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라틴어: Quintus Lutatius Catul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50년 ~ 기원전 87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아버지) 포필리아(어머니)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계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부 형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이부 형제) 세르빌리아(아내)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아들) 루타티아(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02년 |
전임 | 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
동기 | 가이우스 마리우스 |
후임 |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니우스 아퀼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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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킴브리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마리우스의 정적이 되었고, 결국 기원전 87년 로마에 입성한 마리우스에게 처형될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2. 생애
비교적 오래된 노빌레스 가문인 루타티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상인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기원전 242년 가문 최초로 집정관을 맡은 뒤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해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시키는 공적을 세웠다. 이후 루타티우스 일족은 고위 행정관에 이름을 종종 올렸지만, 기원전 241년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 기원전 220년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외에는 집정관을 더 이상 배출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독일의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뮌처는 루타티우스 일족이 명문가 같아보이나 실제로는 퇴락했다고 평했다.아버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그가 아직 어렸을 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 포필리아는 남편이 사망한 뒤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재혼해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를 낳았다. 그는 이 두 이부형제와 평생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젊은 시절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그라쿠스 형제의 활약상을 지켜봤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스키피오의 당에 속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저서 <웅변술에 대하여>에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 그리고 루키우스 푸리우스 필리우스가 자신의 웅변을 한 번 이상 듣고 호평했다고 밝혔다. 키케로는 그의 웅변술은 최고 수준은 아니었지만 유쾌한 목소리, 매우 부드러운 음절, 뛰어난 발음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연설을 즐겼다고 설명했다.
그는 누만티아 전쟁의 막바지에 입대하여 누만티아 시 포위 공격에 참여했으며, 기원전 121년 이전에 기원전 140년 집정관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딸 세르빌리아와 결혼했다. 이를 통해 세르빌리우스 가문과 동맹을 맺었고, 세르빌리우스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던 메텔루스 가문의 지원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정치적 행보는 기원전 107년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기원전 109년 이전에 처남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법무관을 맡았다는 것만 전해졌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시칠리아 등 로마로 곡물을 보내는 지역의 총독을 맡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07년, 그는 처남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카이피오는 당선되었지만 그는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에게 낙선했다. 이듬해 재차 출마했으나 노부스 호모(Nobus Homo: 신참자)였던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에게 낙선했다. 일부 학자들은 아라우시오 전투 때 카이피오가 막시무스의 군대에 통합되기를 거부하고 단독으로 카르피족과 상대하기로 한 것은 막시무스가 카툴루스를 낙선시킨 것에 앙심을 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기원전 105년, 카툴루스는 3번째로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이번에도 노부스 호모인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에게 패배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극을 초래한 카이피오에게 극도로 분노했기 때문에, 카이피오와 깊은 관련이 있는 그가 당선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그 후 카이피오는 정적들의 비난에 시달린 끝에 기원전 103년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포한 "로마 인민의 위대함을 모욕하는 것에 관한 법률"(lex Appuleia de maestate)에 의해 추방당했다.
기원전 102년, 그는 4년 연속 집정관을 역임하고 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대해 카툴루스가 귀족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자 평민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선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근거 삼아 마리우스가 집정관을 연이어 맡으며 막강한 권세를 누리는 것을 견제하고 싶었던 귀족들이 그를 지지했고, 마리우스 역시 킴브리족과의 전쟁이 눈앞에 이른 상황에서 귀족들과 어느정도 타협할 필요가 있기에 받아들였다고 추정한다. 또다른 설에 따르면, 마리우스의 아내 율리아가 카툴루스의 이부형제들의 사촌이기 때문에 마리우스의 선택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후원을 받아 정치 경력을 성공적으로 쌓고 있었다. 한편, 마리우스가 메텔루스 가문과 연관이 있는 카툴루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정적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를 약화시키기 위해 그를 파트너로 정했을 거라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집정관에 당선된 그는 마리우스와 함께 이탈리아로 몰려오는 킴브리족, 테우토네스족, 암브로네스 족 등 게르만족을 상대할 임무를 맡았다. 그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가서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 진입을 시도하는 킴브리족을 저지했고, 마리우스는 론 강 계곡에서 테우토네스족 등 다른 게르만족과 대치했다. 이때 유구르타 전쟁 때 마리우스의 부관이며 유구르타를 생포한 것으로 유명해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카툴루스의 군대에 입대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술라는 마리우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카툴루스와 가까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마리우스가 두 군대 간의 상호 협조를 보장하기 위해 술라를 보냈다고 추정한다. 아무튼 술라는 곧 카툴루스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마리우스가 테우토네스족과 암브로네스족을 상대로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고 있을 때, 카툴루스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킴브리인들이 베르네르 고개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산길을 장악하기 위해 킴브리인들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앞서 파견한 기병대는 첫번째 전투에서 패퇴했다.[1] 그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아테시스 강변 요새로 후퇴했다. 킴브리인들이 그 요새를 포위하려 하자, 그의 군대는 또다시 후퇴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요새에서 결사항전하려 했지만 병사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기수에게 독수리 휘장을 챙겨서 맨먼저 도망치는 병사를 앞지르게 했다. 이를 통해 그 병사가 수치스러워하게 만들고 패주가 아닌 사령관이 이끄는 후퇴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이때 그의 군단 중 하나는 후퇴하던 중에 적에게 궤멸될까 겁이 난 군단장 때문에 요새에 남아 있었다. 이에 백부장 그나이우스 페트레우스가 군단장을 죽이고 지휘권을 잡은 뒤 킴브리족의 포위망을 뚫고 아군과 합세했다. 그 후 이 인물은 카툴루스와 마리우스로부터 월계관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101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뒤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을 맡은 카툴루스는 또다시 집정관을 맡은 마리우스와 군대를 통합한 뒤 포 강을 건너 베르켈라이(오늘날 베르첼리)에서 킴브리 족과 대치했다. 킴브리족은 자신들이 포 평원에서 정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마리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결전을 벌이자고 답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101년 7월 30일, 양측은 베르켈라이 전투를 감행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킴브리족의 군세가 40만에 달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4만 5천에서 4만 8천으로 보며, 심지어 2만 5천에서 3만 가량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반면 로마측 병력은 5만여 명이었는데 그중 2만 명은 카툴루스의 군대였다.
마리우스는 카툴루스의 군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측면에 자신의 부대를 배치했다. 나중에 카툴루스와 술라는 회고록에서 마리우스가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 이렇게 배치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카툴루스의 부대는 작년에 큰 승리를 거두면서 사기충천한 마리우스의 군대에 비해 자신감이 떨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중앙에서 버티는 역할만 수행하게 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고대 역사가들은 이 전투에서 킴브리인 12만~14만 명이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포로로 전락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계는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한다. 다만 킴브리족이 이 전투에서 전멸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 후 마리우스와 카툴루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함께 거행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마리우스는 혼자 개선식을 거행하고 싶어했지만 원로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이야기는 카툴루스와 술라가 마리우스의 인격을 깎아내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간주하며, 마리우스 본인은 카툴루스를 자신의 동맹자로 간주했고 귀족들이 반감을 품을 새로운 이유를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카툴루스는 승리를 기리기 위해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동지였던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집 부지에 대규모 저택을 짓고 킴브리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으로 장식했다. 또한 포르투나 여신을 기리는 신전인 'Fortuna Huiusce Diei'를 아레아 사크라에 건설했다.
그러나 카툴루스는 전쟁 종식 후 마리우스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학자들은 더 유능하고 성공적인 동료에 대한 시기심, 마리우스의 '부속물' 취급을 언제나 받고 싶지 않은 마음, 마리우스가 실각한 후 승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욕구 등 복합적인 심리가 있었을 거라 추정한다. 그는 킴브리 전쟁에 관한 회고록을 집필했는데, 현재는 전해지지 않으나 후대의 여러 역사가들에 의해 부분 인용되었다. 그는 이 회고록에서 킴브리족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건 자신이고 마리우스는 단지 보조만 맞췄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은 집정관 당선인이 살해된 사건의 배후인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원로원 최종결의를 발동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이에 응해 '반란군'과의 전투를 위해 완전 무장한 채 포로 로마노에 나타난 이들 중엔 카툴루스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던 그는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 때 이부형제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았다. 기원전 88년 술라가 로마에 군대를 이끌고 입성한 뒤 아프리카로 달아난 마리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을 때, 카툴루스는 "가장 강력한 용어로" 이 조치를 지지했다. 아피아노스는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마리우스 덕분에 집정관을 맡고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그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배은망덕한 짓이라고 비판했다.
기원전 87년, 망명에서 돌아와 현직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동맹을 맺은 마리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접근했다. 원로원은 이에 맞서 당시 삼니움인들과 전쟁 중이던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그 중에는 카툴루스도 있었다. 그러나 메텔루스 피우스는 개입을 거부했고, 마리우스는 로마에 입성했다. 그 후 마리우스는 자신을 박해한 정적들을 상대로 대숙청을 단행했다. 특히 자신에게 은혜를 입고도 배신한 카툴루스에 대한 마리우스의 증오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여러 인사가 선처를 호소했지만, 마리우스는 "그는 죽어야 한다"라며 묵살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툴루스 본인이 마리우스에게 자비를 구했지만 묵살당하자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새로 칠한 방에서 숯불을 피우고 연기에 질식해 죽었다고 한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그는 불속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아내 세르빌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와 딸 루타티아를 낳았다. 아들 카툴루스는 술라의 내전 때 술라의 편에 서서 아버지를 살해한 마리우스파에게 복수하고 기원전 78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65년에 감찰관을 맡았다. 딸 루타티아는 기원전 69년 집정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의 아내가 되었다.
[1]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당시 원로원의 프린캡스 세나투스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기병 장교를 맡고 있던 아들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도주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격노해 "겁쟁이 아들이 남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금지한다"라고 통보했고, 아들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