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라틴어: Marcus Atilius Regul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조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칼레누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94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동기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
후임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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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행적
레굴루스 가문은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아틸리우스 씨족 내 평민 지파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기원전 335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칼레누스가 그의 아버지라고 추정한다.기원전 294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원로원은 두 집정관에게 삼니움 정벌을 지시했다. 하지만 메겔루스는 연초에 병에 걸려서 거동이 힘들었기에, 그가 단독으로 삼니움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로마와 삼니움을 있는 도로에 주둔하고 있을 때 짙은 안개가 낀 틈을 타 습격해온 삼니움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소라로 후퇴했다. 이후 병세에서 회복된 뒤 군대를 이끌고 온 메겔루스와 소라에서 합세했다.
이후 메겔루스가 삼니움으로 진군하여 삼니움의 두 마을인 밀로니아와 펜트룸을 공략하는 동안, 레굴루스는 삼니움군에게 포위된 아풀리아 지방의 루케리아를 구원하러 진격했다가 적에게 요격되어 7800명을 상실했다. 하지만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돌아가는 삼니움인들을 추격해 비슷한 숫자의 삼니움인들을 살해했다.[1]
이후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전공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나중에 삼니움의 두 마을인 밀로니아와 펜트룸을 공략하고 원로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에트루리아로 진군해 볼시니 시의 영토를 파괴하고 이를 막으려는 적군을 격파한 뒤 볼시니, 페루시아, 아레티움과 평화 협약을 맺은 메겔루스가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레굴루스의 동지들이 그만 개선식을 치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겨 막대한 로비를 하자, 이에 넘어간 원로원은 허락없이 에트루리아로 이동한 점을 지적하며 개선식을 불허했다. 그러자 메겔루스는 민회에 출석해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호민관 3명이 그를 지지하기로 했고, 그는 이들의 지원에 힘입어 원로원을 압박한 끝에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이 일로 원로원을 구성한 귀족들의 적개심을 샀다.
로마 연대기 작가 퀸투스 클라우디우스 콰드리가리우스는 또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이에 따르면 레굴루스가 에트루리아 전선에 가서 싸워 승리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고, 메겔루스는 삼니움의 일부 도시를 점령한 뒤 아풀리아에서 패배해 부상을 입은 채 루케리아로 피신했다고 한다. 또다른 연대기 작가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삼니움과 루케리아에서 합심하여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렇듯 기록이 중구난방이기 때문에, 현대 학계에서는 어느 쪽이 사실인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기원전 293년 1월 1일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마자, 호민관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칸티우스가 지난해 집정관 임기 당시 원로원을 무시한 행동을 문제삼아 메겔루스를 고발했다. 당시 법무관이었던 그는 에트루리아를 침공한 것에 불평하는 라틴 동맹 사절을 원로원에 소개했다. 그래서 칸티우스의 배후에 레굴루스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메겔루스는 기원전 293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휘하 레가투스에 발탁됨으로써 고발을 회피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전투 도중에 자신이 이기면 유피테르에게 바치는 신전을 짓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