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라틴어: Lucius Aurelius Commodus Pompeianus | |
전체이름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Lucius Aurelius Commodus Pompeianus |
생몰년도 | 서기 177년 ~ 서기 211년(또는 서기 212년) |
지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로마 황족 |
왕조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종교 | 로마 다신교 |
부모 | 폼페이아누스(父) 루킬라(母) |
아들 |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족, 원로원 의원, 집정관.세베루스 왕조 시대 때까지 살았던 옛 안토니누스 가문의 방계 황족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 부부의 외손자이다.
서기 211년 12월 말 또는 212년 1월 초 카라칼라가 게타를 존속살해할 당시, 고모 등 옛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족들과 함께 카라칼라의 명령으로 재판 없이 살해됐다.
2. 생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사실상 첫째인 루킬라 공주가 재혼으로 맞이한 남편 폼페이아누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다. 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는 결혼 당시 30대 후반인 장군으로 첫 결혼이었고,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는 아버지에겐 첫 아이였다.부모 사이가 냉랭해, 일찍부터 부모는 그를 낳은 직후 별거했고, 어머니 루킬라는 남자 애인을 여럿 구해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동시대 로마인들이 그를 가리켜 "위대한 조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평한 것처럼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친가가 있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가 아닌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자랐다. 이런 배경처럼 그와 두 아들은 모두 로마와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한 오래된 노빌레스 가문 안토니누스 일가이자 이탈리아인이라는 자각이 강했다고 한다. 다만, 대개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외손주들이 그렇듯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남들보다 앞선 공직 생활을 했음에도 그 능력은 평범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개인적 원한과 권력욕 때문에 평범하게 제국을 통치하던 외삼촌 콤모두스를 암살하려고 했기 때문에, 앞길이 막혔을 운명이었다. 그렇지만 182년 콜로세움 암살 미수 사건 당시, 루키우스의 나이는 고작 5살이었고, 로마에선 연좌제가 거의 없었다. 또 180년 그는 아버지 티베리우스 폼페이아누스와 함께 이탈리아 시골 별장에서 살면서 루킬라와 교류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외삼촌 콤모두스는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조카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에게 어떤 보복도 하지 않고, 폼페이아누스에 관한 신임을 모두에게 보여주고자, 그를 자기 혈육으로 적극 후원했다. 그래서 그는 외삼촌 콤모두스 시대 내내 로마 황족으로 누릴 모든 특권을 행사했고, 어린 나이에 원로원 의원이 되고, 군경력 역시 또래 파트리키 자제들보다 높은 지위부터 시작해, 군공을 쉽게 쌓을 수 있었다.
192년 11월, 외삼촌 콤모두스가 스스로를 "로마의 헤라클레스"라고 공식 선언하고 콜로세움에서 플레부스의 날을 기념해 검투사로 직접 나서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콤모두스가 192년 11월 수많은 맹수들을 혼자 힘으로 다 죽이는 초인적인 능력을 공개할 당시,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을 손수 초대해 관람하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세습 원로원 의원이었던 디오 카시우스, 동서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등은 반강제로 이 경기를 모두 관전했다. 그런데 처남의 막장행각을 참다 못한 폼페이아누스는, 동서지간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를 비롯한 다른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유일하게 콜로세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표면상 이유는 건강상 문제였다고 하는데, 디오에 따르면 이건 핑계였다. 대신 그는 자신의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를 대리인 자격으로 내보낸 뒤, 아들을 통해 자신이 콤모두스의 안녕과 선전을 빈다고 의견을 밝혔다.
허나 폼페이아누스는 이 행동을 통해, 변해버린 처남 콤모두스에게 공개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폼페이아누스가 장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지를 받들고, 콤모두스를 지켜주겠다는 것만은 지켜주기 위해 아들을 보냈을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그리고 1달 뒤인,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황궁에서 애첩 마르키아, 침실 시종장 에클렉투스, 단독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사주를 받은 개인 레슬링 교사 나르키수스에게 교살됐다.
192년 12월 31일 저녁,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다음날인 193년 1월 1일 원로원과 근위대에서 폼페이아누스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에게 황제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 이때 티베리우스 폼페이아누스는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함께 원로원에 출석해 후임황제 자리를 제안받았는데, 두 사람 모두 본인과 자녀 모두 황제 자리에 뜻이 없다고 밝히면서 혼란해질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루키우스는 이종사촌 퀸틸루스와 함께 제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코르니키피아와 불륜 관계인 페르티낙스가 암살을 주도한 라이투스, 에클렉투스 주도 하에 프라이토리아니에게 많은 상여금을 주겠다는 약조 아래 후임황제가 됐다.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오를 당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의 행적은 자세히 모른다. 다만, 그는 페르티낙스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선동하고 그들 불만을 앞세워 선동한 라이투스 세력 손에 어이없게 피살되는 과정 전까지 철저히 제위에서 배제됐다. 이때 그의 부친 폼페이아누스는 원로원에 복귀했는데, 페르티낙스 암살 뒤 라이투스가 제위를 경매에 올려 술피키아누스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사이의 경쟁을 유도했다. 제위는 마르코만니 전쟁의 용장으로 이름난, 콤모두스 아래의 또 다른 고문이자, 클레안데르 농간으로 고초를 겪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돌아갔다. 건국 최초로 제위가 매관매직 모양새로 넘어가자, 로마는 혼란에 빠졌고, 그 틈을 노려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상판노니아 총독 겸 다누비우스 전선의 사령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연이어 황제를 참칭했다. 가장 먼저 참칭했지만, 지리적 이점을 살려, 중간에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의 서신을 가로챈 세베루스는 황제선포 후 과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처럼 완전 무장한 로마군을 끌고 본국 이탈리아를 들이친 다음, 로마 진군 아래 무력으로 이탈리아 전역과 로마를 집어 삼켰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모든 사단의 원흉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와 그 애인으로 콤모두스의 애첩 출신 마르키아를 참수하고 상황 안전에 힘쓰는 등 노력했으나, 제위를 경매로 사들인 까닭에 먼친척 세베루스와 타협이 불가능했다. 이런 가운데 원로원은 기습적으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폐위시키고 그를 처형했다. 곧 세베루스가 로마를 접수했고, 그는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체 후 재조직한 다음, 페르티낙스의 후계를 자처하고, 처형된 율리아누스 신원복구를 명한 뒤, 원로원 내 반대파 제거를 시작했다. 동시에 세베루스는 후방에서 자신을 위협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속여 공동황제 아래 제위를 나눈다는 조건으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의 일전을 준비한다.
로마는 이렇게 193년 다섯 황제의 해라는 초유의 내란에 휩싸인다. 이때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는 제1군단 미네르비아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자신의 복무지인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 가족을 위한 제단 헌납을 하고, 서방 로마군 주력 전체의 지지를 얻은 세베루스 지지를 선언했다. 그래서 그는 190년대 세베루스 치세기때 여러 임무를 부여받고, 서기 209년 집정관에 순조롭게 당선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모부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처럼 세베루스 왕조에게 눈엣가시 같은 위험인물이었다. 왜냐하면 세베루스 왕조가 제 정통성을 위해 안토니누스 가문의 정통을 주장하는 현실 속에서, 몇 없는 진짜 안토니누스 가문의 적통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베루스 황제는 그를 용서했다. 허나 카라칼라는 그를 없앨 궁리를 했고, 서기 211년 12월 또는 서기 212년 1월 게타가 카라칼라 손에 살해된 직후, 처형됐다.
이때 카라칼라는 루키우스의 이모 코르니피키아 공주를 "게타가 죽은 것을 슬퍼한다."는 누명을 씌워 살해했고,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를 살해할 당시에는 게타 지지자로 몰면서도 대중들의 반발을 의식해 "도적들에게 살해당했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아들로는 루키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클로디우스 폼페이아누스가 있었는데 두 아들 모두 군경력을 거쳐 집정관에 올랐다.
3. 기타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왕자 루시우스가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하였다. 단 완전히 동일인물은 아닌데, 일단 '루시우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이자 공동황제였던 루키우스 베루스의 아들 소(小) 루키우스 베루스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小) 루키우스 베루스는 역사상 어떤 행적이랄 것도 없이 요절했기 때문에, 영화에서의 행적은 본 문서의 주인공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를 따라갈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속편인 글래디에이터 2에서 카라칼라와 게타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확정되면서, 2편의 '루시우스'는 이 폼페이아누스를 모티브로 하는 것은 거의 확정적으로 보인다. 다만, 애초에 콤모두스 생전에 처형된 어머니 루킬라가 버젓이 살아 활동하는 등 글래디에이터는 역사 고증을 완전히 무시하는 픽션 영화이므로, 재미로 보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