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Appius Claudius Pulcher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조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버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30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
동기 |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
후임 |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마니우스 아퀼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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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중에서도 '풀케르(Pulcher: 잘생긴)'라는 코그노멘을 쓰는 그의 가문은 아피아 가도의 건설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장님')의 차남 푸블리우스부터 시작되었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본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증조부이기도 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기원전 249년 집정관을 맡아 드레파나 해전을 치렀다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함선 120척 중 93척이 격침되는 참사를 야기하고 말았고, 전투 전에 전투의 향방을 알아보기 위해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는 의식을 진행하던 중 닭들이 쪼아먹질 않자 "먹기 싫으면 물이나 마셔라!"라고 외치며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능과 불경죄로 재판을 받다가 판결 직전 자살했다. 여기에 아버지의 여동생인 고모 클라우디아는 경기장에 참석했다가 평민들이 워낙 많이 있어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 쓸모없는 평민들을 다시 한 번 물속에 쳐넣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가 고발당하여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하지만 푸블리우스의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맹활약해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냈다. 그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가담하여 기원전 213년부터 벌어진 시라쿠사 공방전에 참여했다. 뒤이어 기원전 212년 집정관을 맡아 로마와 동맹을 끊고 한니발 바르카와 연합한 카푸아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2년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른 끝에 마침내 카푸아를 정복했으나,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기원전 212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아피우스는 기원전 185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차남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184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삼남 가이우스는 기원전 177년 집정관, 기원전 169년 감찰관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185년 집정관 아피우스의 아들이었다.
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180년 최고 행정관 간의 취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따라 기원전 133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기원전 130년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임기를 마치기 전에 사망한 후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고 한다. 이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82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콜리네 성문 전투에서 전사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기원전 73년 베수비오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에게 패배한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가 그의 아들이라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