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라틴어: Gnaeus Domitius Ahenobarb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31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그리스 |
지위 | 평민 귀족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할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버지) 포르키아(어머니) 아이밀리아 레피다(부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들)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해방자 내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2년 |
전임 | 루키우스 비니키우스 퀸투스 라로니우스 |
동기 | 가이우스 소시우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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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정의 군인, 정치인. 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적했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하고 생포되었다가 카이사르의 용서를 받은 뒤 조용히 지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후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카이사르 암살자들의 편에 서서 필리피 해전에서 활약했다가 필리피 전투 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편에 섰다. 나중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관이 되어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서 한 몫했고,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집정관을 역임했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시기에 안토니우스에게 가담했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가 얼마 안가 사망했다.2. 생애
2.1. 가문
고대 로마의 오래된 평민 씨족인 도미티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여러 지파 중 개인이름으로 루키우스를 선호해 물려 사용한 아헤노바르부스 가 사람이다. 도미티우스 씨족은 모든 지파들이 개인이름으로 그나이우스를 사용했다. 그런데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사람들은 씨족 가문 전통대로 이 개인이름과 함께 루키우스를 사용했고, 이 개인이름을 그나이우스와 함께 대대로 아들 중 한명에게 물려줬다.수에토니우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도미티우스 씨족에 속한 한 사람이 신성한 모습의 쌍둥이 청년을 만나서 그들에게 뺨을 어루만져지자 수염이 붉게 변했다. 이 인물은 아헤노바르부스(Ahenobarbus, "빨간 수염")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것이 그의 후손들에게 통칭이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192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기원전 162년 보결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22년 집정관을 맡아 친로마 성향의 부족 아이두이 족에게 해를 입힌 알로브로게스 족과을 상대로 빈달리움 전투에서 알로브로게스 족을 격파했다. 그 후 기원전 121년 신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와 함께 알로브로게스 족-아르베르니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원로원은 현직 집정관으로서 그보다 높은 직위인 파비우스를 더 높게 평가해 두 사람이 개선식을 거행할 때 파비우스에게는 개선문을 수여했지만 도미티우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이후 기원전 118년 식민도시 콜로니아 나르보 마르티우스(나르본)를 건설했으며,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연결하는 도로인 도미티아 가도를 건설했고, 기원전 115년 감찰관으로서 원로원 의원 32명을 추방했다.
그는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루키우스를 낳았다. 그나이우스는 기원전 103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기원전 96년 집정관을 역임하였고, 기원전 92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감찰관을 맡아 공공도덕에 해롭다고 간주된 라틴어 수사학파를 탄압했다. 동생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96년 법무관을 맡아 시칠리아에 근무했는데, 제2차 노예 전쟁 직후 시칠리아에서 노예들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한 노예가 사냥용 창으로 멧돼지를 죽였다는 이유로 그 노예를 십자가형에 처해, 너무 잔혹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 일로 정치적 입지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고, 기원전 94년 집정관을 맡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의 내전 때 술라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들 마리우스의 명령으로 로마에서 피살되었다.
기원전 96년 집정관을 역임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루키우스를 낳았다. 그나이우스는 일찍 죽었고, 동생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정계에서 활약했다. 그는 소 카토와 손잡고 카토의 여동생 포르키아와 결혼하여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낳았는데, 이 인물이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2.2. 경력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50년 아버지가 집정관 대리를 맡는 것을 막는 데 관여한 그나이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고발했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그 후 기원전 49년 1월 갈리아 총독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무단 도하하여 로마로 진격하면서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아버지의 여정에 함께 했다. 기원전 49년 2월 내전 발발 이래 첫번째로 벌어진 전투인 코르피니움 공방전에서 아버지와 함께 카이사르군에 사로잡혔지만, 카이사르는 이들을 관대하게 사면했다. 아버지는 카이사르와 계속 맞서기로 하고 마실리아로 갔지만, 그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나폴리로 갔다.그 후 그리스로 건너가 아버지와 함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편에 선 그는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여했다. 이때 아버지는 전사했고 그는 생포되었지만, 이번에도 카이사르의 사면을 받았다. 이후에는 카이사르와 맞서지 않고 로마로 돌아간 후 은둔 생활을 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46년 그에게 카이사르와 화해하고 정계에 참여하라고 권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키케로는 기원전 45년 그의 어머니 포르키아의 추도사를 보내기도 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가 이 암살 음모에 관여했을 거라는 주장이 당대부터 제기되었다. 키케로는 필리피카이를 발표했을 때 카이사르 암살을 공모한 이들과 그를 연관시켰고,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그를 숙청 대상으로 지명하면서 카이사르 암살에 연관되었다고 비난했다. 기원전 40년 말 브룬디시움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평화 협약을 논의하고 있을 때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 암살에 그가 연루되었다고 비난했지만, 안토니우스의 부관인 루키우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후대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그를 카이사르 암살자 중 한 명으로 간주했지만, 수에토니우스는 암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가 카이사르 암살에 정말로 관여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일찍이 카이사르와 맞섰던 건 사실이고 암살 사건 이후 주요 음모자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편에 곧바로 가담했기 때문에 적어도 암살 계획을 인지했거나 방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기원전 44년 중반에 브루투스, 카시우스와 함께 함대를 수리하고 새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 캄파니아로 갔다. 이후 기원전 44년 말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카시우스와 함께 시리아로 가서 카시우스를 공격하려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의 기병대를 카시우스 편으로 회유했다. 이로 인해 수세에 몰린 돌라벨라는 카시우스의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기원전 42년 해방자 내전이 발발했을 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오니아 해에서 50척의 함대를 이끌고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의 함대와 합세했다. 그들은 필리피 전투 첫번째 회전이 벌어지던 때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이끄는 적 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칼비누스의 수송선에 실렸던 2개 군단을 수장시켰다. 그는 이 승리로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로 불렸고, 이를 기념하는 특별 동전을 주조했다.
필리피 전투가 해방자파의 패배로 끝난 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지지자들을 수습한 후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귀순한 뒤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여, 70척의 함대와 2개 군단을 이끌고 이오니아 해 연안을 약탈했고 브룬디시움 항구에 정박해 있던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섬멸했다. 기원전 40년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의 중재를 받아들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화해했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단 5척의 배만 이끌고 아헤노바르부스 함대와 합세해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을 보여줬고, 아헤노바르부스는 그런 안토니우스를 성심껏 대접했다. 그 후 아헤노바르부스는 안토니우스의 두상을 새긴 동전을 주조해 자신이 안토니우스를 따른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 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브룬디시움에서 만나 평화 협약을 논의했을 때, 그에게 맺힌 게 많았던 옥타비아누스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를 카이사르의 암살자 중 한 명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를 제거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루키우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는 아헤노바르부스가 암살에 개입했다는 걸 입증할 물증은 없다고 반박했고, 안토니우스 역시 아헤노바르부스의 신변을 보장했다. 안토니우스와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던 옥타비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아헤노바르부스에게 걸린 카이사르 암살 혐의를 풀어주기로 했다.
이후 비티니아 충독을 맡은 그는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했으며, 원정이 실패한 것에 낙담한 나머지 사후수습에 손 놓고 있던 안토니우스를 대신해 패잔병들을 수습하고 파르티아의 반격을 저지했다. 기원전 35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뒤 소아시아로 달아나서 3개 군단을 모집한 후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와 연합하여 재기를 도모하려 하자, 아시아 총독 가이우스 푸르니우스와 함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체포해 안토니우스에게 넘겨 처형당하게 했다.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의 부관인 가이우스 소시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두 집정관은 안토니우스의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을 로마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성토하라는 옥타비아누스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서를 공개해, 그의 정치적 명분에 치명타를 가했다. 플루타르코스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문제의 유언서는 화로의 여신을 지키던 사제 처녀들에게 보관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 진영에 속해 있다가 옥타비아누스파로 변절한 마르쿠스 티티우스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가 유언서가 숨겨진 장소를 밀고해서 옥타비아누스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신성모독죄를 무릅쓰고 이를 탈취해 선동의 도구로 이용했다. "내가 죽으면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안토니우스의 유서가 진짜인지 위조된 것인지 여부는 오래도록 논란이 이어졌다. 로마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인 로널드 사임 교수는 이 유언서가 진본이 아니라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존 로버트 존슨 등은 유언서가 진본이라고 주장했으며, 현재 역사학계는 유언서가 진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유언장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상관없이, 이것은 안토니우스를 회복 불가능한 궁지로 내몰았다. 이 유언서는 옥타비아누스 진영이 그간 소문으로만 퍼뜨렸던 온갖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의 구실을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광범위한 정치조직을 동원하여 안토니우스가 원로원의 동의 없이 로마의 속국들을 불법적으로 분할했다는 주장, 정실부인인 소 옥타비아를 내쫓고 클레오파트라를 정식 아내로 맞이했다는 주장, 카이사르의 적장자로 카이사리온을 지명했다는 주장, 안토니우스가 죽으면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히고 싶어한다는 주장 등을 유포시켰다.
집정관 소시우스는 이에 맞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 없을 때 원로원 회의를 소집한 뒤 옥타비아누스의 언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단행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한 뒤 병사들에게 원로원 회의장을 포위하게 한 후 안토니우스를 강력히 규탄하는 한편 두 집정관과 친 안토니우스파 인사들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위협했다. 이에 아헤노바르부스, 소시우스, 그리고 300명의 원로원 의원이 기원전 32년 3월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규합하고 있던 아테네로 달려갔다.
아헤노바르부스와 소시우스는 로마의 상황을 안토니우스에게 전하면서, 로마 시민들이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매우 적대적이니 이집트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권력투쟁을 로마와 이집트 여왕의 전쟁으로 왜곡시킨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공세에 대한 대응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처음에는 두 집정관의 주장에 설득되어 클레오파트라에게 이집트로 돌아가 있으라고 권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저들이 내게 전쟁을 선포한 이상 끝까지 당신과 함께 싸우겠다"라고 밝혔고, 안토니우스의 부관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역시 클레오파트라가 계속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마음을 바꿔 클레오파트라가 계속 있게 했다.
그 후 안토니우스로부터 해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선원들을 선동한 혐의로 트랄레스의 사제 메노도로스를 처형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발발 이래 옥타비아누스 측으로 탈영하는 이들을 막는 데 애를 먹었다. 이때 많은 병사들이 이집트 여왕에게 휘둘리는 안토니우스에게 혐오를 느끼고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에게 지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나이우스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했다. 안토니우스는 의외로 그나이우스에게 속한 모든 친구와 수행원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나이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 합류한 지 며칠 후 사망했기 때문에 악티움 해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자신이 저지른 배신에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에 죽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오만하고 잔인하고 사치스러움 속에서 나온, 비루한 인간의 표본"이라고 악평했다. 반면에 수에토니우스는 그를 "의심할 여지 없이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중 최고였다"라고 호평했다.
3. 후손
그는 아이밀리아 레피다와의 사이에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낳았다. 아들 루키우스는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소 옥타비아의 딸인 대 안토니아와 약혼했으며, 기원전 22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는 기원전 16년 집정관을 맡았고 기원전 13년부터 아프리카 총독을 역임했다. 또한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게르마니아 원정을 맡아 엘베 강을 건너 아우구스투스의 위업을 기리는 제단을 쌓기도 했으며, 라인 강과 엠스 강 사이의 습지 위에 폰테스 롱기라고 불리는 산책로를 건설했다. 한편 전차 기수로서도 맹활약해 세간의 칭송을 받았다.루키우스는 대 안토니아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얻었는데, 딸 도미티아는 결혼하기 전에 요절했고 장남 루키우스 역시 결혼 전 요절해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요절한 장남 루키우스는 10대 중반의 나이에 술을 잔뜩 먹고 동방 현지에서 시비가 붙은 속주민을 죽을 때까지 폭행해 죽였을 정도로 잔혹하고 폭력성이 대단했다. 그래서 그가 요절한 뒤 아버지인 동명이인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속앓이를 했다.
둘째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역시 망나니로 악명이 대단했다. 그는 국고 횡령, 폭행, 협박, 여러 여성들과의 불륜, 도박, 검투사 경기와 전차 경기 중독, 고리대금업 등을 저지르고, 여동생 소 도미티아 레피다와 불륜을 맺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품행이 대단히 나빴다. 급기야 티베리우스 황제가 세야누스 몰락 후 국가 기강 잡기에 나서면서 국고 횡령, 간통, 강간, 폭행, 협박, 문서 위조 등 각종 범죄 혐의로 기소해, 재판을 열고 사형판결을 손수 내리고 죽이라고 서한장까지 보냈다.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기 전, 티베리우스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아내의 오빠인 칼리굴라가 즉위하면서 죄인들을 사면시켜줄 때 석방됐다. 그는 아들이 2살이 되던 40년에 사망했는데, 임종 직전에도 기분이 좋지 않다며 노예들을 때리고 욕설을 퍼붓는 등 좋지 않은 행실만 보였다. 이 인물의 아들이 바로 로마 제국 제5대 황제 네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