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라틴어: Quintus Fabius Labeo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조부)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아버지)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3년 |
전임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 |
동기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후임 |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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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집안인 파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서는 조부와 아버지 모두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196년 재무관을 맡아 동료 재무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아우구르와 폰티펙스들에게 전쟁 기간 동안 특별세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아우구르와 폰티펙스들은 호민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결국 돈을 지불해야 했다.기원전 189년 법무관에 선임된 뒤 제비뽑기에 따라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의 전쟁에서 함대 지휘권을 맡았다. 그러나 그가 에게 해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크레타 섬으로 가서 그곳의 시민들에게 노예로 잡혀 있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들을 해방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에 따르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겠다고 위협했고, 시민들은 4천 명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을 풀어줬다. 그 후 그는 트라키아의 에노스와 마로네아 시에서 셀레우코스 수비대를 철수시키고 마케도니아 왕국과 이들 도시 사이의 경계를 확립했다.
기원전 188년 총독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의 지시에 따라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전함 50척을 받아내고 파타라 시 인근에서 이들을 불태웠다. 이후 리키아와 텔메소스 시를 접수한 뒤 피레우스에 함대 전체를 집결시킨 후 이탈리아로 항해했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개선식을 요청했고, 원로원은 전투를 벌인 적이 없는데 개선식은 부당하다는 호민관의 반대를 묵살하고 이를 허락했다.
기원전 185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그는 당선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현직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자기 동생인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노골적으로 밀어주는 바람에 낙선했다. 이에 많은 귀족들이 반발했지만,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의 위세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유야무야 처리되었다.
기원전 183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두 집정관 모두 리구리아를 임지로 부여받았지만, 마르켈루스는 나중에 갈리아 키살피나로 옮겨졌다. 그는 리구리아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에트루리아의 사투르니아 시 건설을 수행했다.
기원전 180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사망하면서 공석이 된 폰티펙스에 발탁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정확한 날짜가 알려지지 않은 그에 대한 일화가 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당시 네아폴리스(오늘날 나폴리)와 놀라 시 사이의 국경에 대한 분쟁이 벌어지자, 원로원은 그에게 이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두 도시의 입장을 전해들은 뒤 양측이 욕심을 부리지 말고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며,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는 것보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설득했다. 그 결과 양측 모두 양보하면서 서로에게 속하지 않은 땅이 생겼는데, 로마가 이 땅을 취했다고한다.
기원전 124년과 기원전 114년 화폐 주조관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는 그의 손자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