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틴어: Lucius Cassius Longin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07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갈리아 나르보네시스 속주 아쟁 인근 가론강변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아버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형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07년 |
전임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 |
동기 | 가이우스 마리우스 |
후임 |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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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킴브리 전쟁에서 전사했다.2. 생애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동한 노빌레스 가문인 카시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그와 같은 프라이노멘인 '루키우스'를 사용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127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라고 추정한다. 형제로 기원전 96년 집정관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있었다.기원전 111년 법무관을 맡았다. 당시 유구르타 전쟁을 수행하고자 아프리카로 출정했던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는 누미디아 국왕 유구르타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원로원은 베스티아가 유구르타에게 제시한 평화 조건이 너무 관대하다고 여기고, 베스티아와 유구르타 사이에 뇌물이 오갔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그를 누미디아로 파견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따르면, 유구르타는 그 앞에서 이에 롱기누스는 직접 로마로 와서 재판을 받으라고 요구했고, 그는 이를 따라 심복인 보밀카르와 함께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재판은 유구르타에게 사전에 매수된 호민관 가이우스 베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기원전 107년, 그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마리우스는 유구르타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났고, 그는 킴브리족의 침략으로 위험에 처한 갈리아 나르보네시스 속주로 향했다. 킴브리 부족 연합의 일부인 티구르니족이 주라 산맥을 등반한 후 아쟁 시 인근의 가론강변에 이르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막아섰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는 자세한 경위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로마군이 참패해 상당수의 병사가 죽고 그가 전임 집정관이자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와 함께 전사했다는 것은 전해진다.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레나투스가 이끄는 생존자들은 숙영지로 피신한 뒤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군수품의 절반을 바치고 인질을 보내는 대가로 풀려났다. 아피아노스는 그들이 멍에 아래로 기어갔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학자들은 아피아노스가 삼니움 전쟁 시기의 유명한 일화를 베꼈을 뿐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89년 호민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기원전 73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그의 두 아들이라고 추정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의 주동자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그의 손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