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라틴어: Gaius Marcius Figul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56년 이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퀸투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조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아버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아들) |
참전 |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달마티아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62년 |
전임 | 대 그라쿠스 마니우스 유벤티우스 탈나 |
동기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임기 | 기원전 156년 |
전임 |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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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달마티아 전쟁에서 활약했다.2. 생애
기원전 4세기부터 고위 행정관을 역임한 노빌레스 가문인 마르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로마 국왕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후손이라고 내세우며 파트리키와 동등한 위상을 누리려 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퀸투스이고 아버지는 가이우스라고 한다. 독일의 고대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는 기원전 281년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가 그의 조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그는 기원전 169년에 법무관에 선임되었을 때부터 고대 사료에 등장한다. 그의 사촌으로 추정되는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당해 집정관을 맡았다. 두 마르키우스는 기원전 171년에 발발한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브룬디시움에서 발칸 반도로 건너간 뒤 암브라키아에서 갈라섰다. 퀸투스는 테살리아로 진군했고, 가이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할키스로 향했다. 그들은 곧 테살리아에서 조우한 뒤 마케도니아 남서부 일대에 대한 합동 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함대는 마케도니아 해안을 황폐화시키고 지상군에게 보급물자를 제공했다.
그러나 원정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현지인들의 저항이 극심한 데다 올림푸스 지역을 통과해 마케도니아에 진입했으나 보급로가 수시로 끊기는 바람에 식량이 떨어져 버려서 테살리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안티코니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에게 패배했고, 카산드리아를 공략하려 했다가 격퇴되었다. 그는 원정이 끝날 무렵 오레아에서 겨울을 보내다가 전염병과 탈영으로 인해 많은 병력을 잃고 기원전 168년 초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직임을 넘기고 로마에 귀환했다.
기원전 162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추첨 결과에 따라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떠났다. 그러나 이해 집정관 선거를 감독했던 대 그라쿠스가 문제제기를 했다. 이보다 앞서, 대 그라쿠스가 집정관 선거를 주관할 때 새가 날아가는 걸 보고 점을 쳐서 투표를 해도 좋은 지를 정하던 복점관이 불길한 징조가 보였다고 주장했다. 그라쿠스는 이를 무시하고 투표를 강행했는데, 투표 결과가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나오자 복점관이 운운했던 불길한 징조를 새삼스럽게 거론했다. 두 집정관은 즉각 소환되었고, 대 그라쿠스로부터 사임하지 않으면 신의 분노를 살 거라는 위협을 받았다. 결국 두 집정관은 사임해야 했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보결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
기원전 156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된 그는 로마령 일리리아를 약탈하고 있던 달마티아인들과 전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달마티아인들의 연이은 유격전에 휘말려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연말에 주도권을 잡고 적의 수도인 델미니우스를 포위했다. 이후 차기 집정관이자 기원전 162년 그와 함께 집정관을 맡다가 나란히 사임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그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고 달마티아인들을 굴복시켰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아들 가이우스 무르키우스 피굴루스는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저명한 법학자로 많은 이들에게 법적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심히 낙심해 투표 다음날 조언을 구하는 모든 사람을 집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것을 볼 때 법무관을 역임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증손자인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는 기원전 64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