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7:39:13

소 율리아

Vipsania Julia Agrippina
빕사니아 율리아 아그리피나
로마 제국의 황녀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신상 정보
Vipsania Julia Agrippina
빕사니아 율리아 아그리피나
통칭 소 율리아(Julia the Younger)
출생 기원전 19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 서기 29년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트레미티 제도 (향년 47세)
아버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어머니 대 율리아
배우자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자녀 아이밀리아 레피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갓난아기
형제자매 가이우스 카이사르(오빠), 루키우스 카이사르(남동생), 대 아그리피나(여동생),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남동생)

1. 개요2. 행적

1. 개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어머니 대 율리아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에게 추방당한 황녀'로 유명한 인물이다.

2. 행적

기원전 19년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심복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친자식인 대 율리아의 장녀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대 아그리피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부인의 전형적인 활동 중 하나인 양모 작업 방법을 가르치고, 그들이 행한 모든 말과 행동을 일지로 기록하게 했으며, 외부인을 절대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등 손녀를 엄격하게 교육했다.

기원전 6년 또는 5년,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중매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결혼했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기원전 34년 집정관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아우구스투스의 2번째 아내였던 스크리보니아의 장녀 코르넬리아의 아들로, 아우구스투스는 이 결혼을 통해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씨족을 포섭하고자 했다. 파울루스와 율리아 부부는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를 낳았다. 칼리굴라 황제의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와 결혼했다가 나중에 칼리굴라에 의해 반역 및 간통 혐의로 처형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두 부부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소 율리아는 시골에 웅장하고 사치스러운 별장을 지었다. 검소를 미덕으로 삼던 아우구스투스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격분해 건물을 통째로 허물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검증되지 않은 뜬소문을 그대로 싣거나 살을 붙여가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공격했던 인물이기에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믿을 만한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기원전 2년 어머니 대 율리아가 신전에서 공개 섹스를 벌이며 아버지의 명예에 먹칠하고 반역 음모를 꾀한 혐의로 판다테리아 섬에 추방된 사건이 벌어진 후, 딸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품은 아우구스투스가 대 율리아의 딸인 그녀까지 미워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래도 서기 1년에 소 율리아의 남편 파울루스가 집정관을 역임하는 등, 파울루스와 율리아 부부는 대 율리아가 추방된 후에도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율리아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어릴 적부터 사치스러웠고, 거만했다. 이는 아그리파, 대 율리아 부부의 다섯 자녀 중 넷째인 대 아그리피나 외의 4남매가 가진 단점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과시적이었는데 기행도 벌여, 이 시기부터 입방아에 올랐다. 이중 화제를 모은 것은 광대, 무용수 노예들을 소유했고, 키가 60cm인 광대 노예를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다닌 행동이었다.

이렇게 되니,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난쟁이 광대를 데리고 다니며 이를 과시한 아우구스투스의 손녀라고 수근거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잡음을 만들고 본인과 일가 역시 비슷하다는 오해를 사는 것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아우구스투스는 손녀를 타일렀지만, 율리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녀가 어머니 율리아에 대한 할아버지의 행동, 계부 티베리우스와 할머니 리비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갈등은 깊어졌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손녀 율리아에게 야단만 칠 뿐 아직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율리아의 행동과 그 기행은, 아우구스투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서기 4년 2월 객사한 뒤 후계자로 선정해 심혈을 기울인 손자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에 대한 이미지까지 영향을 끼쳤다. 당시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수도 로마에 남아 제왕교육을 받던 소 드루수스는 갓 성년식을 치른 뒤, 원로원에 데뷔한 상태였다. 그런 소 드루수스가 친척 율리아처럼 호화로움에 빠져 폐습에 젖지 않았냐는 헛소문이 돌자,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를 더욱 미워했다.[1]

서기 8년, 소 율리아는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간통을 저지르고 아이를 가진 혐의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고발당했다.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즉시 트레미티 제도로 추방되었고 재산까지 압류되었다. 이후 태어난 갓난아기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산비탈에 던져 살해되었다. 그 후 서기 10년 율리아의 남편 파울루스는 아우구스투스를 상대로 암살 음모를 꾀한 혐의로 즉결 처형되었다.

반면 간통 혐의로 기소된 원로원 의원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대 율리아와 간통한 혐의로 처형된 율루스 안토니우스처럼 처형되기는 커녕 자발적으로 망명했으며 재산도 몰수되지 않았다. 그러다 서기 17년 티베리우스 황제의 허락을 받고 로마에 귀국해 여생을 평온하게 보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정황을 볼 때 실라누스가 실제로 율리아와 간통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보며, 아우구스투스가 미운털이 박힌 손녀가 자신을 음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숙청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소 율리아는 트레미티 제도로 유배된 뒤 20년간 유배 생활을 보내다가 서기 29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 그녀가 로마에 묻혀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기에, 그녀의 유해는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되기는 커녕 로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트레미티 제도에 안장되었다.

파울루스와 소 율리아의 딸인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어린 시절에 클라우디우스 1세와 약혼했지만 부모가 몰락한 뒤 취소되었다. 이후 서기 13년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와 결혼하여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2], 유니아 칼비나[3],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4],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5], 유니아 레피다[6]를 낳았다.


[1] 아우구스투스의 우려 그대로, 소 드루수스에 대한 이런 헛소문에 기반한 이미지는 그가 티베리우스 대에 집정관이 되어 그 능력과 실제 검소한 삶을 증명할 때까지 거의 20년여 동안 악영향을 끼쳤다.[2] 14 ~ 54, 46년 집정관. 54년 형제 루키우스의 원수를 갚으려드는 것을 사전에 막으려는 소 아그리피나의 사주로 처형됨.[3] ? ~ 79, 미래의 로마 황제 비텔리우스의 형제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의 부인[4] ? ~ 64, 53년 집정관,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을 자랑했다는 혐의로 네로 황제에게 자살을 강요당함.[5] ? ~ 49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의 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약혼했지만, 네로와 옥타비아를 결혼시키고 싶어한 소 아그리피나가 여동생과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퍼트리는 바람에 원로원에서 추방된 뒤 클라우디우스 1세와 소 아그리피나가 결혼하던 날 자살함.[6]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부인. 도미티아 롱기나 황후의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