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lvia (기원전 83 – 기원전 40)
1. 개요
고대 로마 시대의 인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로[1] 한 성깔하는 남편들 못지않게 괄괄한 성격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2. 생애
풀비아는 명망이 높은 평민 귀족(노빌레스) 가문의 상속녀였다. 고대 로마의 평민가문은 중세 봉건 사회의 귀족 평민과는 달라 수직적 관계가 아니어서, 로마의 최고위 관직인 집정관을 귀족 가문과 나눠먹고(...), 귀족가문과의 통혼도 일반적이었다. 그녀의 모친 역시 명문 평민귀족 가문인 셈프로니우스 가문 출신이다. 당시 셈프로니우스 가문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유명한 인물은 그라쿠스 형제, 즉 평민파의 지도자였고 풀비아의 어머니는 셈프로니아였는데,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딸이라는 설이 있지만,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기원전 129년 집정관)의 딸이라고 보기도 하는 등[2]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3]어쨌든 그녀는 정치 명문가이자 부잣집의 외동딸로, 많은 로마 남자들이 탐을 낼만한 신붓감이었다. 그녀가 첫번째 선택한 남편은 바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였다. 푸블리우스는 풀케르 가문의 막내아들로, 풀케르 가문은 그의 누이가 당시 귀족(원로원)파의 영수였던 술라의 오른팔이자 당대의 명장 루쿨루스와 결혼하는 등, 그림으로 그린듯한 귀족 명문가였다. 문제는 그가 동시에 그림으로 그린듯하게 제멋대로 자란 막내아들이었다는 것. 이 사람이 벌인 기행은 난데없이 당대의 유력자 카틸리나를 여사제와 간통했다고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4] 이로인해 여론이 나빠지자 로마를 떠나, 매형인 루쿨루스가 미트리다테스와 싸우는 전쟁에 종군했으나, 얼마안가 매형과 싸우고는 군대를 선동하여 병사들이 종군거부를 하는 사태를 일으켰다.[5] 분노한 루쿨루스는 로마로 돌아와서는 푸블리우스를 자신의 부인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고발하고는, 부인과 이혼한 뒤 다시는 전쟁에 나가지 않고 미식에 탐닉하며 여생을 보냈다.[6] 이후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기행, 즉 카이사르의 둘째부인에게 반해서, 축제날 신전에 여장을 하고 잠입했다가 들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사제들이 거처하는 신전에 침입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고, 귀족파의 지도자였던 키케로의 주도로 고발을 당했지만, 의외로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 사후 풀비아는, 역시 카이사르 일파의 호민관이자 푸블리우스의 친구[9]인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와 재혼한다. 그러나 쿠리오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내전을 벌이는 와중에, 카이사르파 군대를 이끌고 아프리카에 갔다가 폼페이우스파 군대에 패해 전사했고, 풀비아는 다시 한 번 미망인이 되었다.
다시금 미망인이 된 풀비아는 세 번째 혼인을 하게 되는데, 그 상대는 이번에도 카이사르 일파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파트너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는데, 키케로가 연설 필리피카이를 통해 그녀를 안토니우스와 함께 묶어서 깔 정도였다. 키케로의 비난은 풀비아와 결혼하면 남편이 죽는다는 내용이지만, 풀비아 입장에서 보면 사실 죽은 두 남편은 키케로가 몸담고 있는 원로원/폼페이우스파에 의해 사망했기 때문에, 풀비아 입장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격파하고 2차 삼두정치의 핵심 인물로 떠올라 동방의 권력자가 되자 풀비아는 로마에 남아 안토니우스 지지자들을 이끌었다고 하는데, 당시 집정관이었던 시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의 비선실세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며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딸 클로디아 풀크라와 정략혼인을 맺게 했다.
하지만 풀비아는 지속적으로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였는데, 이에 참다 못한 옥타비아누스는 정략혼을 파기하고 풀비아를 대놓고 저격하였고, 이에 풀비아는 페루시아 내전으로 응수하였다. 풀비아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연합하여 6개의 군단을 동원해 옥타비아누스를 몰아내고 로마를 점거하는 쾌거를 이뤄냈지만,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맹렬한 반격에 패퇴하여 로마에서 물러나 페루시아로 도주하였다.
풀비아는 남편의 지원을 기다리며 저항했으나 그의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항복하면서 풀비아는 남편이 있는 동방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그 곳에서 풀비아는 급작스레 사망했으며,[11] 홀아비가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재혼하면서 화해하지만, 결국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 엮이면서 재차 옥타비아누스와 전면전에 들어가고, 결국 패해서 자살한다.
[1] 다만 안토니우스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뒤를 이은 풀비아의 세번째 남편이었다.[2] Babcock, Charles L. “The Early Career of Fulvia.” The American Journal of Philology, vol. 86, no. 1, 1965, pp. 1–32. JSTOR, https://doi.org/10.2307/292619. Accessed 5 May 2024.[3] 프리드리히 뮌처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새)어머니 셈프로니아가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딸이라고 보았고, 풀비아의 어머니 셈프로니아는 투디타누스의 딸이라고 보았다. 로널드 사임이나 뮌처는 풀비아의 가문에 정치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자주 했지만, 웰치(1995)는 이렇게 제시된 가계도 중 어느 것도 입증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Welch, Kathryn E. “Antony, Fulvia, and the Ghost of Clodius in 47 B. C.” Greece & Rome, vol. 42, no. 2, 1995, pp. 182–201. JSTOR, http://www.jstor.org/stable/643230. Accessed 5 May 2024.[4] 카틸리나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그 이후로도 계속 중상모략을 당하다가 결국 궁지에 몰려 반란을 모의하고 처형당한다.[5] 이 와중에 해적에게 붙잡혔는데, 카이사르의 흉내를 내 자신의 몸값을 높게 불렀으나, 그는 카이사르가 아니어서 아무도 그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행히도 해적이 그냥 풀어줬다고 한다.[6] 루쿨루스가 푸블리우스와 사이가 나빠 무고한 것으로 여겨졌는지, 이들은 처벌받지 않았다.[7] 그래서 이후 푸블리우스는 키케로의 정적이 되어 그가 하는 일에 계속해서 어깃장을 놓았다. 대표적으로 카틸리나 탄핵과 관련하여 키케로는 카틸리나를 반역죄로 몰아 그와 그의 지지자 수백명을 죄다 처형했는데 문제는 카틸리나는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 키케로는 반역을 미연에 막았다고 자뻑했지만 사실은 엄연한 위법행위였다. 푸블리우스는 이를 빌미로 민회에서 아무 재판 없이 로마인을 살해한 자를 추방해야 한다는 법률을 제정했고 이로 인해 키케로는 로마에서 추방당해야 했다.[8] 이쪽은 술라의 딸, 코르넬리아의 남편으로 귀족파였으며, 푸블리우스와는 공직 선거를 두고 경쟁하던 사이였다.[9] 앞서 푸블리우스가 신전에 침입했다가 고발당했을 때, 그의 변호를 맡았던 것이 쿠리오였다.[10] 일설에 따르면 키케로의 시신을 욕보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11] 멋대로 내전을 일으킨 데에 분노한 안토니우스에게 폭행당했고 이후 불타는 석탄을 삼켜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12] 사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이 두 사람이 정략결혼을 좀 많이 한 것일 뿐 그렇게 족보가 꼬이거나 한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은 족보가 꼬일 정도로 후손을 많이 본 것도 아니었다. 물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족보가 꼬인 건 사실이지만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자기 후손에게 제위를 물려주기 위한 술수에서(그리고 그 술수의 대부분이 빗나간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