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 대한 내용은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시칠리아 총독)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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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생년 미상 | ||
로마 공화국 로마 | |||
사망 | 몰년 미상 (향년 ?세) | ||
로마 공화국 로마 | |||
재임기간 | 고대 로마 집정관 | ||
기원전 261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부모 | 父: 가이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母: 이름 미상 | |
배우자 | 이름 미상 | ||
자녀 | 1명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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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집정관.2. 생애
베네벤토 출신의 평민 씨족인 오타킬리우스 씨족 출신이다. 이 가문은 기원전 3세기 초 파비우스 씨족과 결혼 관계를 맺은 덕분에 로마로 이주할 수 있었고, 이후 노빌레스 집안으로서 여러 요직에 임용되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조부의 프라이노멘은 마니우스이고 아버지는 가이우스라고 한다. 형제인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263년과 기원전 246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시라쿠사를 군사적으로 압박해 로마의 편을 들게 하는 데 일조했다.기원전 261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어 시칠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당시 카르타고군에 복무하던 4천 명의 갈리아인들은 급료를 받지 못하자 로마 편으로 넘어가려 했다. 카르타고 사령관[1]은 이 그들의 계획을 알게 되자 속임수를 썼다. 그는 용병들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특정 장소로 보낸 뒤 한 병사에게 탈영병인 것처럼 위장해 크라수스에게 가서 갈리아인들이 있는 장소를 알리게 했다. 크라수스는 이를 믿고 갈리아인들을 포위 공격해 섬멸했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는 이에 대해 로마군은 잠재적인 동맹군을 잃었고 그들 자신도 손실을 입었다고 평했다.
그 후 크라수스는 남은 임기 동안 카르타고 해군을 제압하기 위한 로마 최초의 대규모 함대 건설에 힘을 쏟았다. 5단층 갤리선 100척과 3단층 갤리선 200척으로 구성된 이 함대는 기원전 260년에 완성되어 스키피오 아시나의 지휘를 받았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의 아들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진행중이던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11년까지 시칠리아 총독을 역임하면서 카르타고 함대가 시칠리아에 오는 걸 저지하고 아프리카 해안가를 연이어 습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가 시칠리아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하밀카르[2]라고 기술했고,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한노라고 명시했다. 현대 학자들은 아그리젠툼 전투에서 패배한 한노는 진작에 경질되었을 거라며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기록이 신빙성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