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Marcus Vipsanius Agrippa) |
출생 | 기원전 64년 또는 기원전 62년 |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에트루리아 피사 | |
사망 | 기원전 12년 (향년 49~52세) |
로마 제국 캄파니아 | |
배우자 | 폼포니아 카이킬리아 아티카[1] (기원전 37년 결혼 / ?) |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2] (기원전 28년 결혼 / 기원전 21년 이혼) | |
대 율리아[3] (기원전 21년 결혼) | |
자녀 | 빕사니아 아티카,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대 빕사니아 마르켈라, 소 빕사니아 마르켈라, 가이우스 카이사르, 소 율리아, 루키우스 카이사르, 대 아그리피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
아버지 | 루키우스 빕사니우스 |
형제 | 루키우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빕사니아 폴라 |
1. 개요
로마 제국의 정치가이자 군인, 건축가이다.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사위,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프린키파투스 체제의 2인자,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로 잘 알려져 있다. 흔히 아그리파라고 하면 보통 이 인물을 말한다.아우구스투스 &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소 옥타비아 부부와 함께 로마를 100년여 지배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 황후, 황족들의 조상이다.[4]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로 양자가 되어 후계자로 내정됐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아버지였고,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장인이다. 또 티베리우스 황제의 동생으로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차기황제로 유력시된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의 장남 게르마니쿠스가 아그리파의 딸 대 아그리피나와 결혼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인 3대 황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5대 황제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는 아그리파의 외손주가 된다. 이 외에도 티베리우스의 아들로 아우구스투스 생전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차기황제로 후계자 중 한명으로 내정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아그리파의 외손자가 된다.
로마 공화정 말~원수정 시대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내전기동안 옥타비아누스군의 전투를 지휘해 승리를 이끈 장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5][6]
부모와 형제자매 모두 평민인, 이탈리아 농촌 출신임에도 옥타비아누스파의 핵심 인사로 활약했다. 그는 공화정 말 내전 당시 옥타비아누스파의 실질적인 군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친구 옥타비아누스를 지중해 세계의 최고권력자로 만들었다. 기원전 29년 공화정 회복 선언 후 시작된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아래에서 제2인자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완비된 갈리아 일대 완전 편입, 다뉴브 강 일대 속주 편입조치, 지중해 동부 일대 방어선 정비, 도로 및 우편체제 등이 바로 아그리파가 직접 맡아 성공리에 완비된 대표적인 업적이다. 하드리아누스 시대때 개보수된 판테온을 세웠고,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세워진 수많은 목욕탕, 공공건물 건축을 입안하고 이를 실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기원전 64/62년경생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현대 로마사 연구자들의 연구들에 따르면 기원전 63년생으로 친구 아우구스투스와 동갑이다. 고향은 옛 에트루리아 지방인 오늘날의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 피사 근교로, 농촌 마을 출신이다.에트루리아계 로마인으로, 이탈리아 농촌 지방의 평민 출신이며 소작농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아버지 이름은 루키우스 빕사니우스이며, 어머니 이름은 미상인데, 루키우스 빕사니우스 부부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루키우스, 누나 빕사니아 폴라가 있었으며, 친가와 외가 모두 전형적인 이탈리아 시골 농부 집안이었다.
그의 집안 친척 중 공직이나 서기 같은 낮은 행정실무를 맡은 이들, 즉 소위 기사계급에 속한 평민 집안은 형수, 매부 쪽까지 전무했고, 누나와 형의 자녀들(아그리파의 조카들) 역시 아그리파가 성공한 이후에도 그를 연줄 삼아 한몫 크게 잡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졌다. 그렇지만 빕사니우스 회랑에서 누나 폴라와 그 가족들이 감독자가 되었고, 폴라가 직접 대규모의 서커스 경기를 아그리파를 위해 열어 주연을 베푼 점 등을 토대로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도움으로 누나 폴라, 형 루키우스 아그리파 일가 역시 기사계급으로 신분상승해, 가세가 흥했던 것으로 추정들 한다.
아그리파의 가족들은 대대로 카이사르 집안의 클리엔테스였다. 아그리파의 아버지 루키우스 빕사니우스는 동맹시 전쟁 이후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1세대 시민권자였다고 추정된다. 아그리파 부친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할 무렵 대개의 소작농들이 그렇듯이 본인이 땅을 경작하면서 관련 있게 된 귀족 가문과 형식적으로 클리엔텔라 관계가 되었던 모양이다. 이때 아그리파 일가인 빕사니우스 가문은 형식적으로 율리우스 가문과 맺게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카이사르와의 클리엔텔라 관계는 대개의 형식적 클리엔텔라 관계들처럼 카이사르 집안에게 종속된 클리엔테스는 아니었고, 당연히 쌍방적인 의무가 강제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그리파는 대개의 클리엔텔라에서 종속된 클리엔테스와 달리, 군입대 당시 카이사르의 모병 공고를 보고 지원병으로 입대했다. 이는 아그리파의 친형 루키우스 역시 비슷했다. 아그리파의 형인 루키우스는 카이사르 모병 공고와 거의 비슷하게 뜬 다른 공고를 보고 입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기원전 40년대 동안 소 카토 밑에서 로마군으로 복무했고, 탑수스 전투에서 카토 쪽 병사로 카이사르에게 칼을 겨누다가 카이사르군의 포로가 되었다. 다행히 아그라파의 형 루키우스 아그리파는 탑수스 전투 후 포로생활을 하다가, 동생 친구 옥타비아누스의 도움으로 다른 동료들보다 일찍 귀향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후 기록은 없고 그 후손들도 공직을 역임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이처럼 아그리파의 집안은 종신독재관 카이사르와 엄청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마르쿠스 아그리파는 그의 누나 빕사니아 폴라와 마찬가지로 카이사르 일가와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어 상호 의무를 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아그리파라는 뜻은 "(어머니) 둔부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를 토대로 많은 연구자들은 아그리파의 어머니가 난산 끝에 아그리파와 그 형제들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아그리파가 막내인 것을 볼 때, 아그리파를 낳고 어머니 건강이 나빠졌던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야기와 함께,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아그리파는 어릴 때 발 한쪽이 태어날 당시의 일로 불편해, 아주 어릴 적 이를 교정하는 과정에서 한동안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처음으로 군복무를 한 기원전 46~45년부터 카이사르 휘하 로마군에 자원입대해 군복무를 시작했다. 아그리파는 대개의 가난한 농촌 청년들처럼 퇴역 후 퇴직금과 밑천을 얻을 요량으로 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그는 형 루키우스와 달리 집안 쪽과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고 있던 카이사르군에 자원입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토대로 학자들은 아그리파의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 농가보다는 자녀들에게 간단한 읽고 쓰기, 셈법 등은 교육시킬 수 있는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추정한다.[7]
이렇게 그는 일반사병으로 갓 직업군인 경력을 시작했는데, 기원전 45년 벌어진 문다 전투에 일반 병졸로 참전해 싸웠다고 한다. 문다 전투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군사적인 재능이 결여된 옥타비아누스를 군사적인 면에서 보완하기 위해 젊고 재능있는 동년배의 군인이었던 아그리파를 자신의 막사로 불러 들여 손수 붙여줬다. 당시 카이사르가 일개 사병인 아그리파를 주목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클리엔테스인 점도 있었다. 이때 카이사르는 기사계급이나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병영 내 장교들이나 여타 다른 인재들을 다 제쳐두고, 외종손과 동년배였던 아그리파를 굳이 불러 들여 누나의 손자인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옥타비아누스의 본명)에게 직접 소개해주고 둘을 친구로 만들어줬다. 그리고 이때 그는 아그리파에게 단순히 옥타비아누스를 보좌하는 역할 외에도, 아폴로니아에서 공부를 하라고 지시했다.
'보좌'가 아니라 '보완'이라고 표현한 것은 워낙 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 재능과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전장에서 실제로 군대를 지휘할 대리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전략까지는 제대로 수립했지만, 막상 전장에 나서면 복통[8] 등으로 인해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거나, 직접 지휘봉을 잡으면 패전하거나 고전하는 경향이 있었다. 영어권에서 권위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대놓고 "아그리파가 없었으면 옥타비아누스는 황제가 되지도 못했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특이하게도 아그리파는 이런 중임을 맡기에는 신분상 크게 떨어지는 평범한 평민 중에서도 시골 농부 아들이었다. 이는 로마 시민권자들이 같은 신분이라고 해도, 엄연히 부모의 위치와 가문의 위상 등이 계급으로 인식돼 철저히 판단잣대가 된, 로마에서도 아그리파의 신분적 한계가 분명했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이 이런 풍토가 존중받을 전통으로 인식된 곳이 그가 살았던 로마사회 분위기였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굳이 시골 출신의 평민, 그것도 소작농 내지 자작농 아들을 선발해 붙여준 것은, 놀라운 결정이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다른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계급들과 비교해, 로마인들 기준으로 상당히 개방적이고 유연하다고 볼 수 있다. 허나 학자들의 일관된 평처럼, 여기에는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모두에게 출신배경이 로마에서 최상류층으로 오르기 힘든 아그리파 같은 인재가 반드시 필요한 속사정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그리파 발탁과 카이사르의 판단에는 두 사람이 클리엔텔라 관계인 것이 컸다. 아그리파 부모는 카이사르 일가의 클리엔테스였고, 아그리파의 군경력은 카이사르가 공고를 내고 아그리파가 지원했다는 점은 이를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증거다. 즉, 클리엔텔라 관습상 아그리파는 태생적, 현실적으로 클리엔테스로 그 의무가 귀속된 사람이었고, 카이사르 역시 후원자 입장에서 그를 키워준 조치였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아그리파는 카이사르의 유일한 남자혈육 옥타비아누스의 영향력을 뛰어넘으면 곤란한 상황에서 보완재 같은 인재였다. 누나의 외손자이고 조카 아티아가 노빌레스라고 해도, 외종손 옥타비아누스는 엄연히 평민 중 기사계급의 신참자 아들이었다. 즉, 카이사르 입장에선, 자신의 휘하에서 근무 중인 젊은 부관과 귀족 출신 장교들은 선택지로 삼기에 무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카이사르 휘하의 젊은 인재들은 데키무스 브루투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쿠리오, 폴리오, 클라우디우스 네로,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등처럼 거진 공화정기의 파트리키, 노빌레스 자제들이 많았다. 더욱이 이들은 옥타비아누스보다 나이도 평균 10살 정도 많고, 경력도 월등한 청장년 귀족들이었다. 여기에 더해 아그리파는 그 신분 한계상, 옥타비아누스가 수행원으로 중용해도 실패확률이 적다는 장점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아그리파는 누나 손자인 자기 혈육에겐 실패해도 위험 요소가 적은 카드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그리파 발탁과 공동 유학명령은 안전한 보완재를 넘어,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아그리파 모두에게 탁월한 선택이 됐다. 아그리파는 진중하고 순박한 성격을 가진데다 자기자랑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매우 먼 겸손한 청년이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예민하고 이성적인 까닭에,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옥타비아누스조차 아그리파에게 흠뻑 빠진 이유가 됐다. 즉, 아그리파는 까다로운 옥타비아누스조차 진심으로 마음을 열 만큼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아폴로니아 유학시절부터 가장 친한 동료이자 친구가 됐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아그리파는 늘 겸손하면서도 자신이 농부의 아들이라는 것조차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는 첫 발탁부터 옥타비아누스파가 승승장구하는 상황에서도, 심지어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된 이후 조언을 구할 때에도 한결 같았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의 관계는 단순 정치적, 사무적 관계로 끝났던 다른 이들과 달리 아그리파가 먼저 세상을 떠날때까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한결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그리파는 친구 옥타비아누스가 숙적 안토니우스를 꺾는 것에 자신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에도, 평생 옥타비아누스의 그림자에 머물며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 충성했을 뿐, 여타 다른 이들과 달리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9] 이는 옥타비아누스파에 협력한 지식인, 지역유지, 원로원 의원들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당장 아우구스투스의 또 다른 친구로 3인자 위치로 문화부 장관 역할을 하며 여러 시인, 역사가, 예술인들을 후원해 준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늘 일정 부분 대가를 요구해 딜을 했다.[10]
이런 이유로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된 이후, 황제에게 늘 에트루리아 동향 사람들을 관료, 근위대 장교로 추천해 그 세를 불렸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일정 부분의 권력 지분을 요구해 이를 받아냈고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렸다. 그런데 아그리파는 이런 요구 대신 늘 자기 역할을 하고, 알아서 아우구스투스의 짐까지 도맡아 처리하고 이를 아우구스투스의 공로로 돌렸다. 즉, 아우구스투스에게 아그리파는 정치적 협력관계, 적대관계로만 나뉘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인생에 단 하나밖에 없을 특별한 친구였다.
아그리파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귀국을 결정하고 입국시 비무장을 선택했을 때부터 목숨을 내놓고,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외종조부가 자신을 입양했고 카이사르 가문을 물려준다는 통보를 받자마자, 로마에 있던 어머니, 계부 필리푸스, 매형 마르켈루스 등의 반대에도 이탈리아 입국을 결정했다. 이때 아폴로니아에 머물고 있던 카이사르파 인사들은 로마가 혼란스럽고 위험하니 상황을 지켜보자고 조언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귀국을 결정했고, 아그리파는 친구의 결정을 지지하며 귀국길에 동행했다. 따라서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비무장 상태로 이탈리아로 귀국한 최측근으로 퀸투스 살비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와 함께 '3월 15일 (이두스 마르티아이) 사태' 정국의 옥타비아누스파 핵심인사로 활약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4월 20일 나폴리 근교의 고급별장에 머물고 있던 키케로 방문[11][12] 등 옥타비아누스가 가는 거의 모든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기록에 따르면, 아그리파가 수행원 신분이 아닌 옥타비아누스파의 공직자로 정치활동을 한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온 직후부터라고 한다. 제2차 삼두정치가 법적으로 공인된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본인의 지위와 명성이 어느 정도 자리잡자마자 묵묵하게 자신을 따른 친구를 적극 후원했다. 이는 그가 아그리파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의지한 친구로 생각했고, 늘 아그리파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생각한 것도 컸다. 그래서 가문도 보잘 것 없고 에트루리아 지방의 일개 농부 아들인 친구 아그리파를 기어이 호민관에 입후보시켜 이 해에 당당히 당선시켜줬다고 한다[13]. 여기에 더해 아그리파가 호민관 임기 직후 원로원 의원이 될 길도 열어주고, 최우선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지원사격까지 해줬다.[14] 이는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타이틀만으로 야심가들이 몰려드는 옥타비아누스 파에서 그의 출신, 배경, 나이, 경력 등을 생각해보면, 옥타비아누스가 얼마나 아그리파를 믿고 신뢰했는지 단 번에 눈치챌 수 있다.
이렇게 친구 옥타비아누스의 도움 아래 정치경력을 시작한 아그리파는, 기원전 43년부터 쟁쟁한 장군들을 제치고 옥타비아누스파의 모든 군사업무를 도맡았다고 한다. 아그리파는 젊은 나이부터 옥타비아누스를 대신해 육군, 해군을 가리지 않고 지휘했는데, 단순한 대리 지휘에 그치지 않고 거둔 승리마다 그 무게감은 내전 내내 옥타비아누스의 성공에 큰 힘이 됐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 그가 참전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옥타비아누스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가 일으킨 페루시아 내전을 제압하고 기원전 40년 페루자를 함락시켰다.
기원전 36년에는 해군을 키워 옥타비아누스를 위협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두 차례의 결정적인 승리를 모두 거두었는데(시칠리아 내전), 이 해전 승리는 아그리파가 가진 뛰어난 전술적 재능과 해전에 필요한 풍부한 지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특히 아그리파는 포에니 전쟁 당시 항해술이 뒤쳐지는 로마 해군이 '코르부스'라는 사다리를 이용해 카르타고 함에 등선육박전을 걸어 승리했던 전훈을 분석하여 하르팍스라는 갈고리 막대를 함재 발리스타로 적함에 발사해 적함에 갈고리를 걸고 잡아당긴 후 아군 군단병들이 등선육박전을 걸도록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이 해적들로 구성되어 육박전에는 약했던 섹스투스군 수병들에게 제대로 유효타를 날렸다.[15]
신참자로 원로원에 입성한 까닭에 아그리파는 문자 그대로 친구 빽으로 승승장구한 사람으로 비춰졌는데, 도리어 옥타비아누스파에서 아그리파 이상의 성과를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기원전 33년 수도 장관에 올랐는데 이때 선보인 행정 판단, 결정은 놀라울 정도라서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에서 '제4의 건국자' 내지 '평민들의 영웅이자 보호자'로 명성을 떨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더해 아그리파는 기원전 35년, 기원전 34년 이탈리아에서 반옥타비아누스 움직임으로 벌어진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군을 이끌고 이를 진압하거나, 도리어 이들을 옥타비아누스 지지자들로 포섭했다. 여기에 더해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가 자리를 비우거나, 거물급 정치인들과 협상을 벌이기 위해 로마를 잠시 떠날 때마다 로마 내 치안을 담당해 로마와 이탈리아를 옥타비아누스의 근거지로 확고히 만들어줬다.
아그리파는 제2차 삼두정치 아래에서 옥타비아누스군의 실질적 사령관으로 있었고, 옥타비아누스가 생각하지 못한 군, 행정 업무의 조언도 했다. 어떻게 보면 드라마 ROME 시즌2에서의 모습과 달리 마이케나스가 하던 책사 업무도 일정부분 했다는 말인데, 아그리파가 없었다면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레피두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등을 이기기 어려웠을 정도로 그 공은 대단했다.
일례로 후일의 아우구스투스가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에서 모든 서류 절차를 거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완전한 개명한 직후, 그에게 로마 정계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분석하면서 과거 술라, 카이사르와 같은 힘을 갖추기 위해선 사병 집단이 필요하다고 조언한 사람은 놀랍게도 아그리파였다. 따라서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를 설득해 옥타비아누스군의 기반이 될 병사모집이 열린 캄파니아에서 책임자로 그 임무를 담당했다. 아울러 군사적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옥타비아누스를 대신해 지휘자로 나서서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그때마다 자신이 지휘한 모든 전투의 공을 모두 친구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돌렸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이런 아그리파를 진심으로 신뢰했고, 옥타비아누스의 숙적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는 친구 아그리파가 승리를 가져다 줄 때까지 자신의 침대 위에서 뻗어서 기다린다." 하고 빈정거림을 담아 평했다.
내전이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마무리된 이후, 악티움 해전 승리를 기념해 판테온[16]으로 알려진 신전을 짓고 이를 헌납했다. 이후에도 아그리파는 친구 아우구스투스(개명 전 옥타비아누스)를 도와 로마군 감축, 원로원 개편 등을 추진했고, 제국 군대를 재편성하고 도나우 강 방위선을 확립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 이는 갈리아 속주[17]를 완전히 로마제국의 영향력 하에 두었음을 뜻하고, 게르만족과 발칸반도의 소국들을 군사/외교적으로 압박하여 압도하였음을 뜻한다.
또 아그리파는 내전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자 사위 마르켈루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의 군사업무 및 행정업무를 직접 지도한 스승 역할을 했고, 갈리아 지방의 도로, 수로 건설 를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가 장성한 이후부터는 동방 일대의 전권을 가진 속주 총책임자 자격으로 파견돼 로마 제국 동방 일대의 외교, 군사, 행정체계를 정비했는데, 로마를 수백년간 골치 아프게 한 유대인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 지중해 동부, 특히 유대인들에게도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찬사받았다. 어느 정도로 찬사를 받았는지 유대인들은 아그리파를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신뢰가 가는 행정가로 평했다.
율리아의 남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마르켈루스가 죽은 뒤, 황제의 친딸 율리아와 결혼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자손을 늘리기 위한 목적에서 딸 율리아와 아그리파를 정략결혼시켰는데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왜냐하면 나이차가 크게 나는 결혼이었음에도 아그리파는 율리아와 사이에서 자식 다섯을 보아서 후계자 양산에서도 아우구스투스에게 제대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결혼 전 친구 아우구스투스와 한 약속에 따라 율리아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을 양자로 내보냈는데, 그들이 바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다.
마르켈루스 사후,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으면서 차기 후계자로 내정됐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일찍 죽을 것을 대비하고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위한 포석이었다. 왜냐하면 동년배 친구여도 아우구스투스에 비해 아그리파는 무척 강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체가 강건했던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훨씬 전인 기원전 12년에 급사했다. 죽기 1년 전에 이미 몸이 갑자기 수척해진 모습이 신전에 조각되었으므로 건강은 전부터 나빴던 모양이지만,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아그리파의 건강이 크게 상한 원인은 오랜 과로 속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으로 아그리파가 판노니아로 간 일 때문이라고 한다.
아그리파는 동방 업무를 책임진 직후부터 기원전 13년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복을 위한 계획 수립과 다누비우스(오늘날의 도나우 강) 유역 정복 계획을 담당하면서, 라치오 지방에 빕사니우스 회랑 등을 설계하고 직접 감독하는 등 과로에 시달렸다. 아그리파는 오랜 전장 생활과 내정으로 인해 아우구스투스보다 몸 관리를 충실히 할 시간이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동방 업무를 다 끝낸 아그리파에게 본인의 양자로 게르마니아 전쟁 이후 적절한 때에 개선식을 할 계획이 세워진 대 드루수스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따라서 아그리파는 로마에 도착한 뒤, 곧바로 오늘날 중부 유럽인 판노니아로 떠나 겨울까지 쉬지 못하고 대 드루수스의 병참 지원 업무를 맡고, 제자인 대 드루수스에게 조력자 노릇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추운 판노니아 날씨에 시달린 탓에 건강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18] 이때 그는 갓 50세를 넘긴 아주 왕성한 나이였는데, 판노니아 야전 생활 속에서 건강이 완전히 망가진 나머지, 남이탈리아의 캄파니아 별장으로 요양생활을 하러 떠났다. 그렇지만 이때의 일로 아그리파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고, 아내 율리아가 출산을 얼마 앞둔 상황에서 급사했다. 다시 말하면, 친구이자 장인인 아우구스투스와 본인과 친분 관계가 두터운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 드루수스를 돕고자 떠났다가, 그곳에서 건강이 상해 한창 나이에 급사한 것이다.[19]
그래서 아그리파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말에 아우구스투스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국가 애도 기간을 한달간 가지면서도, 본인이 유일한 친구 아그리파를 판노니아 겨울 날씨의 혹독함에 몰아 넣었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무척 괴로워했다. 더군다나 이때의 일로 아우구스투스의 아내로, 대 드루수스의 어머니인 리비아 드루실라는 시누이이자 사돈관계인 소 옥타비아와 함께 아들의 경쟁자인 아그리파와 그의 아들들을 견제코자 아그리파를 사지로 몰아 암살했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게 됐다. 그 결과, 후대 호사가들은 리비아 드루실라가 아그리파를 암살했다고도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당대부터 헛소문으로 취급되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 드루실라는 요절한 마르켈루스와 달리 아그리파를 견제할 이유가 없었고, 아그리파가 당시 티베리우스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소 옥타비아는 막내사위 대 드루수스를 마르켈루스 요절 직후부터 후원함에도 동생의 외손자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견제한다는 이유로 음모를 꾸밀 성격과 거리가 멀었다
3. 가족관계
아그리파는 인생에서 총 3번 결혼했다. 첫 아내는 키케로의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의 딸인 폼포니아 카이킬리아 아티카인데,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고 둘의 결혼은 아그리파가 로마 귀족 사회에 편입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다만 아무래도 아그리파가 신분으로는 아티쿠스 집안보다도 딸리는 사실이 다소 장애였는데, 이 부분을 해소한 게 아이러니하게도 안토니우스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나름 단순솔직한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첫 화의를 하던 시절에 사정을 알고 둘의 혼인을 강하게 밀어붙여준 것이다. 첫 아내 아티카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 바로 빕사니아 아티카(Vipsania Attica)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Vipsania Agrippina)다. 장녀 빕사니아 아티카는 원로원 의원이자 연설가인 퀸투스 하테리우스 (Quintus Haterius)와 결혼했고,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를 낳았다.아그리파의 외손자 하테리우스 아그리파는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 타키투스의 표현을 빌리면 ,"졸린 인간"이라고 불렸던 집정관 역임자로 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 후반 공포정치의 희생자가 됐다고 한다. 허나 그는 외조부와 친구인 아우구스투스, 사위였던 티베리우스 시대동안 승승장구했으며, 5대 황제 네로의 큰고모로 훗날 누명을 뒤집어쓰고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에게 살해된 대(大) 도미티아 레피다와 결혼해 그 아들인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를 낳았다. 그런데 아그리파의 후손 중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는 네로의 총애를 받아 연금을 받았음에도, 여러 부자들의 유언장에 이름을 올려 재물을 축적한 유산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쳤다고 한다.
첫 결혼에서 얻은 차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는 기원전 36년생으로 첫 돌 직후,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7살이었던 티베리우스와 약혼을 올렸다고 한다. 이 약혼은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생전 자신의 아들과 딸을 결혼시키자는 약속으로 진행된 혼사였지만, 당시 티베리우스의 친부가 생존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에서 이 결혼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요청해 약혼으로 이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정략혼 비슷한 약혼으로 맺어진 사이였지만, 두 사람은 연애결혼 후 결혼해[20]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소(小) 드루수스)를 낳았다.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 대 빕사니아 마르켈라, 소 빕사니아 마르켈라를 뒀다. 이중 대 빕사니아 마르켈라는 바루스[21]와 결혼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소 빕사니아 마르켈라는 2차 삼두정치의 레피두스 후손으로, 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때 '로마 귀족 정신의 상징'으로 찬사받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결혼했다.
세 번째 아내 율리아 사이에서 자식 다섯을 낳았는데, 이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남녀 황족으로 거진 카이사르 가문 사람들로 불렸다. 허나 앞선 두 아내와 사이에서 얻은 자녀들과는 달리 율리아 사이에서 얻은 자식들은 모두 최후가 좋지 못했다. 장남, 차남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모두 요절했고, 다섯 아이 중 막내로 삼남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과대망상, 비행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속을 썩힌 탓에 가문의 골칫거리로 유명했다. 따라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가문에서 제명되고 원로원 의결로 외딴 섬에 유폐당했다가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그와 티베리우스의 명령을 받은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살해되었다.
딸들도 운명은 비슷했다. 과거까지 차녀로 알려진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큰딸 소(小) 율리아(빕사니아 율리아 아그리피나)는 뛰어난 미모에도 어린 시절부터 허세가 심하고 거만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는 아그리파가 대 율리아 사이에서 얻은 아이들의 공통된 단점이었는데, 소 율리아는 아그리파의 여러 자녀 중 지나친 허영심과 거만함 탓에 아우구스투스의 속을 많이 썩였다고 한다. 따라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결혼해 잘 살던 시절에도 웅장하고 사치스러운 별장을 크게 지어 이 문제로 외할아버지에게 단단히 찍혔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 파울루스와 함께 거액을 들여 지은 큰 별장이 황제의 명령으로 강제 철거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러다가 소 율리아는 남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몰래 원로원 의원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불륜을 저지르고 둘 사이에서 아이까지 가졌다는 의심을 받게 됐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간통혐의로 소 율리아를 기소했는데, 유죄 판결이 내려진 직후 데키무스 실라누스는 자발적으로 망명하겠다고 요청해 재산을 빼앗기지 않고 조용히 끝났다고 한다. 반면 소 율리아는 섬으로 추방됐다. 추방 이후 소 율리아는 간통으로 생겼다고 의심받은 아이를 출산했는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아우구스투스는 당장 그 아이를 산비탈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했다. 곧 이어 소 율리아의 남편 파울루스 역시 반역죄로 체포된 다음 처형됐다. 따라서 근대 이후 로마사 학자들은 간통남으로 지목된 실라누스가 망명 형식으로 단순 추방됐다가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원로원에 복귀 후 승승장구하며 명예회복된 것을 토대로 데키무스 실라누스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부자와 각본대로 소 율리아, 파울루스 부부 숙청 가담자로 의심한다. 어쨌든 아그리파의 딸 소 율리아는 간통죄가 누명이었다고 해도, 아우구스투스에게 철저하게 찍혔고 그 최후도 무척 좋지 못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둘째 딸 대(大) 아그리피나는 언니, 오빠, 남동생과 달리 사회적으로 별 문제도 없었고, 오히려 존경받은 귀부인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엄청난 미녀인데다 아버지 아그리파를 비롯해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의붓 외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무척 사랑받았다. 따라서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대 드루수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소 옥타비아의 딸 소 안토니아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와 어린 시절 약혼 후 두 사람이 성년식을 치른 직후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 사이가 무척 화목했고, 대 아그리피나의 내조는 소 옥타비아와 소 안토니아를 떠올릴 정도로 대단해 로마인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아울러 이 결혼에서 대 아그리피나는 자녀 9명을 낳았는데, 모두 제 손으로 키워 이 부분에서도 큰 존경을 받았다.
대 아그리파나의 자녀들 6명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살았는데, 이후의 가정사는 무척 불우했다. 아우구스투스 생전 차기황제로 일찍부터 내정된 남편 게르마니쿠스는 동방에서 의문사를 맞고, 사이가 무척 좋았던 시동생 소 드루수스(아그리파의 외손자) 역시 세야누스의 음모로 의문사했다. 여기에 더해 대 아그리피나마저 남편 게르마니쿠스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사주한 티베리우스가 죽였다는 소문을 믿어 황궁 안팎에서 티베리우스 황제와 대립하다, 이 틈새를 노린 세야누스의 음모로 장남 네로 카이사르와 반역 혐의로 기소됐고 두 차례 재판 끝에 유죄를 선고받았다. 따라서 대 아그리피나는 섬에 유배됐다가 이곳에서 아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아그리파의 후손들은 부적절한 죽음이 많았고, 이 죽음 뒤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다음 황제였던 티베리우스가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동안 이와 관련된 나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22]
4.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
아우구스투스와의 우정은 평생 동안 연인 사이에 비유할 만큼 깊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뜻을 한 번 정하면 바꾸지 않는 냉혹함으로 유명했는데, 마르쿠스는 그런 아우구스투스가 결정을 재고하거나 판단을 바꾸게 할 수 있는 삼인방 중 한 명으로 유명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그리고 아그리파가 그 삼인방인데, 이들 중 가족관계인 옥타비아와 리비아 드루실라를 논외로 치자면 아그리파는 마이케나스 등 아우구스투스의 타 친구들과 달리 유일하게 아우구스투스의 판단을 뒤집을 수 있는 친구였다. 이처럼 아우구스투스에게 아그리파는 특별한 존재였는데, 아우구스투스가 일평생동안 가장 신뢰하고 의지한 이는 늘 아그리파였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나 황제의 누나 옥타비아 역시 마찬가지라서, 이들 역시 아그리파를 신뢰하고 그를 지지했다.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 이후에도 아그리파의 권한과 권력을 계속 키워주며 중용했다. 후일, 아우구스투스가 중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할 순간에도 조카이자 사위 마르켈루스를 건너뛰고 아그리파에게 자신의 반지와 인장을 맡겼다[23]. 이에 황제의 조카이자 사위였던 마르켈루스는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아그리파가 장차 자신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해 격렬하게 질투하였다. 따라서 마르켈루스 파벌은 공적, 사적으로 비리 혐의도 없고 비난거리도 안 보이는 아그리파가 시골 농부의 아들이라는 이유를 들어 적개심을 드러냈고 공개적으로 아그리파를 헐뜯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정치공작 뒤에 마르켈루스가 있음을 명확히 인지한 후 아무 이유 없이 비난받은 친구를 보호해주고 인격적 비난을 멈추라고 단호히 경고해 비난을 중지시켰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친구를 로마제국 동방 일대를 담당하는 총책임자로 로마를 잠시 떠나도록 조치를 취해 아그리파의 위상을 더욱 높여줬다.
아우구스투스는 냉정을 넘어 냉혹하기까지 한 성격에, 필요할 때는 가식을 부리거나, 위선을 부리는데도 능숙해서 속내를 전혀 알 수 없고 친해지기 무척 어려운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런 아우구스투스에게 아그리파는 부하나 동료를 넘어 유일한 친구였고, 인생의 동반자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단순히 개인적인 친구이자 조언자로 여기지도, 명령받는 부하나 제국의 2인자 따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그리파는 친구이자 주군인 아우구스투스를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약점인 신분적 문제 때문에 목숨을 걸고 이룬 성과를 모두 아우구스투스에게 공을 돌렸고, 아우구스투스 또한 아그리파가 결정한 모든 명령을 자신이 내린 명령과 동일시하고 친구 아그리파의 명령은 곧 자신의 명령이라고 했다.
또 아우구스투스는 자신만 누릴 영예 중 일부를 늘 자신의 친구인 아그리파도 누릴 수 있게 해줬고, 친구 아그리파에 대한 폄훼, 모독은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해 엄하게 대했다. 심지어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개선식 직후부터 자신의 후계자에 가장 가까운 남자친족 3명(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 드루수스)의 군사교육과 행정 및 인성교육을 담당한 스승이자 상관 자리를 아그리파에게 맡겼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가 많지 않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던데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 싹을 처음부터 용납하지 않은 아우구스투스의 삶과 행적을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인데, 마이케나스도 못 누린 영광이었다.
이런 관계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 아그리파가 자신보다 일찍 죽자 큰 충격에 빠졌고[24]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래서 그는 장엄한 대규모의 장례식을 치르게 한 뒤, 자신의 친구 아그리파를 위해 무려 한 달간 국가 애도기간까지 정하게 했고 본인 역시 죽은 친구를 무척 그리워하면서 애도기간을 지켰다고 한다.
5. 기타
- 아그리파는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능력이 출중했다. 허나 농촌의 가난한 평민 출신 신참자였고, 부모와 형제자매 중 지역 유지도 없는 쌩평민인 터라 그의 출신은 늘 약점이었다. 더욱이 아그리파는 오늘날 기준으로도 파격적인 출세로 로마 내 2인자까지 오른데다 늘 자신의 공적을 친구 아우구스투스의 군공으로 돌려, 뚜렷한 공적을 내세워 그 위상을 마냥 높일 수 없는 위치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아그리파의 피를 이어받은 점은 아그리파의 피를 이은 남녀 황족들에게 숨기고 싶은 비밀 내지 미묘한 권력구도 속에서의 약점으로 인식됐다. 왜냐하면 로마 사회가 중세 유럽처럼 신분제가 엄격하지 않다고 해도, 로마 역시 왕정 시대부터 귀족과 평민 사이의 로마 시민권자들의 계급 격차는 분명했고 같은 평민(플레브스)라고 하더라도 평민귀족으로 번역되는 노빌레스(명망가)/기사계급/일반 평민 사이의 격차는 뚜렷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카이사르 가문 남녀황족들에게 아그리파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부분은 굳이 본인이 먼저 "나는 아그리파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떳떳하게 외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따라서 아그리파의 딸 대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자녀들인 가이우스(칼리굴라), 소 아그리피나 남매 등은 자신들이 "내 아버지(할아버지)는 아그리파 장군이다"고 자랑하지 못하거나 숨긴 이유가 됐다. 그래서 아그리파의 딸과 외손주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라는 점을 무척 강조했다고 하며, 가이우스와 소 아그리피나는 아그리파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강조하지 않거나 부끄러워하기도 했다고 한다. 허나 인격적으로 훌륭한데다 그 혈통만으로 뛰어났다고 평가받은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소 드루수스)처럼 자신의 아내가 아그리파의 딸이거나, 본인이 아그리파의 외손자라는 점을 부끄러워 하지 않은 황족들도 존재했다. 그렇지만 제 아무리 이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타키투스의 기록처럼, 배우자가 아그리파의 딸인 게르마니쿠스와 당사자가 아그리파의 외손자인 소 드루수스 사이의 사회적 위상은 아그리파가 일반 평민 출신인 이유로 인하여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미묘하게 갈렸다고 한다.[25]
-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할 당시, 아우구스투스와 일찍이 두 아들 외의 다른 아들은 율리우스 가문의 양자로 입적시키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약속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가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요절하면서 끝내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고 만다.
- 아그리파가 설계해 짓다가 그의 누나 빕사니아 폴라가 동생의 유업을 이어 감독자가 되어 빕사니우스 회랑(포르티쿠스 빕사니아)을 완성했다. 이 회랑에는 세계지도가 있는데, 최근 이 회랑 유적 안에서 아그리파가 살아생전 서커스 경기를 좋아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누나 폴라는 동생이 설계한 건축물 감독관을 맡았는데, 유족 자격으로 죽은 아그리파가 생전 서커스 경기를 좋아해 그를 기리는 추모 경기를 크게 열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대 기록들과 달리 의외로 아그리파의 누나 폴라 일가는 아그리파가 성공한 뒤 기사계급으로 성공했고 꽤나 잘 나갔던 것으로 추정 중이다.
- 의외로 그 키케로의 아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30년 집정관)와 사적으로 상당한 친분을 유지했다. 아들 키케로가 아버지와는 달리 성격은 단순 솔직하였으나 유머 감각이 꽤 있는 편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아그리파 또한 그 점을 꽤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그의 아버지 키케로의 유머 감각을 꽤 좋아하여 정치적 견해와 무관하게 키케로에게 상당한 호감이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키케로는 이런저런 상황 탓에 카이사르와 일정 부분 이상으로 밀착할 수가 없었던 반면 아들 키케로는 그렇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부담 없이 아그리파, 아우구스투스 등과 어울릴 수 있었다.
- 오늘날의 토스카나 도시 피사와 생전부터 관계가 깊었고, 피사 주민들의 아그리파 일가에 대한 존경이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다른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들과 달리, 아그리파의 장남 가이우스 카이사르 요절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요청 전부터 피사 자치 의회와 피사의 주민들은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아그리파의 혈육인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함을 자발적으로 추모하면서 모든 신전, 관공서, 목욕탕 등의 문을 닫았다고 한다.
- 수에토니우스 주장에 따르면, 외손자 칼리굴라가 아그리파의 후손임을 숨기려고 모든 짓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이 주장과 달리 즉위 직후부터 암살될 때까지 본인이 아그리파의 외손자이자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겨, 아그리파가 세 번 집정관에 오른 인물이며 위대한 장군임을 강조한 주화를 발행하고 그를 기렸다.[27]
6. 석고상
이때의 옥타비안 군대 지휘관은 그의 어릴 적 친구이자 뛰어난 장군인 '아그리파'인데, 이 사람의 석고상은 미술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그려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유명한 사람이지.
먼나라 이웃나라 이탈리아편 중 181쪽
그리고 미대 지망생들이 그리는 석고상인 아그리파가 이 사람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이탈리아편 중 181쪽
데생의 기본기를 닦으면서 그리는 만큼, 얼굴 형태 자체는 간단하고 자세도 정적이어서 크게 어려운 부분은 별로 없다. 다만 그 만큼 특징으로 삼을 만한 부분도 없다보니 제대로 그리려면 섬세한 관찰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는 반대로 자세가 역동적이면서도 특징이 두드러지며 아크리파와 비슷한 빈도로 사용되는 석고상으로는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28]가 있으며, 비너스와 함께 석고소묘의 삼총사로 불리운다.
문외한이라도 생김새는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비교할 만한 것이 있다면 '생각하는 사람' 정도), 정치가이니만큼 얼굴에도 위엄이 느껴지고 해서 미술이나 조각 관련해서 유머 요소로 등가하기도 하며, 게임에서는 몬스터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그것도 만날 머리만.
7. 대중 매체에서
7.1. 게임
7.1.1. 섀도우 오브 로마
캡콤의 액션 게임인 섀도우 오브 로마에서 액션 파트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사실상 데드 라이징의 프랭크의 프로토 타입이라고 봐도 좋다. 아버지가 갑자기 카이사르의 암살범으로 몰려 아버지를 구하기위해 검투사로 성공하려는 것이 아그리파 파트의 스토리. 게임내에서 아우구스투스 파트가 워낙 재미없기 때문에 액션 파트가 더 빛난다.7.1.2. 도미네이션즈
아크리파의 군화가 유물로 등장한다.7.2. 드라마
7.2.1. ROME
시즌 2부터 출연, 옥타비아누스의 충실한7.3. 영화
7.3.1. 드래곤 블레이드: 천장웅사
영화에서 잠깐 등장한다. 해당 배우는 데이빗 펙(David Peck).[1] 마르쿠스 키케로의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의 딸이다.[2] 소 옥타비아의 딸로 친구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다.[3] 자신의 친구인 아우구스투스의 딸이다.[4] 안토니우스와 소 옥타비아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그렇잖아도 수가 적었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든든한 일원이 되어 주었다.[5] 그래서 옥타비아누스의 정적들이 옥타비아누스를 비판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뻗어있는 채로 아그리파가 승리를 가져다주길 기다린다고 할 지경이었다.[6] 옥타비아누스는 뛰어난 정치가였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꽝이었기 때문. 몸이 허약해서 군대에서는 거의 누워 지낼 정도였기도 하지만 전쟁에서는 그가 정치에서 발휘되던 그 뛰어난 판단력도 먹통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7]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간단한 셈법조차 모르거나 모국어이자 공용어인 라틴어를 제대로 읽고 사용하지 못하는 문맹자 등은 서류심사와 테스트를 거쳐 로마군 입대조차 못했다.[8]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었던 모양이다. 스스로도 군사적인 재능이 없음을 알기에 전장에 나서면 긴장했던 듯싶다.[9] 다만 딱 한 가지 아그리파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받은 큰 선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형 루키우스의 목숨이었다. 루키우스가 폼페이우스파 쪽에 줄을 잘못 서버리는 바람에 반카이사르파로 찍혀 죽을 운명에 처했다. 그래서 아그리파가 제발 형을 살려달라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간절하게 요청해야 했다. 당시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와 본격적으로 친밀해지기도 전이라 옥타비누스에게 대단히 부담스러운 청탁이었다. 사실 이미 그 시점에서 카이사르는 내심 옥타비아누스를 양자이자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하던 터라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줄 상황이긴 했으나, 옥타비아누스 자신은 결코 그걸 상상조차 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니었다. 물론 카이사르는 예상과는 달리 흔쾌히 이 청탁을 들어주었다. 아그리파 일가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깊은 은의를 느꼈음은 물론이다.[10] 물론 주군인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조차 거래의 대상으로 여길 정도로 현실적이고 타산적이었던 마이케나스의 성격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나 안토니우스와 어려운 협상을 성사시킬 수 있던 비결이었다. 조건 없는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며 군사적, 정치적 경호실장 역할을 자처했던 아그리파가 중요했던 만큼 마이케나스의 이런 자질 역시 아우구스투스가 역경을 헤쳐내고 권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계산적 관계인 만큼 마이케나스는 능력 있는 신하는 될지언정 아우구스투스가 속마음까지 숨김 없이 털어놓는 신뢰받는 친구가 될 수는 없었다.[11] 이 방문 후, 62세였던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 등이 나이도 손자뻘일 정도로 어리고, 죄다 시골촌놈 같다며 '애송이'로 지칭할 정도로 옥타비아누스와 그가 데리고 온 아그리파 등을 깔보고 무시했다. 이때 그는 편지와 일기에 옥타비아누스를 "어차피 잠깐 명성만 날리다가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사라질 존재"이라고 폄하했고, 지인들에게 "어린 카이사르는 쉽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애송이에 불과하다"며 쾌재를 불렀다. 이후에도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대놓고 무시했는데, 이는 키케로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오판이 되고 만다.[12] 엄밀히 말하면 옥타비아누스가 키케로에게 빈번히 방문하고 파테르(아버지 내지는 어르신)이라는 표현까지 붙이면서 존중한 것은 안토니우스를 비롯한 구 카이사르의 측근들에게서 안전을 확보하고, 키케로와의 친분을 통해 옵티마테스로 대표되는 '원로원파'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깔보았다는 것은 키케로가 오히려 옥타비아누스의 가치부전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며, 실제로 2차 삼두 체제가 확고해진 후, 옥타비아누스에게 쓸모가 다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가 시작한 숙청의 첫 번째 희생양들 중 하나가 되고 만다.[13] 기어이 입후보시켜 당선시켰다고 표현한 이유는 아그리파의 입후보부터 로마인들 기준으론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공화정 시대 호민관에 입후보한 평민들은 아그리파처럼 부모와 형제자매 친인척까지 기사계급조차 전무한 소위 쌩 평민, 그것도 이탈리아 시골 농민 집안 출신들은 거의 없었고, 아그리파 같은 배경을 가진 평민후보가 컷오프를 통과해 넉넉하게 당선될 확률은 말 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희박했다. 실제로는 노빌레스, 곧 평민 출신 귀족들의 독무대였다.[14] 로마 공화정 말 원로원의 정원과 분위기, 로마인들의 성향과 전통을 생각해보면, 나이도 20대 초반에 불과한 시골 출신 평민 신참자가 발언권을 보장받고 그 발언이 우선시되는 것은 당시 로마 기준으로 파격 그 이상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원로원 안에서 신참자는 발언권이 없다시피했고, 최우선 발언권은 늘 원로원 안의 프린켑스, 즉 실권자와 전직 집정관들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15] 코르부스의 경우 분명 뛰어난 병기였고 로마 해군이 카르타고 해군을 물리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너무 무거워서 배의 균형을 잃게 하는 물건이라 나중에 가면 로마 해군의 배에서 치워졌다.[16] 다만 판테온은 완전히 소실된 후 하드리아누스가 완전히 다시 지었다. 판테온에는 아직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건축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지만 이는 하드리아누스가 원 건설자를 배려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하드리아누스가 다시 지은 판테온의 양식은 아그리파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17] 현재 프랑스와 스위스, 스페인 북쪽 산맥 일부[18] 아그리파는 젊을 적부터 급사한 순간까지 워커홀릭이었고, 책임감과 성실성이 대단했다.[19]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보다 무려 26년을 더 살았다.[20] 티베리우스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의 연애 및 결혼은 당시 로마 상류층 사이에서 화제를 얻을 정도로 굉장히 드문 사례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행복하게 살던 부부를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손을 늘리기 위해서라는 명목 하에 잔인하게 갈라놓았고 결국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와 이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21] 혹은 아우구스투스의 이복누나 대 옥타비아의 손녀와 결혼했다는 말도 있다.[22] 요컨대 그 배후에 티베리우스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썰은 썰일 뿐이다. 애시당초 티베리우스는 유능하긴 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꼽은 황제 후보들 중에서는 사실상 맨 마지막 서열이나 다름없었고 원래는 앞에 선 후보들이 다 사라지거나 하지 않았다면 황제 자리는 결코 오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하늘의 장난인지 정말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티베리우스 본인은 황제 자리 따윈 원하지도 않았고 사랑하는 빕사니아와 행복하게 살기만 원했는데, 그놈의 황제 자리 때문에 빕사니아와 억지로 헤어지고 내키지 않았던 황제의 딸과 재혼해야 하였다. 게다가 차기 황제에 가장 가까웠고 정식 입양이 내정된 인물은 티베리우스가 가장 사랑한 동생인 대 드루수스였다.[23] 아우구스투스는 열병에 걸려 진짜 죽을 뻔했을 때, 아그리파와 함께 원로원파에 속한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도 함께 불러 두 사람에게 자신의 권한을 비상시에 넘기도록 했다. 물론 이때도 피소보다 아그리파가 아우구스투스 서거시 실질적인 직위계승자였다.[24]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열병에 걸려 생사를 오갈 때 가족도 아니고 타인인 아그리파에게 반지와 인장을 넘겼으니, 아그리파는 사실상 왕위계승자나 다름없었다.[25] 여기에는 게르마니쿠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라는 후광도 있긴 했다. 하지만 원로원과 로마사회에서 두 사람이 소년 시절부터 미묘하게 그 위상에서 차이가 존재한 이유는 두 사람의 혈통 때문이었다고 한다.[26] 이후 로마에는 네로 목욕탕, 카라칼라 목욕탕,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이 지어진다. 목욕탕에 대해서는 "오! 네로보다 나쁜 것이 무엇인가? 오! 네로 목욕탕보다 좋은 것이 무엇인가?"라고 풍자시인 마르티알리스가 비꼬았을 정도이다. 한 마디로 로마인들이 환장을 하고 좋아했던 로마 문명의 상징.[27] 수에토니우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혐오와 비방 그리고 왜곡은 도저히 역사가라고 하기에 창피할 정도로 심각했기에 교차 검증되지 않은 수에토니우스의 황제 열전 기록은 ' 아 그 당시 로마 세간에 저런 찌라시가 돌았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28] 흔히 줄리앙으로 불린다[29] 풀네임은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로 유능한 외교관이자 정치가이며 옥타비아누스의 개인 고문이기도 했다.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메세나의 유래가 된 인물.[30] 다만 ROME에서는 뒤에서 책략을 꾸미는 능글맞고 음흉한 책사 포지션으로 나온다. 첫 등장부터 지원군 사령관인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장군을 모종의 방법으로 난전중에 암살하고 휘하 병력들을 흡수, 그 와중에 '슬프지만, 정말 운이 좋군~ 승리의 영광은 모두 우리 차지니까' 라며 이죽대는건 덤이다.[31] 그래서인지 실제 역사대로라면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와의 딸이어야 할 안토니아는 작중에서는 친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