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 라틴어: Gaius Sulpicius Long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술피키우스 롱구스(조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롱구스(아버지)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37년 |
전임 |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가이우스 마이니우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
후임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 카이소 두일리우스 |
임기 | 기원전 323년 |
전임 | 독재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
동기 |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 |
후임 | 루키우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
임기 | 기원전 314년 |
전임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
동기 | 마르쿠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
후임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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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행적
로마 공화국의 파트리키 가문인 술피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퀸투스, 아버지는 세르비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390년 브렌누스의 로마 침공에 맞서 싸운 집정 무관 퀸투스 술피키우스 롱구스가 그의 조부라고 추정한다.기원전 337년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집정관은 시디키니 족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동맹 부족 아우룬키를 구원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제때에 구원하지 못해 아우룬키 족이 중심지로 삼은 수에술라 아우룬카 시가 파괴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분노한 원로원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인레길렌시스를 독재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호르타토르를 기병장관으로 선출했지만, 두 집정관이 자신들의 동의 없이 독재관과 기병장관을 세운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해 취소시켰다. 한편 플레브스인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가 오직 파트리키만 될 수 있었던 법무관에 처음으로 선출되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
기원전 323년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삼니움과의 전쟁을 실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기원전 319년에 감찰관을 역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료 감찰관이 누구인지는 명시되지 않았다.
기원전 314년 마르쿠스 포에텔리우스 리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들은 동료 집정관과 함께 소라, 오조네스, 민투르노 등 3개 도시를 잇따라 공략했다. 그러던 중 삼니움군이 캄파니아로 진군해 카푸아를 위협할 수 있는 카우디움에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그들은 카우디움으로 이어지는 산길의 끝으로 이동해 적의 진군로를 차단했다. 삼니움군은 다른 산길 끝에 주둔했고, 양자는 서로 대치하기만 할 뿐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러다 삼니움 측이 다른 길을 택해 캄파니아의 평평한 지역으로 이동하자,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타라키나에서 따라잡았다.(타라키나 전투) 이후 양측간의 기병 전투에서 로마군이 우세하자, 두 집정관은 전투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로마군은 평상시처럼 군단을 중앙에, 기병을 측면에 배치했지만 기병은 로마 진영을 방어하는 데 집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포에텔리우스는 상대적으로 밀집 대형을 갖춘 좌익 부대를 지휘했고, 술피키우스는 좀더 개방된 대형을 갖춘 우익 부대를 배치했다. 포에텔리우스는 밀집 대형으로 상대의 진형을 단숨에 허물기를 희망했고, 술피키우스는 적의 우세한 병력이 아군을 포위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전열을 가급적 얇게 확장했다.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자, 포에텔리우스는 좌익 부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삼니움 보병대가 적의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밀리기 시작하자, 삼니움 기병대가 투입되어 아군을 도왔다. 이에 방어만 하고 있던 로마 기병대가 출격해 삼니움 기병대와 맞붙었다. 한동안 격전이 이어진 끝에, 삼니움군이 조금씩 밀렸다. 반면 로마군 우익 부대는 술피키우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적 기병대와 교전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삼니움군이 몰아붙이면서 보병 대열이 뚫릴 위기에 몰렸다. 술피키우스는 적 기병을 격퇴한 뒤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고 즉시 돌아와서 아군을 지휘했고, 금방 허물어지는 듯했던 로마 보병대는 안정을 되찾았다.
얼마 후 포에텔리우스가 이끄는 좌익부대가 삼니움 우익부대를 돌파했다. 이에 삼니움 좌익 부대 역시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달아났고,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이날 30,000명에 달하는 삼니움 병사가 죽거나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 후 삼니움 연맹을 구성한 네 개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인 펜트리족의 수도인 보비아눔을 포위하다가 기원전 313년 독재관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솔루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기원전 312년 독재관을 맡았고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를 기병장관으로 삼았다. 그들은 에트루리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건강한 장정들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