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라틴어: Manius Curius Dentat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70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니우스 쿠리우스(조부) 마니우스 쿠리우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90년 |
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
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퀸투스 카이디키우스 녹투아 |
임기 | 기원전 284년 |
전임 |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투카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덴테르 |
동기 |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투카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막시무스 |
임기 | 기원전 275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가이우스 게누키우스 클렙시나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
후임 |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렌다 |
임기 | 기원전 274년 |
전임 |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
동기 |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렌다 |
후임 | 가이우스 파비우스 도르소 리키누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카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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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2. 행적
플레브스 가문인 쿠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마니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가 지방에서 로마로 이주한 뒤 성공한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라고 밝혔다. 대 플리니우스는 그가 태어났을 때 이가 나 있었기 때문에 덴타투스(Dentatus: 이빨 있는)라는 코그노멘을 얻었다고 설명했다.기원전 298년, 인터렉스를 맡고 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집정관 선거를 주관한 뒤 평민 후보에게 주어진 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당시 호민관을 맡고 있떤 그가 원로원에게 평민들의 선택을 무시하면 로마에 이롭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고, 원로원은 선거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평민들은 그에게 보답하고자 500 유게룸(jugerum)[1] 상당의 토지와 집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기원전 290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삼니움 전선에 투입되었다. 두 집정관은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삼니움인들로부터 로마와 영원히 동맹을 맺고 자치권을 유지하는 대가로 공물을 납부하고 병력을 지원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삼니움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후 삼니움에 호응했던 사비니인들을 공격해 복속시키고 로마로 돌아와서 삼니움과 사비니인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식을 2차례 치렀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그가 포획한 사비니 영토와 포로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원로원에 보고할 때 이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사비니인들은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기원전 284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덴테르가 켈트족 계열인 세노네스족과의 전투를 치렀다가 7명의 트리부누스 밀리툼 및 13,000명의 군인과 함께 전사했다. 이후 보결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세노네스족에게 사절을 보내 협상을 벌이려 했지만, 그들이 사절을 죽이자 즉시 전투를 벌여 승리한 후 세노네스 족으로부터 많은 땅을 탈취한 뒤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이 사건은 기원전 283년에 발생했고 그는 법무관의 자격으로 메텔루스의 뒤를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법무관이 군사권을 가진 것은 제2차 포에니 전쟁부터라며 오로시우스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본다.
기원전 275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어 시칠리아 원정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피로스 1세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당시 로마는 장기간의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가 눈에 띄게 감소했으며, 시민들은 자기들과 맞붙어서 승리를 거듭한 피로스 1세를 두려워했다. 이로 인해 병력 모집이 잘 되지 않자, 군 복무를 기피한 이들의 재산을 몰수해 경매에 내놓았다. 이에 장정들이 뒤늦게 징집에 응하면서 겨우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 후 동료 집정관 렌툴루스가 루카니아와 브루티움으로 이동하는 동안, 그는 삼니움으로 향했다. 피로스는 이들을 각개 격파하기로 하고, 먼저 덴타투스 쪽으로 향했다. 당시 덴타투스의 군대는 말렌툼 고지대를 점거한 뒤 동맹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피로스는 이들을 야습하기로 하고, 일부 병력을 적진 근방에 보냈다. 그런데 이들이 익숙하지 않은 지형에서 야간 행군하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해가 뜰 무렵에도 여전히 헤맸다. 그 사이에 적이 접근한다는 것을 알게 된 덴타투스는 즉시 수비를 강화했고, 얼마 후 가까스로 위치를 잡은 적이 급습해오는 것을 격퇴했다.
덴타투스는 적을 물리친 뒤 여세를 몰아 적진을 향해 진격했다. 피로스는 전투 코끼리와 호플리테스를 동원하여 아군 진영에 가까이 오는 로마 군단병들에 돌격시켜서 격퇴했다. 이에 로마군은 재차 공격하면서 코끼리들을 향해 필룸을 퍼부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불타는 화살과 채찍도 코끼리를 향해 날아들었다고 한다. 코끼리들은 이 공격에 혼란해진 나머지 에페이로스군의 진영을 헤집어놨다. 이에 피로스는 즉시 군대를 군대를 철수시켰고, 덴타투스는 적이 전투 대열을 유지한 채 철수하는 것을 보고 추격하지 않았다. 그 후 '나쁜 상황'이라는 의미가 담긴 말벤툼은 '좋은 상황'이라는 의미의 베네벤툼으로 개명되었다.
피로스가 말벤툼 전투에서 패한 뒤 에페이로스로 돌아간 후, 덴타투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당시 개선식에는 금, 보라색 망토, 그림, 타란토의 사치품 등이 전시되었지만, 대다수의 로마인들은 처음으로 본 코끼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덴타투스는 이듬해인 기원전 274년에 또다시 집정관에 선임되어 루카니아, 삼니움, 브루티움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임기가 만료된 후 사비니 땅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서 농업에 전념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의 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 카토의 영지가 나중에 위치했다고 한다.
기원전 272년 감찰관에 선임된 그는 라티움의 벨리아 호수의 물을 나르 강으로 방향을 바꾸고 아니오 강의 물을 테베레 강에 연결해 로마에 공급하기 위한 아니오 베루스 수로 건설을 개시했다. 이 공사에 쓰이는 자금은 피로스 전쟁에서 포획한 전리품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것으로 충당되었다. 기원전 270년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두 개의 강 연결 책임자(duoviri aquae perducendae)'로 선임되어 아니오 베루스 수로 공사를 완료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5일 만에 사망했다.
3. 후대의 전승
그는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고위직을 누리면서도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유지한 훌륭한 인물로서 로마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여 확보한 전리품 대부분을 원로원에 바치고 오직 나무 컵 하나만 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사비니인들의 땅을 확보한 후 각 시민이 7 유게룸의 땅을 받았을 때, 원로원은 그에게 100 유게룸을 할당했지만 덴타투스가 이를 거부했다. 그는 나중에 너무 가난해서 사람들이 그의 딸을 위해 지참금을 모아야 했다고 한다.장 프랑수아 피에르 페이롱(Jean François Pierre Peyron) 작, <삼니움인들의 선물을 받기를 거부하는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1787년.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키케로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 번은 로마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삼니움족의 사절이 그의 호의를 얻기 위해 찾아왔다. 당시 화로에 순무를 굽고 있던 그는 금으로 세공된 접시를 비롯한 값진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며 거부했다.
나는 토기로 먹는 것을 좋아하오. 그리고 금을 가지기보다 금을 소유한 자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더 낫소.
이 이야기의 진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은 이에 영감을 받아 덴타투스가 순무를 굽던 중 삼니움 사절로부터 금은 세공품을 선물받지만 거부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을 여러 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