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rippina Major | 대 아그리피나 | |
이름 |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Vipsania Agrippina) |
별칭 | 아그리피나 게르마니키 Agrippina Germanici[1] |
출생 | 기원전 14년 아테네 |
사망 | 33년 (향년 46세) 벤토테네섬 |
배우자 | 게르마니쿠스 |
자녀 |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
아버지 |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
어머니 | 대 율리아 |
형제 | 가이우스 카이사르, 소 율리아, 루키우스 카이사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
1. 개요
로마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황족. 흔히 대(大) 아그리피나로 불리나, 로마인들에게는 그냥 아그리피나로 불렸고, 아버지의 성씨인 빕사니아로는 불리지 않았다고 한다. 굳이 여사님 정도 칭호를 붙여 높여 부른다면 남편의 통칭을 덧붙여 아그리피나 게르마니키라고 했다.3대 황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아우구스타로 5대 황제 네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의 어머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으로 로마 공화정 말 ~ 원수정 초를 대표하는 대정치가이자 장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이다.
2. 생애
로마 제정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자 친구이며 사위인 아그리파와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인 대 율리아 황녀 사이에서 태어난 5남매 중 넷째(차녀)다. 출생지는 아테네. 위로는 오빠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언니 소(小) 율리아(빕사니아 율리아)가 있고, 밑으로는 남동생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있었다. 아버지 아그리파가 이전 아내들로부터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빕사니아 아티카, 빕사니아 마르켈라를 뒀기 때문에, 아그리파에게는 다섯째 딸이자 막내딸이었다. 아버지의 자녀 중 첫째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가 티베리우스와 결혼해 낳은 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대 아그리피나가 동갑인 만큼, 아그리파가 늦은 나이에 얻었다.전체 이름에서 드러나듯, 언니 소 율리아와 달리 맏언니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처럼 아버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여성형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는 이복언니들, 친가 사촌언니들의 이름과 같은 경우로, 부모와 자식이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자매들도 한 이름을 같이 쓰는 경우가 많았던 로마 관습을 생각해보면, 언니 소 율리아의 전체 이름이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아그리파, 대 율리아 부부의 둘째아이인 소 율리아의 전체 이름은 빕사니아 율리아였고, 로마인들에게 율리아로 불린 것을 생각해보면 이 편이 더 이상했던 셈.
언니 소 율리아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미녀였으나, 어린 시절부터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미움받고 서로 사이도 최악인 소 율리아와 달리 외조부 부부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 이유는 외모도 상당하고, 로마 여성들의 덕목으로 불린 순종과 가족애가 대단한 점이 높이 평가받고 실제 성격 역시 대 율리아가 낳은 자녀들의 특유 단점을 빼면 상식적이고 온화한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황실 안에서 그녀와 함께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사랑을 받은 또 다른 공주는 외조부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녀 리빌라인데, 1살 아래인 리빌라와는 어릴 적부터 라이벌이었다.
일찍이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으로 1살 위의 6촌뻘인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로,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인 게르마니쿠스[2]와 약혼 후, AD 5년 결혼했다. 이 결혼 당시 신랑과 신부 나이 차이는 고작 1살에 불과했다. 이는 로마 상류층 신랑, 신부의 나이 차이가 통상적으로 최소 15살 정도 났던 것을 생각하면, 정략혼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정상적인 형태의 소년, 소녀의 혼인이었다.[3] 여담으로 남편 게르마니쿠스는 또래 남성 귀족치곤 아주 빨리 결혼한 케이스였는데, 아그리피나는 남편과 달리 또래 로마 여성들보다 대략 3~4살 정도 늦게 결혼한 케이스라서 신부 쪽이 신랑이 성년식을 마치고 군입대를 하기 전까지 결혼을 미뤘다가 결혼한 경우였다.
큰오빠 가이우스 카이사르, 작은오빠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일찍 요절해, 남편 게르마니쿠스가 일찍부터 외조부의 실질적 후계자가 되면서 일찌감치 황후 자리를 차지할 것이 확실시됐다. 이 상황은 어릴 적부터 질투심이 대단했던 시누이 리빌라와 아그리피나 사이를 철천지원수로 만들게 된다. 리빌라는 어릴 적부터 자신보다 2살 많은 오빠 게르마니쿠스, 1살 많은 새언니 아그리피나를 자신의 앞길을 막는 원수이자 라이벌로 생각해 유독 미워하고 증오했는데, 차기황제로 확정났던 남편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결혼식만 올린 상태에서 요절해 그 증오심이 더 깊어갔다.[4]
남편 게르마니쿠스가 갑자기 죽기 전까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자손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성격에 문제가 없었던 공주였다.[5][6]
결혼 전부터 이복언니의 아들로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와 사이가 무척 좋았고, 몸이 불편한 시동생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도 냉담하지 않고 사이가 괜찮았다. 정략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시부모와 마찬가지[7]로 남편과의 금슬도 좋아 남편에게 순종적이고 남편의 형제들인 소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에게 온화하면서도, 집안을 잘 꾸리고 시어머니 안토니아에게 무척 순종적이었다. 아이들도 많이 낳았는데, 모두 제 손으로 젖을 먹이고 옷을 만들어 입히고 키웠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친혈육 중 유일하게 사랑을 받았고, 어머니 대 율리아의 나쁜 행실에도 손가락질 당하는 일이 없었다.
내조에 착실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남편을 따라다니며 나댄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붙어다녔다. 이는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하기 전까지 아그리피나의 유일한 단점이었는데, 사실 이 단점 역시 반농담식으로 칭찬하기 위해 어거지로 덧붙인 약점이었지만 결국 그녀가 몰락하는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 여자는 집에서 자녀 양육에 전념해야 한다는 통념과는 다르게,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겠다면서 끝내 그녀가 정치에 직접 개입한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마 최상류층이자 황족임에도, 대개의 어머니뻘, 또래 상류층 여인답지 않게 남편이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며 남편의 모든 것을 돕고 아이들을 그곳에서 낳고 환경에 맞게 키우면서 군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이런 부분은 시어미니 소 안토니아와 판박이였는데, 그럼에도 어릴 적부터 본인 혈통에 대한 특유의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 단점은 오빠, 언니, 남동생도 함께 가지고 있는 문제였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라는 자부심은 남편 게르마니쿠스가 의문사하고 후일 티베리우스와의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병적 수준으로 악화된다.
대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와의 사이에서 9명의 아이를 낳았고 이중 6명의 자녀가 유년기 후에도 살아남았다.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소(小)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비아가 그들인데, 자녀들 모두 하나 같이 제 명을 못 채우고 죽었다. 장남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세야누스, 리빌라 일당에게 누명을 쓰고 국가의 적이 되었다가 섬으로 추방됐다가 31년 그곳에서 가망없다고 판단해 자살, 차남은 세야누스의 농간으로 난잡한 범죄자로 모함받아 황궁 지하실에 유폐됐다가 풀려나기 직전에 아사, 삼남은 제위에 올랐으나 서기 41년 암살됐다. 장녀는 친아들 손에 살해됐고, 차녀는 전염병에 걸려 요절, 삼녀는 메살리나에게 구박을 받고 온갖 고생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쓸쓸히 죽었다.
티베리우스 시대 중기까지는 황실과 로마 민중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가 게르마니쿠스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횡사하면서 그녀의 인생에도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게르마니쿠스가 시리아에 파견되었을 때, 그는 시리아 총독인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심각한 불화를 겪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였던 대 아그리피나 역시 피소의 아내인 플랑키나와 쌍으로 충돌해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 와중에 게르마니쿠스가 원인모를 열병[8]에 걸려 죽어버렸다. 죽으면서 게르마니쿠스는 아내와 지인들에게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겼다.[9] 다만, 게르마니쿠스는 친구들과 아내에게 죽어가면서 자신의 오른손으로 그들의 손을 일일이 붙잡으면서, 이들에게 이성을 되찾고, 반드시 살아남아 본인의 혈육들을 지켜달라고 했다. 이때 한 친구가 복수를 단념하느니, 자신도 목숨을 끊겠다고 맹세했고, 대 아그리피나는 죽어가는 남편 얼굴을 매만지고 펑펑 눈물을 쏟으면서 자신 역시 남편을 따라 그 앞에서 목숨을 끊겠다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자 게르마니쿠스는 아내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사랑하는 아그리피나, 부디 나 자신에 대한 추억과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아이들을 위해, 당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잔혹한 운명에 순종하시오. 부탁이오. 우리 아이들과 아우들[10]을 위해서라도 도시(로마)로 귀국한 뒤 권력 다툼으로 당신보다 더 강한 사람들을 자극하지 말아야 하오."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다시 한 번 친구들에게 아내 아그리피나와 여섯 자녀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했고, 죽어가면서 법적 형제이자 혈연상 사촌동생인 소 드루수스에게 자신의 유언을 전달해달라고 한 다음, 함께 자신의 죽음을 슬퍼만 하지 말고 이를 기억해, 그가 이성적으로 중심을 잡아,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이어 그는 티베리우스 측 인사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티베리우스와 소 드루수스에게 이성적으로 법적 판결 아래 헛된 또 다른 희생이 없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대 아그리피나 손을 놓는 것을 끝으로 사망했다.
대 아그리피나는 남편이 죽자, 완성히 이성을 상실했고,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자녀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녀는 도착 소식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판노니아에서 며칠째 잠도 못 자고 달려온 소 드루수스, 소 드루수스가 로마를 지나기 전 함께 데리고 온 시동생 클라우디우스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이들에게 감사함을 거듭 표했고, 이후 장례 절차가 소 드루수스가 상주가 되어 시작됐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충격으로 혼절한 소 안토니아를 병간호하고, 어머니 리비아가 충격으로 앓아 누운 까닭에 함께 있어야 된다는 이유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대 아그리피나는 여러 정황상 증거를 이유로 티베리우스에게 증오을 품었다. 이런 점은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도 비슷했는데, 그는 아버지가 이 정도로 비정하게 행동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으로 보내기 전에 게르마니쿠스의 친구, 친척들을 총독 직에서 해임하거나 소환한 뒤 피소를 시리아로 보낸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터라, 소 아그리피나 편을 들면서 일단 재판을 지켜보자고 했다.
이 사건 이후 열린 피소 재판이 열리는데, 21세기 발굴된 피소 동판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객관적 증거를 이유로 "피소가 게르마니쿠스를 죽인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상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은 유죄"라고 결론내린다. 그렇지만 동판에 티베리우스가 원로원과 함께 언급했듯이, 티베리우스는 본래 피소 부부 중 그 아내가 마법을 부려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하도록 사주했다는 것에는 증거가 명확하다고 유죄를 내리려고 했다가, 어머니 리비아가 피소 아내에게 면죄부를 주도록 하면서, 최악의 결과를 게르마니쿠스 유족들에게 내린 꼴이 됐다. 대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남편 게르마니쿠스를 법적 아버지가 되어 보호해주겠다고 했음에도 은근히 견제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그리피나와 게르마니쿠스 친구들 입장에서 볼 때, 티베리우스를 무조건 비방하려고 벌인 어거지가 아니었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전쟁 중 게르마니쿠스가 전공을 세워 원로원이 훈장과 영예를 내릴 때, 홍보를 하겠다며 게르마니쿠스 이름으로 로마군과 로마 거주 평민들에게 은사금을 내리면서도, 친아들 소 드루수스를 함께 끼워 넣었다. 게르마니쿠스의 친구로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게르마니쿠스 부부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 장인으로 정해진 크레티쿠스 실라누스를 견제하다가 게르마니쿠스가 시리아로 가기 직전에 해임했다. 대 드루수스(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 쪽 인사들과 친한 빕스타누스 갈루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형제가 게르마니쿠스를 돕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으며, 즉위 직후 아우구스투스 유언장을 통해 황족 특권을 유지하고 제5 상속자, 제 6 상속자가 된 클라우디우스, 소 안토니아를 마치 유언장 조작 아래 지위를 얻은 양 무심하게 대하다가, 사실상 특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또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 아그리피나 부부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를 사위로 맞이하기로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결정내린 시리아 총독 크레티쿠스 실라누스를 티베리우스가 해임하고 피소를 내려 보내 견제하고, 네로 카이사르의 약혼을 파기시켰다. 이 모든 일은 그 의심을 더욱 키웠다. 이렇게 되니, 아그리피나는 남편의 유언을 따르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 된 남편을 위해서라도 티베리우스를 파멸시키겠다고 이를 갈았다.
즉, 아그리피나가 복수의 화신이 된 것은 피소 재판에서 법적 시아버지이자 남편의 백부 티베리우스 황제를 믿었다가 배신당했다는 분노 등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이후에도 게르마니쿠스를 그리워 한 사람들에게 냉담했고, 가족들에게도 평소처럼 행동했다. 또 그는 아그리피나의 시어머니 소 안토니아, 시동생 클라우디우스에게도 큰 위로를 하지 않는 등 아그리피나 입장에서 보면 의심을 살 만한 모습만 보였다. 이런 모습에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인 남편 게르마니쿠스와 본인을 경계했다가, 비열하게 피소를 시켜 남편을 독살했다고 확신했다. 다른 것보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에 대한 사후 처리가 무척 부실하게 이루어졌던 것이 대 아그리피나의 의심을 키워서, 그녀는 이때부터 음모와 증오의 화신이 됐다.
아그리피나는 이때부터 황궁에서 사사건건 티베리우스를 비방했고, 티베리우스의 친구들과 근위대장 세야누스는 중간에서 아그리피나의 발언을 모두 티베리우스에게 전달했다. 때문에 시아버지 티베리우스, 며느리 아그리피나 사이의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갔다. 그래서 식사 중 아무 생각 없이 사과를 건넨 티베리우스를 의심해, 아그리피나가 정색하면서 노려본 일도 있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내가 여기에 독이라도 묻힌 줄 아느냐”라면서 사과를 먼저 먹어 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는 티베리우스와의 관계 외에도 비슷하게 전개돼, 다른 황족들과도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시어머니 소 안토니아, 이복언니의 아들로 티베리우스의 친아들인 소 드루수스와도 티베리우스 문제로 말싸움을 벌였다. 다행인 건, 남편과는 어릴 적부터 친형제와 같았던 소 드루수스가 그녀를 이해하면서, 티베리우스와 대립하거나, 원로원 안에서 그녀를 비방할 때마다 중재자 역할을 하며 막아준 덕에 큰 소란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남편 사후, 아그리피나는 과거와 달리 편집증, 우울증이 심해져 매우 까칠한 성격이 됐고,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라는 자부심이 지나칠 정도로 심해져 적이 많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가 티베리우스의 명령으로 정혼한 소녀와 파혼 후, 소 드루수스와 리빌라의 딸 율리아 리비아 카이사리스와 결혼했다. 이는 소 드루수스가 죽더라도 티베리우스가 죽으면 그 다음 황제는 대 아그리피나의 아들 몫이 된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의 이런 배려에도 늙은 황제가 남편을 죽이고, 소 드루수스와 본인 가족들을 원수로 만들어 모두 제거할 것이라고 떠들며 티베리우스의 심기를 계속 자극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황궁 안에서 아그리피나를 유일하게 변호해주던 소 드루수스가 급사했다. 그는 게르마니쿠스 사후,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야심과 불충을 눈치채고 대립 중이었는데, 위기에 몰린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아내 리빌라와 불륜을 감추고 황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가 마시는 술잔에 독을 묻혀 급사하는 형태로 독살했다.
소 드루수스의 죽음은 대 아그리피나의 몰락을 앞당겼다. 소 드루수스 사후, 티베리우스는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났고 네아폴리스로 갔다가 바다 건너의 카프리 섬으로 들어가 은둔통치를 시작했다. 그 사이 로마는 세야누스와 그를 따르는 일당이 판치게 됐고, 황궁 안에서는 리빌라가 티베리우스의 손자로 소 드루수스의 어린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앞세워 아그리피나를 쪼아댔다. 이에 아그리피나는 파벌을 여기저기에서 만들어 티베리우스를 계속 씹어댔고, 그 틈을 노린 세야누스와 리빌라는 합세해 아그리피나를 계속 공격하면서, 아그리피나와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이간질하고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정적으로 만들었다.
결국 아그리피나는 장남 네로 카이사르와 함께 세야누스에 의해 군단병들을 매수[11]하여 반역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이후 남편의 친구들, 그녀의 측근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아들인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함께 유폐당했고, 대 아그리피나는 벤토테네 섬에 유배당했다. 그러자 그녀는 결국 곡기를 끊어 굶어죽는 길을 선택했다. 이때 일에 관해, 타키투스는 그녀가 경비병들에게 얻어 맞아 눈 한쪽이 거의 실명했으며 이후 아사했다고 한다.
결국 그녀의 아들인 칼리굴라가 제위를 이어받았는데, 그에게 제위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대 아그리피나는 무척 성급했다. 제위 계승의 정통성, 여론의 지지가 게르마니쿠스 가문에 있었는데도, 대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다 화를 부르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종국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 여섯 자녀가 제 명을 못 채우고 비극 속에 죽은 원인이 됐다.
[1] 게르마니쿠스의 아그리피나라는 뜻으로, 게르마니쿠스의 아내라는 것을 뜻한다.[2] 대 드루수스와 소(小) 안토니아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요절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후견인을 맡고 있었던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이다. 대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기 직전 아우구스투스의 의중에 따라 큰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돼 일찌감치 제위 계승 예정자(황태손)가 됐다.[3]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혈육들을 결혼시키는데 있어, 본인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정략혼을 추진해도 신랑과 신부의 나이 차이를 따져 결혼을 명령했다. 따라서 비슷한 나이대였지만 연애결혼을 한 티베리우스,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의 결혼 외의 결혼 명령으로 결합한 대 율리아&마르켈루스, 대 드루수스&소 안토니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대 안토니아 결혼을 보면 대 아그리피나 부부의 경우처럼 신랑, 신부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동시대 로마 귀족, 후세대 로마 귀족들의 정략혼과는 묘하게 다른 명령이었다고.[4] 리빌라는 사촌오빠로 아그리피나의 이복언니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의 외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보다 1살이 어렸다. 그녀는 게르마니쿠스, 대 아그리피나를 미워한 만큼이나 로마 제정 초기의 대표 악녀답게 몸이 불편한 친동생 클라우디우스를 구박하고 인격자인 후일의 남편 소 드루수스에게도 증오심을 표출했다.[5] 친남매지간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외조부이자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엄청난 지원 속에서도 뚜렷한 공적을 내지 못한 채 요절했고, 어머니 대 율리아와 또 다른 자매 소 율리아는 간통 혐의로 격노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추방되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또 남동생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누구도 제어 못할 난폭한 성격 때문에 유배형에 처해진 뒤, 아우구스투스 임종 전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6] 아래와 같이 게르마니쿠스 사후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한 증오로 다소 과격한 행동을 하기는 했지만 미심쩍은 일(거기다 당대에는 독살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었다.)로 남편을 잃은 여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볼 것은 절대 아니다. 사실 막장들과 성격 파탄자로 가득 찬 그 콩가루 황실에서 이 정도의 정상적인 성격은 놀라운 비정상이었다(...). 참고로 남편인 게르마니쿠스 역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정상인이었다. 원정때 악천후로 배가 침몰 위기에 처하자 자기 탓이라며 뛰어내리려고 했다는, 어찌 보면 좀 똘끼(...)가 느껴지는 일화도 있지만 인물 평론에서 상당히 시니컬했던 로마인들 중 저 일화를 거론해서 게르마니쿠스를 깐 이는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게르마니쿠스가 자신이 부리는 사람들을 진정 인격적으로 챙기는, 당대 고귀한 신분의 로마인에게선 정말 보기 드문 교과서적인 윗사람의 표상이었기에 저런 일화도 가능했던 것이다.[7] 대 아그리피나의 시부모인 대 드루수스와 소(小) 안토니아 역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중매로 결혼한 케이스였는데, 게르마니쿠스의 부모 역시 아들 내외처럼 상류층에서는 이례적으로 금슬이 굉장히 좋았고, 대 아그리피나처럼 소(小) 안토니아도 남편의 임지를 따라다니면서 손수 아이를 낳고 직접 키웠다.[8] 현대에는 말라리아일 것이라는 게 정설.[9] 그 때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소가 독살했다고 믿었다. 심지어 게르마니쿠스 본인도...[10] 소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1세[11] 게르마니쿠스는 라인 강 지역의 군단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