, 가장 가까운 친척 중 한명이 막시미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정도다.
조용한 사생활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이나, 즉위 전까지 경력들이 크게 알려진 게 없다. 그래서 황제로 즉위한 사람임에도 75살 이전까지 어떤 경력을 쌓고 즉위했는지 수수께끼다. 그러나 명문귀족가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집안의 후손이거나 역사가 타키투스의 먼 후손, 또는 원로원 계급이나 기사계급 출신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당장 그와 그를 따른 측근들이 타키투스의 대관식이 끝나기 무섭게, 그와 통칭이 비슷한 원로원 의원이자 변호사였던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서를 제국 전역에 배포하면서, 그가 역사가 타키투스와 관련이 있는 듯 행동한 것을 보면, 그가 이탈리아의 아주 오래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후예이거나 최상류 기사계급 출신 내지 세습의원이 아님은 단번에 드러난다.
고대기록에 따르면, 세베루스 왕조가 나름 안정적인 시대에 태어났던 사람임에도, 273년 늦은 나이에 집정관을 생애 처음으로 경험했다고 한다.[2] 그럼에도 그는 즉위 당시 개인재산이 거의 3억 세스테르티우스나 되는 부자 원로원 의원이었고, 이탈리아에 부유한 저택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볼때 타키투스는 설령 도나우 강 일대 속주에서 태어났음에도, 이 당시 괜찮은 경력을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그와 그의 이부동생 플로리아누스가 도나우 일대 군인 황제들과 연계된 사람이고 허수아비 황제여도 어느 정도 군을 통제한 것을 볼 때, 그가 최소한 군업무와 관계된 일을 오랫동안 한 것은 분명해보인다. 따라서 학자들에게 이 사람의 고향이 어디인지 엇갈리더라도, 타키투스는 군사 업무를 오랫동안 맡은 원로원 의원 내지 군단장급을 경험하면서 군부를 알고 있던 퇴역장군 출신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2.2. 황제
2.2.1. 즉위
타키투스는 아우렐리아누스 시대 당시, 원로원 의원 중 중진으로 평이 상당히 좋았다고 하며, 총 두 번의 집정관 경험이 있었다. 실제로도 그는 매우 검소하고 온화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여타 동료 의원들과 달리 밭에서 기른 상추 같은 농작물을 즐겨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치품인 유리 제품을 유독 좋아했다. 그럼에도 그는 겉치레를 싫어하고 절제된 생활 속에서도 교양도 풍부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도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아우렐리아누스 암살 이후, 아우렐리아누스의 후임 황제로 원로원에 선출됐다. 하지만 즉위 당시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았다. 심지어 무려 15대 전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보다도 더 일찍 태어났다.[3]이 당시, 대개 황제 자리가 빌 때에는 야심많은 군단장이나 근위대장, 혹은 기병대장이 황제 자리를 꿰차지만, 275년 당시 로마 군부 내 황제 유력후보들은 아우렐리아누스 암살에 말려 사형당했거나 그냥 슬퍼만 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부 내에서 존경받는 경력을 갖춘 황제 유력후보였고, 마음만 먹으면 즉위할 수 있던 프로부스 등은 황제가 되겠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여러 장군들과 의견을 모아 원로원에 황제감을 뽑아달라고 서한을 보냈다. 그런데 정작 원로원에서는 세베루스 왕조 시절부터 군대의 입김과 그들의 제안이 떠보기였던 경우가 많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숙청의 빌미가 된 탓에 의심부터 했다. 또 갈리에누스 암살 이후 오랫동안 군사에 개입하지 못한 탓인지 결국 이 편지를 받은 원로원은 부담만 느끼고는 도로 돌려보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이 주고받기를 세 번씩이나 했다.
그렇게 8주가 지난 2개월가량이나 원로원은 군부와 군대를 믿지 못하고 계속 상황만 지켜보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했는데, 군대와 유력 장군들은 자신들의 요청이 진심인 뜻을 계속 전하면서 후임 황제가 논의되게 된다. 그래서 황제 자리를 비워두다가 원로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타키투스가 황제로 발탁됐다. 원로원 추대로 즉위한데다 군부 내에서 프로부스같이 덕망과 야심을 두루 갖춘 장군들이 건재한 만큼, 사실상 죽을 각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고도 볼 수 있다.
2.2.1.1. 정말 노령의 허수아비 황제였을까?
그러나 현대 연구들에서는 이런 미궁의 기록에 대해 여러 증거를 내세우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먼저 타키투스는 원로원 의원 중 갈리에누스 시대부터 군업무를 오래 본 사람 또는 장군으로 있던 사람인 만큼, 오히려 바지사장 황제는 결코 아니었다. 현대 사가들은 타키투스도 젊었을 때 장군이었지 않나 강하게 추측한다. 다시 말하면 군부에서 그냥 슬퍼만 하고 있었다는 것은 조작이고 사실은 현역 장군 중 황제를 맡을 만한 인물이 없자 전직 장군인 타키투스를 황제로 세우도록 원로원에 압력을 가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가 갈리에누스 황제의 전면적인 군사개혁 이전에 군사 경험을 한 원로원 의원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즉 일리리쿰 황제들과 같은 고향출신의 장군이 아니고 원로원 의원에서 군사 경험을 한 원로원 계층이라는 소리인데, 이 주장은 위에 제기된 퇴역장군 출신설과 함께 묶여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지지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타키투스가 원로원에 입성한 때는 대략 250년 이전이며, 첫 집정관 경력이 발레리아누스 시대였던 것이 그 증거인데, 이는 타키투스가 일리리쿰 장군들을 육성해 군부 핵심으로 끌어올린 발레리아누스 측근으로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두 주장이 아니더라도 일리리쿰 출신 장군들의 상관으로 타키투스가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원로원 의원이라고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는 증거는 또 하나 있다. 그것은 타키투스가 다른 원로원 인사들과 달리 이상할 만큼 프로부스 등 군부 수뇌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4][5], 군부를 별 문제없이 통제할 줄 알았던 점이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들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진짜 고령이 아닐 수 있고, 실제로는 50대의 아주 적당한 나이의 실력자일 확률이 매우매우 높다는 주장들이다. 만일 이 주장이 맞다면, 상당히 충격적인데, 이는 헛소리가 아니라서 주목을 끌고 있다. 2016년 데이비드 하지로 대표되는 현대 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타키투스가 의외로 50대 나이의 꽤 젊은 황제일 수 있으며, 당시 발행된 주화, 비문 등을 연구해보면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원로원과 군부가 6개월간 황제 자리를 공석에 둔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더욱이 지금까지는 고대기록 중 가장 많이 차용되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주장의 전제 조건이 되는 "아우렐리아누스의 아내 울피아 세베리나가 타키투스 선출 전까지의 6개월 간 제위를 임시로 맡았다"는 것이 일찌감치 반박돼, 타키투스가 고령이라거나, 6개월간 장군과 원로원에서 눈치싸움을 하다가 마지못해 타키투스를 선출했다는 것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20세기 후반 이래의 여러 현대사가들에 따르면, 타키투스는 황제로 선포되기 전, 이탈리아 캄파니아에 머물고 있다가, 마지못해 로마로 상경해 원로원에 돌아온 다음 그 자리에서 반강제로 황제로 선출됐다고 한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한다. 후일 타키투스의 이부동생 플로리아누스를 몰아내고 제위를 차지한 프로부스나, 옛 원로원 동료로 프로부스의 지지자였던 카루스가 타키투스의 계획이나 행보를 계승한 것을 보면, 캄파니아로 내려가 살고 있던 그가 프로부스로 대표되는 아우렐리아누스 휘하 장군들과 카루스 등으로 대표되는 원로원 인사들의 모종의 합의로 반강제로 제위에 올랐던 것은 여러 부분에서 미궁인 이 사람의 즉위과정, 프로부스의 즉위 전 애매모호한 행보 등이 설명될 정도라고.
2.2.2. 공화국의 재건자
어쨌든 이런 사정으로 타키투스는 즉위했다.그가 제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발표한 조치는, 아우렐리아누스 살해범들을 체포해 처형하기 전에 아우렐리아누스 신격화를 요청한 일이었다. 이어 그는 자신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로마 원로원 권한과 권위의 회복이라고 강조하면서, 갈리에누스 조치 이전 상황으로의 법제 회복에 집중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갈리에누스가 사문화시킨, 원로원 의원들의 속주총독 부임, 집정관 입후보와 추천제 특권을 비롯해, 로마시민과 원로원에게 제국의 모든 법원에 항소할 권리를 재부여하고 원로원의 최고재판소 권리까지 돌려줬다. 이어 그는 원로원 의원들의 신분 보장을 다시 인정해주고, 관료들에게는 재정 수입과 지출에 필요한 여러 관리 능력을 부여해 흐트러진 제국을 안정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새긴 주화 뒤에 레스티투토르 레이 푸블리카이(공화국의 재건자)라는 문구를 새기고 이를 강조했다.
다행히 이런 조치들은 타키투스가 후대의 로마인들에게 명예로운 즉위와 제국 재건을 위한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고결한 황제로 평가받는 근거가 됐다. 타키투스는 원로원의 위엄을 세우고, 내부 혼란을 잠재우는데 주력했다. 이 결과, 군대에게는 온전히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군부를 이끈 장군들의 지지, 원로원과 민중들의 지지 아래 무난하게 제위를 지킬 수 있었다. 따라서 타키투스 즉위를 묵인한 프로부스는 후일 타키투스의 이런 통치 철학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그 후임인 카루스 역시 타키투스처럼 원로원을 존중하면서 국정을 이끌었다. 물론 이런 경향의 통치는 후일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같은 쌩하층민 출신의 발칸황제들이 등장한 이후 모조리 중지된 뒤, 파괴됐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무효화된 다음 원로원 권위가 크게 추락해 의미가 퇴색하게 된다.
이런 조치들 외에도, 그는 자신의 파벌들과 논의 후 자신과 이름이 같은 역사가 타키투스의 책을 로마 도서관에 가져다 놓으라고 명했다. 당시 타키투스의 저서가 거의 읽히지 않아, 필사본이 귀해진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명령은 타키투스의 여러 저서들이 살아남게 되는데 큰 힘이 됐다. 또 그는 전 재산을 팔아 국고에 기부했다. 자기 저택 중 일부는 해체해 쓸만한 자재는 모조리 기부한 다음 공중목욕탕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조치들은, 아마 로마인 평균수명상 아내와 장성한 자녀들이 그가 즉위할 당시 사망했을 확률이 높아보이거나, 혹시 모를 자신의 죽음 이후 남은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모종의 협의 끝에 전 재산을 국고에 넣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타키투스의 즉위만큼이나, 타키투스의 전 재산 기부 조치는 상당한 흥미를 끌고 있다.
특히 일부 기록들의 주장처럼 그가 암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신빙성 높다면, 이런 조치는 아마 제위등극 후의 지지확보를 목적으로 벌인 것으로 해석되며 암살 직전의 군부의 지지철회도 쉽게 해석된다고 한다.
2.2.3. 전쟁과 사망
황제 취임 이후, 다음 해 트라키아로 출발했다. 그 이유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모집한 군대 때문이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전쟁을 벌이기 위해, 인근 게르만족들을 용병으로 데리고 와서 군대를 꾸렸다. 그런데 이 용병들이 아우렐리아누스가 암살된 뒤 관리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제국 동부의 부유한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자행했다. 타키투스는 즉위 직후, 이부(異父)동생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로리아누스에게 근위대장 자리를 주고 집정관 직까지 하사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이부동생과 함께, 본인에게 호의적인 장군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즉시 토벌했다. 이때 타키투스는 이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진군해 276년 봄에 헤룰리족과 싸워 승리했는데, 원로원은 타키투스의 전공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고티쿠스 막시무스(위대한 고트족 정복자)'라는 존칭을 선물했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를 통해 타키투스가 원로원 의원 신분이어도 사실상 로마군 내에서 간접적으로 선출한 황제라고 확정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겉은 허수아비 황제 같아도 실제로는 퇴역장군이나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포장된 군인황제 중 한 명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는 말.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에우트로피우스를 비롯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이 전쟁 직후인 그해, 프랑크족, 알라만니족이 서방 방어선을 돌파해 유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전갈이 도착했다고 한다. 이 당시, 타키투스는 오늘날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 중 하나인 카파도키아의 고대도시 티아나에 6개월 정도 머물고 있었다. 하여 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유럽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헌데 7월, 건강하던 타키투스가 갑자기 열병에 걸려 티아나에서 급사했다. 조시무스가 쓴 기록에 따르면, 타키투스가 티아나에서 암살됐다고 하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타키투스는 시리아에 있던 친척 막시미누스의 가혹한 세금징수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고, 여기에서 군부와 부하들에게 불만을 샀는데 이를 계기로 신망을 잃고 군을 통제하지 못해 고생했다고 한다.
타키투스가 죽자, 타키투스의 이부동생으로 근위대장인 플로리아누스가 제 스스로 황제를 선포한 뒤, 타키투스가 이끌고 있던 서방군과 소아시아 주둔 병력을 장악했다. 그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방어선을 치게 했고, 고트족 토벌을 계속해야만 하는 상황을 내세워 원로원에 사람을 보냈다. 이때 그는 원로원에게 말하길, 자신이 서방속주와 병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원로원은 그를 새 황제로 추인했다. 그럼에도 로마군[6]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아우렐리아누스 생전부터 군부 내 2인자이자, 타키투스 생전에도 사실상 제국 내 최고실력자인 황제의 또 다른 조력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를 새 황제로 선포했다. 프로부스는 아우렐리아누스와 타키투스의 휘하에서 성공적으로 지휘관을 지낸 장군으로 명성이 대단했고, 군인 출신임에도 원로원과 사이가 상당히 좋았다.
따라서 프로부스가 아주 겸손한 태도로 자신이 부하들 손에 추대됐음을 사과하면서, 원로원을 존중해주고 정중히 본인의 황제 즉위 추인 여부를 논의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원로원은 열광적으로 프로부스를 지지했다. 원로원은 타키투스가 급사한 상황에서 죽은 타키투스의 뜻을 대충 밝히면서, 원로원을 겁박하고 무시한 플로리아누스를 버렸다. 이때 원로원은 프로부스가 보낸 전령에게 자신들이 프로부스를 열광적으로 지지한다는 뜻을 전하면서, 그 자리에서 프로부스를 타키투스 후임 황제로 승인했다.
이후 두 사람은 맞붙게 된다. 그런데 플로리아누스와 프로부스의 군사적 역량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서, 플로리아누스는 프로부스와의 내전에서 패배한 뒤 목숨을 잃었다. 따라서 타키투스 사망 후, 군단에서 황제로 추대한 프로부스가 사실상 뒤를 잇게 된다.
3. 평가
한때 타키투스 황제는 평범한 로마시민이자 원로원 의원 중 매우 나이 많고 온화한 황제로 묘사되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러 연구에서 발표됐듯이, 여타 군인황제들과 큰 차이가 없던 황제였고 본인의 가족이나 부하들의 행동도 제어하기 힘들어했던 사람에 가까웠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래서 이런 이미지와 즉위과정상의 모양새 때문에 군인황제라는 이미지가 적은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4. 여담
참고로 역사가 타키투스와 혈통적으로 후손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여겨진다. 애초에 로마식 작명법의 중간 이름, 혹은 성인 노멘이 다르다.[7] 그래도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서 점점 소실되어 가던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술을 다 긁어모아서 유통시킨 걸 보면 타키투스의 후예나 성이 같은 것에 대해 자긍심은 많았을 듯하다.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술이 약간이라도 남아있는 데는 황제 타키투스가 큰 공헌을 한 셈.[1] 오늘날의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테르니[2] 원로원 의원 중 왕정,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명문가 출신들은 극소수였고 타키투스 황제처럼 지나친 고령의 나이에 집정관에 취임한 세습 의원들은 보통은 중장년 나이에 경험해본 전직집정관 출신들이 많았다.[3] 단, 이 점에서는 일단 타키투스의 경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당한 후 시작된 군인 황제 시대에 속하는 황제라는 점, 그리고 군인 황제 시대 자체가 49년간 공동 황제 빼고도 18명의 황제가 즉위하여 각 황제의 제위 기간이 길어봤자 5년, 짧으면 15일, 평균 2년이 채 못 된다고 할 정도로 황제 댓수가 확확확 미친듯이 올라가던 혼란기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어린 나위에 즉위하여 젊은 나이에 사망한 황제였던 점과 타키투스가 고령에 즉위한 점까지 감안하면 15대 전 황제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신기한 일은 아닌 셈.[4] 타키투스는 로마군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프로부스와 사이가 좋았다. 이는 프로부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아우렐리아누스에 이은 제국 내 군부 2인자였고 마음만 먹으면 즉위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로부스는 이상할 정도로 타키투스와 일종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아우렐리아누스 사후부터 타키투스 시대 내내 보였다.[5] 이런 프로부스의 태도는 거짓말이 아니었는데, 실제로 그가 제 목소리를 낸 것은 플로리아누스가 즉위한 이후였다.[6] 특히 제국 동부의 로마군[7] 대충 따지면 개인 이름-일족명-가문명인데 이 중 일족명이 다르다.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김씨라고 해서 김구가 김유신의 후손이 아닌 것과 같다. 물론 양자결연이나 가문명 하사와 같은 경우의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