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두일리우스 라틴어: Gaius Duili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두일리우스(조부) 마르쿠스 두일리우스(아버지)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60년 |
전임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
동기 | 스키피오 아시나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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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독재관. 로마 해군의 첫 승리인 밀레 해전의 지휘관이다.2. 생애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260년 스키피오 아시나와 함께 집정관에 오르기 이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두 집정관은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시칠리아로 파견되었다. 스키피오 아시나는 220척의 함대 지휘권을 맡았고, 그는 육군을 통솔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리파리 해전에서 16척의 전선과 함게 카르타고군의 포로가 되어버리면서, 졸지에 그가 해군 지휘권까지 맡게 되었다.로마인들은 바다에서 전투를 한 경험이 없었고 장기간 바다에서 배를 이끈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오랜 바다 생활에 단련된 카르타고 함대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길 수 없었다. 이에 두일리우스는 코르부스를 제작하게 하고, 코르부스가 적 선반의 갑판으로 떨어져서 쇠못을 박으면, 병사들이 이를 통해 적선으로 건너가서 닥치는 대로 도륙하는 작전을 고안했다. 카르타고 해군이 시칠리아 도시 밀레 인근을 약탈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즉시 함대를 이끌고 그 쪽으로 진격했다.
당시 카르타고 해군 지휘관 한니발 기스코는 적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을 갑판 위에 단 채 천천히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나머지 전투 진형 편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로마군을 향해 항해했다. 그 바람에 카르타고 함대는 일부만 전투에 참여했고 나머지는 뒤쳐졌다. 로마군은 그 사이에 코르부스를 활용해 적선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 뒤 배 위로 뛰어들어가 살육했다. 카르카고 해군은 50척의 선박을 잃고 도주했다.
밀레 해전에서 완승을 거둔 뒤 육지로 돌아온 두일리우스는 에게스타를 9일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킨 뒤 여름이 끝날 무렵 로마로 돌아와서 로마 역사상 최초로 바다에서 승리한 사령관으로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그의 승리를 찬미하기 위해 밀레 해전에서 노획한 선박의 뱃머리로 장식된 '주둥이 기둥(columna rostrata)'이 포로 로마노에 세워졌다.
기원전 258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함께 감찰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231년 집정관들을 대신해 선거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은 독재관을 역임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플루트 연주자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가 플루트를 연주하는 가운데 여러 잔치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