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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시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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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브리아 왕조 레온 3세 | 콘스탄티노스 5세 | 아르타바스도스 · 니키포로스 | 2차 재위 콘스탄티노스 5세 | 레온 4세 | 콘스탄티노스 6세 | 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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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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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겸 집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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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보결 4년 4년 보결 5년 5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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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클로디우스 리키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
6년 6년 보결 7년 7년 보결 8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킬리우스 롱구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8년 보결 9년 9년 보결 10년 10년 보결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파피우스 무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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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실리우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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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센나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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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투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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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보결 22년 22년 보결 23년 23년 보결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그나이우스 트레멜리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피누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막시무스
24년 24년 보결 25년 25년 보결 26년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아비올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26년 보결 27년 27년 보결 28년 28년 보결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벨라이우스 투토르
29년 29년 보결 30년 30년 보결 31년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수르디누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루벨리우스 게미누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31년 보결 31년 보결 31년 보결 32년 32년 보결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섹스투스 테디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33년 33년 보결 34년 34년 보결 35년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티투스 루스티우스 눔미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노니아누스
35년 보결 36년 36년 보결 37년 37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섹스투스 파피니우스 알레니우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케로니우스 프로쿨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플라우티우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폰티우스 니그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37년 보결 38년 38년 보결 39년 39년 보결
아울루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아퀼라 율리아누스 세르비우스 아시니우스 켈레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퀸투스 산퀴니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푸블리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칼푸르니우스 세라누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카이시아누스
39년 보결 39년 보결 40년 40년 보결 41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ignotus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sine collega 퀸투스 테렌티우스 쿨레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41년 보결 41년 보결 41년 보결 42년 42년 보결
퀸투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푸티우스 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이우스 바라누스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42년 보결 43년 43년 보결 43년 보결 43년 보결
코르넬리우스 루푸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섹스투스 팔펠리우스 히스테르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ignotus 스푸리우스 오피우스
44년 44년 보결 45년 45년 보결 45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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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46년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카메리누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툴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47년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세다투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마르쿠스 호르데오니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바겔리우스 가이우스 볼라센나 세베루스
48년 48년 보결 49년 49년 보결 50년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퀸투스 베라니우스 루키우스 맘미우스 폴리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 빕스타누스 갈루스 가이우스 폼페이우스 롱구스 갈루스 퀸투스 알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수일리우스 네룰리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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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트레보니우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살비아누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 퀸투스 카이키나 프리무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마르켈루스
54년 보결 55년 55년 보결 55년 보결 55년 보결
마르쿠스 아이풀라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누메리우스 케스티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트레벨리우스 막시무스
ignotus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55년 보결 55년 보결 56년 56년 보결 56년 보결
푸블리우스 팔푸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 안나이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쿠르틸리우스 만키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티투스 쿠티우스 킬투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프로쿨루스
56년 보결 57년 57년 보결 58년 58년 보결
루키우스 두비우스 아비투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아그리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트라세아 파이투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카이시우스 마르티알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58년 보결 59년 59년 보결 60년 60년 보결
아울루스 페트로니우스 루르코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티투스 섹스티우스 아프리카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아울루스 파코니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마닐리우스 보피스쿠스
61년 61년 보결 62년 62년 보결 62년 보결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 그나이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 푸블리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만리우스 타르퀴티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마룰루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루키우스 아피니우스 갈루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63년 64년 64년 보결 65년 65년 보결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안토니우스 마케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푸블리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65년 보결 66년 66년 보결 66년 보결 67년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아프리누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아니키우스 케리알리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가이우스 파키우스 아프리카누스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누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67년 보결 67년 보결 68년 68년 보결 68년 보결
아피우스 안니우스 갈루스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아스코니우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베룰라누스 세베루스 푸블리우스 갈레리우스 트라칼루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69년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세르비우스 갈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루스 사비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티투스 비니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아울루스 마리우스 켈수스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70년 70년 보결
파비우스 발렌스 그나이우스 카이킬리우스 심플렉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알리에누스 로시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퀸크티우스 아티쿠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70년 보결 70년 보결 71년 71년 보결 71년 보결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ignotus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그나이우스 페디우스 카스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퀴리날리스 발레리우스 페스투스
71년 보결 71년 보결 72년 72년 보결 72년 보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바르바루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두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72년 보결 73년 73년 보결 73년 보결 73년 보결
섹스투스 마르키우스 프리스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오쿨라투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퀸투스 가비우스 아티쿠스 […]m[…] ignotus
74년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퀸투스 비비우스 크리스푸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ignotus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on[…]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74년 보결 74년 보결 75년 75년 보결 75년 보결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파트루이누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76년 76년 보결 76년 보결 76년 보결 7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탐피우스 플라비아누스 갈레오 테티에누스 페트로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길로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77년 보결 77년 보결 77년 보결 78년 78년 보결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가이우스 아룬티우스 카텔리우스 켈레르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데키무스 유니우스 노비우스 프리스쿠스 (루푸스) 퀸투스 코렐리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ignotus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푸니술라누스 베토니아누스
78년 보결 78년 보결 79년 79년 보결 79년 보결
섹스투스 비툴라시우스 네포스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ignotus ignotus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79년 보결 80년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티투스 루브리우스 아일리우스 네포스 임페라토르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파브리키우스 베이엔토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팍투메이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켈루스 옥타비우스 푸블리우스 클루비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리우스 플라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아일리아누스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81년 81년 보결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포스투무스 브라두아 섹스투스 네라니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티티우스 프루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 노니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로스키우스 코엘리우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킬리우스 스트라보 티투스 비니키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베루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유베날리스
81년 보결 81년 보결 81년 보결 82년 82년 보결
루키우스 베티우스 파울루스 가이우스 스코에디우스 나타 피나리우스 루키우스 카르미니우스 루시타니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세르바이우스 In]noc(ens)
티투스 유니우스 몬타누스 티투스 테티에누스 세레누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움브리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3년
[…]an(us) [가이우스 아리니우스 Mo]dest(us)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파트루니우스 마르쿠스 라르키우스 마그누스 폼페이우스 실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ignotus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퀴에투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
83년 보결 83년 보결 83년 보결 84년 84년 보결
마르쿠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섹스투스 카르미니우스 베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가이우스 피시우스 사비누스 테렌티우스 스트라보 에루키우스 호물루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니그리누스 쿠리아티우스 마테르누스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 ignotus
84년 보결 84년 보결 85년 85년 보결 85년 보결
가이우스 툴리우스 카피토 폼포니아누스 플로티우스 피르무스 igno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리카누스 (마르쿠스 라이키우스 또는 푸블리우스 글리티우스) 갈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호노라투스
85년 보결 85년 보결 85년 보결 86년 86년 보결
푸블리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데키무스 아부리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살비우스 리베랄리스 노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퀸투스 율리우스 발부스 [코르넬리우스] 오레스테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페트로니아누스
86년 보결 86년 보결 86년 보결 87년 87년 보결
incertus 섹스투스 옥타비우스 프론토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퀸투스 비비우스 세쿤두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칸디두스 마리우스 켈수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티디우스 토시아누스 루키우스 야볼레누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87년 보결 87년 보결 88년 88년 보결 88년 보결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가비디우스 테바니아누스 가이우스 킬니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Ⅳ 데키무스 플로티우스 그리푸스 퀸투스 닌니우스 하스타
가이우스 두케니우스 프로쿨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88년 보결 89년 89년 보결 89년 보결 90년
마르쿠스 오타킬리우스 카툴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푸블리우스 살루스티우스 블라이수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Ⅴ
섹스투스 율리우스 스파르수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사이니아누스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푸시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아카이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바이비우스 이탈리쿠스 루키우스 알비우스 풀라이에누스 폴리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 가이우스 카리스타니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프로쿨루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폼페이우스 롱기누스
90년 보결 91년 91년 보결 91년 보결 92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케리알리스 (또는 마르쿠스 투키우스 케리알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데키무스 미니키우스 파우스티누스 퀸투스 발레리우스 베게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Ⅵ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카툴리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마리누스 푸블리우스 메틸리우스 사비누스 네포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92년 보결 92년 보결 92년 보결 93년 93년 보결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몬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 아비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실라누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티투스 아비디우스 퀴에투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아룰레누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페두카이우스 프리스키누스 섹스투스 루시아누스 프로쿨루스
93년 보결 94년 94년 보결 94년 보결 95년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라루스 섹스티우스 Na(so) 루키우스 노니우스 칼푸르니우스 토르콰투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실리우스 데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Ⅶ
[투키우스 Ceria]lis 티투스 섹스티우스 마기우스 라테라누스 가이우스 안티우스 아울루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95년 보결 95년 보결 95년 보결 96년 96년 보결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만리우스 발렌스 퀸투스 파비우스 포스투미누스
푸블리우스 두케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툴루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티투스 프리페르니우스 [파이투스]
96년 보결 97년 97년 보결 97년 보결 97년 보결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카이시우스 프론토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폴리나리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icus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섹스투스 헤르멘티디우스 캄파누스
97년 보결 97년 보결 98년 98년 보결 98년 보결
퀸투스 글리티우스 아틸리우스 아그리콜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쿠르비우스 툴루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마테르누스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티투스 베스트리키우스 스푸린나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마르티알리스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아킬리우스 [Pri]scus 코엘리우스 스파르수스
루키우스 마이키우스 포스투무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페록스 리키니아누스
98년 보결 99년 99년 보결 99년 보결 99년 보결
퀸투스 풀비우스 길로 비티우스 프로쿨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팔마 프론토니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크레티우스 바르바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발레리우스 마그누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페록스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퀸투스 소시우스 세네키오 세네키오 멤미우스 아페르 아울루스 카이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ignotus
100년 100년 보결 100년 보결 100년 보결 100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마르쿠스 마르키우스 마케르 루키우스 헤렌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아쿠티우스 네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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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3년 기원전 435년 기원전 430년 기원전 418년 기원전 403년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무길라누스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쿨루스 푸수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 (불명)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마르쿠스 게가니우스 마케리누스 푸블리우스 피나리우스 (마메르키누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무길라누스 마르쿠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레길렌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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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마르쿠스 푸리우스 푸수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레길렌시스 스푸리우스 세르빌리우스 프리스쿠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페티쿠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율루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무길라누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퀸투스 클로엘리우스 시쿨루스 (포스투미우스 레길렌시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말루기넨시스 (보결)
기원전 363년 기원전 351년 기원전 340년 기원전 332년 기원전 319년
마르쿠스 파비우스 암부스투스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임페리오수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
루키우스 푸리우스 메둘리누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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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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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94년 기원전 289년 기원전 283년 기원전 280년 기원전 275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비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불명)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카이디키우스 녹투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
기원전 272년 기원전 269년 기원전 265년 기원전 258년 기원전 253년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프라이텍스타투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 가이우스 두일리우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페라
기원전 252년 기원전 247년 기원전 241년 기원전 236년 기원전 234년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기원전 231년 기원전 230년 기원전 225년 기원전 220년 기원전 214년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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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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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기원전 164년 기원전 159년 기원전 154년 기원전 147년 기원전 142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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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레아리쿠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 또는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
퀸투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기원전 109년 기원전 108년 기원전 102년 기원전 97년 기원전 92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에부르누스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게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기원전 89년 기원전 86년 기원전 70년 기원전 65년 기원전 64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불명)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루키우스 겔리우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기원전 61년 기원전 55년 기원전 50년 기원전 42년 기원전 28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기원전 22년 기원전 8년 14년 46년 73년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
로마 제국 제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파일:베스파시아누스고화질.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Titus Flavius Vespasianus
출생 9년 11월 17일
로마 제국 팔라크리나이
사망 79년 6월 23일 (향년 69세)
로마 제국 아쿠아에 쿠틸리아에
재위 기간 로마 황제
69년 7월 1일 ~ 79년 6월 23일 (10년)
전임자 비텔리우스
후임자 티투스
부모 아버지: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어머니: 베스파시아 폴라
배우자 대 도미틸라, 카에니스
자녀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소 도미틸라
종교 로마 다신교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2.1.1. 출생과 가문 이야기2.1.2. 출세를 하다
2.2. 내전 수습과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종결2.3. 원로원 개편과 내정 개혁2.4. 군대개혁과 속주운영체제의 변화2.5. 사망
3. 여담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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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9대 황제.

네로 황제 사후에 벌어진 내전인 네 황제의 해최후의 승자였고, 두 번째 세습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건자로, 오늘날 콜로세움으로 잘 알려진 플라비우스 원형극장[1] 건설을 명령한 것으로 유명하다.

출생지는 이탈리아 사비니 지역의 레아테(리에티)였으며, 최초의 기사계급 출신 로마 황제였다. 네로 황제의 자살 이후 세 명의 황제가 난립하며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69년 공식적으로 황제에 등극했다. 황제로서의 능력은 뛰어났는데 제위 계승에 대한 법률을 제정해 이전까지의 로마 제정의 세습체제를 확고히 굳히고 서기 2세기에 펼쳐진 팍스 로마나의 기반을 만든 명군으로 칭송받고 있다.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2.1.1. 출생과 가문 이야기

베스파시아누스는 AD 9년 이탈리아 레아테 근교의 팔라크리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사비니 지방의 레아테 근처의 작은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던 기사계급(부유층)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 집안의 가업은 징세와 경매, 고리대금업이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사채, 추심, 압류를 전문으로 하는 제3금융권인 셈이라 돈은 많았지만 사회적인 평판이 굉장히 나빴다. 그의 조부였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페트로는 경매업자였고, 부친이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세금징수원을 지내다가 고리대금업자를 지낸 세리업자 집안 이었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형이었던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성공은 당시 부유층 사이에서도 존경받지 못하는 가문 출신이 개인 능력과 훌륭한 인품, 성실성만으로 편견을 깬 것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플라비우스 가문은 '금발머리'에서 유래한 평민 성씨였는데, 속된 말로 "어디서 굴러먹다가 급부상한 집안"으로 평가받았다. 실제로 플라비우스 왕조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을 살았던 수에토니우스의 표현을 빌리면, 로마인에게 있어 생소한 무명의 가문에 불과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세간의 평가처럼 베스파시아누스 형제가 기용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제2대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 제3대 임페라토르 가이우스 이전까지는 가문의 일원 중 단 한 명의 공직자도 배출하지 못한 성씨였다.

그나마 이 가문에서 이름이 있었던 사람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할아버지였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페트로 정도였는데, 이 역시 손자인 베스파시아누스가 고위직에 오르면서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정도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조부 티투스 플라비우스 페트로는 평범한 레아테 시민으로 태어나 무슨 일을 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그저그런 사내였다고 한다. 그는 공화정 말기의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군에서 백인대장으로 복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에 관해 수에토니우스는 조사 결과, 페트로는 백인대장으로 근무하지 않았고 자원 보충병으로 싸웠다고 한다. 페트로는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카이사르의 관용으로 특별사면을 명령받아 명예제대 형식으로 목숨을 건져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그는 고향에서 코사 출신의 테르툴라라는 꽤 넉넉한 집안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다고 하며, 사비니와 그 근처에서 로마인들로부터 멸시받는 세금징수원과 경매업자에 종사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버지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는 대를 이어 세금징수원의 길을 걸었는데, 다른 세금징수원들과는 달리 상당히 양심적이고 정직한 세리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부친은 아시아 속주에서 세금징수원을 거쳐 세관 감독까지 지냈다. 이후 그는 퇴직한 후 라이티아 속주[2]에서 고리대금업에 종사했다. 이때 사비누스는 같은 직군에 종사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사기를 쳐서 세금을 가로채거나 고리대를 덧붙이는 악행을 벌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아시아 속주에서는 사비누스의 정직함과 성실성을 높이 평가한 이곳 시민들이 친히
"정직한 세리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라는 문구까지 적은 동상도 만들어줬고, 헬베티족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면서도 세무사 노릇을 했다고 한다. 또 그는 로마인과 속주민들로부터 "더러운 일", "비열하고 추접한 일"로 비난받는 직업을 두루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문과 자녀들이 지금 일보다 더 훌륭하고 존경받는 직업을 갖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보다 신분이 훌륭한, 고향 근처의 도시 누르시아의 명문가 출신의 처녀와 결혼했다. 그녀가 바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어머니였던 베스파시아 폴라였는데, 그녀의 아버지[3]였던 베스파시우스 폴리오는 제국군의 군단 대대장을 3번이나 지내고, 로마군 병영 행정책임자까지 지낸 전형적인 '존경받는' 기사계급 출신 관료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부친 사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어린 시절, 헬베티족의 땅인 갈리아에서 근무 중 객사했다.

플라비우스 가문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조부때부터 돈과 관련된 일에 종사했고, 부친 대에 이르러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를 이어 종사한 직업이 로마 사회에서 그 평판이 최악인 세리, 고리대금업, 경매업이었던 탓에, 많은 돈을 모았어도 세간의 존경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산이 상당히 많아, 베스파시아누스의 생가는 사비니 일대에 과수원과 경작지 등을 갖춘 장원을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나름 유복했고, 할머니쪽과 어머니쪽 집안도 코사와 누르시아 내에서 부유했던데다가 이들 지역에도 비슷한 규모의 집이 있었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어린 시절 그를 돌본 이는 코사에 살고 있었던 친할머니 테르툴라였다. 이런 이유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이후, 할머니와 함께 지낸 코사 내 시골집을 그대로 보존케하고, 할머니가 물려준 은잔을 축일이나 휴일에 사용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2.1.2. 출세를 하다

평판이야 어쨌든 돈은 많이 벌었던 집안에서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모국어인 라틴어 외에도, 당시 교양인의 척도 중 하나였던 그리스어 역시 상당한 수준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코사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하며, 가정교육을 받았다가 이후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됐다고 한다. 이 시기, 형 사비누스는 말 그대로 집안의 자랑이었는데, 베스파시아누스가 성년식 직전일 무렵 하필이면 친가와 외가 양가 최초로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 시기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머니 베스파시아 폴라에게 매일같이 "네놈은 네 형의 시종 노릇이나 해라!"고 놀림받으며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참다못한 베스파시아누스는 페렌티움 출신 기사계급 가문의 딸이었던 도미틸라와 결혼한 이후, 36년에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트라키아 속주에 있는 로마군 장교로 입대해 복무했으며, 그제서야 베스파시아 폴라는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는 훗날 본인의 고백처럼 "폭이 넓고 자주빛 줄무늬가 있는 토가를 걸치기 싫었다"고 다짐했어도 형 사비누스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게 됐다. 이때가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고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가 갓 즉위한 때인 37년인데,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먼저 공직에 몸담고 있던 형 플라비우스 사비누스[4]를 따라 자연스레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조부, 부친이 모두 돈과 관련된 일에 종사한 까닭에 일찍부터 재무와 관련된 직무 이해도가 상당히 높았고, 성격이 워낙 꼼꼼해서 복무지였던 크레타 섬과 키레네에서 훌륭한 공적 경험을 쌓았다. 이후 39년 조영관(안찰관)에 추천받아 이 관직을 지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실제 재무와 군무 모두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선보였는데, 당시 원로원은 그의 출신 가문이 이름없고 세리업에 종사한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맨처음 추천을 통해 출마한 조영관 선거에서 그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럼에도 당시 원로원과 가이우스 황제 사이는 양측의 끝없는 견제로 알력다툼이 일었고, 가이우스 황제는 황제권 강화와 원로원 견제를 위해 측근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터라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젊은 황제의 추천 아래 본격적으로 출세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가이우스 황제는 가문의 평판이 좋지 않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출세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줬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재수 끝에 조영관을 지낸 뒤, 서기 40년 가장 빨리 법무관에 올랐다. 이는 기사계급 출신 중 평이 안 좋은 징세업과 고리대금업 집안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형 사비누스 이상으로 이른 출세였는데, 더 대단한 것은 황제의 추천 덕분에 법무관 당선도 가장 빨랐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원로원 입성의 기회를 얻게 됐다. 이런 이유로 베스파시아누스는 별 볼 일 없는 가문 태생임에도 자신에게 기회를 준 젊은 가이우스 황제를 적극 지지했다.[5] 그리고 이런 그의 태도처럼 변덕스러운 면이 많은 가이우스 황제도 여러 부분에서 베스파시아누스를 괜찮게 생각했다. 가이우스는 꼼꼼한데다 성실하고, 유머 감각이 풍부하면서도 황제와 황실에게 진심으로 헌신한 베스파시아누스를 좋게 여겼다고 한다.

이런 배경과 이유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에 온 이후, 공개석상에서 "가이우스 황제의 게르마니아 원정을 기념하고 그의 승리를 위한 기념일은 당연하다"고 대놓고 언급할 정도로 황제를 적극 지지했다. 그의 칼리굴라를 향한 그 충성심은 끝이 없었는데, 그럴수록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법무관이 끝난 직후인 41년 1월, 베스파시아누스를 총애한 칼리굴라가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그를 따르는 20여명에게 암살됐다. 이후 근위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칼리굴라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가 옹립돼 황제에 올랐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원로원 회의 중 "억울하게 살해당한 가이우스 황제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며 그 충정을 드러냈고, 원로원이나 암살범들이 시해당한 황제의 유해에 해를 가하면 안 되며 이를 시도하는 것은 반역 중의 반역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한 법령 제정까지 건의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 발언을 할 당시 원로원은 공화정 복귀 선언 논의를 하고 있었고, 신참자에 불과한 그가 회의 중 이런 발언을 한 것은 보통 배짱이 아니라면 하기 힘든 작심발언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황숙 클라우디우스가 클레멘스를 위시한 근위대의 지지 아래 즉위했다. 그는 24시간도 되지 않아 모든 혼란을 수습하고, 근위대를 완벽히 장악한 다음 원로원에 출석했다.

이 사건 이후, 베스파시아누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부터 가이우스 황제의 측근이며 친황제파로 눈도장을 제대로 찍게 된다. 따라서 갓 즉위한 클라우디우스의 해방노예 참모 3인방 중 한 명인 나르키수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신임받는 해방노예 여성 카이니스의 천거를 받게 된다. 그 결과, 베스파시아누스는 여러 인사들과 달리 황실의 적극적 추천 아래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게르마니아에 주둔 중인 제2군단의 군단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이 시기,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실의 해방노예 카이니스와 인연을 맺어 카이니스가 죽을 때까지 사실상 부부로 지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아래에서 무수한 행정, 군사적 경험들을 쌓았으며, 특유의 성실함과 꼼꼼함 그리고 공직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보인 충성심 등을 두 황제에게 인정받았다. 그래서 여러 공직을 거친 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원로원 귀족에 편입됐다. 이후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장군으로 상당한 공적을 쌓으면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신임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네로 시대에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잠깐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왜냐하면 네로 치세 때 시 낭송회에서 직접 출연한 네로 황제가 시를 읊는 도중에 대놓고 졸아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베스파시아누스는 잠시 네로의 진노를 사 처형될뻔했지만 목숨을 겨우 건진 채 섬으로 유배됐다. 이때 그는 유배지에서 양봉으로 소일하기도 했다.[6] 하지만 이 사건 외에는 네로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아서,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재등용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능력을 인정받아 즉위 전까지 트라키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파견돼 공적을 쌓았다. 따라서 그는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신임 아래 계속 군부에 남아있었는데 네로 치세 말기에 유대 지역에서 종교적 민족주의 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발생한 유대 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명장 코르불로 휘하의 시리아 속주로 파견됐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반란을 평정할 지휘관으로서 새로이 임명을 받고 유대땅으로 파견된 이후, 지략과 용맹성으로 유대 북부 갈릴레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요셉이라는 유대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게 된다. 후에 로마로 들어가 시민권을 얻게 되는 요셉, 즉 로마인으로서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로마와 유대 간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양쪽의 공존을 모색하게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도움으로 유대를 무리없이 통치하였다. 물론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정치를 도운 요세푸스를 보호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여튼, 이 반란을 진압하던 중 내란이 일어나 네로가 자결하자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7]와 로마의 동방 관리들, 동맹국 국왕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또한 비텔리우스에게 쌓인 원한을 풀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한 도나우 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로마에 입성해 비텔리우스를 죽이고 로마를 평정하여 베스파시아누스는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2.2. 내전 수습과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종결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네 황제의 해라고 불리는 네로 후기와 세 황제의 난립기로 인한 혼란과 국가 위신의 회복을 위해 진력하였다. 최대한 보복을 줄이는 방법으로 네로 자살 이후 터진 내전 치유와 제국 안정에 최선을 다했다.

비텔리우스파의 난동으로 불타버린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복구하고 방만한 재정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국유지 재측량 작업으로 상당한 국고수입 증대를 이뤘다.[8][9] 재정수입의 증대 덕에 그의 아들들 대까지 콜로세움과 같은 공공 건축 사업을 원활히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허나 비텔리우스 형제와 아들을 제거한 뒤, 네로 시대의 피소 음모로 피해를 입고 갈바의 양아들이 됐다가 억울하게 피살된 피소 리키니아누스 문제를 재조사해 신원복구해주기 보다는 이를 이유 삼아 탄압하는 태도를 취해 이 부분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때 그는 오래된 명문 피소 가문의 남성들을 정치 공작을 통해 대거 처형, 추방하고 반대파가 될 귀족 가문들까지 싸잡아 원로원에서 내쫓는 등의 이해 못 할 정치적 숙청을 자행했다. 이 외에도 베스파시아누스 즉위에 도움을 준 장군들, 즉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도나우 군단장 프리무스를 반강제로 퇴역시키거나 정치공작을 통해 묘한 분위기를 조성해 은퇴시켰다. 이들은 자체 무력을 보유하고 즉위 과정에서 비텔리우스와의 내전을 대신 치뤄줬기 때문에 그대로 둘 경우 권신이 될 우려가 높아 숙청 자체는 불가피했고, 다른 황제 같으면 죽였을 것을 그나마 명예롭게 은퇴하는 식으로 추방한 것은 그나마 잘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이 숙청 작업은 근위대장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의 장남 티투스가 담당했는데, 이는 티투스가 즉위하기 전까지 인기가 형편없게 된 원인이 됐다. 아울러 티투스 즉위 후 이런 보복이 줄었다고 해도 후일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도미티아누스 시대가 되면 황제가 앞장서서 이 작업을 하면서 원로원과 황제 사이의 힘 대결 양상으로 확전된다.

어쨌든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위 이후 장남 티투스를 앞세워, 본인은 관용을 베푸는 방법으로 인기를 얻고 뒤로는 계속되는 명문 귀족 숙청 및 추방으로 권력 강화에 매진하며 내전 수습에 매진한다. 헌데 이런 비열한 정적 숙청 방법은 짧게 보면 기사계급 출신 신흥 황제 가문의 권력 기반 안정에는 도움이 됐음에도, 결과론적으로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종말로 연결됐다.

이 외에도 그는 비텔리우스 즉위 후 게르마니아에서 로마군 장교로 복무해온 게르만 족장 율리우스 키빌리스 주도로 터진 바타비아 반란, 오늘날 벨기에에서 시작돼 갈리아 북동부로 퍼져나간 켈트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주력했다. 이때 그는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에게 두 반란을 진압하라고 지휘권을 내렸는데 그는 1년만에 두 반란을 모두 진압했다.[10]

서방에 이어 동방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즉위 후, 후임으로 유대 전쟁을 총괄한 황제의 장남 티투스의 손에서 마무리되어갔다. 로마군을 이끌던 티투스는 유대 반란군을 거세게 밀어붙였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유대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 전쟁은 유대인들이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양측 모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학살이 자행되었고, 포로로 잡힌 유대인들은 처형되거나 로마로 끌려간다. 특히 로마에 저항한 본보기로 예루살렘 신전 등이 모두 약탈되고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렸다.

2.3. 원로원 개편과 내정 개혁

베스파시아누스는 한평생을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원로원과의 관계도 원만했으며, 반대파들을 억누르기보단 설득하며 국정을 이끌었다.

그는 원로원과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상당히 노력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제정을 공식적인 제도로 만들고 공화정을 부인하면서 제국의 통치자는 황제이며 황제는 원로원보다 위에 있다며 선은 분명하게 그었다.

69년 처음 황제로 공표될 당시, 그는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내리는 제위계승법을 만들면서, 이런 그의 원로원 존중 태도를 확고히 보여주고 애매모호한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 직위를 명확히 규정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카피톨리누스 신전 내에 동판으로 법령을 새긴 뒤 이를 설치했다. 그 동판에는 명문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계보와 그 정통성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로 말한 뒤 브리타니쿠스를 그 마지막 직계로 언급하고 공적으로 탄핵된 네로를 제외하면서, 플라비우스 가의 정통성이 클라우디우스에서 나왔다고 명기됐다.

또 그는 원로원에서 현군의 예시로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를 언급했는데, 원로원과 사이가 껄끄러웠던 티베리우스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언급하고[11] 칼리굴라, 네로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는 해당 황제가 기념식이 없어 언급하기 곤란해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12] 원로원의 체면이나 플라비우스 가문의 정통성을 이유로 제위를 계승한 적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13]

베스파시아누스는 감찰관 부임 후 기존 원로원의 위상과 자부심을 존중했지만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처럼 원로원을 서서히 약화시켜나갔다. 네로 사후 혼란기 동안 당시 원로원 수는 200명가량으로 줄어들었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본국과 속주 내에서 무려 800명의 인사들을 선별해 새로운 원로원 의원으로 충원하고, 그들을 원로원 귀족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원로원은 70년 이후 사실상 베스파시아누스와 플리비우스 왕조에 협력적인 인사들로 자연스레 교체하는데, 과거 네로 시대에 중용받던 그리스와 소아시아 출신자들보다 그가 더 신경써준 지방은 세금을 부담하면서도 소외된 갈리아 남부와 서부, 히스파니아 일대였다.[14][15]

이처럼 원로원을 약화시킨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처럼 제국 행정부를 강화시켜나갔다. 이 조치는 내전을 치르면서 항구적인 행정을 위해 필요한 결정이었으며, 과거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대동안 관료층을 서서히 차지하던 해방노예 출신들을 다시금 밀어내고 기사계급으로 채워넣는 조치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는 과거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근위대장과 근위대의 힘을 통해 정적을 솎아냈는데, 이 중책을 맡게 된 이는 후계자 티투스였다.

이런 내정 개혁 중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후세까지 큰 명성을 가져오게 한 개혁은 재무행정 분야였다. 클라우디우스 생전부터 황제에게 재무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던 사람답게 그는 네로의 사치와 내전기 혼란으로 바닥난 국고를 다시 채워나갔다. 본래부터 꼼꼼하고 검소한 사람답게 그는 공중화장실에 오줌세 등을 부과[16]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네로 시대 이후 박살난 나라살림을 재건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세수의 기본이 되는 인구, 재산 조사를 실시하면서 관료들의 부패와 뇌물 수수, 횡령을 적극 색출해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또한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했다.[17] 하지만 속주들에게는 새로 만든 세금들을 적극적으로 부과했다. 속주세를 최대 2배나 인상하여 재정이 나아질 때까지 유지한 것이다. 돈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닌 만큼, 가장 만만한 게 속주세였다고 할 수 있다.

2.4. 군대개혁과 속주운영체제의 변화

내전을 치르는 동안, 베스파시아누스는 야전사령관, 임페라토르 자리 모두의 위치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로마군 내 속주 주둔병력들의 수행 역할을 개혁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로마군 중 국경지대에서 일부 부대들에서 벌어진 군단병, 보조병 모집 관행을 폐지하고, 동족주의 경향이 강한 레누스, 다누비우스 일대 병력 내에는 과거 아우구스투스 시대처럼 본국 출신 이탈리아 혈통 장교들을 대거 배치했다. 이는 즉위 직후 게르마니아와 갈리아 내 독립움직임 당시 일부 병력의 동요가 있었던 사건이 그 계기였다. 따라서 그 움직임에 동조한 군단들을 군대 명부에서 삭제해 재편성한 조치와 이런 쇄신은 함께 진행됐다.

다음으로 그는 69년 네로의 몰락 이후 이를 심화시킨 속주총독, 야전사령관들의 여러 군단 장악과 반란 위험성을 최소화시키는데 주력했다. 이 조치는 기존 사령관들을 소환하거나 은퇴 등을 유도해 숙청시키는 극단적 방법이 아닌, 갈수록 정밀화되는 서방 외적들을 막기 위한 전략적 판단에 맞춰 국방강화 정책으로 진행됐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는 반발 없이 이 어려운 작업을 사령관급 군부 인사들의 도움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로마군은 이전까지 항구적 군사기지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형태의 군단 주둔 방식에서 군사국경선에 따라 개별 군단 단위로 주둔하는 시스템으로 변화됐다.

아울러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군의 골머리를 앓게 만든 정규 군단병 모집 대상 문제도 발빠르게 해결했다. 로마와 이탈리아 내 본국 청년들은 클라우디우스 시대부터 높아진 교육 수준과 경제 향상, 복무지 환경 등을 이유로, 속주 군단에 지원하기 보다는 프라이토리아니에 지원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따라서 네로 치세 후반부터는 본국 출신 이탈리아인들의 속주 군단 입대 비율은 뚜렷하게 하락세를 타게 되는데,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는 서방 내 갈리아, 히스파니아 출신자들도 로마 정규군 모집 대상으로 입대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이는 오래전 로마령에 편입된 역사에도, 동방 내 그리스와 소아시아 일대에 비해 은근히 차별대우를 받는다고 느낀 소외된 이 지역 내 민심을 다독이는 또 다른 조치이기도 했다. 또 곡창지대인데다 백여년 간의 평화로 인구가 늘고, 로마시민권자 비율이 높았던 현실까지 감안해 내린 결정이었다.

군대개혁이나 관료제 재정비, 재정안정화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노력한 내정부분은 3세기 초반까지 진행되는 대대적인 속주정책과 라틴 권리 확대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범위했고 도시와 농촌에서 로마화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진행됐다.

따라서 그는 여러 속주 중 갈리아 남부를 시작으로 갈리아 서부와 히스파니아 일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으로 라틴 권리를 새롭게 부여했는데, 이는 네로 시대에 이르러 나타난 이 일대의 불만을 다독이는 조치이기도 했다. 즉,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출신 기사계급들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고, 그들을 귀족반열에 올려주는 조치처럼 라틴 권리 부여는 이런 측면까지 고려했다. 하지만 이런 측면을 고려했다고 해도, 대대적인 속주 내 라틴권리 부여 정책은 본국과 속주 간의 연계성까지 강화한 효과까지 있어 단순한 선심성 결정이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 치세 말에 이르게 되면, 이탈리아 동쪽의 달마티아 일대에도 라틴 권리를 부여됐고 이 흐름은 계속 확대됐다. 아울러 이렇게 라틴 권리가 부여된 속주들은 항구적인 로마시민권자 병력 자원과 세금 징수대상 확대 효과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 성공의 과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의 번영에 있어 큰 힘이 되었다.

2.5. 사망

79년 봄 베스파시아누스는 고된 직무를 지속해오다 캄파니아를 순시하던 도중에 열병에 걸려 쓰러진다. 그래서 로마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가 갈수록 악화되었고[18] 결국 그는 눈을 감았다. 이때 그의 나이 69세였다. 그가 쓰러질 당시 후계자 문제는 해결된 상태였기에 뒤는 이름이 똑같은 장남 티투스가 이어받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평소 촌철살인 농담을 즐기던 황제답게 임종 직전에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는데
"여보게, 내가 신이 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19]

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았다. 이때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서서 죽어야 한다며 죽기 직전에 병상에서 억지로 일어나다가 시종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3. 여담

  • 상당히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농담을 즐겨했던 사람이었고 죽는 순간까지 농담으로 모두의 슬픔을 멈추게 한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이는 황제가 된 이후의 습관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나온 특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는 모두를 웃게 만들 수 있었는데, 농담 수준은 야한 내용부터 아재개그, 자학개그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내전 중 아들 티투스에게 중요 명령을 편지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농담을 적어 보냈다.
"고맙구나, 아들아. 네가 반기를 들지않고 나를 제위에 머물게 해주니."
베스파시아누스는 생애 첫 개선식 중 개선 행렬이 오래 계속되면서 주변이 지루해하자, 다음과 같이 농담을 하면서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다 늙어빠져서 개선식을 원했으니 이래도 싸지. 당연한 거 아닌가?"
따라서 수에토니우스는 이런 베스파시아누스를 저속하고 광대 같은 익살이라며 비난했는데,[20] 대개의 원로원 의원들이나 황제가 되기 전 그를 경험한 선대 황제들과 주변인들은 수준 높은 농담부터 익살스러운 이야기까지 재밌게 말하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솔직 담백하다고 생각했을 뿐 천박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 워낙 농담을 좋아한 사람인 만큼, 모국어인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로도 모두를 웃게 할 정도로 상황에 맞는 농담을 잘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리스어로 하는 농담은 그리스어 책에 나온 문구까지 자연스럽게 암송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리스어로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였다는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그리스어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증거이며,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은 교양인이라는 증거 중 하나다.
  •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머 뿐만 아니라 촌철살인의 경구를 날리는데도 능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제정 철폐와 공화정 복고를 주장하는 민주주의파 그리스 철학자들이 면전에서 계속 황제는 폭군이며 독재자라고 욕하자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나는 짖는다는 이유로 개를 죽이지는 않소."

    라고 쏘아붙였고 그 한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그리스 철학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주류 그리스 철학자들은 스스로 '개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천명한 디오게네스 이래 개처럼 가진 것 없이 세상에 냉소적인 삶을 산다고 자인하는 일명 '견유학파'였는데, 그 시점에서의 공화정 복고론은 이미 잃을게 많아서 진짜 개처럼 물지도 못하는 반쪽짜리들이 짖어대는 '개똥철학'일 뿐임을 지적한 것이다.
  • 탈무드에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유대 반란 당시 벤 자카이란 이름의 랍비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와 황제가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작은 학교라도 좋으니 이를 세우고 그것만은 파괴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이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한 뒤 예루살렘 전체를 파괴하되 벤 자카이와의 약속대로 조그마한 학교는 남겨두어서 유대인들의 전통과 지식을 지켜나갔다는 내용이다. 위의 요세푸스와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유대인들에겐 교육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때 벤 자카이는 포위된 성을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관에 숨어서 나왔다. 로마와의 협상을 반대하며 항전하던 강경파는 관을 들춰서 칼로 찔러보려 했으나 차마 랍비의 시신을 모욕할 순 없다며 그냥 보내줬고, 로마군의 경우 실제로 칼로 찔러보려 했으나 관을 가지고 온 제자들이 '당신들의 황제께서 돌아가셔도 이런 짓을 할 거요?'라고 반대해서 무사히 통과했다는 이야기.
  • 돈 문제에 민감해 세간으로부터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탐욕스러운 것 같다"고 욕을 먹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총독으로 있으면서 군자금과 국고 문제로 한 행동 때문에 생긴 비판이었고, 즉위 후 국고 정상화를 위해 세금을 여기저기 붙이면서 얻은 오명에 가까웠다. 실제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위 전부터 정의롭고 관대하며 의리있는 사내로 유명했다. 이는 그를 법무관으로 추천해준 칼리굴라 암살 당시에도, 제위에 오른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는 후세대의 수에토니우스로부터 출세를 위해 함량미달인 황제에게 아부를 떤 것이라고 폄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수에토니우스의 폄하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제위에 오른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본인이 한 말은 지켰고 자상한 면이 많았다. 따라서, 그는 내전 이후 생활이 팍팍해진 옛 동료들을 위해 수많은 소송들을 신속히 처리해줬다. 이는 정적들에게도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 외에는 비슷했다. 일례로 베스파시아누스는 비텔리우스의 딸이 결혼을 잘하도록 혼처를 구해 도와주고, 결혼 지참금까지 두둑히 챙겨줬다. 네로가 구멍낸 400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채우는 과정에서도 정적들을 반역죄로 고발해 재물을 한 푼도 뺏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비방과 욕설이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처럼 습관적이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이유로 계속되면 관용은 더 이상 없었다. 처벌받은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는 제 손으로 무덤을 판 탓에, 베스파시아누스를 비난하기 곤란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인내심이 부각된 측면이 강했다. 프리스쿠스는 다른 정적들과 달리,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비난이 지나쳤는데, 그 비난 방식 역시 인신공격 수준이 심하고 늘 반대를 위한 반대 뿐이었다. 이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만하면 그만해라"라고 경고를 여러 번 했다. 그럼에도 그는 황제가 자신을 처벌하지 않음을 알고 계속 신상 공격을 퍼붓고, 반대를 위한 반대로 꼬투리를 잡았다. 따라서 참다못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례적으로 프리스쿠스를 추방 후 처형하도록 했고, 진짜 이를 집행했다.
  • 이렇듯 건전 재정에 집착한 황제여서 온갖 짠돌이 이미지와 관련된 일화가 많고, 본인도 스스로 그에 관련된 농담을 적극 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어떤 지방도시를 방문했는데, 아부하고 싶었던 지방관이 막대한 공금을 들여 자기 상을 세우겠다고 터를 잡아달라고 하자, 프로젝트를 당장 진행하라고 한 다음 손바닥을 내밀면서 이렇게 답했다.
"내 상을 세울 터는 여기다 잡으면 되네."
아첨하는 데 괜히 공금을 쓸 바에야 그 돈 나나 줘라고 한 것이다. 결국 후일 이 말을 소재로 한 고인드립을 당했다.
  • 세수 증대의 일환으로 공중변소에서 공짜로 오줌을 퍼다 정제해 양모 가공에 쓰던 섬유업자들에게 부과하던 오줌세(vectigal urinae)를 부활시켰다. 본래는 네로 황제가 만들었던 세금이었는데 재정을 탕진한 폭군이 황급히 급조한 망측스러운 세금을 부활시킨 것 때문인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이를 부끄럽게 여긴 아들 티투스가 찾아와서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냐고 따지자 금화를 한웅큼 꺼내들어 아들의 코에 들이밀면서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고, 티투스가 안 난다고 하자 "오줌세로 거둔 돈인데 말이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돈에는 냄새가 없다(Pecunia non olet)'이라는 라틴어 숙어로 남게 되었다.
  • 개인적으로도 정말로 지출을 아까워했는지, 황제 체면 상 한턱 내려고 지갑을 열 때마다 꼭 우거지상을 하고 "이 몸이 쏘는 거야?"라고 한 마디씩 생색을 내는 버릇이 있어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고 한다.
  • 디오 카시우스는 '그가 돈을 얻기 위해 남을 죽인 적은 없지만, 돈을 받는 대가로 남을 살려 준 적은 많다'는 미묘한 기록을 남겼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첩인 카이니스가 이런 사업에 관여했는데, 로마 사람들은 베스파시아누스가 막후에서 조종했을 거라고 믿었다고 한다.

4. 평가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평가는 그가 69년 내전과 유혈사태로 얼룩진 로마를 안정시키고, 70년부터 네로와 갈바, 비텔리우스가 저지른 실정을 수습한 것만으로도 당대 로마인들에게 과거 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해전 승리 못지않다고 찬사를 받았다. 아울러 이 황제가 재위기간동안 벌인 일들은 아우구스투스 못지않게 광범위하고 로마의 1세기 중후반 ~ 2세기까지 그 연속성을 지속케했기에, 당대사가들과 근현대사가들은 이런 그를 제정 로마의 제2 창건자라고 했다.

그러나 당대사람들의 일관된 이야기처럼, 베스파시아누스는 특별대우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본인 스스로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카리스마와 묘한 매력, 특별한 신망이 없다고 생각했다.[21] 그래서 혹자들은 베스파시아누스를 2세기 로마 제정 최고의 황금기를 열었던 명군, 오현제보다 훌륭한 진정한 현군이라고 더 높여 평가해준다.

그는 사상 최초로 수도 로마가 아닌 이탈리아 지방 출신의 황제였고, 이는 이후에 로마 황제의 출생지에 대한 로마 제국 백성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어 나중에 가면 속주 출신 황제들도 나올 정도가 되게 한 선구자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세리 집안의 차남으로서 로마 제국의 권부 최상층에 오르기 어려운 신분이었으나, 치밀함과 부지런함으로 자신의 신분을 끌어 올린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고, 제위 등극 자체도 개인적 야심을 앞세워 등장한 권력자도 아니었다.

모국의 다큐에서는 이 사람과 네로를 비교하면서 네로가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오페라 관람을 하는 속물이라면, 베스파시아누스는 맥주를 들이키면서 축구 경기를 보는 건실한 서민적 남성이라고 했다. 확실히 점잔빼면서 고상한 취향을 가장하는 네로의 시를 듣다가 졸아버린다든가 재위 중에 축구장만 한 콜로세움을 착공한다든가 한 것을 보면 단순히 서민들에게 아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서민적인 취향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황제들은 돈이 궁하면 재정 마련 수단으로 정적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서 재산을 몰수하는 악랄한 일석이조의 행동을 종종 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런 짓을 일절 하지 않아 칭찬을 들었다. 대신 재정적자 해결의 수단으로 여기저기에 온갖 간접세를 붙였다. 따라서 이런 그의 행동은 "지나치게 돈을 밝힌다"고 까였다. 이는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그의 장례식에도, 심지어 현대 이탈리아에서도 이름이 회자될 정도다. 공중변소의 오줌에까지 세금을 매기는 등 다소 치졸한 명목의 세금도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에게는 짠돌이 황제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사후에 베스파시아누스를 풍자하는 희곡이 상연되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장례비로 1천만 세스테르티우스[22]가 들어갔다고 하자 죽은 베스파시아누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차라리 그 중 1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미리 나한테 주고 내 몸은 그냥 테베레 강에 던져버리지 그랬어!"라고 절규하는 고인드립성 내용의 희곡이었다.[23] 그럼에도 황제 티투스는 그 희곡이 상연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베스파시아누스가 그렇게 돈에 집착했던 것이 물욕이 많아서가 아니라 워낙 좋지못한 국가 재정을 복구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건 당시 로마인들이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풍자가 플라비우스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 물론 악의가 없어 웃어넘길 수 있는 유머에도 과민반응해 피바람을 일으키는 권력자가 동서고금 통틀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하면 베스파시아누스나 티투스의 관용과 자제심을 낮게 평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특히 티투스는 상당히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유명한 황제였고, 아버지 스스로가 평생 자신의 인색함을 적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부단히 긍정적인 유머 소재로 삼아 온 탓인지 본인도 이에 익숙했다.
[1]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 Amphitheatrum Flavium[2] 오늘날 바이에른 지역의 일부와 스위스 동부[3]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외할아버지[4] 유능한 관료로 인정받아 AD47년 보결집정관을 지냈고, 집정관 퇴임 후에는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11년이나 지낸다.[5] 당연하지만 원로원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칼리굴라를 지지하고 우호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수에토니우스도 비슷했는데, 그는 자신이 전해들은 바를 토대로 예측하건데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무 이유 없이 아부를 했다며 출세를 위해 양심을 팔았다고 힐난했다.[6] 사형이나 다름없는 자살강요까지 받을 수도 있었던 위기를 구해준 것이 페트로니우스로 네로에게 "오르페우스는 하프 연주로 케르베로스를 잠들게 했는데, 폐하는 시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잠들게 했으니 이는 오르페우스의 업적과 맞먹는 것입니다"라고 살짝 야유가 섞인 칭찬으로 달래면서 네로의 분노를 풀어주어 베스파시아누스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7] 다만 베스파시아누스 즉위 전, 인지도나 공적 등을 비교할 때 네 황제의 해 시절 황제 후보로서 베스파시아누스보다는 무키아누스, 무키아누스보다는 코르불로가 좀 더 어울렸다(다만 코르불로는 이미 네로의 치세 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후였다). 그리고 타키투스는 이러한 점 때문에 무키아누스와 베스파시아누스가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았고 무키아누스가 베스파시아누스 즉위 후 안하무인이 되었다고 하였으나 이는 경쟁관계를 너무 확대해석한 것에 가깝다. 즉,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경쟁관계인 동시에 협력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는 시오노 나나미의 접근이 좀 더 타당할 것이다.[8] 그 과정에서 공중변소의 오줌에 세금을 물리기도 했다. 단, 오줌 누려면 돈 내고 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모인 오줌을 수거해서 표백이나 세탁 등에 쓰는 업자들에게 오줌 사용료를 내라는 의미다. 이때 아들인 티투스가 이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는데 그의 앞에서 금화를 보여주며 '배뇨세금으로 만든 이 금화에 냄새가 나냐?'라고 한마디 했고 여기서 '돈에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Pecunia non olet)'는 명언이 탄생했다고 한다.[9]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베스파시아노'라고 하면 '공중화장실'이라는 뜻이라고. 실제로 이탈리아어 사전에 vespasiano라고 찾아보면 '(남자용) 공중변소'라고 나온다.[10] 키빌리스의 반란은 초기에는 군단장 보쿨라는 전사, 군단장 루페르쿠스는 포로로 잡혀 살해당하는 등 고전했으나 결국 반란의 근거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을 탈환하여 진압했고 키빌리스는 로마 영토를 영원히 떠나는 조건으로 살려주었다. 벨기에에서 일어난 켈트족 반란의 경우, 일찍부터 로마화되고 난 이후부터 로마 주류사회로 편입되어가던 갈리아 속주 내 켈트인들의 무관심으로 호응도 크게 못 얻고 싱겁게 끝났다고 한다.[11] 티베리우스는 말년을 제외하곤 늘 원로원을 존중해줬지만, 양쪽의 관계는 티베리우스가 20대부터 항상 다투었기에 쌍방으로 냉담했다. 이런 이유로 후임황제들로서는 그 업적을 존중하면서도, 정작 티베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나 클라우디우스처럼 황제 이름을 대놓고 언급하는 것을 자제했다. 왜냐하면 이 황제가 생전 원로원에게 한 “스스로 노예가 될 준비를 한 인간들”이라는 말은 두고두고 회자된 망언으로 취급받았고, 백년이 지난 뒤에도 티베리우스처럼 하겠다는 말은 원로원을 대놓고 거수기처럼 취급하겠다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12] 칼리굴라가 이 경우에 해당됐다. 베스파시아누스 개인 입장으로는 그의 출세와 성공의 은인이었지만, 재위 기간도 4년 밖에 안되고 황제권 강화나 수도교 건설입안, 이탈리아 경제 부흥 계획 등 외에는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 언급하지 않은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다. 또 내전 직후, 새황제가 칼리굴라를 티베리우스처럼 원로원 앞에서 언급하면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처럼 원로원과 대립하겠다는 의미도 있기에, 정치적 부담도 상당했다.[13] 당시 원로원 입장에서 기억에서 잊어버리고 싶던 황제는 네로와 갈바, 비텔리우스였다. 이들은 원로원을 존중하면서도 무시했던 티베리우스나 냉담하고 변덕스러운 칼리굴라 같은 황제처럼 자신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비난받고 있었다. 따라서 원로원에게 금지어 그 자체로 평가받고 있는 이들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14] 과거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역시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출신들에게 동방 출신 못지 않게 원로원을 개방했지만, 카이사르처럼 아예 이쪽 출신들에게 귀족 자리도 주고 그들이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고 느끼게 해준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두 황제였다.[15] 베스파시아누스의 차남이자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형과 다르게 그리스,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출신들에게 원로원이나 고위관직을 많이 하사했다.[16] 오줌세의 직접적인 과세 대상은 양모 가공업자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양모는 특유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암모니아로 세척하는데, 지금이야 정제 암모니아를 쓰지만 당시에는 암모니아가 포함된 오줌을 사용했다. 로마의 양모 가공업자들은 공공화장실의 오줌을 공짜로 이용했고, 이런 양모업자들의 무임승차에 대해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감하게 오줌세를 거뒀다. 이에 양모업자들은 크게 반발했고, 티투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아버지에게 이를 따졌는데 이때 베스파시아누스가 은화 한 줌을 아들 코앞에 쥐어 주며 "자 맡아봐라. 오줌 냄새가 나느냐?" 라고 촌철살인급의 대답을 하며 해프닝으로 반발을 수습했다고 한다. 그래도 원체 반발이 심했던만큼 그가 죽고 난 뒤 티투스 치세 때에 그를 비판하는 연극이 오르기도 했었으나, 관대한 티투스는 그냥 웃고 넘어갔다.[17] 이는 불필요한 공공지출에 관한 내용일 뿐 오히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실 경비, 사회 인프라, 교육 분야에서의 공공지출은 확대했다.[18] 특히 설사를 심하게 하였다. 사실 말년에 가면 건강이 갈수록 나빠진터라 측근들의 조언을 받고 고향에 가서 온천욕을 하며 요양까지 했지만 여기서도 업무를 한터라 나아지지 않고 더 악화되었다.[19]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고대 로마 황제들은 대부분 사후 신으로 추앙되었다. 예외는 내전에서 패한 이들(베스파시아누스 이전의 내란기의 3명)이거나 동시대의 원로원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은 이들, 그리고 생전에 자신이 거부한 경우(티베리우스 외)가 있었다.[20] 베스파시아누스를 비난한 수에토니우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파면되고 처벌된 범죄혐의는 그의 사비나 황후에 대한 불경과 황후를 향한 뒷담화와 야하고 저질적인 비열한 언행이 하드리아누스에게 걸렸기 때문이다.[21] 장남 티투스 역시 이런 입장을 견지하여 시종일관 겸손했다. 반면 차남 도미티아누스는 칼리굴라를 연상시킬 정도로 개인 숭배와 자기신격화로 일관해 그 평가가 원로원에게 박했다.[22] 현대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물론 아무리 황제의 장례식이라도 실제로 이 정도의 돈이 들었을 리는 없고 풍자를 위한 과장이라 봐야 할 것이다.[23] 고대 로마에서 죽은 자의 시신을 테베레 강에 버린다는 건 부관참시를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