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5 17:44:15

스크리보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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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평가
가족관계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부인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자식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전투
내전기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전투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반란 일리리아 대반란
기타
장소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기타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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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리보니아
라틴어: Scribonia
생몰년도 기원전 70년경 - 서기 16년 이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제국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로마 제국
가족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아버지 또는 이복 형제)
코르넬리아 술라(어머니)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형제 또는 조카)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형제 또는 조카)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첫째 남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토(둘째 남편)
옥타비아누스(셋째 남편)
코르넬리우스 마르켈리누스(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들)
코르넬리아(딸)
대 율리아(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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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로마 제국의 귀부인.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두번째 아내이다.

2. 행적

기원전 70년경에 출생했다. 아버지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로 알려졌다. 이 인물이 기원전 80년 법무관 루키우스 스키보니우스 리보이며, 기원전 34년 집정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그녀의 이복 누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가설이지만, 고대 로마 여성의 삶을 연구한 서양 고전학자 일레인 펜섬(Elaine Fantham, 1933 ~ 2016)은 2006년에 출간한 저서 <율리아 아우구스티: 황제의 딸(Julia Augusti: The Emperor's Daughter)>에서 스크리보니아가 기원전 90년경에 출생한 리보의 이복 누이라고 하기엔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며, 서기 16년에도 살아있었던 것이 고대 기록상에서 확인되는 만큼 비현실적이라면서, 스크리보니아는 기원전 34년 집정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둘째 딸이라고 주장했다. 이 가설은 현재 여러 학자들로부터 일리있는 주장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어머니 코르넬리아 술라는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유일한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폼페이우스의 딸인 폼페이아 마그나의 딸이었다. 형제 또는 조카로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가 있었으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차남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결혼한 조카 또는 누이인 스크리보니아가 있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스크리보니아는 총 3번 결혼했으며 처음 두 남편은 집정관이었다고 한다. 첫번째 남편의 이름은 분명하지 않지만, 로널드 사임 등 많은 로마사 권위자들은 기원전 56년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는 기원전 39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 그녀와 아들 코르넬리우스 마르켈리누스를 기리는 비문이 로마에서 발견된 점을 고려한 추정이다. 두 번째 남편 역시 분명하지 않으나, 많은 학자들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스크리보니아는 기원전 34년 집정관을 역임한 적이 있었던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늘그막에 결혼한 코르넬리아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기원전 16년 집정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기원전 16년에 사망한 코르넬리아를 그녀와 스키피오 살피토의 자녀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시칠리아에 거점을 삼고 이탈리아의 해상을 봉쇄해 식량 수송을 가로막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고전한 끝에 그와 타협하기로 하고, 섹스투스의 최측근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의 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하기로 했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와의 사이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친자식인 대 율리아를 낳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지극히 짧고 불행했다. 애초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언젠가 도모할 마음을 품고 있었던 옥타비아누스는 스크리보니아를 전혀 사랑하지도, 아내로서 존중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다 기원전 38년 섹스투스와의 전쟁을 재개하기로 마음먹은 옥타비아누스는 스크리보니아와의 이혼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율리아가 태어난 지 몇 달만에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빨리 결혼했다고 한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측 진영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를 내쫓은 이유는 그녀가 남편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해 질투심을 보였기 때문이며, 그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결혼 생활 중이었고 임신 중이었던 리비아와의 결혼을 성급하게 추진한 것도 결혼식 이전에 이미 은밀한 성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음해성 소문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부족하다.

그렇게 옥타비아누스와 이혼한 스크리보니아는 친정으로 돌아가야 했고,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에 의해 엄격하게 양육되는 친딸 율리아를 대면하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다. 이후 재혼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던 그녀는 기원전 2년 율리아가 신전에서 대놓고 남정네들과 성관계를 맺고 아우구스투스와 남편 티베리우스를 도모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실이 발각되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판다테리아 섬으로 추방되자, "딸의 부도덕함을 참회한다"라며 여자 노예 몇 명과 함께 딸을 따라갔다. 이후 서기 4년에 레기움으로 이송된 딸과 함께 하다가 서기 14년에 율리아가 사망하자 로마로 귀환했다.

서기 16년, 두 형제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도모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마르쿠스는 병마로 고생하고 있었기에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했지만, 티베리우스는 가차없이 재판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마르쿠스가 자결을 결심하자, 스크리보니아가 만류했다.
"다른 사람이 할 일을 스스로 하는 게 무슨 보람이 있는가? 재판에 출두해서 처벌을 달게 받아라."

그러나 마르쿠스는 듣지 않고 16년 9월 13일에 배를 단검으로 두 번 찔러 자살했다. 형 루키우스 역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형제의 지지자들은 처형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마르쿠스가 자살한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앞으로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의 구성원들이 '드루수스'라는 이름을 쓰는 걸 금지했다. 이후 스크리보니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사망 년도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친딸과 두 형제 또는 조카를 잃고 집안이 무너졌으니 절망과 비탄 속에서 곤궁하게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