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 라틴어: Lucius Volumnius Flamma Violen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플레브스,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아울리아 비르길리아(아내)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07년 |
전임 |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
동기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
후임 | 퀸투스 마르키우스 트레물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비나 |
임기 | 기원전 296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동기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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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당대, 후대 로마인에게 가이우스 마리우스 등장 전까지 노부스 호모로 언급된 인물이다.2. 생애
플레브스 출신으로, 로마인과 로마 사회가 말한 노부스 호모의 대명사와 같은 인물 중 한명이었다.기원전 307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삼니움 족과의 전쟁에 투입되어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도시들을 공략한 뒤 확보한 전리품들을 병사들에게 아낌없이 분배해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기원전 296년 또다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동료 집정관이 에트루리아인과 상대하는 사이 삼니움과 맞섰다. 그는 전직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와 함께 삼니움의 여러 마을과 농지를 황폐화시켰다.
이에 삼니움 장군 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는 다른 장군들에게 오로지 요새에 틀어박혀 수비에 전념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은 특별히 차출된 정예병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로 이동해 에트루이아인들을 삼니움 편으로 포섭했으며, 뒤이어 움브리아인과 켈트 계열의 세노네스족을 끌어들였다. 에그나티우스는 이렇게 확보한 연합군을 이끌고 카이쿠스의 로마군을 몰아붙였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카이쿠스는 에그나티우스에게 연전연패해 군대의 신뢰를 잃었다고 한다.
이 무렵, 비올렌스는 삼니움에서 3개 요새를 공략한 뒤 루카니아 평민들의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룰리아누스를 루카니아 쪽으로 파견하고 무스에게 삼니움의 농촌 지역을 계속 약탈하게 했다. 그러던 중 동료 집정관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향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일부 연대기에는 카이쿠스가 비올렌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나중에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뗐다고 한다. 하지만 리비우스 본인은 카이쿠스가 실제로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고 여겼다.
카이쿠스는 비올렌스가 자신을 돕기 위해 오자 열등감을 느끼고 삼니움으로 되돌려 보내려 했다. 비올렌스가 그와 함께 연합군을 물리치겠다고 밝히자, 카이쿠스는 동료 집정관의 임페리움을 탐낸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적군이 로마 진영 가까이에 이르자, 군인들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적에 맞서 싸우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결국 카이쿠스는 뜻을 접어야 했다.[1] 이후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에트루리아-삼니움 연합군은 7,900명이 전사하고 2,010명이 생포되는 패배를 당했다고 한다.
비올렌스는 룰리아누스와 무스의 총독직이 곧 만료되기 때문에 삼니움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던 중 삼니움인들이 새 군대를 일으켜 캄파니아의 카푸아와 파레르눔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방향을 돌려 캄파니아로 향했다. 막대한 약탈품을 챙긴 채 삼니움으로 귀환하던 삼니움군은 비올렌스의 습격으로 인해 참패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삼니움 사령관 스타이우스 미나티우스(Staius Minatius)는 생포되었다. 이후 삼니움 전선에 도착한 비올렌스는 룰리아누스의 군대를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북상시켜 카이쿠스와 합세하게 했다. 룰리아누스는 지시에 따라 에트루리아로 가서 카이쿠스와 합세한 뒤 카메리눔에 군대를 주둔시킨 후 로마로 귀환했다. 또한 비올렌스는 무스의 군대를 인계받은 뒤 삼니움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겨울이 다가오자 겨울 숙영지로 귀환했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집정관 선거를 개최했다. 당시 에트루리아-삼니움-움브리아-세노네스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병력을 일으켜 로마로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로마 시내에 파다했다. 이에 로마 시민들은 군사적 역량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를 집정관으로 세웠고, 원로원은 비올렌스가 집정관을 다시 맡게 하려 했다. 그러나 룰리아누스가 푸블리우스 데키무스 무스가 자신의 동료가 되지 않는다면 집정관을 맡지 않겠다고 밝히자,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비올렌스는 전직 집정관 신분으로서 삼니움 전선에서 1년 더 지휘권을 행사했다. 그는 티페르누스 산 전투에서 삼니움족을 상대로 승리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93년 아퀼로니아 전투에서 집정관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휘하 우익 보병대를 이끌어 승리에 일조한 뒤 적진을 공략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296년경 귀족 아울루스 베르기니우스의 딸 베르기니아와 결혼했다. 이후 귀족 부인들은 그녀가 평민과 결혼함으로써 가문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순결의 여신인 푸디키티아(Pudicitia) 신전에 출입하는 것을 막았다. 이에 베르기니아는 비구스 롱구스(Vicus Longus)에 있는 자신의 집 일부를 제단으로 꾸며서 푸디키티아 여신의 석상을 모신 뒤 평민 여성들을 초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