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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브리튼 제83대 브리튼인의 왕[1] | |
로마 제국 제21대 황제 게타 GETA | |
<colbgcolor=#9F0807> 이름 |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Publius Septimius Geta) |
출생 | 189년 3월 7일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 | 211년 12월 26일 (향년 22세) |
로마 제국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11년 2월 2일 ~ 211년 12월 26일 (326일) | |
전임자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후임자 | 카라칼라 |
부모 | 아버지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어머니 : 율리아 돔나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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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둘째아들이자 카라칼라의 친동생, 공동황제. 로마 제국의 21대 황제로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다. 형 카라칼라와 공동황제가 된 인물로, 아버지 세베루스,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결정으로, 형 카라칼라와 함께 공동 통치 아래 제국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211년 형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공존 실패, 제국 분할 모두 실패되면서, 관계가 악화되던 211년 12월 혹은 212년 1월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침실에서 형 카라칼라 손에 어머니 앞에서 살해됐다. 사후 로마 대학살로 불린 약 2만명의 로마인들이 카라칼라 손에 살육되는 사건이 벌어졌다.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카이사르 시절의 게타가 도안된 로마시대 주화들 |
본명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Publius Septimius Geta)로, 할아버지, 큰아버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의 풀네임을 그대로 따왔다.
189년 3월 7일생으로 고향은 로마이다. 간혹 메디올라눔 태생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로마 태생이 맞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 사이에서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위에는 연년생 형인 카라칼라가 있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 세베루스가 콤모두스 아래에서 지방 총독에 부임했다고 하며, 외모는 아버지 세베루스를 붕어빵 수준으로 많이 닮았다고 한다.
9세이던 198년, 1살 위의 형 카라칼라가 황제(Augustus)로서 아버지와 공동황제가 되었을 때 부황제(Caesar) 칭호를 받았고, 199년 가을에 어머니, 형과 함께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길에 동행했다. 이 원정길에서 로마군은 티그리스 강변까지 침공해서 부유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하고 귀환했다. 그리고 202년 열린 로마에서의 개선식에서 아버지, 형과 함께 나란히 개선장군이 타는 마차를 타고 갓 건립한 세베루스 개선문을 지났다.
203년 형의 장인이자 황실 근위대장인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와 14세의 나이에 집정관을 지냈고, 205년 1월 1일에는 16세의 나이에 17세의 친형 카라칼라와 집정관에 취임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형과 사사건건 다투면서 불화가 매우 커져 나중에 가면 형제간의 불화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아버지의 명령으로 가까스로 취임했지만 그래도 형과는 여전히 사이가 나빴다.
208년부터 211년까지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에서 벌어진 스코틀랜드 원정에 아버지와 함께 참전하였다. 전투는 원주민들의 게릴라 전술로 병력 손실이 많았고, 큰 성공을 직접적으로 거두진 못했지만, 브리타니아 속주 방어선과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안정화되었다.
2.2. 아버지의 죽음과 유언
브리타니아 북쪽 병영에 있는 동안, 카라칼라와 게타는 불화가 너무 커서 아버지 세베루스만 아니었다면 어떻게 될 지 모를 극단적인 상황까지 사이가 악화된 상태였다. 둘은 동복친형제임에도 원정길 내내 서로를 견제했고, 그 긴장감은 부모조차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211년 2월 4일,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영국 땅에 있는 에부라쿰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게타는 론디니움(런던)에 있었는데, 평소 효성이 지극하던 그는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자 오늘날의 요크에 해당하는 에부라쿰까지 달려와 며칠 전부터 곁을 지켰다고 한다.동시대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의하면 죽기 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제가 서로 아끼면서 사이좋게 제국을 통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무시해도 좋다. 그러나 병사들을 우대하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2]
2.3. 암살
카라칼라는 동생을 죽인 뒤, 왼쪽 하단에 그려진 동생의 얼굴을 지우게 했다. |
브리타니아에서 세베루스 황제가 사망하기 직전일 당시, 23세의 카라칼라와 22세의 게타는 세베루스의 명에 따라 소집된 회의를 통해, 일찌감치 공동황제가 되었다. 파피니아누스가 대리인 자격으로 전령을 로마에 보냈고, 원로원은 세베루스가 죽기 직전에 이를 승인했다는 것을 알렸다. 이런 가운데 세베루스가 죽었다. 세베루스가 죽자마자, 카라칼라와 게타는 일단 갈등을 멈추자고 했다. 이는 두 사람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마지막 주도권을 어머니 율리아 돔나가 쥐고 있어, 타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카라칼라는 일단 형제의 이름으로 브리타니아의 칼레도니아인들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같은 시간, 게타는 교섭 내용을 놓고 행정 절차와 원로원 승인 등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형제는 아버지의 유해를 요크에 있는 로마군 겨울철 숙영기지에서 화장했다. 두 사람은 어머니 율리아 돔나, 근위대장 파피니아누스 중재 아래 세베루스의 유해를 마르스 평원에서 장례절차를 시작해, 수도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매장하자고 합의했다. 이후, 그들은 로마 귀환을 서둘렀다. 하지만 갈등은 시작됐고, 벌써부터 파벌 다툼은 잡음을 일으켰다.
갈등은 두 사람이 어머니 율리아 돔나, 근위대장이자 외가 오촌 어른 파피니아누스와 함께 하(下) 브리타니아의 론디니움(오늘날의 영국 런던)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유골항아리가 배에 실릴 때부터 시작됐다. 이때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독살하고자 동생의 전속 요리사 등을 매수했고, 게타 역시 사실을 안 뒤부터 형의 측근들을 매수해 맞대응하며, 갈등이 폭발했다.
형제 간의 공존은 힘들었고, 그 공존 역시 세베루스 부부의 헛된 꿈에 불과할 정도로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극도로 사이가 나빴는데, 브리타니아 원정을 치루면서 이 관계는 더 악화된 까닭에 놀랍지 않았다. 카라칼라와 게타는 영국에 있는 동안 한 막사 안에서 단 한 번도 함께 있지 않았고, 식사 역시 따로 먹었으며, 병사들이 보는 상황에도 늘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를 증오했다가, 아버지 세베루스가 마지막 부탁으로 호소해 함께 식사를 한 번 한 것이 끝일 만큼 파탄난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상황이 언제든지 파국으로 갈 수 있기에 어머니 율리아 돔나는 사촌오빠인 근위대장 파피니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두 아들을 불러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다며, 공존을 촉구했다. 동시에 율리아 돔나는 두 아들의 공동 통치를 유지케하고 형제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총동원해 이 관계가 파국으로 끝나지 않게 노력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로마 귀환 이후, 공동황제가 된 카라칼라와 게타는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둘은 각기 군대를 갈라 나눴고, 내란의 기미가 곳곳에서 감지될 정도로 극도의 불안 상태가 유지되었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들이 마중나온 가운데에서 로마에 도착할 당시 상황은 험악했고, 두 사람이 원로원 앞에서 즉위 연설을 할 때의 분위기는 무척 험악했다고 한다.
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조치를 취해, 형제의 공동 근위대장이자 법률 대리인으로 임명된 파피니아누스의 중재 아래, 파벌 싸움이 악화됐다. 카라칼라 쪽에는 카라칼라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인 발비누스를 비롯한 이들이 붙고, 게타 쪽에는 율리아 돔나의 친구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를 필두로 한 인사들이 포진해 세를 불렸다. 형제 중 키가 크고, 잘생기고, 무뚝뚝하지만 인간적인 면이 강한 게타의 지지는 높아졌고, 이는 카라칼라와 그 친구들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결국 팔라티노 황궁은 두 형제의 명에 따라 두 부분으로 분할됐고, 형제를 따르는 시종, 호위병들에게 둘은 상대방의 공간 자체를 가지 못하게 했다. 이는 원로원과 법정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카라칼라는 자신의 법정에서, 게타는 자신의 법정에서 각각 다른 의견의 판결을 내렸다. 따라서 당대 역사가이자 당시 황실 비서관, 관료인 헤로디아누스는 급기야 카라칼라와 게타가 제국을 둘로 나누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간곡한 만류와 협박으로 실패했고 이는 형제 중 세 싸움에서 벼랑 끝에 몰린 카라칼라 쪽이 골육상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무뚝뚝했지만, 무례하지 않고, 폭력적인 사람이 아닌 게타와 달리,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가 209년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받기 전부터 위험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장인, 장모, 아내, 처남, 그리고 아이에 불과한 처조카까지 살해할 정도로 그 잔인함과 냉혹함이 아버지 세베루스 이상이었다. 카라칼라는 211년 동생과 제국을 분할하기로 했던 협약이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동생이 위험하다고 생각되자, 게타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12월 17일 열린 사투르날리아 축제에서 카라칼라는 게타 암살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과거 플라우티아누스 일가가 도륙된 과정을 알고 있던 게타의 친구와 지지자들은 게타를 보호했고 이 암살시도는 무산됐다.
이런 가운데 211년 12월 혹은 212년 1월 초, 로마의 황궁 안에서는 대형 참사가 벌어지게 된다.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어머니인 율리아 돔나가 머물던 곳으로 유인하였고 근위병들과 함께 경호원들과 황궁으로 들어오던 게타를 공격하면서 게타가 어머니에게 도망갈 때 어머니 앞에서 동생의 복부와 급소를 연달아 공격해, 직접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22세의 게타는 어머니를 껴안으며 죽었는데, 카라칼라는 비무장 상태의 동생을 백부장에서 빼앗은 칼로(또는 숨겨둔 단검으로) 동생을 죽였다. 이때 게타는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형 카라칼라가 어머니 율리아 돔나 쪽을 향해 돌진하자, 피하지 않고 복부에 칼이 찔렸다. 그는 복부를 맞고, 이어 급소를 공격받았는데, 형의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죽으면서 "어머니, 형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 절 살려주세요."라고 말했다. 게타를 경호하던 지지자들도 모두 근위병들에게 살해된다.
동생을 살해한 카라칼라는 마침내 유일무이한 황제가 됐지만, 사건 직후부터 존속살해 후 극도의 불안함을 느끼면서, 불안감을 표출했다. 그는 게타를 살해한 직후, 밖에서 기다리던 게타의 지지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했다. 이후, 어머니 율리아 돔나, 이모 율리아 마이사 등을 협박한 뒤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그는 장인, 처남 등을 살해할 당시에는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지만, 동생의 피가 묻은 칼을 들고 겁에 질린 채 황궁을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니다가, 횡설수설을 했다. 이 증세는 갈수록 악화됐는데, 당대의 디오, 헤로디아누스 등에 따르면 이후 그는 발기부전이라는 고통과 불면증, 환각과 환청이라는 저주로 죽을 때까지 고통에 시달렸고, 후계를 얻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음에도 실패해, 순방 기간 내내 카라칼라를 고통에 빠지게 했다.[3]
이후, 자신의 스승이며 아버지, 어머니의 친구이자 최측근인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를 체포해 자신 앞으로 데리고 오게 한 뒤, 죽이고, 완전히 이성을 상실했다. 그는 말을 몰고 급히 근위대 병영으로 갔고, 다음날 프라이토리아니를 전부 연병장에 집합시켜, 돈과 보석을 일시급으로 하사하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이후 원로원에 출석해, 동생 게타 파벌의 수장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를 죽이라고 명한 뒤, 게타를 기록말살형에 처해 달라고 호소하고, 협박해 이를 통과시켰다. 그는 동생을 증오한 나머지, 저주 가득한 비문을 곳곳에 만들어 설치하라고 했다. 이후, 카라칼라는 동생의 초상화를 제거하도록 지시하고, 게타의 지지자들과 친구들, 그리고 저명한 법률가이자 친위대장인 파피니아누스를 무자비하게 제거했다.[4]
그리고 게타 암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카라칼라의 행동을 비난하는 군인들[5]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로 인상시켜 주었고 이에 그들은 돈을 받고 카라칼라에게 충성을 맹세한다.[6] 이렇게 카라칼라에 의해서 살해됨으로 인해 게타의 이미지는 순교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3. 평가
고대 기록 등을 통해, 게타는 그동안 순교자 이미지의 불행한 황제 중 한명으로 평가받았다. 디오 카시우스의 경우에는 게타를 옹호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지만 대개 고대 로마인 사가들은 게타에게 호의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고대 기록들에서는 스물 둘의 나이에 쓰러진 그의 장점을 부각했고 형 카라칼라의 잔인함과 비열함을 상징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로 서술했다. 그러나 그가 제위를 계속 유지했다면 카라칼라보다 더 나은 또는 더 많은 덕을 지닌 황제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사실 게타도 형인 카라칼라만큼 성품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기록이 상당히 많으며, 형 카라칼라처럼 결점이 분명해도 꽤 영리했다는 이야기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그가 카라칼라에게 살해당하면서 부풀려진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게타의 이미지가 좋아진 것은 분명 211년 형의 손에 암살된 이유가 컸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게타는 아버지와 가장 닮았으나, "어려서부터 얼굴이 잘생겼고 무례하진 않았지만, 무뚝뚝했으며, 여자를 밝혔고 애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비열하고 탐욕스러웠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또 그는 살아생전 "다양한 향신료를 넣은 음식과 포도주를 좋아했고, 자신의 옷과 보석에 돈을 많이 쓰면서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선물을 하지 않는다"고 평판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를 평할 때, 대개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세베루스 치세 후기의 변화된 계획으로, 새로운 후계구도에 직면한 형 카라칼라 입장에선 자신과 대립각을 키우고 비열하게 행동한 동생 게타에게 적개심과 분노, 수치심을 느낄만 하다"고 말한다.
다만 살아생전 비정함과 짠돌이의 대명사로 대중에게 알려졌던 티베리우스 황제의 경우처럼 단순히 성격에 모가 났다고 좋은 황제가 되진 못했을 거라 단정 짓는 것도 잘못된 것이긴 하다. 애초에 게타는 22살의 너무 젊은 나이에 죽어 실력을 입증할 기회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지지기반이 원로원과 법률가,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 등 세베루스 가의 엘리트 집단인 부분 역시 게타가 형에게 살해되지 않거나, 공존했다면 괜찮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듣는 이유이다.
4. 여담
형 카라칼라에게 암살된 이후, 모든 초상화들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것처럼 파괴된 탓에 제위 등극 후 대리석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에 따르면, 제위 등극 직전부터 풍성한 수염을 기르기 시작해 형과 달리 젊은 시절의 아버지 외모가 연상됐다고 한다.[1] 브리타니아 열왕사를 따른 대수[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두 아들의 사이가 극도로 벌어져 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카라칼라와 게타 간의 대립과 결과를 너무 잘 알았기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이미 결과를 예측했다고 말한다.[3] 이때 카라칼라의 스트레스는 극심해, 탈모까지 심해져, 가발을 쓸 정도였다.[4] 자신을 변호해 달라는 카라칼라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5] 디오에 따르면 군인들은 세베루스 황제와 닮은 게타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세베루스 황제가 창설한 제2 파르티카 군단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6] 하지만 당시 로마의 재정상태를 감안하면 무리한 인상이었다. 그 결과, 국고는 고갈되었고, 이는 결국 카라칼라가 화폐 개혁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안토니니아누스'라는 화폐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