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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클로디아 풀크라 라틴어: Clodia Pulchra | |
생몰년도 | 기원전 57/56년경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파트리키[1]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아버지) 풀비아(어머니)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형제) 옥타비아누스(첫번째 남편) 그나이우스 라르티우스(두번째 남편) 라티아(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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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귀부인. 논란 많은 문제 부부로 평가받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풀비아의 딸로,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첫번째 아내이다.2. 행적
기원전 57/56년경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풀비아의 딸로 출생했다. 형제로 기원전 31년 이후에 법무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있었다. 아버지 클로디우스는 고대 로마 최고의 명문 씨족으로 손꼽히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일원이었지만, 기원전 59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고, 사적으로는 본인을 공격해 궁지에 몰아넣었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복수하기 위해 호민관이 되고자 평민 푸블리우스 폰테이우스의 양자가 되는 방식으로 신분을 평민으로 바꾸었다. 어머니 풀비아는 기원전 322년에 집정관을 배출한 이래 로마 정계에서 맹활약한 저명한 평민 가문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그라쿠스 형제 중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외손녀였다.기원전 52년 아버지가 정적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의 부하들에게 피살된 뒤, 친가 어른들의 결정과 남매의 의견 아래, 본래 신분이던 파트리카로 신분 복귀가 결정났다. 그녀는 이후 남자 형제 푸블리우스와 함께, 어머니 풀비아가 쿠리오와 결혼해 낳은 이부형제들과 자라다가, 풀비아가 기원전 43년 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결혼하면서, 안토니우스의 수양딸이 됐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와 계부에게 철저히 정략혼 수단으로 홍보됐고, 본가의 결정권 등은 이들 부부 손에 통제됐다. 그러다가 기원전 42년 해방자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서로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결혼 동맹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당시 14/15세였던 클로디아는 21세의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 및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향한 정치적 공세를 퍼부으면서 결혼 생활은 위태로워졌다. 결국 기원전 41년 여름, 옥타비아누스는 클로디아와 이혼하고 풀비아가 로마의 지도자가 되려 한다고 규탄했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는 옥타비아누스에 맞서 페루시아 내전을 단행했지만, 기원전 40년 2월 말 또는 3월 초에 페루시아에서 포위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풀비아는 그리스로 피신하면서 실패했다.
옥타비아누스와 이혼한 후, 그나이우스 라르티우스라는 원로원 의원과 곧 결혼했다. 이 재혼 후, 사이에 외동딸 라티아를 얻었다. 하지만 이후의 행적은 남자형제 푸블리우스, 조카 아피우스와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2]
다만, 그녀의 딸 라티아는 성인이 된 뒤, 기원전 2년 집정관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와 결혼해 슬하에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풀케르, 풀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우르굴라니우스를 얻었다. 이중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는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 클라우디우스 1세와 결혼해, 그의 첫 아내가 됐다. 하지만 이 결혼은 어릴 적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다리 한쪽이 불편해 제위서열이 크게 밀린 클라우디우스를 성격이 괄괄하고 오만한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가 무시하면서 잡음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그녀가 자신의 해방노예들과 바람을 피우고, 임신 후 낳은 딸을 일방적으로 법적 남편 클라우디우스의 딸이라고 주장한 일 등과 엮여 파탄났다.
클로디아 풀크라의 외손자 중 한명인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아내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가, 되레 본인이 아내에게 가정폭력을 당해 매일 맞다가, 부부싸움 중 흥분한 아내가 난투 중 창 밖으로 떨어져 추락사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누명을 벗은 일로 세간을 떠들석하게 했다.[3]
[1] 남자형제 푸블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암살당한 직후, 친가 집안 어른들의 결정과 본인들의 결정 아래, 플레브스에서 파트리키로 신분 복귀.[2] 남자형제 푸블리우스는 계부 안토니우스가 남매의 후원자, 돌아가신 부모와 일가 친척들의 친구들과 대립하다가 후원자 한명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자, 크게 반발해, 사촌들과 함께 옥타비아누스 열혈 지지자가 됐고, 이후 안토니우스파 공격에 적극 협력했다.[3] 이 사건의 파장은 엄청 컸다. 누나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와 그의 형제들이 전부 이 사건 전에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처가 식구들에게 살인교사 혐의로 누명을 쓰고 기소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며느리이자 조카 소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의 막내아들로 아우구스투스의 양손자인 제위계승 5순위 클라우디우스가 법정 증인으로 매일 소환되어,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화제가 대단했는지, 당시 카프리 섬으로 스스로 들어간 티베리우스 황제마저 평소 시큰둥하던 태도 대신 큰 관심을 보였다. 따라서 재판은 내내 로마인들의 관심을 모았는데, 티베리우스 황제가 직접 이 재판을 챙겨, 거의 살인죄 유죄 판결 직전까지 간 실바누스가 무죄를 받는다. 이때 소 안토니아, 클라우디우스 모자와 황실 식구들은 그동안 본인들 이름이 사람들 밥상머리에서 계속 언급된 일에 제대로 열받는다. 그래서 부부관계가 완전히 파탄난 클라우디우스는 아내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하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임신 중이던 우르굴라닐라가 해방노예들과 불륜을 하면서 임신한 것이 들통이 나고, 우르굴라닐라 친정에서 갓 태어난 딸에게 인지 없이 클라우디아라는 이름을 지어줘, 리비아 드루실라, 소 안토니아, 클라우디우스가 이 문제로 또 재판 소송을 제기하는 일련의 막장극으로 이어진다. 이와 동시에 황제에게 무죄판결을 받은 실바누스가 할머니에게 단검을 받으면서 "자살해라"고 권유 받아, 이 문제로도 로마 안에서는 티베리우스 시대 내내 갑론을박이 펼쳐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