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라틴어: Marcus Atilius Regulus | |
생몰년도 | 기원전 263년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아버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동생)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아들)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27년 |
전임 |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메살라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 풀로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7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후임 |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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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평민 귀족이자 장군.2. 생애
캄파니아 지방의 평민 귀족 가문인 아틸리아 씨족의 일원으로, 파비우스 씨족과 클리엔텔라 관게를 맺었다. 그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기원전 267년과 256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제1차 포에니 전쟁 중 아프리카에 쳐들어갔다가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참패한 뒤 카르타고군의 포로 신세로 전락하고 결국 사망하였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그의 삼촌은 기원전 257년과 250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였다고 한다. 한편 동생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기원전 225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나, 그해 탈라몬 전투에서 켈트족과 싸우다 전사했다.기원전 227년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이때 당시에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며, 단지 동료 발레리우스가 재임중에 아내와 이혼한 최초의 집정관이 된 것만 알 수 있다. 기원전 217년 여름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한 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6개월간 독재관을 역임하였다. 파비우스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뒤 그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어 로마군을 지휘했다. 그는 한니발 바르카의 회전 요구에 응하지 않다가 새 집정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선출되자 그들에게 군대를 맡겼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후임 집정관에게 지휘권을 양도한 직후 고령을 이유로 로마로 돌아갔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는 군대에 남아 칸나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대체로 리비우스의 기록이 옳다고 본다.
기원전 214년 국고가 전쟁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어 자금을 모집하는 역할을 맡았다. 두 사람은 칸나이 전투 이후 생겨난 악덕을 폭로하여 돈을 받아내기로 하고, 칸나이 전투 직후 이탈리아를 떠날 계획을 세운 많은 젊은 귀족들을 고발하여 말을 몰수하고 도덕적 문제로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하는 계층인 아에라리(aerarii) 계급으로 낮췄다. 법적인 이유 없이 병역을 기피한 시민들도 같은 처벌을 받았다. 원로원은 도덕적 해이로 고발된 모든 이들을 시칠리아로 보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병으로 복무하게 하였다.
기원전 213년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호민관에 선임된 직후 지난날 자신을 아에라리로 강등시킨 두 감찰관을 재판에 회부하려 했지만, 다른 호민관 9명이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하지만 민중의 불만이 무척 강했던 터라, 그는 인구 조사를 중단해야 했다. 얼마 후 동료 감찰관 필루스가 사망하자, 감찰관 한 명이 임기 중에 사망하면 다른 감찰관은 무조건 물러나야 하는 관례에 따라 사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기원전 211년 카푸아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이집트를 방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