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라틴어: Gnaeus Domitius Ahenobarb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장남)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차남)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22년 |
전임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발레아리쿠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
동기 | 가이우스 판니우스 |
후임 | 루키우스 오피미우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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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로마군을 이끌고 남부 갈리아 지방 정복 전쟁을 이끌었고, 이탈리아반도 ~ 갈리아 남부 ~ 히스파니아를 잇는 도미티아 가도를 입안하고 후원했다. 하지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이후부터는 로마 제국의 악명 높은 황제 네로의 직계 조상으로 유명하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유서 깊은 플레브스 씨족 가문인 도미티우스 가문 일원이다. 그는 코그노멘에서 드러나듯이, 이 씨족 가문 안에서 저명한 노빌레스 양대 집안 중 하나로 유명했던 아헤노바르부스 집안 출신이다.공화정 시절까지는 기록상 여러 도미티우스 가문의 지파 중 위세 높은 노빌레스로 평가받은 집안은 2 가문이 있었다. 대머리에서 유래된 칼비누스 가문과 빨간 수염에서 유래된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이 그들이다. 이중 칼비누스 가는 전통적으로 그나이우스를 공통으로 쓴 도미티우스 가문의 관습 속에서 마르쿠스를 개인이름으로 사용했고,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루키우스를 독점적으로 사용해 그나이우스와 함께 사용했다.[1]
수에토니우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도미티우스 씨족에 속한 한 사람이 신성한 모습의 쌍둥이 청년을 만나서 그들에게 뺨을 어루만져지자 수염이 붉게 변했다. 이 인물은 아헤노바르부스(Ahenobarbus, "빨간 수염")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것이 그의 후손들에게 통칭이 되었다고 한다. 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92년에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62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134년에서 129년 사이에 화폐 주조관으로 활동했다.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기원전 125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22년, 가이우스 판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제비뽑기 결과, 판니우스는 로마에 남아서 행정을 주관하고, 그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로 가서 2년간 켈트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가이우스 섹스티우스 칼비누스와 교대했다. 그는 로마에 적대적인 살루비족의 왕 토브토모툴루스(Tovtomotulus)를 돕고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아이두이족을 공격한 알로브로게스 족과 전쟁을 벌였다. 빈달리아 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가 이끄는 로마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켈트 부족들은 로마군이 전투 코끼리를 보고 놀라 공포에 질려 달아났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20,000명의 알로브로게스 족이 전사했고 3,000명이 사로잡혔다고 한다.
기원전 121년, 갈리아의 가장 강력한 부족인 아르베르니족이 알로브로게스족과 연합하여 로마에 대적했다. 그는 신임 집정관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와 연합해 기원전 121년 8월 8일 이세르 강 인근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격파했다. 그 결과 갈리아 남부 일대는 로마의 새로운 속주로 개편되었다. 이후 아헤노바르부스는 새로 확보한 영토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미티아 가도(Via Domitia)를 건설했다. 이후 로마로 돌아온 그는 파비우스와 함께 개선식을 거행했다. 파비우스는 알로브로게스족에 대한 개선식을, 그는 아르베르니족에 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현직 집정관으로서 그보다 높은 직위인 파비우스를 더 높게 평가해 두 사람이 개선식을 거행할 때 파비우스에게는 개선문을 수여했지만 도미티우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기원전 118년 식민도시 콜로니아 나르보 마르티우스(나르본)를 건설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기원전 115년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그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고 한다. 이 메텔루스는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라는 설과 기원전 117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디아데마투스라는 설이 병립하는데, 어느 쪽이 사실인지 불분명하다. 두 감찰관은 기원전 116년 집정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게타를 비롯한 32명을 원로원에서 행실이 좋지 않다는 의유로 제명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3. 가족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03년 폰티펙스 막시무스, 기원전 96년 집정관, 기원전 92년 감찰관을 역임했고, 차남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9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하지만 그의 두 아들은 아헤노바르부스 집안이 네로를 끝으로 완전히 멸족하고도 현재까지 내려온 악명을 가문 평판에 처음 남긴 것으로 유명했다.
장남 그나이우스는 성격이 매우 난폭한 사람이었다. 그는 툭하면 거친 언사를 내뱉고, 노예와 클리엔테스들을 과도하게 벌주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또한 그는 사적 원한과 악감정으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등을 적으로 규정해 여러 명을 기소할 정도로 뒤끝 있는 성격으로도 악명을 떨쳤다.
그렇지만 이런 장남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킨 쪽은 차남 루키우스였다. 그는 형 그나이우스가 차라리 낫다고 할 정도로 잔혹하고 난폭하기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뇌물 받기를 좋아했고, 사치스럽고 위선적인 사람인데다, 형보다 훨씬 더 아랫사람과 후배 원로원 의원들에게 무례했다. 특히, 기원전 96년, 노예들이 무기를 휴대하는 것이 금지된 제2차 노예 전쟁 직후 시칠리아에서 법무관으로 있던 중, 사냥용 창으로 멧돼지를 죽인 노예를 법무관임에도 십자가형으로 잔혹히 죽이라고 지시하고 이를 감상한 일은 후대 로마인까지 회자될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이와 함께 루키우스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중 술라 편을 들면서, 술라 이상으로 탄압에 앞장섰다. 그 결과, 그는 평민들과 포풀라레스에게 증오를 샀고,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시를 받은 법무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디마시푸스에게 로마에서 잔혹히 살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