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안토니우스 라틴어: Lucius Antonius | |
생몰년도 | 기원전 80년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조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아버지) 율리아 안토니아(어머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첫째 형)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둘째 형)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무티나 내전 페루시아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1년 |
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
후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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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으로,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형을 따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다. 카이사르 암살 후 카이사르파를 이끈 형과 행보를 함께 했고, 기원전 41년 집정관을 맡았다. 이후 형수 풀비아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와 내전을 벌였으나 끝내 패배하여 항복했고,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다.2. 생애
저명한 평민 귀족 가문인 안토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는 기원전 99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97년 감찰관을 맡은 당대 최고의 웅변가였다. 삼촌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는 기원전 63년 집정관을 맡았고, 이후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을 역임했지만 속주민을 가혹하게 대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로마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는 기원전 74년 법무관으로 선출되었으나, 기원전 71년 크레타 해적들을 토벌하는 임무에 실패하여 대부분의 함선이 침몰되는 참사를 겪고 곧 사망했다.어머니 율리아 안토니아는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율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그는 기원전 90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외손자이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이기도 했다. 큰형으로 그 유명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있었고, 작은형으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가 있었다. 아버지가 크레타에서 사망한 뒤, 어머니 율리아는 기원전 71년 집정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와 재혼했다. 그러나 양아버지 수라는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현직 집정관 키케로에게 처형되었다.
기원전 54년 형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시리아 속주민을 핍박한 혐의로 기소된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탄핵했지만, 폼페이우스가 가비니우스를 비호하는 바람에 패소했다. 기원전 50년 재무관을 맡아 전직 집정관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와 함께 아시아 속주로 향했다. 사실 미누키우스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이웃 속주인 킬리키아 속주 총독을 맡고 있던 키케로가 미누키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그렇게 하면 루키우스에게 불명예일 것이며, 모든 안토니우스 형제를 적으로 돌릴 것이다"라며 그를 뽑을 것을 권했고, 미누키우스는 충고에 따랐다. 그는 아시아 속주에서 얼마 동안 활동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두 형과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지만, 뚜렷한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기원전 44년 호민관을 맡아 독재관 카이사르가 집정관을 제외한 모든 공직의 절반을 선거 없이 임명할 수 있다고 규정한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인 그해 4월, 농업법을 통과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기록이 미비해 확실하지 않으나, 주인이 없는 땅을 퇴역병들에게 나누어주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토지 분배 임무는 그와 형 마르쿠스를 포함한 7명의 위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키케로가 이에 대해 우려를 표하자, 그는 "당신 재산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는 답장을 보냈다. 병사들은 그의 이같은 행보에 찬사를 보냈고, 그를 기리는 여러 동상이 세워졌다.
기원전 44년 5월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 도착하자, 그는 옥타비아누스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할 수있는 권한을 줬다. 12월 10일 호민관 권한이 만료되자, 티부르로 가서 그곳에 군단과 함께 있던 형 마르쿠스와 합류했다. 그는 형에게 원로원과 타협할 것을 권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탄핵 연설인 필리피카이에서 루키우스가 형을 죽음으로 위협하며 원로원과 화해하라고 촉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끝내 원로원과 갈라져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현지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무티나에서 포위 공격했고, 그는 1개 군단을 맡았다. 이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 형제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진압군을 보냈다. 이리하여 벌어진 무티나 내전에서, 그는 파르마를 점령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파르마에서 "가장 잔인한 행위"와 "비인간적인 행위"를 보였다고 한다.
기원전 43년 4월 15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포룸 갈로룸에서 현직 집정관 판사, 하르티우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이날 1개 군단을 이끌고 적진을 급습해 형의 승리에 일조했다. 그러나 4월 21일 무티나 전투에서 패배를 면치 못했고, 그는 형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피신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총독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동맹을 맺고 세력을 재건했는데, 그가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기원전 41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뒤 로마로 진군해 수많은 이를 숙청했다. 이후 그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동방으로 떠난 뒤, 그는 이탈리아에 남아 형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 무렵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 주민들에게서 몰수한 토지를 참전 용사들에게 나눠주자, 마르쿠스의 아내 풀비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의 모든 군대를 포섭하여 권력을 장악할 걸 두려워하여 그를 부추겨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마르쿠스의 친구들을 토지 위원회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를 대적하는 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에 따랐다. 이후 토지를 강제로 빼앗긴 주민들의 불만이 이탈리아 전역에 퍼지자, 그는 이 기회를 노려 옥타비아누스를 실각시키기로 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주도로 토지 분배가 이뤄지고 있으며, 형 마르쿠스가 동방에서 돌아오는 즉시 공화국을 회복시킬 거라고 선언했다. 그는 형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증명하기 위해 이름에 '피우스'라는 명칭을 추가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풀비아는 그가 잘못된 시기에 옥타비아누스와 대적하기 시작했다고 여기며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입장을 바꾸고 루키우스를 부추겼고, 많은 이가 그의 설득에 넘어가 옥타비아누스를 적대했다. 이리하여 옥타비아누스파와 안토니우스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기원전 41년 가을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했다. 당시 루키우스는 6개 군단을 지휘했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하인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의 13개 군단이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있었고,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의 11개 군단이 갈리아에 주둔했다.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당장 4개 군단 밖에 없었고, 히스파니아 속주에 6개 군단을 합친다 해도 이들 모두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그와 풀비아는 충분히 승산있다고 보고 옥타비아누스를 대적했다.
기원전 41년 9월, 그는 풀비아와 함께 로마에 입성했고, 시민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맞이하며 임페라토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심복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반격을 가했고, 그는 페루시아로 패퇴했다. 풀비아는 그를 돕기 위해 칼레누스, 폴리오, 바수스에게 당장 페루시아로 가서 아그리파를 격파하라고 요구했지만, 세 사람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 전쟁을 지지하는 지 확신하지 못하여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이어 플란쿠스의 군대를 페루시아로 이끌었지만 이 마저도 격퇴되었다. 그는 기원전 40년 겨울이 끝날 때까지 맹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형은 좀처럼 도와주지 않았고, 페루시아에 기근이 들어 많은 이가 굶어죽자, 결국 기원전 40년 2월 말 또는 3월 초에 항복했다.
부하들은 내전의 원흉인 그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반발을 고려해 그를 살려주고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선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오래 살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