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라틴어: Spurius Carvilius Maxim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가이우스 카르빌리우스(조부) 가이우스 카르빌리우스(아버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아들)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93년 |
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동기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스카이바 |
임기 | 기원전 272년 |
전임 | 가이우스 파비우스 도르소 리키누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카니나 |
동기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
후임 | 카이소 퀸크티우스 클라우두스 루키우스 게누키우스 클렙시나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생애
플레브스 출신으로,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로마 정치인이자 역사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는 기원전 299년에 수석 조영관을 역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이 인물이 '퀸투스'의 아들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기원전 293년 집정관과 기원전 299년 조영관이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학계에서는 당시에는 귀족만이 수석 조영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기록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기원전 293년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해에 대규모 삼니움 군대가 캄파니아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카르빌리우스는 이에 대응해 코미니움 인근에 진을 쳤고, 쿠르소르는 아퀼로니아 인근에 진을 쳤다. 그는 코미니움을 포위 공격하면서 쿠르소르와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후 쿠르소르가 아퀼로니아 전투에서 삼니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동안, 그는 콤미니움을 함락시켜 삼니움인 4,880명을 사살하고 11,400명을 생포했으며 도시 전체를 파괴했다.
이후 삼니움의 도시인 벨리아, 팔룸비누스, 헤르쿨라네움을 공략한 뒤 삼니움과 손을 잡았던 에트루리아로 진군해 5개의 요새를 공략하고 에트루리아 연맹의 주요 도시인 팔리스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했다. 그 후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삼니움족에 대한 그의 승리는 동료만큼 영광스럽지 않았지만 에트루리아에서의 승리가 추가되었을 때 비로소 그와 동등해졌다."고 평했다. 또한 그는 동료와는 달리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줘서 동료보다 더욱 인기가 많았다.
기원전 292년 집정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스카이바 휘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아 에트루리아에서 군공을 세웠다. 훗날[1] 감찰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272년에 동료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와 함께 집정관을 재차 역임해 피로스 1세와 연합해 로마에 대항했던 삼니움, 타라스, 루카니아, 브루티움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정벌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2번째로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 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는 기원전 234년과 22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1]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기원전 289년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